“등과 허벅지 쪽에 절상(切傷), 상처 부위 넓음. 출혈량 다소 있음이라...”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가 조용한 방을 맴돌았다. 녹색 머리 여성, 켈시는 작전 도중 부상당한 오퍼레이터의 보고서를 책상 위에 휙 던져놓으면서 앞에 있는 남성, 박사를 째려보았다.
“별일 없을 거라며?”
냉담한 그녀의 말 마디에 박사는 가슴에 화살이 박히는 것을 느꼈다. 후두부에 돌이라도 얹은 것처럼, 그의 얼굴은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중력을 못 이긴 채 바닥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뭐라 말 좀 해보시지?”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평소보다 공격적이고 화난 상태라는 걸 보여주듯, 켈시의 뾰족한 귀가 평소와는 달리 옆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분노에 응답하듯, 이 여성을 옆에서 지키고 있는 정체불명의 괴수 Mon3ter의 흑요석과도 같이 검은 살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내가 방심한 거.”
“또?”
“나 때문에 스카디가 중상을 입은 거.”
“하나 더 있을 텐데?”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일까. 아니면 눈앞에 있는 여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또는 둘 다일까. 손톱자국이 선명한 박사의 손바닥이 본인의 다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이가 평평해질 기세로 아득바득 좌우로 움직이는 턱뼈를 멈추고, 박사는 입을 열었다.
“네 충고를 안 들은 거.”
출발하기 전에 옥신각신 다투었던 실루엣이 박사의 시야 너머로 비쳤다. 비록 몇 달째 조용하다고는 해도 결코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켈시의 다그침을 웃어넘긴 채 용문으로 향했던 몇 시간 전의 자신에게 달려가서 주먹 한 대 날리고 싶다는 충동을 발산하지 못한 채, 비속어와 함께 그는 애꿎은 본인의 무릎을 후려쳤다. 통각보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이 먼저 몸 전체를 뒤덮어서, 박사는 그 분함으로 인해 눈가에 이슬이 맺힐 것만 같았다.
가슴이 답답한 심정은 켈시도 똑같은지, 그녀는 냉수 한 잔과 함께 큰 한숨을 내쉬면서 방금 집어던진 서류를 다시 들었다.
“보고서를 보니 네가 담당한 리유니온의 군세는 400명에 근접했어. 이미 섬멸전에 맞먹을 수준의 양이었다는 거야.”
당시 전투에 참여한 오퍼레이터의 증언, 박사의 신경 연결 네트워크와 동기화된 PRTS의 보고 등을 단말기에 띄운 채, 다리를 꼬며 박사를 응시했다.
“근데 그걸 5명만으로 대응시키다니, 단단히 미친 거지.”
물론 그 미친 작전을 사망자 없이 성공시킨 네 지휘 능력이 더욱더 정상이 아니지만,라고 켈시의 진심이 그녀의 마음속에 잔잔히 울려퍼졌다.
PRTS의 보고에 따르면 리유니온 군세의 제 1진이 일반 병사에 캐스터가 섞인 150여명. 제 2진이 중장갑병 위주의 200여명. 1진에서의 소모 시간은 반올림해서 23분. 2진에서의 소모 시간은 그것의 절반도 안 되는 10분.
즉, 오퍼레이터 2명이서 10분 동안 처리한 게 200여명. 맹독 능력을 가진 블루포이즌의 엄호사격이 있다하더라도 1분마다 그 철벽과도 같이 단단한 중장갑병 20명의 목이 논밭의 벼 이삭마냥 스카디의 검에 의해 허공에서 춤을 췄다는 뜻이 된다.
신화 속의 영웅이랑 견줄 수준의 이 비현실적인 전투력에, 평정심을 살짝 잃은 켈시는 무심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쩌면 상상 이상의 괴물을 들여버린것일까하는, 향후에 로도스에 닥칠 위험들에 대한 근심이 그녀의 머리를 잘근잘근 씹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미안해.”
근심의 수마(睡魔)에 농락되고 있던 켈시를 깨우는 건 박사의 들릴 듯 말 듯 한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네 말을 들었어야 되는데, 순간적인 자만심과 자존심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해버렸어. 미안해.”
