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서 미안. 생각나는 거 다 썼더니 A4 9페이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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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기억을 잃고 체르노보그에서 깨어났을 때를 연상시킬 정도로 혼란스러운 박사의 머릿속을 대변하는 적절한 한 마디였다.
방금 전 해변가에서 스카디의 기습(?)을 받은 것도 모자라, 정신을 차려보니 그 당사자의 방 안에 있는 이 상황. 유령에 홀렸다는 옛말이 어떤 느낌인지를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는 박사의 뒤에서 들려오는, 욕실 안의 빗소리. 안에서 그녀가 몸을 씻어내고 있다는 걸 상상하니 무심코 그의 고간이 저 소리에 솔깃하게 만들었다.

현재 시간 저녁 8시. 해변에서 돌아온 지 30분 정도 지난 상황. 창밖의 달빛이 박사의 뺨을 놀리듯이 간지럽혔고,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숲속에서의 곤충들의 합창은 그의 조바심을 자극했다.
아무리 본능에 사로잡혔다고 해도 생각을 1도 안 한 채 그대로 대원을 따라서 그녀의 방에 들어오다니. 이게 사람인가? 짐승새끼지. 자괴감과 허탈함으로 가득한 불평이 박사의 대뇌피질을 쿡쿡 찔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가만히 기다려야 하나. 방향을 잡지 못하는 박사의 발자국은 방 안을 이리저리 방황했고, 그러기를 10초. 어차피 들어온 거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는 들어보고 판단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박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윽고 욕실에서 밸브가 잠가지는 소리, 수건으로 몸의 이곳저곳을 터는 소리가 순서대로 들려왔다. 곧바로 문이 열리면서 증기를 두른 스카디의 모습이 박사의 눈에 비쳤다. 흰색 가운 너머로 보이는 열기에 붉어진 그녀의 살결을 보니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게 되어서, 박사는 고개를 돌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췄다.

“박사도 하지 그래?”
“응? 아니, 뭐... 난 있다가 내 방에서 할게.”

굳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스카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느 정도 머리의 수분을 턴 후 수건을 의자에 걸어둔 그녀는 곧바로 박사의 바로 옆에 조용히 밀착했다. 여성의 은색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샴푸 향은,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박사의 신경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런 대화 없이,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만이 맴돌고 있었다. 용문의 웨이엔우 장관이랑 단둘이 있을 때도 이만큼 어색하진 아니었는데. 박사는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뭔가 여러모로 이상해질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 그래서 할 얘기는 뭐야? 방에 들여보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것일텐데.”

박사는 살짝 거리를 벌리면서 질문을 던졌다. 허나 스카디는 아무 대답 없이 멀어져 가는 박사의 손을 부여잡으며, 떨어지지 말라는 신호를 강하게 표출했다.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범고래와도 같이,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는 남성을 줄곧 응시하고 있었다.

“그... 할 말 없으면 갈까 하는데...”
“안 돼.”
“나 내일 11시에 회의가 있어서 쉬고 싶...”
“안 돼.”

압력이 느껴지는 두 글자의 단답과 함께, 스카디는 점점 더 박사에게 다가왔다. 손가락, 손목, 팔뚝에 이어 어깨까지, 두 사람이 밀착하는 정도는 점점 짙어져갔다.

“오늘은, 어디에도 가지 말고 나랑 있어줬으면 해.”

스카디의 요청에 박사는 아직 자유로운 다른 쪽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오늘 밤은 계속 같이 있어달라니. 혹시 자장가를 들려달라는 건가 싶었지만, 시간이 아직 자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을, 박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뭔 일 있어? 천천히 말해 봐."

스카디는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고 눈앞의 남성을 응시했다. 코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부분부분 탈색된 흑발. 다크서클로 얼룩진 힘없이 처진 갈색 눈. 창백하다 싶은 흰 피부. 누가 봐도 연약해 보이고 믿음직하지 못하지만, 그와 동시에 로도스의 모두가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게 만드는 그 모습.

"어디 아픈 거야? 열은 없는 거 같은데..."

박사의 손이 스카디의 이마를 가득 덮으며 온기가 전해져왔다. 그러면서 방금 전보다 좁혀진 거리에 무심코, 스카디에게서 두근두근 작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당황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분명 그럴 거라 믿었는데.’
그 이유도, 발생한 시점도 모른 채, 언젠가부터 변덕쟁이가 되어버린 스카디의 심장박동은, 몇 번이고 ‘더 가까이 와줘’라는 소리 없는 외침과 함께 템포를 높여갔다.

"아프다고도... 할 수 있겠네."

