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찔, 자그마한 세모꼴의 신체 부위 두 쌍이 흔들렸다.


그곳을 통해 모종의 기력이 흘러들어가기라도 한 듯, 그 미세한 떨림은 얼굴, 어깨, 팔을 타고 내려가 축 늘어져 있던 신체를 다시 움직였다.


"...으음."


게슴츠레 뜨이는 두 눈.


그 얇은 틈새로 빛을 타고 흘러들어가 망막 너머에 맺히는 상은 느긋하게 자고 있기에 적합한 광경은 아니었다. 적어도 상식을 갖춘 인간이라면 신변이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생각했겠지.


깨진 술병, 바닥을 적신 정체모를 액체, 쏟아지고 뒤섞여버린 음식들, 널부러져 녹아가는 얼음조각 사이로 숨어든 유리파편, 지금도 번져가는 중인 핏빛 액체...


생쥐를 피하듯 소파의 등받이에 걸려 자는 라테라노인, 비싸 보이는 술병의 파편을 그러모으다 쓰러져 자는 호박빛 머리칼, 발밑에서 느껴지는 짐승 특유의 따스하고 물컹한 감촉, 내 허벅지에 쓰러져 있는 아이돌까지.


다시 말해서, 펭귄 로지스틱스의 일상적인 광경이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한다면.


코를 찌르는 술의 알코올 냄새와 설탕덩어리들, 뭉개진 케이크의 단 내음이 섞여버린 대기 속에서도 그 암취는 선명하게 내 머리를 파고들었다.


"윽... 머리가..."


얼마나 마셨지? 취기 때문일까, 숙취 때문일까, 아니면 실내의 공기가 가득 머금은 악취 탓일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묵직한 몸을 일으켰다.


이 가벼운 소녀는 내가 없어도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머리를 조심히 들어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문으로 다가가며 얼핏 시계를 보니, 시침은 꽤나 적은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녀석들 치곤 빨리도 쓰러졌군."


보스가 이번 파티의 주인공을 떡실신시키기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는 그 정체 모를 술만 아니었다면 이지경까지 볼 일은 없었겠지.


바닥에 흩뿌려져 보석처럼 빛나는 유리조각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문에 도달했다.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내가 문에 도달해 느긋하게 잠금을 해제할 때까지 노크 소리를 울리지 않은 것은 나름의 배려이리라.


나는 물 흐르듯 잠금을 해제하고 날 기다리던 여자를 맞이했다.


그리고 은백색의 루포는 늘 그러듯이 미소를 지은 채 기다렸다는 듯 서 있었다.


"왜..."


"왜 찾아왔냐고? 어라아~ 이상하네, 내가 찾는 사람은 그런 멍청한 질문은 안 하는 타입인데. 혹시 그쪽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


"..."


"응~? 저기, 넌 누구야?"


"...용건이나 말해."


"아아, 정말로 머리가 썩어들기라도 한거야? 내가 널 찾아온 이유를 물어보다니, 하하... 이거 실망스러운데."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탄식하듯 팔을 흔들었다.


"..."


"오늘."


"...?"


"[오늘]이니까."


"하아..."


"축하해 주려고 왔지."


검파를 가볍게 두드리며 산뜻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잘도 그런 말을 그렇게까지 유쾌하게 말하는군.


"...일단 말해두겠다만, 이미 6월의 첫 번째 날은 지나갔다."


"아직 해가 안 떴으니까! 아하하!"


...난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에이, 그렇게 화내지 마. 우리 사이에 그런 사소한 인과 따위가 중요하진 않잖아?"


쿡쿡쿡, 작은 웃음소리가 로도스에 흘려지고,


"응? 봐봐, 오늘이 무슨 날이라서, 네 상태가 좋아서, 네 동료들이 전부 쓰러져서, 시간이 적당해서, 날씨가 거칠어서, 내가 하고 싶어서..."


"그만."


