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어째선지 짤려서 재업함. 야한 것도 없는데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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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과 푸른 수평선. 둘 위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따스한 햇빛의 은총이 내려왔다. 수많은 인파들을 가로지르며, 현지인들과는 꽤나 다른 복장을 입은 일행이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시에스타도 오랜만이네.”
가을이 가까워짐에도 20도에 근접한 온도에 굴하지 않겠다는 듯 코트를 벗지 않고, 박사는 손을 부채 삼아 얼굴을 향해 휘저었다. 차량 안의 에어컨 설비가 그리워졌지만, 할 일은 해야 되므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해변도시 시에스타. 로도스로부터 서쪽 멀리에 있는 휴양지로 유명한 장소. 메딕 오퍼레이터 실론과 스나이퍼 오퍼레이터 슈바르츠의 원 거주지.
박사가 갑작스레 시에스타에 오게 된 건, 작년에 있던 옵시디언 페스티벌 때의 소동이 이유였다. 분화 직전의 화산을 대원들이랑 힘을 합해서 잠재우는 것은 좋았지만, 그것은 잠시 잠잠하게 만든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고, 시에스타는 가까운 시일 내에 화산재에 뒤덮여 사라질 상황에 처했다.
이에 시에스타 시장이자 오퍼레이터 실론의 아버지이기도 한 ‘헤르만 도이코스’는 이동도시화를 계획하게 되었고, 그렇게 계획한지 1년이 지난 지금. 도이코스 시장은 이동도시 ‘뉴 시에스타’의 건축 진도 확인 및 관련 자문을 위해 로도스의 지도자인 박사와 건축 관련 전문인 오퍼레이터들을 초청하게 된 것이었다.
“레드, 지나가는 루퍼트족의 꼬리를 만지려 하지 말고, 오키드는 저기 여성분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는 미드나이트 좀 어떻게든 해줘. 헤이즈 넌 경호역이니 은근슬쩍 도망치려 하지 말고! 리스캄은 일단 저기 쇼핑 삼매경인 프란카부터 어떻게 해! 그리고 나중에 자유 시간 줄테니까 일단은 다들 제발 좀 모여!!”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던가? 이전 용문에서의 일 때문인지 켈시가 건축 전문 대원들 외에도 박사에게 경호 임무를 위한 오퍼레이터들을 10명 넘게 붙여버려서, 지금의 박사에게 스트레스인 건 습기와 땀으로 인해 찐득해진 몸보다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활기찬 대원들의 통제였다. 오키드나 리스캄 같은 조용하고 침착한 대원들이 어느 정도 도와주고는 있다마는, 최종적으로는 모두를 통제해야 하는 건 리더인 박사 본인. 대원들에 대한 스트레스도 만만찮지만, 한술 더 떠서 기껏 휴양지로 놀러 왔는데 일을 해야 한다는 자신의 불쌍한 처지는 그의 등골을 한 달쯤 사용한 고무줄처럼 흐물흐물 휘게 만들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는 박사의 시선에 비치는 건, 일행과 한 발자국 떨어져서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스카디였다.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가 향하고 있는 곳엔, 멀리까지 푸른 물감으로 가득 채운 풍경, 흔히 사람들 사이에 ‘바다’라고 불리는 구역이 비치고 있었다. 수중생물 종족인 에기르인으로 추정되는 그녀에게 있어서 저 ‘바다’라는 곳은 고향과도 비슷한 장소일 터. 저 너머를 보면서 향수를 느끼고 있는 거라고 박사는 추정했다.
“스카디. 가자.”
박사의 한 마디에 흠칫 놀라면서, 스카디는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동자는 그렇고 싶지 않다는 듯, 몇 초에 한 번 간격으로 멀어지는 ‘바다’의 모습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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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 오전 11시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래. 고생했네.”
짧은 인사와 함께 박사는 도이코스 시장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냉방 시설로 인해 서늘한 복도엔 박사의 구두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회의를 끝내고 대원들을 전부 내보낸 뒤에 잠시 둘이서 가진 티타임. 2시간 간의 회의 후에 어째선지 시작해버린 도이코스 시장의 딸 자랑을 30분 가까이 듣고 나니, 박사의 정신적 체력은 부러지기 직전인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현재 시간 오후 4시 반. 먼저 나간 건축 전문 대원들은 휴식을 만끽하러 간 건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경호 역으로 데려온 오퍼레이터들도 지금쯤이면 각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박사에게 있어선, 평소에 할 수 없었던 ‘낮잠’이라는 이름의 봉인되었던 과실을 맛볼 수가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도이코스 시장이 제공한 5성급 호텔의 푹신한 침대에 점프하는 행복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출구를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경호원이 열어주는 문 너머로 꽤나 선선한 바람이 박사를 맞이했다. 암석으로 만들어진 정돈된 돌계단을 사뿐사뿐 걸어 내려오며,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 그는 작년에 있었던 일들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 한 칸에는, 좀 전에 봤던 스카디의 옆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리워하면서도, 슬퍼하고,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 같은 그 눈동자에 너머엔 무엇이 있던 것일까. 그걸 생각하자니 방금 전까지 낮잠을 자러 가기 위해 가볍게 걸어가던 박사의 발걸음이 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박사.”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한창 생각 중이던 스카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험담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며 박사는 고개를 돌렸고, 이윽고 그는 바닥에 부어진지 하루 지난 콘크리트 용액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붉은색의 끝단 위에 반짝이는 금색 단추로 치장하고 있는 약간 큰 사이즈의 옅은 베이지색 니트 가디건. 그와 대비되는 입고 있는 몸에 딱 달라붙는, 좀 작아 보일 수 있는 흰색 민소매 상의. 튼실한 허벅지부터 날씬한 종아리까지 있는 그대로 선명하게 과시하고 있는 진청색의 스키니 진. 그리고 4cm 정도의 굽이 있는 걸로 추정되는, 수정이 박힌 검은색의 구두. 단순하다고 할 수 있으면서도 상당히 과감한 패션에, 박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카디...? 도대체 뭔?”