꾹꾹 눌러 참는 것 같이 중간중간 어색하게 끊기는 박사의 말에, 언제나 냉정함을 잃지 않는 켈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풀어졌다. 자신이 너무 몰아세웠나 하는 한순간의 동정심이 그녀를 미약하게 자극했다. 허나 곧바로 이성의 파도가 그 잡념을 씻겨냈고, 그 잔재인 머쓱함을 숨기기 위해 켈시는 작은 심호흡을 내뱉었다.
“오퍼레이터가 다치는 건 한 두 번도 아닌데 왜 이제 와서 울먹거리는 거야?”
“만전의 상태일 때와... 지금은 다르잖아.”
물론 만전인 상태였을 때도 크고 작게 다치는 오퍼레이터들의 모습에 박사가 마음 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투가 있던 날엔 자신이 더 잘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만약의 상황에 대한 죄책감으로 잠을 못 자는 건 기본이었고, 심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하루 종일 헛구역질 증세와 함께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걸 어쩔 수 없다는 전투였다며, 만전이었음에도 힘겨워서 이런 결과였다라며 자기 자신에게 거는 합리화와, 계속되는 전투에 적응되면서 미세하게 풍화되어가는 본인의 인간성과 죄책감이라는 요소가 합해지면서 지금까지 견뎌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엄연히 달랐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 박사의 한순간의 실수가 나비효과를 일으킨 셈이었다. 자기 합리화나 회피심리 같은 장애물을 간단히 깨부술 정도로, 죄책감과 자기혐오라는 이름의 추는 박사의 목을 강하게 조였고, 이윽고 참아오던 감정의 둑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보기 안쓰러웠는지 Mon3ster가 당황해하듯 어디선가 수건을 들고 와서 꼬리를 통해 박사에게 건넸다. 이윽고 박사에게서 코 푸는 소리가 켈시에게 들려왔다.
“하아... 사과를 할 거면 내가 아니라 널 따른 오퍼레이터들에게나 해.”
켈시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기억을 잃기 전의, 전쟁에 참여한 후에 살인기계로 변하기 전의 ‘그 사람’이랑 닮은 박사의 모습에 혀를 차며 약간의 불쾌함을 표하며, 그녀는 창밖의 회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간에 잘못을 한 건 맞으니까 처벌은 내려야겠지. 1주일 근신이야. 그동안의 전투 지휘가 있으면 내가 할게.”
“켈시...”
“말했다? 근신이니까 절대로 전투 지휘 같은 것도 하지도 말고 로도스를 나갈 생각도 하지 마.”
본디 같은 로도스의 수뇌부지만, 형식상으로나마 최고 권위자는 박사다. 언제나 갈구는 입장이더라도 엄연히 켈시는 로도스의 메딕 오퍼레이터. 상관인 박사에게 명령권을 내릴 권리는 없다.
부하 직원이 하극상을 일으키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박사는 일말의 불쾌감도 내비치지 않았다. 저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로도스의 또 다른 수뇌부로서 감정을 비추지 않기 위해 뒤틀어서 말하는 것일 뿐, 언제나 박사 본인을 생각해서 진심을 담아 건네는 말이라는 걸 어느 순간부터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그녀가 하는 말을 박사표 번역기로 해석하면 이런 뜻이었다.
‘1주일 동안 어디 가지도 말고 그냥 푹 쉬어.’
그런 그녀에 대한 감사가 99%, 그리고 업무 지옥에서 잠시 동안 해방된다는 분위기 파악 못하는 얌체 같은 생각이 1%. 박사는 뭉클해지는 심정에 눈가의 수분 자국을 손으로 지우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켈시가 말해준 대로 오퍼레이터들에게 사과를 하러 가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 때문에 다친 스카디의 상태를 보러 가기 위해.
“고마워. 켈시.”
“고맙다고? 미쳤어? 욕 나오기 전에 나가.”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켈시는 부족해진 카페인을 보충하기 위해 선반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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