"아아, 네 친구들과 놀고 싶어져서는 어때? 음! 그거면 딱 적당한 이유 아닌가?"


"...충분해, 전부 이해했다."


"친구들이 걱정되지도 않나봐? 엄청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그 녀석들은 구태여 내가 신경써야할 녀석들이 아니다."


"흐,그런가? 그런거야?"


"아아...이거 참 부럽네. 응?"


"..."


"오늘만 해도 신나게 놀았지? 이야, 여기까지 파티의 흔적이 느껴진다고... 분명 선물도 잔뜩 받았을거야, 그렇지? 내가 준비한 녀석도 있는데..."


"입 다물어."


"하하하, 너무 무서워서 오금이 다 저리네. 아니, 신나서 그러나? 아무튼, 잘 봐. 내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얼마나 많이..."


난 몸을 움직여 라플란드를 제쳤다.


"계속 떠들고 싶으면 거기 가만히 서서 해라."


"아아, 텍사스! 같이 가야지!"


라플란드는 꺼내들던 작은 주머니를 내팽개치고 나를 따랐다.


저건 아마도...


"하하하, 네가 이렇게 적극적일 줄 알았으면 진작에 왔을텐데. 혹시나 안 올까봐 얼마나 많이 준비했는지 알아?"


"관심 없다."


"하하하, 자!"


라플란드는 검을 뽑아들고 내게 잘 보이도록 들이밀었다.


...평소의 라플란드는 무기 상태에 그렇게까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썰어넘길 적이 누구인가, 수량은 얼마나 많은가 따위이지 장비, 몸의 상태는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아니, 고려할 생각을 못 하는걸까? ...눈앞의 흉기가 적어도 그 생각은 틀렸다는 걸 증명하였다.


"어때? 오늘이 너무 기, 기대되서 도저히 버틸수가 없었거든...!"


"그런가."


"그, 흐흐, 그렇고 말고... 하하하..."


제 풀에 흥분한 라플란드가 검을 검집에 되돌리는 작업에 애를 먹는 동안, 난 뒤돌아 열린 채로 방치된 숙소의 문 속을 들여다보았다.


은은한 주홍빛 조명이 비치는 난리 통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방은 금방이라도 나비 한 마리가 내려앉을듯한 고요함으로 가득해, 평소의 소란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게...


"히히..."


라플란드의 시선이 느껴져, 그만 몸을 돌렸다.


"앞장서."


"아하하, 아아, 아아아... 좋은데... 으으, 너무 좋아서 머리가 아프잖아... 히히히..."


새벽녘의 어둠 속에 잠긴 복도는 조명조차 모두 꺼져, 우중충한 밤하늘 못지않게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멈추었던 발은 의식적으로 바닥으로부터 떼어내, 이내 미련 없이 어둠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뒤늦게 습도가 높은 공기가 체감되었지만,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라플란드가 작게 웃었다.



???



"텍사스, 듣고 있어?"


"물론."ㅡ안 듣고 있다.


라플란드가 자신이 방금까지 어떻게 사람들을 썰어두었는지 자랑하는 동안 귀가 떨어지도록 계속되는 소음을 멈추기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서, 그 놈의 몸과 팔다리를 분리시켰더니, 몸과 머리만 붙어서 엄청 꿈틀거리더라고! 어지간히 아파하길래, 밟아서 편해게 해줬지!"


"...악취미로군."


"하하하! 해석은 자유지! 하지만 장담하건데, 그놈은 지옥에서 나한테 감사하고 있을거야. 한 번 밟아서는 머리가 안 부서져서, 확실하게 으스러질때까지, 몇 번이고 밟아주는 사람은 몇 없다고."


"확실히 로도스에서 사람 머리를 으깨는 취미를 가진 모노마니아는 너 뿐이지."


"나는 사람 머릴 으깨는 게 취미가 아니라,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법을 실천하는 사람일 뿐이야... 각박한 세상이니까, 나같은 놈들도 조금은 있어줘야하지 않겠어?"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널 죽이려 들었을지도 모르는 농담이로군."


