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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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이었던 내 풍경이, 점점 푸른색으로 물들어가. 당신이랑 맞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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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잔잔하게 방을 감쌌다. 따뜻한 콘스프가 들어 있는 보온병을 둘러싸고 있는, 오늘자 요리 당번에게 받은 두 플라스틱 용기에서 나오는 향이 두 사람의 코와 침샘을 자극했다. 한쪽은 스카디가 고른 스크램블 에그와 감자 마카로니 샐러드를 곁들인 참치 샌드위치 두 조각. 다른 한쪽은 박사가 고른 야채볶음을 곁들인 돼지고기를 주재료로 한, 딱 봐도 자극적으로 보이는 붉은색의 볶음밥이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사이드 디쉬의 기름칠 작업이 끝난 혀 위로 샌드위치 안의 아삭한 야채와 참치가 다이빙. 그리고 콘스프의 온기가 입에서 위장 너머까지 상냥하게 감싸는 걸 마음껏 즐기면서, 평소 보기 힘든 미소가 스카디의 얼굴을 가득 채웠다.
맛있냐는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린 오퍼레이터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떠올린 박사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오물오물 입을 열심히 움직이는 것이 작은 반려동물을 보는 것만 같아서, 무심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려고 하관을 가리는 그의 필사적인 노력은 덤이다.
그런 그의 노력을 모르는 스카디는 의아한 듯 박사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뺨에 뭐라도 묻었나 손으로 만져봤지만 곧바로 아닌 것 같고, 혹시 지금 몰골이 이상한 건가 싶었지만 방금 손거울로 확인했으니 그것도 아닌 걸로 보아 원인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시야에 비친 건 그녀가 쥐고 있는 나머지 한 조각의 샌드위치. 이윽고 알아차렸다는 듯, 스카디는 일어나서 박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박사. 아, 해.”
“응?”
갑작스레 다가오는 스카디의 손길에 흠칫하며, 박사의 등이 살짝 뒤로 밀려났다. 한입 베어 문 샌드위치 너머로 보이는 참치가 노을빛에 선명하게 반짝이며 기름을 한두 방울 아래로 떨어트리는 것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먹고 싶어서 계속 보고 있었잖아? 한 입 줄게.”
“아니 그게...”
뭔가 하며 고민하길 1초, 곧바로 박사는 지금 그녀가 뭔가 단단히 착각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냥 넘기려 했지만, 저 받아쓰기 100점 받아온 어린아이 같이 당당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거절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렇다고 해도 저 한입 베어 문 자국이 선명히 보이는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들이밀다니. 정말 순수한 의도인가? 아니면 일부러 저러는 것인가? 박사의 시야에 각종 의심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호의를 거절하지 않기 위해 먹으려 해도 ‘간접 키스’라는 단어가 박사의 머릿속을 간지럽히며 몸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는 건 유치한 것인 걸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좀 전부터 오늘자 비서가 한 말을 신경 쓰고 있던 지라 그의 머릿속 잡념의 농도는 서서히 짙어져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 망설일 수는 없는 노릇. 잠시 눈을 질끈 감은 박사는 조심히 자신의 본능을 달래며 입을 크게 벌려 샌드위치를 한입 깨물었다. 신선한 참치의 짭조름함 뒤에 느껴지는 진하고 깊은 고소함이 그의 혀 위에서 춤추는 것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스카디의 시선은 의도치 않게 박사의 샌드위치에 대한 감상을 방해했다.
우물우물 음식을 씹으면서 박사는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스카디를 보았다. 용문에서의 ‘그 일’로부터 어느새 8일째. 또한 매일 밤 서투른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도 8일째. 칙칙해져 가던 스카디의 상태는 딱 봐도 눈에 띄게 호전되는 것이 보였다. 다크서클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진 것이 그 증거 중 하나였다. 의료 오퍼레이터들의 보고서에서도 정서가 많이 안정화되었다는 내용을 본 것으로 보아, 그녀가 한동안 겪어온 불면증이 완화된 것이라고 박사는 짐작했다.