무심한 표정으로 스카디는 이마에 닿고 있는 박사의 손을 양손으로 잡아서 위치를 자신의 뺨으로 옮겼다. 따뜻하면서도 더위로 인해 약간의 축축한, 당황한 듯 움찔거리는 박사의 손의 감촉을 느꼈다. 적잖이 당황해하는 그의 어설픈 웃음에 스카디는, 언제나 봐도 질리지 않는 그의 모습을 강하게 갈구하는 속마음을 억누르며, 그 여우 귀 대원이 건넨 조언을 떠올렸다.
비록 중간부터 경로가 많이 달라졌지만, 최종 장소인 자신의 방까지 끌어들였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성공이었다. 남은 건 그 대원의 말마따나 ‘본심’을 전달하는 것일 뿐.

“난... ...잠시 실례할게.”

허나, 그 마지막 단계에 발을 함부로 들일 수가 없었다. 마치 땅에서 손이 튀어나와 발목을 잡기라도 한 것처럼, 스카디가 건네려 하는 ‘본심’은 목 너머를 넘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폐로 휙 떨어졌다. 목 안이 이물질로 가득 찬 것 같은 답답함과 함께, 어째선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심정으로 그녀는 그대로 박사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역시 너 오늘 뭔가 이상해.”

자신에게 안긴 스카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박사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어봤다.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갈, 필요는... 없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키고, 그대로 내뱉었다. 아까는 실패했지만 이번엔 반드시. 마음속 정리를 마친 스카디는 고개를 들어 다시 박사랑 시선을 맞췄다.

“원인이 바로 앞에 있으니까.”
“바로 앞이라니... 내가?”
“그래. 당신이 말이야.”
“그게 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사의 시야가 빙글빙글 회전했다. 밀쳐지는 느낌과 함께 이윽고 등뒤에 느껴지는 푹신함.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그의 위로 묵직한 중량이 느껴졌다.

“스카디... 뭔...?!”

분위기에 취하면서 뇌가 기능을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실은 이 모든 게 꿈인 것일까? 잠시 희미해졌다가 선명해져 가는 박사의 시야엔 자신의 얼굴 양쪽에 팔을 뻗은 채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스카디의 모습이 보였고, 그는 곧바로 그녀가 자신을 침대 너머로 넘어뜨렸다는 것을 알아챘다. 끈이 느슨해지며 느슨해진 가운 너머로 보이는 풍만한 윤곽에 무심코 시선이 집중될 뻔한 걸 애써 견디면서, 박사는 최대한 시점을 스카디에 고정했다. 루비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붉은색의 홍채는, 어두운 조명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별빛처럼 반짝였다.

“박사. 예전에 말했지? 나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저주의 파도가 있다고 말이야.”
“응? 어, 응. 그렇지?”
“그리고 그런 나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날 원한다고 했고.”

뭔가 어감이 미묘하다고 속으로 딴죽을 걸었지만, 박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을 하기에는 여태껏 자신이 그녀에게 해준 행동들이 그의 생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스카디는 다시금 박사의 얇은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늑골 너머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심장소리가 잔잔한 물결과도 같이 그녀의 귓속에 스며들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밀착해 있는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째깍째깍 시계의 초침 소리와 함께, 열린 창문 너머로 작은 파도의 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방 안을 채워갔다.

“멀리 퍼지는 구름... 모래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하얀 반짝임...”

그런 정적 속에 먼저 말하기 시작한 것은 스카디였다. 얇고 가녀린 왼손으로 박사의 가슴팍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녀의 시선은 창밖의 풍경을 향했다.

“그 아래엔 한 때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잠들어 있어. 가족도. 친구도. 동족도. 장소도. 추억도. 전부... 그 ‘재앙’에 의해...”

‘소녀’의 시야에 담겨 있는 건 창밖의 숲과 해변만이 아니었다. 끝이 안 보이는 푸른 사방(四方)에서 휘몰아치는 붉은 광석, 그리고 화염과 독기의 폭풍 속에 들려오는 수많은 단말마. 복수의 이미지가 겹쳐지며 수많은 불협화음이 스카디의 눈과 귀를 괴롭혀왔다.

“무서웠어. ‘재앙’이 다시 나타나서 내 소중한 모든 걸 뺐어갈까봐. 그래서 난, 도망치는 걸 선택했어. 모두가 나 때문에 다치지 않았으면 해서. 나 하나만 다치면, 다른 모두는 괜찮을 테니까.”

잠시 눈을 감으며 과거의 것들을 기억의 저편에 다시 담아둔 채, 슬쩍 고개를 들며, 스카디는 살며시 박사와 다시금 눈을 맞추었다. 덜 마른 그녀의 머리카락이 실타래처럼 흘러내려 박사의 콧등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사실 더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는 걸, 당신을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어.”
“날...?”
“계속, 계속... 나 자신에게 거짓말해 왔어. 혼자인 것이 좋다고.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지만, 당신이 내게 해준 말을 들으면서, 어느샌가 깨달아버렸어.”