"오, 로도스에도 날 죽이려는 자가 있었어? 누구?"


"농담이다."


"에이, 재미없네."


"내가 무슨 농담을 하건 네가 내뱉는 끔찍한 것들보단 재밌겠지."


"하하, 내가 분위기 띄우는 방법을 좀 알아서. 지금만 해도, 이렇게까지 흥분해서 바짝 긴장한 텍사스를 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조용."


"에이, 아닌척하지 마. 내가 일부러 놈들의 몸통에서 뽑은..."


"그게 아니라, 숨을 죽여라."


"으응?"


"누군가 있다."


"...으음, 로도스에 이런 변태들이 한둘이어야지."


"그중에 가장 악질이 내 옆에 있다만."


호탕하게 웃어넘기는 라플란드를 무시하고, 소리쳤다.


"거기! 그만 나와!"


...저 선홍빛은...


"오오, 프로스트리프! 너도 끼고 싶은거야?"


달빛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던 대원 프로스트리프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너처럼 이상한 취미는 없어."


"그럼 왜 우리를 따라..."


"그 역겨운 악취는 사람 신경을 아주 거슬리게 하거든."


"...라플란드."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고, 라플란드는 멋쩍게 웃었다.


"너희들이 뭘 하려던 간에 나와는 관계없지만, 로도스에 피칠갑을 한 채로 돌아다는 녀석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은 없어."


"하하하... 뭐, 거슬렸다면 미안해. 다만..."


"다만?"


"이런 희미한 향기만으로도 그렇게 흥분하다니, 너도 결국엔..."


"시끄러워."


흉악한 할버드가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흔들렸고, 라플란드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만둬."


"..."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고, 숨통이 조여왔다. 두 명은 언제라도 서로를 찌를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찔러넣어 항상 입에 꼬나물던 녀석을 찾았다.


"...쳇, 담배밖에 없군."


그 난리통에 두고 나온 모양이다.


"...지금 뭐 하는거야?"


...프로스트리프는 너무 공격을 막아낼 생각만 하고 있고, 라플란드는 상대방의 몸에 검을 비집어 넣을 틈만 찾고 있으니, 결국 누구도 움직일 수 없다.


라플란드의 악명이 어지간히도 퍼진 모양이군.


결국 내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대충 찔러넣고 불을 붙일 때까지도 두 사람은 대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랜만의 연초가 타들어가며 폐포를 가득 채웠고...


약간의 통증과 함께 연기가 입으로 천천히 빠져나왔다.


"후... 라플란드, 나와 한바탕 벌일 생각이라면 지금 저만한 상대와 싸우겠다는 생각은 접어라."


"..."


"프로스트리프, 약속하지. 네가 염려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다."


"헤헤, 일어날 것 같은데?"


"닥쳐."


"안 그래도 비가 와서 추우니, 냉기는 그만 뿜어줬으면 하는군."


"오싹해서 좋잖아! 날 죽이려면 더 차갑게 해야 할걸?"


"너도 저 녀석과 싸우면 성치 못할거다."


"그거 흥분되는데."


"하아... 그냥 밖에서 다른 놈들이나 더 썰어버리지 그래."


"하하하, 알았어. 오늘은 너랑 어울리려고 왔으니까. 이런 걸로 삐지진 말라고."


라플란드가 검에서 손을 떼어냈다.


"자, 프로스트리프."


"...흠"


프로스트리프는 한동안 우리들의 기색을 살피더니, 결국 긴장을 풀었다.


"후... 제발, 안 그래도 피곤한 일 많으니까, 이상한 놈 데리고 오지 마."


"이 녀석이 멋대로 따라다니는 것 뿐이다."


"하하하. 너무한걸, 나름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말이지."