다만, 그것보다 박사의 눈에 띄는 건 스카디가 그에게 보이는 태도였다. 상태를 확인해 주고 간혹 소소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는 것. 그 외에는 특별한 건 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날이 지날수록 스카디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점점 바뀌어 가는 것을 박사도 확실히 느꼈다. 당장 얼마 전부터 보이는 저 미소 짓고 있는 모습만 봐도 박사의 뇌와 심장을 믹서기처럼 휘저었다. 허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첫날엔 손만 잡는 정도였는데, 사흘 정도 지나고 나서부턴 침대에 앉아있을 땐 옆에 밀착하기 시작했고, 더해서 엿새쯤 됐을 때부터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맡기는 건 아직도 박사의 척추가 기억할 정도로 짜릿짜릿한 자극이었다. 허나 여기서 끝나지 않은 채, 이윽고 전날부턴 ‘자신을 다치게 한 대가’라고 말하며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이리저리 비비적거리는 것도 추가되었다. 가끔씩 느껴지는 스카디로부터의 풍만한 감촉을 아직도 그의 아랫도리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덤이다.
부모를 향한 아이의, 혹은 주인을 향한 반려동물과의 애교와도 같이, 다른 한편으로는 연인을 적극적으로 유혹해 오는 이성과도 같이. 시나브로 가까워지는 이 여성의 스킨쉽은 박사에게 온갖 번뇌를 부여하는 시련과도 같았다. 행위만 보면 좀 전에 와파린이 말하는 그런 관계가 진짜인 것처럼 착각할 거 같아, 에로스가 박사의 기껏 유지하고 있는 이성을 땡볕에 놓인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 녹여가고 있었다.
“저, 스카디. 말할 게 있는데...”
“뭔데?”
‘하지만 내가 누군가. 로도스의 최고지도자 아닌가!’하며 껍데기뿐인 자존심을 이성에 우겨넣으며, 박사는 슬슬 면도해야 할 것 같은 턱을 쓰다듬으며 나름대로의 결심을 다졌다.
“그... 요즘 따라, 스킨십이 좀 많아진 거 같지 않아?”
예상외의 질문을 날려오는 박사를 보며, 스카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가?”
“자세히 생각해 봐. 손잡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요즘 거리감이 매우 가까워졌다는 거 못 느꼈어?”
박사의 질문에 스카디는 자신이 요 며칠간 해온 행동들을 곰곰이 떠올렸다. 손을 잡는다던가, 어깨에 기대던가, 등에 얼굴을 파묻는다던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자신의 행동들이, 박사가 언급하니까 어째선지 다른 감각이 그녀의 가슴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지난주에 박사에게 알몸을 보였을 때랑 똑같은 기분이 의식의 수면 위로 등장하면서, 스카디는 자신의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민폐였던 걸까?”
“아니 그건 아닌데... 네가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 말했잖아. 2m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고. 그때랑 전혀 달라서 뭔가 있는 건가 싶어서.”
아뿔싸.
박사의 질문과 함께 스카디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번개와도 같이 지나갔다. 이윽고 액화질소를 부은 것처럼 급하게 썰렁해지는 방의 온도. 자신이 지금까지 저질렀던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뒤늦게 알아차리면서, 방금 전까지 있던 스카디의 웃음기가 사라져졌다. 찡그려진 미간과 함께 이리저리 가만히 있지 못하는 손가락이 그녀의 변해가는 심정을 대변했다.
“아냐, 괜찮을 거야... 아직은...”
“뭐가?”
박사의 질문에도 스카디는 아무 대답 없이 시선이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부들부들 미세하게 들썩이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여, 박사는 자신이 또 뭔가 건드리면 안 되는 부분에 손을 뻗었다는 걸 느꼈다. 곧바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그에게, 스카디는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박사 잘못이 아냐. 내가 잘못한 거니까.”
“네가? 무엇을?”
“이건 저주야. 옛날부터 내 몸에 각인되어온, 끔찍한 저주.”
