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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세력으로부터 협력 차 온 오퍼레이터나 고용된 용병들이 살고 있는 로도스 부유함의 3층 에리어, 그중에서도 제일 가장자리에 있는 방이 박사의 눈에 비친다.
본디 안 쓰는 창고였으나 오퍼레이터 스카디의 요청인 ‘주위의 아무도 없는 방으로 배치할 것’을 위해, 급하게나마 침실로 개조한 곳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문이 다른 오퍼레이터들의 방에 비해 세월의 풍파가 느껴졌다.
오퍼레이터들을 일일이 만나면서 사과와 위로를 주고받는 걸 하길 1시간. 박사에게 남은 대원은 단 한 명, 이 방 너머에 있는 여성이었다.
방금 전 만나고 온 의료 오퍼레이터 가비알이 건넨 보고서 파일을 단말기로 읽으며, 박사는 착잡한 심정을 치우지 못한 채 문 앞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화면에 써진 ‘허벅지랑 등에 큰 상처를 입었으니 거동이 불편할 것으로 예상’이라는 문장이 기껏 감추고 있는 그의 죄책감 덩어리를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과연 그녀를 보러 가도 될까. 그녀가 미워하지 않을까 하는 여러 가지 기우들이 그를 여러 번 망설이게 만들었지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를 5분. 박사는 단말기를 주머니에 넣고 양쪽 뺨을 손바닥으로 약하게 두들겼다.

간신히 결심을 하고 노크를 하기 위해 문 가까이 다가간 그 순간이었다.

방 안에서 둔탁한 소리가 박사에게 들려왔다. 그리고 이윽고 들려오는 미약한 여성의 신음소리. 방금 전에 보고서에서 본 스카디의 상태를 떠올리며, 그는 전신에 닭살이 돋는 것 같은 섬뜩함과 함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직감했다.
박사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지며, 최고 책임자의 권한으로써 모든 방의 잠금을 강제로 해제시킬 수 있는 마스터키를 찾았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내서 곧바로 방의 잠금을 해제하자, ‘관리자 권한으로 잠금을 해제합니다’라는 기계음과 함께 오래된 자동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스카디, 무슨 일이야?!”

문이 완전히 열리는 걸 기다릴 틈이 없다는 듯, 박사는 덜 열린 틈 너머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몸이 박물관의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방금 끝난 건지 욕실로 가는 문에서 뜨거운 증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문 근처에 보이는 여성의 맨발. 위로 올라가면서 보이는, 열로 인해 복숭아처럼 약간 붉어진 하얀 종아리. 다시 살짝 위로 올라가면서 보이는, 보는 사람 모두가 숨을 멈출 것 같은, 매끈한 곡선의 고혹적인 허벅지. 또다시 위로 올라가면서, 본디 감싸려 했던 수건이 풀려버린 채 극상의 여성미를 과시하고 있는 풍만한 상체. 마지막으로 수분에 의해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융단과도 같은 회색 머리칼.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증기가 아슬아슬하게 위험한 부위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더욱더 배가 된 선정적인 장면에, 박사는 재빨리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 그는 직감했다. 방금 전의 소리는 그녀가 목욕을 끝내고 나오다가 넘어지면서 발생한 것이었다는 것을.

“박사...? 여긴 어떻게...?”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것처럼, 스카디는 멍한 붉은 눈으로 박사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서 눈을 돌리는 그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윽고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인해 몸에 거대한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힘을 주면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신음소리는, 잡념을 어떻게든 누르고 있는 박사의 말초신경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계속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박사는 급하게나마 코트를 벗어서 반라 상태인 스카디의 등에 덮어주었다. 젖은 피부를 관통하는 한기를 막아줌과 동시에, 박사의 온기와 약간의 체취가 그녀를 감쌌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스카디는 박사의 시선을 맞추면서 입을 열었다.

“박사, 이건...?”
“계속 그 상태로 있으면 감기 걸리잖아.”

헛기침 소리와 함께 먼 산을 보고 있는 박사의 모습에, 스카디는 고개를 내렸다. 곧바로 보이는 두 거대한 지방덩어리, 가늘면서도 희미하게 자리 잡고 있는 11자 복근. 그리고 더욱 아래로 보이는 두 허벅지를 잇는 맨들맨들한 치구(恥丘).
그제서야 자신의 맨몸이 있는 그대로 박사에게 보여져 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한 스카디는,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 찾아왔다. 전신, 특히 얼굴에서 느껴지는 열기. 미약한 현기증. 자연스레 미간이 찡그려지며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다는 충동. 병이라도 걸린 건가, 하며 이 알아차릴 수 없는 감정에 스카디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망설였다. 이 여성에게 처음으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도래한 순간이었다.