"...너도 피곤하겠네."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라플란드가 정말로 자신의 흥미만 쫓는 녀석이었다면, 로도스에 이리 오랫동안 남아있을 수도 없었겠지.


"다음에도 그런 꼴로 로도스를 돌아다니면..."


"오, 나한테 덤비게?"


"...아니, 켈시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추방 시킬거야."


"...엑"


"아무리 너라도 로도스의 경계 대상으로 지목된다면 상당히 거슬리겠지. 그 텍사스를 쫓아다니기도 어려워질 테고."


"쳇..."


어려 보이는데도 사람을 능숙하게 다루는군.


"하아... 정말, 조금은 매너를 신경 쓰라고.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미안하군."


"너한테 사과받아도 의미 없어."


두 개의 시선이 한 사람을 찔렀다.


"히히히, 조심해 볼게."


"제발... 새벽만이라도 조용히 노래 좀 듣자."


철컥, 할버드를 어깨에 올려놓고 다시 왔던 길을 되짚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관리된 듯한 무기가 희미한 달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로도스의 기본 교육 체계를 좀 개선시켜달라고 건의라도 해야 하나..."


프로스트리프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좋아. 또 누가 나타나기 전에 서두르는 편이 좋겠군."


...


"...라플란드?"


"응? 아아, 미안."


"...무슨 생각이건 간에, 그만둬."


"아니, 음... 저 녀석, 나한테 뭐라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뭐. 저 녀석도 그리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다고 들었다. 그래도 너와는 달리, 상식이 아주 잘 잡혀있지."


"헤헤헤... 우린 상식을 논할만한 인간이 아니야."


"그럴지도."


"저 녀석도 아마..."


"그만. 우리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아니, 그래도... 너도 느꼈잖아? 미세하긴 했지만, 그런 자극적인 향기는 드물어."


"...가서 데이트라도 신청해 보던가."


"지금 질투하는거야?"


"아니."


"아하하, 귀엽기는. 걱정하지 마. 금방 달아오르게 해 줄 테니까."


...어쩌면 지금 달려들어서 제압한 후 의료팀에 넘기는 편이 싸게 먹힐지도 모르겠군.


"...생각이 바뀌었어. 갑판 위로 가자."


"지금 하늘이 어떤 상태인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그러니까 가자는 거야."


하아... 라플란드의 입꼬리가 귀에 걸리면 보통 성가신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도, 난 라플란드를 조용히 뒤따랐다.


???


갑판 위로 나서자, 거센 장대비가 우릴 반겼다.


꽤나 거리가 있긴 하지만, 천재, 즉 재앙이 하늘을 뒤덮어 일진흑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재앙의 중심지에선 달빛 뿐만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으리라.


"...정말로 여기서 할 건가?"


"여기라면 피를 얼마나 흘리건 금세 씻겨질 거고, 빗방울이 상처를 두드릴 테니 고통은 더 잘 느껴지겠지. 폭풍과 번개를 끌고 오는 적란운도 배경으로 삼을 수 있고."


"최악이군."


"최고의 무대지."


라플란드는 놀이기구를 앞에 둔 아이처럼 빗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생각보다도 더 무겁게, 빗방울이 몸을 두들겼다.


몸에 걸친 옷이 빗물을 빨아들여 몸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재앙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어. 로도스 본함도 곧 이동을 개시할거다."


"되도록이면 재앙 한복판에서 싸우고 싶었는데."


"죽고 싶은 거라면 혼자서 죽어라."


"너나 나나, 재앙 따위로는 죽을 수 없잖아?"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이 입에서 터져나왔다. 정말로 재앙에게 죽는 편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군.


찰팍찰팍 라플란드의 발이 소리나게 물을 튀겨대며 움직이다가, 문뜩 멈춰섰다.


...


어떤 특별한 신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근육이 긴장하고 호흡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자..."


검집에서 흑백의 장검이 매끄럽게 뽑혀나왔고,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음이 울렸다.