저주라는 말에 박사는 처음엔 비유적인 표현이라 생각했으나, 곧바로 오리지늄 아츠를, 정확히는 서포터 오퍼레이터 샤마르를 떠올렸다. 그 분홍 머리 소녀 역시 아츠를 활용해 상대방의 운명을 건드리는 능력이 있는 만큼, 지금 스카디가 말한 저주 역시 샤마르랑 비슷한 능력을 가진 자가 한 짓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게 가까이 온 자들은 전부 하나같이 사라져갔어.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파도에 집어삼켜져서... 영원히 다시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되버렸어.”
“스카디...”
“미안해. 박사. 내가 너무 주제넘게 굴어서. 처음부터 난 누구와도 가까이 지냈으면 안 됐는데. 그걸 잊고 멋대로 당신에게 다가가려 해서...”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로도스에 오고 나면서 잊고 있었어. 내게 걸린 저주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내게 자연스레 다가오는 사람들 때문에, 무심코 옛날로 돌아간 거 같아서... 마치 긴 악몽에서 깨어난 거 같아서. 그게 기뻐서. 난...”
횡설수설 말하는 스카디에게 박사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이 이상 말해봤자 같은 대화가 오고 갈 것 같다는, 경험과 지식에 기반한 그의 직감이 옆에서 조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먹이는 목소리. 일렁이기 시작하는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를 보며, 박사는 착잡한 심정을 숨기기 위해 목을 주물렀다. 자신이 괜히 꺼낸 주제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여성을 어떻게 다독여야 되는지에 대한 당혹감이 공존하는 것을 느끼며,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강구했다.
이윽고 박사의 머릿속에 오늘 처리한 서류 작업 중의 한 내용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스카디랑 관련된 내용이어서 방에 들른 김에 이야기하려 했다가 식사하면서 무심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 돌고 돌아서 다시 그의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이거라면. 짧은 한 마디와 함께, 박사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스카디, 내일 시간 있어? 건네주고 싶은 게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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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이었던 내 풍경이, 점점 푸른색으로 물들어가. 당신이랑 맞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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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잔잔하게 방을 감쌌다. 따뜻한 콘스프가 들어 있는 보온병을 둘러싸고 있는, 오늘자 요리 당번에게 받은 두 플라스틱 용기에서 나오는 향이 두 사람의 코와 침샘을 자극했다. 한쪽은 스카디가 고른 스크램블 에그와 감자 마카로니 샐러드를 곁들인 참치 샌드위치 두 조각. 다른 한쪽은 박사가 고른 야채볶음을 곁들인 돼지고기를 주재료로 한, 딱 봐도 자극적으로 보이는 붉은색의 볶음밥이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사이드 디쉬의 기름칠 작업이 끝난 혀 위로 샌드위치 안의 아삭한 야채와 참치가 다이빙. 그리고 콘스프의 온기가 입에서 위장 너머까지 상냥하게 감싸는 걸 마음껏 즐기면서, 평소 보기 힘든 미소가 스카디의 얼굴을 가득 채웠다.
맛있냐는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린 오퍼레이터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떠올린 박사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오물오물 입을 열심히 움직이는 것이 작은 반려동물을 보는 것만 같아서, 무심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려고 하관을 가리는 그의 필사적인 노력은 덤이다.
그런 그의 노력을 모르는 스카디는 의아한 듯 박사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뺨에 뭐라도 묻었나 손으로 만져봤지만 곧바로 아닌 것 같고, 혹시 지금 몰골이 이상한 건가 싶었지만 방금 손거울로 확인했으니 그것도 아닌 걸로 보아 원인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시야에 비친 건 그녀가 쥐고 있는 나머지 한 조각의 샌드위치. 이윽고 알아차렸다는 듯, 스카디는 일어나서 박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박사. 아, 해.”
“응?”