이불을 꽉 쥐는 소리가 박사에게 들려왔다. 미약하게 떨리는 몸 위로,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스카디의 얼굴이 그의 눈에 확연하게 각인되었다.

“난 외로웠던 거야. 모두가 다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어도, 끝을 알 수 없는 칠흑의 운명을, 내 모든 걸 뺏어간 거대한 괴물을 홀로 싸워야한다는 게...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은 그러지 않았던 거야.”

격해질 것 같은 파도를 억누르며 스카디는 자신의 ‘본심’을 천천히 풀어냈다. 허나 둑을 넘어선 물결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가시밭길인 걸 알아도. 섬뜩한 불길이라는 걸 인지해도. 같이 걸어줄 사람을 원했어. 어떤 파도에 휩쓸려도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을 바랬어. 어두운 심연 속에서 불빛을 밝혀줄 사람을... 갈구했어.”
“스카디...”
“그런 나에게, 당신이 다가와 줬어. 떨어지려 해도. 위협해도, 막말을 던져도, 당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 감싸안아줬어.”

입에 붕대라도 두른 것처럼, 박사는 아무 말 없이 스카디의 넋두리를 귀에 담았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이슬 맺힌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니, 몸속의 모든 시계가 우뚝 선 것만 같이 몸이 경직되어서였다.

“처음 당신이 해준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어. 강적을 만나거나 악몽을 꿀 때의 느낌이 아닌, 따뜻한 무언가가 스르륵하고 내 몸을 감싸는 것 같은,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무언가...”

스카디는 박사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댔다. 쿠션 사이에 끼워진 것 같은 극상의 쾌락이 박사의 뇌를 강타했다. 그 직후에 놀라서 움찔거리는 손 너머로 느껴지는 건, 크고 재빠르게 울리는 흉부의 프레스토. 박사였어도 비정상적인 심장박동에 가출할 뻔한 이성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래. 당신을 보기만 해도, 이렇게 계속 고동이 빨라져. 세상 모든 게 포근해지고 따뜻한 기분이 들면서, 어째선지 기쁨만이 내 몸에 맴돌아.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소중한 무언가, 라고 생각해.”
“그건...”
“그러면서 박사가 나에게서 멀어질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고 아파 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여러 나쁜 생각들이 내 머리를 지배하게 돼.”

한 방울. 두 방울. 박사의 얼굴 위로 투명하고 작은 꽃이 피어났다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이윽고 그의 턱 아래에 맺힌 이슬은 유성처럼 툭하고 떨어졌다.

“당신의 관심을 원해. 계속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기를 원해. 다른 누군가에게 한눈 팔지 않기를 원해. 그 상냥한 눈빛과 손길이 전부, 나에게만 향했으면 해.”

들끓어 오르는 감정의 정체를 모른 채 내뱉는 ‘소녀’의 ‘본심’은 그대로 박사의 심상에 스며들었다. 그의 손 너머로 느껴지는 스카디의 심장박동에 공명하듯, 숨이 가빠지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찾아왔다.

“말해줘. 박사. 난 어딘가 잘못된 걸까? 이 가슴을 쥐락펴락 애태우는 느낌도, 내가 겪어야 하는 저주의 일부인걸까?”

동시에, 계속 무의식의 저편에 꽁꽁 묶어두던, 누구에게도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가 없었던 금고의 자물쇠가 풀렸다.
‘그럼 박사랑 스카디는 어떤 관계인 거야?’
해변에서 어렴풋이 알아차린 것만 같은, 답하는 걸 피했던 오퍼레이터 그라니의 질문에 대한 정답이, 박사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저주 따위가 아니야.”

의존. 비 내리는 그날 이후로부터 계속 이어져 온, 박사가 스카디와 자신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할 만한 한 단어였다.
어찌어찌 운 좋게 그녀의 마음속 어둠을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해 주면서 그녀의 호감과 신뢰를 얻은 건 좋았다. 고용주와 고용자 간의 관계 형성에 좋은 영향을 끼칠 테니까.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매우 당연한 감정이야.”

하지만 박사가 그런 스카디에게 느낀 것은 무미건조한 비즈니스 관계랑은 좀 동떨어진, 연민과도 비슷한 무언가였다.
‘위태로워 보여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손을 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잡았을 뿐이었는데.’
상담사는 상담자와의 관계에 신뢰는 형성하더라도 애착을 가져선 안 된다. 상담 직종 업계에 있어서 제1의 규칙이었고 그건 박사도 알고 있을 터였다.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아졌어.’
하지만 머리가 안다고 몸까지 이해한다는 규칙은 없다. 자신도 모르는 틈에 어느새 연민은, 애정이라는 형태로 변모해 갔다.