난 평소대로, 양 손으로 검을 단단히 붙잡았다.


아니, 평소 이상으로, 팔에 힘을 주었다.


징징거리며 울리는 흉기로 나를 가리키며, 라플란드는 표정을 크게 일그러트렸다.


"텍사스..."


"..."


나는 조용히, 신체의 감각을 날카롭게 일으켰다.


"아아, 기대되서 미칠 지경이야... 난 널 죽일 수 있을까? 넌 날 죽일 수 있을까?"


"흐흐흐... 하하하... 아하하하하..."


"..."


"응? 텍사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날 죽이고 싶어?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라플란드, 너도 변했군."


"...?"


"너는 본디, 입보다 검이 먼저 움직였다."


"..."


눈에 들어오는 광경도, 빗소리도, 천둥 소리도, 로도스 본함의 소음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느껴지는 건 검의 무게, 몸을 휘감은 근육들의 긴장감, 그리고... 대원 라플란드가 아닌, 한 살인자이자 생존자의 적의와 살의, 그리고 희열이다.


그녀도 같은 걸 느끼고 있으리라.


라플란드의 검 끝에서 옅게 울리던 마지막 잔음이 허공으로 소멸되고... 동시에 잿빛 루포도 증발한 것처럼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시각만이 아니다. 공기의 흐름, 빗방울이 갈라지는 소리, 온갖 잡것들이 섞였음에도 몸 속 깊이 새겨진 본능이 잡아내는 피비린내.


나는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흐읍!!!"


내 검이 머리 위로 올라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의 머리를 뭉게버렸을 두 자루의 검이 막혔다.


검과 검이 부딪혀 터지는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광기가 물씬 묻어나는 웃음소리만이 귀에 들어왔다.


"하하하하하!! 좋은데!! 그 얼굴, 옛날 생각 난다고!!!"


내 머리 위에서 내리찍은 라플란드를 힘껏 튕겨내려 했지만, 라플란드는 긴 검을 구렁이처럼 움직여 내 검 하나를 물고 늘어졌다.


"큭...!"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라플란드의 발이 날 걷어찼고, 내 얼굴에 정통으로 처박혔다.


"...!!"


순간적으로 고개를 어느정도 충격을 흘린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지며, 귓가를 걷어찬 라플란드의 발을 잡아 뒤로 내던졌다...!


"하하하하하...!"


라플란드는 상당한 거리를 날아갔지만, 매끄럽게 낙법을 취하는 소리가 들렸고, 난 뇌를 흔들어놓은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검의 손잡이로 구렛나루를 쳤다.


둔탁한 소리와 대비되는 청명한 시야가 회복되었고,


"텍사스!! 아아, 죽이겠어, 피, 피가아, 피가아아하하하!!"


물을 쳐부수는 발소리가 매섭게 다가왔다.


하지만 내 주위엔 조금 더 치명적인 비가 내린다...


"...!!"


구태여 근접전을 고수하려던 라플란드는 제 발로 검의 비의 영향권에 뛰어든 꼴이 되었지만, 오히려 기뻐보이는 표정으로 더욱 깊히 파고들었다.


"...무슨!!"


다급하게 검을 들어 방어하려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빠른 라플란드의 속도에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라플란드 스스로도 마찬가지였는지, 본인의 어마무시한 속도를 거스르는 힘으로 검을 휘두르진 못했다.


그 결과, 내가 소환한 검이 땅에 꼽히기도 전에, 라플란드는 내게 날아와 머리부터 그대로 처박혔다.


"크으읏!!"


거의 팔이 부러질 뻔 했지만, 가까스로 그 질량을 버텨내는데 성공한 나는 그대로 라플란드의 머리를 확실히 쥐어잡고...


무릎으로 라플란드의 얼굴을 올려쳤다.


"아악!"


라플란드의 팔이 허우적거렸지만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거리가 좁혀지면 그런 장검은 써먹기가 힘들겠지만.