평소에 입는 전투복이랑 전혀 다른 느낌을 선보이는 그녀를 보며, 말을 안 듣는 입과 혀를 필사적으로 굴리면서 박사는 물었다. 그런 그의 질문에 스카디는 살짝 쑥스럽다는 듯, 평소와는 다르게 머리 바로 아래에서 묶어 길게 늘어뜨린 비단과도 같은 은빛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라니랑 다른 대원들이 날 끌고 어딘가로 가더니... 갑자기 이 옷을 줘서... 박사가 좋아할 거라고 해서...”
햇살에 비치며 강조되는 홍조를 감추려는 듯 니트 가디건의 헐렁한 소매로 잠시 하관을 가리더니, 스카디는 잠시 옆으로 새고 있던 시선을 다시 박사에게로 고정했다.
“어울리려나?”
박사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찢어지기 직전일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너덜너덜한 이성이 한계치를 넘어서기 직전인 걸 의미하는 경고음이었다.
니트 가디건이 만드는 푹신푹신한 인상, 그리고 그 안에서 살짝 튀어나온 스카디의 손가락. 언제나의 쿨하고 미스테리어스한 미녀라는 기존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보호 욕구를 일으킬 것만 같은 매력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작은 민소매 상의 아래에서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는 풍만한 지고의 상체와 옷이랑 스키니 진 사이의 협곡에서 살짝 보이는 장골의 존재감은, 청순하면서도 요염한 두 모순적인 감상이 기적적으로 공존하는 진풍경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스카디의 새로운 옷차림은, 이성 교제 경험이라곤 1도 없는 박사의 뇌리에 성대하게 빅뱅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나중에 저 옷을 입힌 오퍼레이터에게는 기필코 포상금을 줘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며, 박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스카디의 질문에 긍정을 표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만족한 듯, 스카디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박사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괜찮다면 같이 다니지 않을래? 이쪽 지리는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아서.”
“나랑? 다른 대원들은 어쩌고?”
“글쎄...?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박사는 그 말과 함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허나 그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꼬리나 귀 등 특징적인 요소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뭔가를 느낀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찝찝한 감정을 뒤로하며, 박사는 뒷목을 긁적였다.
“괜찮겠어? 나도 여기 지리에 빠삭하진 않은데.”
“괜찮아.”
스카디는 박사의 코트의 소매 부분을 한손으로 약하게 잡았다. 뭔가 말하려다가 말려는 듯 잠시 입을 꾹 다물더니, 긴장한 것을 풀려는 듯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랑, 같이 걷는 게 좋으니까.”
두근, 두근 하며, 두 사람의 심장박동이 같이 빨라지면서 공명하기 시작했다. 감정에 동요하고 있는 것을 상대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박사와 스카디는 다른 곳을 바라본 채, 시에스타의 길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점점 비슷해져 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 점점 안단테(andante)에 가까워지는 심장의 고동소리. 시에스타의 기후와는 사뭇 다른, 푹신푹신한 온기가 둘 주위를 상냥하게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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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하마타면 들킬 뻔했네. 최근 들어서 박사의 감이 이상하게 좋아졌단 말이야.”
수풀 아래에서 손으로 접혀 있던 적갈색의 여우 귀가 해방감을 느끼며 쫑긋거렸다. 방금 전에 박사가 두리번거렸을 때 철렁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후 수풀 밖으로 나왔다.
“프란카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포족 여성에 뒤따라 쿠란타족 소녀 그라니도 뒤따라 나왔다. 몸에 붙은 잎사귀들을 툭툭 털어내며, 오랫동안 쭈그려 앉아 있어 찌뿌둥해진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뭘. 그 박사가 연애를 한다는데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잖아?”
“프란카씨도 그렇고 오키드씨도 그렇고 굉장해요. 옷 한 벌만으로 스카디가 저런 분위기를 낼 수 있다니...”
“그게 패션이 가진 매력이니까. 이참에 그라니도 한 번 배워볼래?”
“어? 제가요?”
“얼굴도 예쁘장하고 비율도 좋으니까, 코디만 잘하면 더욱 예뻐질 거야!”
꺄르륵하며 이야기꽃을 두 여성이 피워내고 있을 때, 아직 수풀 안에서 쥐가 난 다리를 풀어주고 있는 와이번족 여성, 리스캄이 투덜거리며 말을 걸었다.
“프란카... 이제 돌아가도 돼?”
장비 점검을 하기 위해 호텔로 가려 했던 그녀를 갑자기 끌고 와서 하는 게 스카디를 코디시키고 박사를 멀리서 관찰하는 거라니. 시간 낭비도 이런 특급 낭비가 없다. 호텔에서 점검을 끝내고 맛있는 식사를 마친 뒤에 방에서 느긋하게 쉬려고 했던 리스캄의 완벽한 계획은 이미 허공으로 증발한지 오래였다.
“무슨 소리야, 이제부터 본방인데!”
“이번엔 또 뭐할건데? 코디 시켜주고 데이트 코스 짜줬잖아?”
질린 듯한 리스캄의 표정이 맘에 들었다는 듯, 프란카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과 함께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미행이지! 남의 연애사만큼 세상에서 재밌는 게 없다고!”
나중에 박사에게 밀고해야겠다고, 리스캄은 큰 한숨과 함께 결심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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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및 전편 링크
스카디 가방에 프란카가 콘돔 넣어놨을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