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지속되는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사이로 보이는 햇살이 땅이랑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이 창가에 서있는 박사의 눈에 비쳤다.
한 손에 쥔 에스프레소가 선물하는 진한 풍미와 함께, 축축하게 젖은 평원의 저 너머로 향해 자유로이 날아가는 새들의 무리를 보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창밖으로 점프해서 자유로이 날고 싶다는 동심 가득한 충동을 마음속에 품으며, 그는 고개를 돌려 현실로 돌아왔다.
책상에 한가득 쌓여있는 여러 종이 뭉치. 박사가 오늘 이내에 처리해야 할 서류 목록이다. 일주일 근신이라는 명목으로 푹 쉬고 돌아온 첫날인데 그를 반기는 건 아미야의 쓴웃음과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살인적인 양의 업무. 켈시가 자신을 엿먹이려고 휴식을 준 건가 하는 박사의 작은 투정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침묵이 금이라 했던가. 말하는 순간 감시 카메라 너머로 그 녹색 머리 악마가 듣고 있을 걸 상상해버린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멍하니 있을 시간 없을 텐데. 박사.”
박사의 앞에 있는 소파에서 서류 처리를 돕고 있는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안 써져 있는 백지를 연상시키는 긴 백발, 핏기가 없는 창백한 피부 너머로 보이는 뾰족한 귀와 앳된 얼굴. 그 설원과도 같은 백색 표면을 치장하는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붉은색 눈. 연륜이 느껴지는 언변이랑 대비되는 앳된 소녀의 체형을 감싸는 검은색 원피스가 흰 피부와 대비되어 단정한 인상을 강조했다. 켈시와 더불어 로도스의 의학 체계의 기반을 다진 메딕 오퍼레이터, 살카즈 종족의 와파린이었다.
“보나마나 속으로 업무량 때문에 켈시를 욕하고 있었겠지.”
“그거 일부러 말씀하시는 거죠?”
어떻게 자신의 속을 읽었는지에 대한 당혹감이 5할. 켈시가 들었으면 어떡하지 하는 초조함이 나머지 5할. 가슴이 철렁이게 만드는 그녀의 한 마디에 박사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딱히 문제될 건 없잖아? 방 안인데.”
“감시 카메라에 녹화되고 있는데요?”
“나처럼 Mon3ter에게 맞아본 것도 아니면서 너무 겁먹은 거 아냐?”
그건 맞을 만한 짓을 했으니까 그렇지. 박사는 앞에 있는 소녀를 가장한 광기의 의사를 보며 소리 없는 직언을 내뱉었다.
얼마 전에 ‘전 대원을 해부하려 했습니다’라는 표지를 목에 건 채, 2층 로비의 천장에 밧줄에 묶여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그의 얼굴에 선하다. 듣자 하니 이전에도 의료 오퍼레이터들을 소집해서 스카디를 해부하는 토의를 하다가 켈시에게 발각돼서 월급이 삭감됐다는 걸 들었는데 똑같은 짓을 하려 하다니. 이 여성에겐 학습 능력이 있는 건가 하는 진지한 고민이 박사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 박사의 표정을 보더니, 와파린은 피식 웃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박사가 그리 극진히 보살피고 있는 그 여자애는 요즘 어때?”
“누구요?”
“누구긴 누구야. 매일 밤 네가 가는 방의 주인이지.”
박사는 1초간 유체이탈을 경험했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에요?”
“지금 로도스에 모르고 있는 사람이 더 적을걸? 이미 소문 퍼질 대로 다 퍼졌어.”
“소문이라뇨? 갑자기 무슨...”
“남녀가 밤중에 한 방에서 한동안 있다가 남자가 나오면 이미 안 봐도 비디오 아냐? 그것도 매일 그러면 더더욱. 박사, 요즘 뒤에서 불리는 별명 중 하나가 정력왕인 건 알아?”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별명이랑 뜬금없는 소문은 박사에게 정신적 데미지를 주기 충분했다. 급습해오는 두통을 손으로 제지하면서, 그는 일단 눈앞에 있는 사람부터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잠깐만요. 착오가 있는 거 같은데 저와 스카디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는데요?”
“부끄러워하지 마. 젊은 날의 혈기잖아? 그럴 수 있지.”
“아니, 진짜로 안 했다니까요? 애꿎게 사람을 경험자로 만들지 말라고요!”
“안 했다면 뭘 했길래?”
“그건...”
목까지 올라온 박사의 소리는 뒷덜미를 잡아당겨진 듯 다시 폐 속으로 떨어졌다. 오해를 풀어야 되는 건 맞지만, 이게 프라이버시 침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브레이크가 되어 그의 행동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와파린이다. 그 스카디를 해부하지 못해 안달이 난 광기의 메딕이다. 그런 그녀에게 스카디랑 있었던 일을 알려준다니. 박사 입장에선 차라리 이프리트에게 섬멸전의 소대장을 맡기는 게 더 안전해 보일 수준이었다.
그런 생각이 표정에 씌인 박사를 보며, 와파린은 분명 뭔가 재밌는 게 있다는 걸 눈치채,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뭔가 있기는 하구만?”
“그... 죄송해요. 아무리 와파린씨라도 이건 말 못하겠어요.”
“기껏 흥미를 돋궜는데 말을 안 하다니. 박사. 너무한 거 아니야?”
“그냥 간단하게 대화를 나눈 정도라고만 생각해주세요.”
“거참 아쉽군. 날 그렇게 신뢰하지 못하는건가?”
“네.”
거기는 예의상 부정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며, 와파린은 볼을 부풀리며 불평했다. 본인보다 두 배 이상의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보이는 저 소녀같이 귀여운 행동에, 박사는 무심코 저 햄스터처럼 부풀어 오른 뺨을 꼬집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손을 꽉 쥐었다.
홍차 한 모금을 들이키며 작은 한숨을 내쉬며, 와파린은 ‘어쩔 수 없지’라는 한마디와 함께, 잠시 놓고 있던 서류에 다신 손을 내밀었다.
“김새네. 일이나 하자. 매너 없는 정력왕씨.”
그렇게 박사의 칭호는 한 층 더 격상(?)되었다.
◎
태양이 자기 할 일을 마치고 지평선 너머로 퇴근하고, 모든 오퍼레이터들이 언제나 기대하는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방 너머로 왁자지껄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성에게 들려왔다. 부상으로 인해 하루 종일 방 안에 있는 그녀에게 있어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를 알려주는 알람시계이기도 하자, 곧 자신의 방으로 누군가가 온다는 중요한 신호이기도 하다.
상처가 거의 아물어가는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통증과 함께, 여성은 침대에서 일어나 왔다 갔다 걷기 시작했다. 지금 오고 있을까. 언제쯤 도착하려나. 마음 한 칸에서 조용히 불타고 있는 조바심과 함께, 그녀의 발걸음은 방 한가운데를 맴돌고 있었다.
밖에서 오퍼레이터들의 대화하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감과 동시에, 거꾸로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들려왔다. 그가 오고 있다는 걸 직감해, 여성은 무심코 자신의 얼굴이 지금 이상하지 않은지 침대 옆 책상에 있는 손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평소엔 미용에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의 앞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얼마 전부터 생긴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여성은 가벼운 정돈을 끝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남성을 맞이했다.
은발의 여성, 스카디의 소소한 저녁시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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