"예전보다 더 빨라졌군."


"크하하, 내가 빨라진 걸까? 네가-"


라플란드가 말을 미처 끝맺기 전에 두번째 타격이 그녀의 입을 으스러뜨렸다.


"크으... 후으으, 흐하하하..."


...조금만 더 조용해지면 좋겠군.


단단한 무언가가 부서지는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라플란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웃음소리를 퍼뜨렸다.


"크하악! ...하하ㅎ-ㅏㅡ으웁!!"


...젠장,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군.


무기질적으로 적당한 무게의 적당한 크기를 가진 그것을 으깨던 어느 순간, 내 무릎이 무언가에 막혔다.


"...?!"


라플란드의 얼굴 아래에 붙잡힌 내 무릎에, 시뻘건 액체가 후두둑 떨어졌다.


"히히하하하하... 좋은데, 아주 상쾌해."


검을 던져버린건가...?


일부러 맞고 있었거나, 칼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맞았거나...


뭐, 어느 쪽이 정답인지 모르는 얼간이는 없겠지.


"...큭!"


"나만 이렇게 좋을 순 없겠지?"


라플란드는 이빨을 훤히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치아의 원래 색은 흰색이었던가?


붉은 빛으로 번뜩이는 그 사기질들이 위아래로 크게 벌어져,


그대로 내 무릎에 박혔다.


"...아악!!"


생니가 표피를 뚫고 진피층를 유린당하는 감촉을 느끼는 쪽은 비단 먹잇감만이 아니다.


굶주린 포식자들이 하나의 먹잇감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의 목을 물어뜯는 일은 아주 흔하다.


승자는 모든 걸 먹는다. 패배자의 피와 먹잇감의 고기.


그렇다면, 패배자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굶주림이 아닌 대등한 포식자의 이빨로 죽는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안도? 절망? 곧 같은 꼴을 당할 사냥감에 대한 동정? 패배에 대한 아쉬움? 혹은...


먹잇감의 처지를 직접 느껴보며 자신이 해온 포식이라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릴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런 것 따윈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 할 생각도, 잊어버릴 생각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 여자를...


"-!!"


내 살점이 뜯겨나가 찢겨진 스타킹과 뒤섞여 검붉은 무언가가 되어간다.


머지않아 시뻘건 체조직 속에 파묻혔음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뼈가 드러나겠지.


하지만, 라플란드... 네가 그토록 바라는 보석은 아직 내줄 수 없다.


주홍빛 오리지늄 검이 거꾸로 세워지고, 수직으로 내리꽂혀 검은 코트를 깊이 찔렀다.


"크아앗!!!"


빗물이 거칠게 뿜어져나오는 핏물을 씻어내었지만, 혈액은 마치 그 주인처럼 개의치 않고 섬유를 열심히 내달렸다.


"..."


그녀의 몸통이 관통되었음에도 라플란드는 홀린 듯이 움직임을 멈추고, 본인이 물어뜯은 환부를 내려봤다.


"...아, 아아..."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 달성하기 직전까지 도달하는 것의 차이는 아주 크다.


특히나 목숨이 날아가는 등의 이유로 두번째 기회가 사라진다면 더욱.


"...어쩔 수 없군."


난 양손으로 붙든 검을 움직여-


"끄아아아악!!"


...움직여지지 않는다?


"으으, 크흐흐흐... 하하하하하!!"


"검날을 잡은건가."


"덕분에... 정신이 아주 바짝 차려지는데에에..."


"그래 보인다."


내 상처는 부위가 크지만 깊지는 않다. 반면 라플란드의 상처는 치명상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슬슬 이짓도 끝을 봐야겠군."


"흐, 흐아아... 아아, 좋아... 사랑? 아니, 큭, 하하하..."


"...크윽."


이 녀석... 손이 잘리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칼날을 더 단단히 붙잡는군.


"그거 아나?"


"헤히히, 뭐어?"