갑작스레 다가오는 스카디의 손길에 흠칫하며, 박사의 등이 살짝 뒤로 밀려났다. 한입 베어 문 샌드위치 너머로 보이는 참치가 노을빛에 선명하게 반짝이며 기름을 한두 방울 아래로 떨어트리는 것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먹고 싶어서 계속 보고 있었잖아? 한 입 줄게.”
“아니 그게...”
뭔가 하며 고민하길 1초, 곧바로 박사는 지금 그녀가 뭔가 단단히 착각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냥 넘기려 했지만, 저 받아쓰기 100점 받아온 어린아이 같이 당당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거절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렇다고 해도 저 한입 베어 문 자국이 선명히 보이는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들이밀다니. 정말 순수한 의도인가? 아니면 일부러 저러는 것인가? 박사의 시야에 각종 의심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호의를 거절하지 않기 위해 먹으려 해도 ‘간접 키스’라는 단어가 박사의 머릿속을 간지럽히며 몸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는 건 유치한 것인 걸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좀 전부터 오늘자 비서가 한 말을 신경 쓰고 있던 지라 그의 머릿속 잡념의 농도는 서서히 짙어져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 망설일 수는 없는 노릇. 잠시 눈을 질끈 감은 박사는 조심히 자신의 본능을 달래며 입을 크게 벌려 샌드위치를 한입 깨물었다. 신선한 참치의 짭조름함 뒤에 느껴지는 진하고 깊은 고소함이 그의 혀 위에서 춤추는 것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스카디의 시선은 의도치 않게 박사의 샌드위치에 대한 감상을 방해했다.
우물우물 음식을 씹으면서 박사는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스카디를 보았다. 용문에서의 ‘그 일’로부터 어느새 8일째. 또한 매일 밤 서투른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도 8일째. 칙칙해져 가던 스카디의 상태는 딱 봐도 눈에 띄게 호전되는 것이 보였다. 다크서클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진 것이 그 증거 중 하나였다. 의료 오퍼레이터들의 보고서에서도 정서가 많이 안정화되었다는 내용을 본 것으로 보아, 그녀가 한동안 겪어온 불면증이 완화된 것이라고 박사는 짐작했다.
다만, 그것보다 박사의 눈에 띄는 건 스카디가 그에게 보이는 태도였다. 상태를 확인해 주고 간혹 소소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는 것. 그 외에는 특별한 건 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날이 지날수록 스카디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점점 바뀌어 가는 것을 박사도 확실히 느꼈다. 당장 얼마 전부터 보이는 저 미소 짓고 있는 모습만 봐도 박사의 뇌와 심장을 믹서기처럼 휘저었다. 허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첫날엔 손만 잡는 정도였는데, 사흘 정도 지나고 나서부턴 침대에 앉아있을 땐 옆에 밀착하기 시작했고, 더해서 엿새쯤 됐을 때부터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맡기는 건 아직도 박사의 척추가 기억할 정도로 짜릿짜릿한 자극이었다. 허나 여기서 끝나지 않은 채, 이윽고 전날부턴 ‘자신을 다치게 한 대가’라고 말하며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이리저리 비비적거리는 것도 추가되었다. 가끔씩 느껴지는 스카디로부터의 풍만한 감촉을 아직도 그의 아랫도리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덤이다.
부모를 향한 아이의, 혹은 주인을 향한 반려동물과의 애교와도 같이, 다른 한편으로는 연인을 적극적으로 유혹해 오는 이성과도 같이. 시나브로 가까워지는 이 여성의 스킨쉽은 박사에게 온갖 번뇌를 부여하는 시련과도 같았다. 행위만 보면 좀 전에 와파린이 말하는 그런 관계가 진짜인 것처럼 착각할 거 같아, 에로스가 박사의 기껏 유지하고 있는 이성을 땡볕에 놓인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 녹여가고 있었다.
“저, 스카디. 말할 게 있는데...”
“뭔데?”
‘하지만 내가 누군가. 로도스의 최고지도자 아닌가!’하며 껍데기뿐인 자존심을 이성에 우겨넣으며, 박사는 슬슬 면도해야 할 것 같은 턱을 쓰다듬으며 나름대로의 결심을 다졌다.