“지금 당장, 나도 그런걸.”

알면 안 된 걸 알아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박사의 마음속은 점차 혼란스러워지면서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했다. 순수한 애정이 아닌, 그저 신뢰관계를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 상담사로서의 프라이드 따위가 아닌,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스카디의 심리상태를 이용해서 자신의 사리에 악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감정이 양방향이 아닐까 하는 불안함. 그 외에도 부정적인 발상들이 합쳐지면서 박사의 목과 발목을 옥죄여 왔었다.

“박사...도?”
“그래.”

그렇기 때문에, 박사는 자기 자신을 속여 왔다. 그저 조금 특별한 신뢰관계일 뿐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애매한 사이를 유지해 오며, 지금이 두 사람의 적절한 거리라고 무의식적으로 합리화해왔던 것이었다.

“나도 어느순간부터 두려웠던 거야. 내가 너를 향해 가지고 있는 이 고동이, 잘못된 게 아닐까. 널 곤란하게만 만드는 게 아닐까하고. 몇 번이고 고뇌해왔어. 하지만...”

하지만, 박사는 지금 이 순간을 보고 확신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이 바보 같은 기우, 헛된 회피행동이라는 것을. 이것은 거짓된 것도 아니고, 일방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서로가 상대를 자석의 양극처럼 강하게 바라고 있는, ‘사랑’이라 불리는 보석.
죄악감을 필두로 하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격렬하게 부딪히는 감정의 파도와 함께 박사의 마음속을 쓸어냈다. 지금 그와 스카디에게 남겨진 건 그간 쌓여왔던 감정과 정욕의 화합물 뿐.

“이젠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어. 네가 나를, 내가 너를 생각하는 감정은 같은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박사는 상반신을 일으켜 스카디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두 사람의 얼굴의 거리는 순식간에 0으로 수렴했다. 해변가에서의 가벼운 접촉이 아닌, 10분 같은 10초간의 입맞춤.

“박...사...”

숨이 막힌 듯 입술과 떼어짐과 동시에 스카디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그녀가 뭐라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듯, 이윽고 박사는 다시금 그녀의 촉촉한 입술에 다가갔다.

어느새 남녀가 있던 위치는 정반대가 되어 있었다. 스카디는 침대에 누워져 있는 채 박사의 흘러넘치는 감정을 받아들였다. 경험도, 방법도 모른 채 그저 본능에 이끌려, 어설프게나마 혀가 얽히고 섞이는, 그와 동시에 꿀과 설탕이 흐르는 것만 같은 달콤한 키스. 잔잔한 방 안에 선정적이고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몇 분이 지나도록 계속 교차되어온 입술은 떨어지면서 얇은 실타래가 이어졌다. 이윽고 얇은 은빛 선은 끊어지면서 스카디의 쇄골 아래에 한 방울 떨어졌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 반쯤 벗겨진 가운 너머로 보이는 극상의 여체. 특히 가슴 위로 선명하게 보이는 연분홍색의 둥근 윤곽. 한 손으로 다 잡히지 않는 풍만한 볼륨감을 느끼면서, 박사 역시 자신이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한두 개씩 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손목을 살며시, 스카디는 엄지와 검지로 잡으면서 부끄러운 듯 조용히 속삭였다.

“그... 박사...”
“왜?”
“역시 이런 건 처음이다 보니... 그... 상냥하게 부탁해...”

박사는 대답 대신에 미소를 지으며 스카디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자신도 처음이긴 하지만, 기껏 만들어진 무드에 초를 치지 않고 싶은 사심에 나름대로 그가 부린 허세였다.

클릭 소리와 함께 조명이 어두워져 갔다. 깜깜해진 방 안에 있는 건 나체의 남녀. 들려오는 건 사랑을 속삭이는 달콤하면서도 선정적인 음향. 흘러나오는 건 페로몬으로 끈적하게 뒤섞인 농후한 냄새.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밤하늘에 떠서 그들을 축복하듯이 비추는 보름달 뿐이었다.

창밖의 꽃이 진 안개나무는 오늘도 바닷바람이랑 밤의 무도회를 가진다. 다음에 다시 올 흰색 반짝임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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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스토(Presto): 음악 용어로 '매우 빠르게'

● 안개나무의 꽃말은 '희망의 내일'. 스카디편이랑 제일 어울릴 거 같아서 넣어봄.

● 작중 참조: 스카디 2정예화 후 홈 대사

● 이편으로 신뢰도 300 시리즈도 30편이 되었다. 2월부터 시작했는데 벌써 이렇게나 많이 쓸 줄은 몰랐네. 언제나 재밌게 읽어주는 명붕이들 고맙다!!

● 시즌 1 완결이 코앞이네. 뭔가 후련해진다.

● 새로운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