“못 움직이겠으면 부축해 줄게.”

코트를 재빨리 입은 그녀의 눈앞에 무릎을 굽힌 채 손을 내미는 박사의 모습이 살며시 나타났다. 마치 꽃에 이끌리는 나비와도 같이, 호기심이 가득한 어린아이와도 같이. 전투 경력 13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냘픈 스카디의 손은 자연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허나 곧바로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그녀의 손은 갈 길을 잃어 주먹을 쥔 채 허공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할 수 있어.”

누구도 자신의 몸에 손을 대게 하면 안 된다며, 자신은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며, 약해져선 안 된다고 채찍질을 하며. 입술을 깨문 채 스카디는 그가 건네는 친절을 거절했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이 안 보이게 되면서 자연스레 박사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방금 전에 본 허벅지에 가려진, 반대쪽 허벅지에 선명하게 보이는 길고 검붉으면서 흉한 직선이 그의 눈썹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고집 좀 그만 부려.”

붕 뜨는 감각을 느끼더니 방금 전까지 일어서지 못했던 스카디가 어느새 두 발로 바닥을 밟고 있었다. 박사가 손을 뻗어 그녀의 왼팔을 잡아 자신의 목에 걸게 하고,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남은 손으로 얇은 허리를 감싼 채 일어선 것이었다.

“무, 슨...”

힘이 안 들어가는 상태로 약하게 저항하면서 혀가 딱딱하게 굳은 듯이 말하더니, 스카디는 그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당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에 1초, 그리고 그 직후 느껴지는 놀라움에 1초.

“며칠 전에 말했잖아. 혼자서 짐을 전부 지려 하지 말라고.”

그리고 박사의 말을 이해하는 것에 추가로 2초. 그의 말은 수치심이라는 어색한 감정에게 다가가 그녀의 감정 속에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처음에 느껴지는 건 마치 어두운 동굴을 밝혀주는 불꽃과도 같은 희미하면서도 밝은 빛. 그다음으로 느껴진 건 코트로부터가 아닌 그의 한 마디에서 느껴져 오는 온기. 마지막으로 느껴지는 건, 공포, 전율, 분노의 격렬한 스케르초랑 다른, 녹턴과도 같은 가슴속의 포근하고 잔잔한 울음소리.
며칠 전에도, 정확히는 며칠 전보다 더욱더 거세게 다가오는 미지의 감정에, 스카디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요 근래에 계속 경험하게 되는 새로운 기분. 그것도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한테서만 나타나는 이상한 감각. 알 수 없는 느낌이란 것에 불쾌하면서도 동시에 싫지도 않은 모순된 센세이션. 자신에게 혹시 큰 병이 닥쳐온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무의식적으로 박사의 목에 걸치고 있는 손에 힘이 쥐어졌다. 왜?라는 한 글자가 계속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며, 풀릴 것 같지 않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갈구했다. 무엇보다 밀착하면서 느껴지는 박사의 손길은 혼란스러운 그녀의 머릿속에 믹서기를 집어넣은 것처럼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런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스카디를 침대에 앉혀두고, 박사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뭐 더 필요한 거 없냐는 질문에도 묵묵부답인 그녀를 보고 그는 목을 긁적이며 방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창문 아래 퀸 사이즈의 침대. 현재 그가 앉고 있는 의자 옆의 테이블 하나. 방금 지나온 욕실 앞에 있는 옷장. 전부 로도스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물품들이었다. 마치 원래부터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은 방은 박사의 마음 한 칸에 씁쓸하다는 감상을 심어 넣었다.
그리고 이 적막함을 감싸는 건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뿐. 둘 사이의 대화는 한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미안해, 스카디.”

정적을 깨는 첫 번째 소리는 방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박사한테서 시작되었다.

“내가 좀 더 주의를 했으면 네가 다치지 않았을 텐데... 정말 미안해.”

깍지를 낀 채 손가락을 비비고 있는 박사를 향해 스카디는 사과는 필요 없다며 일축했다. 왜 이 남자는 사과를 해오는 것일까. 그녀에게 있어선 이해하기가 어려운 모습이었다. 애초에 그를 지키겠다고 다짐한 것은 본인이었기 때문인데다가 다치는 것쯤이야 예상한 범위 내였고, 의료 오퍼레이터에게 들은 바로는 사망자는 없었다고 했으니 잘 끝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기뻐하지 않고 저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정말 난 괜찮다니까?”
“그래도...”