“그... 요즘 따라, 스킨십이 좀 많아진 거 같지 않아?”
예상외의 질문을 날려오는 박사를 보며, 스카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가?”
“자세히 생각해 봐. 손잡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요즘 거리감이 매우 가까워졌다는 거 못 느꼈어?”
박사의 질문에 스카디는 자신이 요 며칠간 해온 행동들을 곰곰이 떠올렸다. 손을 잡는다던가, 어깨에 기대던가, 등에 얼굴을 파묻는다던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자신의 행동들이, 박사가 언급하니까 어째선지 다른 감각이 그녀의 가슴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지난주에 박사에게 알몸을 보였을 때랑 똑같은 기분이 의식의 수면 위로 등장하면서, 스카디는 자신의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민폐였던 걸까?”
“아니 그건 아닌데... 네가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 말했잖아. 2m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고. 그때랑 전혀 달라서 뭔가 있는 건가 싶어서.”
아뿔싸.
박사의 질문과 함께 스카디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번개와도 같이 지나갔다. 이윽고 액화질소를 부은 것처럼 급하게 썰렁해지는 방의 온도. 자신이 지금까지 저질렀던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뒤늦게 알아차리면서, 방금 전까지 있던 스카디의 웃음기가 사라져졌다. 찡그려진 미간과 함께 이리저리 가만히 있지 못하는 손가락이 그녀의 변해가는 심정을 대변했다.
“아냐, 괜찮을 거야... 아직은...”
“뭐가?”
박사의 질문에도 스카디는 아무 대답 없이 시선이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부들부들 미세하게 들썩이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여, 박사는 자신이 또 뭔가 건드리면 안 되는 부분에 손을 뻗었다는 걸 느꼈다. 곧바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그에게, 스카디는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박사 잘못이 아냐. 내가 잘못한 거니까.”
“네가? 무엇을?”
“이건 저주야. 옛날부터 내 몸에 각인되어온, 끔찍한 저주.”
저주라는 말에 박사는 처음엔 비유적인 표현이라 생각했으나, 곧바로 오리지늄 아츠를, 정확히는 서포터 오퍼레이터 샤마르를 떠올렸다. 그 분홍 머리 소녀 역시 아츠를 활용해 상대방의 운명을 건드리는 능력이 있는 만큼, 지금 스카디가 말한 저주 역시 샤마르랑 비슷한 능력을 가진 자가 한 짓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게 가까이 온 자들은 전부 하나같이 사라져갔어.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파도에 집어삼켜져서... 영원히 다시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되버렸어.”
“스카디...”
“미안해. 박사. 내가 너무 주제넘게 굴어서. 처음부터 난 누구와도 가까이 지냈으면 안 됐는데. 그걸 잊고 멋대로 당신에게 다가가려 해서...”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로도스에 오고 나면서 잊고 있었어. 내게 걸린 저주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내게 자연스레 다가오는 사람들 때문에, 무심코 옛날로 돌아간 거 같아서... 마치 긴 악몽에서 깨어난 거 같아서. 그게 기뻐서. 난...”
횡설수설 말하는 스카디에게 박사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이 이상 말해봤자 같은 대화가 오고 갈 것 같다는, 경험과 지식에 기반한 그의 직감이 옆에서 조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먹이는 목소리. 일렁이기 시작하는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를 보며, 박사는 착잡한 심정을 숨기기 위해 목을 주물렀다. 자신이 괜히 꺼낸 주제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여성을 어떻게 다독여야 되는지에 대한 당혹감이 공존하는 것을 느끼며,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강구했다.
이윽고 박사의 머릿속에 오늘 처리한 서류 작업 중의 한 내용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스카디랑 관련된 내용이어서 방에 들른 김에 이야기하려 했다가 식사하면서 무심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 돌고 돌아서 다시 그의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이거라면. 짧은 한 마디와 함께, 박사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스카디, 내일 시간 있어? 건네주고 싶은 게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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