이곳 로도스의 총지휘자라는 타이틀답지 않은 저 평범하고 얼빠진 모습.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자신을 걱정해 주는 저 태도. 그녀를 흘긋 보면서 어쩔 줄 모르는 저 표정을 보면서, 스카디는 어째선지 모를 미묘한 자극을 느낌과 동시에 잠잠해지려 했던 가슴속의 ‘감정’이라는 이름의 불씨가 더욱더 크고 화려하게 발화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몇 번이고 겪다 보니 적응한 것 같은 고동과 함께 스카디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퍼졌다.

“미안하다면 옷장 안에 있는 옷이라도 건네줄 수 있으려나? 슬슬 자야 되거든.”
“응? 어, 잠시만 기다려...”

분명 누구던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않게 하겠다고 10년 넘게 다짐한 신념도, ‘그때’부터 계속 몸과 마음을 갉아먹어오는 악몽과도 같은 기억조차 한 수 접을 정도로, 박사가 원인인 걸로 추정되는 ‘감정’의 파도는 일파만파 스카디의 심상(心想)을 채우기 시작했다. 매우 깊고 잔잔한, 저 멀리 있는 ‘고향’과도 같이.

“박사. 그럼 부탁 하나 더 해도 될까?”
“뭔데?”

옷을 갈아입는 스카디가 있는 곳의 반대편을 바라보는 박사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박사의 시야에 보이는 건 침대에 옆으로 누워 있는 채, 이불 속에서 이리 오라는 듯 손짓하는 스카디였다. 의자에 앉자 스카디는 곧바로 박사의 손을 잡았다. 어렸을 때 이후로 만져본 적이 없던 감촉이라서, 익숙함과 어색함이라는 모순적인 감정이 그녀의 손끝에 맴돌았다. 그녀의 돌발 행위에 움찔하며 놀란 박사였지만, 그것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스카디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부모의 손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눈빛과 함께.
박사는 두근거리는 이 상황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서 보이는 스카디의 선명하고 긴 속눈썹, 잡티 한 점 없는 매끈한 피부, 피 튀기는 전투를 해온 얼굴이라 믿기지 않는 앳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 그리고 긴 목 아래 잠옷 너머로 보이는 쇄골과 가슴계곡은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것만 같았다.

“노래 불러줘.”
“응?”

그런 박사의 번뇌를 비집고 들어오는 건 스카디의 뜬금없는 리퀘스트였다. 박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나 노래 잘 못 부르는데...”
“괜찮아.”
“할 수 있는 노래도 동요 정도뿐이고...”
“그거라도 좋아.”

당신의 목소리가 있다면, 그 악몽도 문제없을 거 같으니까. 진짜로 말해야 할 것을 입에 담지 않은 채, 스카디는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의중을 알 리가 없는 박사에겐 당황스러운 요구였다. 프로스트리프나 안젤리나, 혹은 소라에게 추천받은 노래들은 잔뜩 있지만 음악에 대한 조예가 전무한 그에겐 부르는 건 무리였고, 겨우 할 수 있는 건 종종 쿠오라 등 나이 어린 오퍼레이터들에게 자장가로 들려주는 짧은 동요 몇 가지뿐. 심지어 잘 부르는 것도 아닌데 들려달라니. 박사의 머릿속에 여성들은 각자 특이한 취향을 하나씩 가진다는 선입견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헛기침 몇 번을 통한 목 풀기. 긴장을 줄이기 위한 심호흡 한 번. 박사에게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투박하고 일정한 톤. 가끔 어긋나는 가사와 음정. 자타가 공인할 음치인 목소리였지만, 눈이 서서히 감겨가는 은발의 여성에게만큼은, 그녀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맺힐 것만 같은 정겨움을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그때’의 따뜻한 순간이랑 유사하게나마, 그녀와 이 방 전체를 감쌌다.

범고래는 노랫소리와 함께 뭐가 있을지 모르는 무의식의 바다를 헤엄쳐 간다. 점점 조용해져 가는 창밖의 빗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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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 설명 1) 치구(恥丘): 고간 바로 위에 부분. 흔히 비너스의 언덕이라 알려진 부분.

● 단어 설명 2) 스케르초/녹턴: 해학곡/야상곡. 각각 빠른 템포/느린 템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