"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죽이기 힘들군."


"하하하... 네가 나약해서 그래..."


"그래."


난 칼을 놓음과 동시에 멀쩡한 발로 뛰어올라 라플란드를 걷어찼다.


"실망시켜서 미안하군."


라플란드의 몸이 공중을 거쳐 바닥으로 나동그라졌고, 긴 핏자국이 생겼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


"...후우"


움직이려던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빗물이 엉덩이에 스며들었지만, 다리를 잔뜩 적신 주인모를 피의 열기가 그 차가움을 덮어씌웠다.


"...젠장"


일어서려고 했으나,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땅을 짚어보려 더듬었지만 차가운 금속만이 손에 잡힐 뿐 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주저앉은 채 몇 미터정도 나동그라진 라플란드를 바라보았다.


...


아니, 죽지 않았다. 저런 정도로는 결코 죽지 않고, 죽일 수도 없다.


"...쿨럭,"


거 봐.


"아, 하하하..."


"움직이지 마라.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내가 어떻게든-"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뭐...?


지금, 일어서려는 건가?


그런 내 의문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땅을 내딛는 두 발이 이상하리만치 큰 물소리를 내었다.


"...무슨"


"아아아, 역시 텍사스 넌 최고야...!"


축 늘어졌던 팔이 등 뒤로 숨어들고는,


살이 베이는 소리, 상처가 벌어지는 소리, 피가 뿜어져나오는 소리, 심장의 고동소리...


라플란드의 복부를 관통해있던 내 오리지늄 검이 라플란드의 손에 뽑혀져 나왔다.


"..."


"아하하, 놀랐어? 그 하아안참 이완한 동공으로... 내가 들어갈 수도 있겠다. 헤핫!"


"넌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닐텐데."


"글쎄? 내 생각은..."


철퍽, 고인 빗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야아악간, 다른데..."


다시.


"급소를 빗겨 찔렀다고는 해도, 이건..."


"옛날의 너였으면 움직일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검은 발이 움직인다.


"하지만 넌 변했어."


그 발 주위의 빗물에 새로운 액체가 한없이 섞여들어, 탁한 빛깔을 퍼뜨려나갔다.


"...광석병 때문이군."


"뭐?"


"본래는 찢어져 움직일 수 없을 터인 근섬유의 자리를 광석이 차지해 버린거야."


철퍽, 튀겨진 물방울이 내 눈가에 떨어졌다.


"텍사스..."


"..."


"너였다면 이런 몸이라도 확실히 죽일 수 있으리라 기대했어."


바람구멍에서 피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실패했구나, 타락해 버렸어."


"내가 찾는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하하, 마른 웃음소리가 빗소리를 잡아먹었다.


라플란드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살며시 손을 움직였다.


축축해진 머리카락이 살짝 움직였고, 만족스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텍사스..."


"생일 축하해."


날 어루만지던 손이 머리채를 쥐어잡았고,


"...!"


거창한 소리와 함께 내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부디 마지막까지 날 바라봐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아, 텍사스..."


몇 번 더 충격이 전해지고 나니, 시야가 흐릿해지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힘들어? 조금 도와줄게..."


다리의 환부에 차갑고, 딱딱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


"히히..."


라플란드는 발을 지그시 누르며 살짝 비틀었다.


"ㅡㅡ!!!"


"최고야, 좀 더 보여줘..."


뻘겋게 물든 세상 속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으음, 조금만 더..."


...비명?


아...


내가 지르는 소리구나.


"..."


천천히 라플란드의 손이 움직였다.


오리지늄 검의 미약한 빛이 라플란드의 검은 광석을 돋보이게 했다.


"자, 텍사스..."


머리채가 위로 딸려올라갔고, 내 고개가 들려 목이 노출되었다.


"이제 편하게 해줄게."


"..."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라플란드의 탁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텍사스?"


"..."


"할 거면 빨리 해라."


라플란드의 눈이 날 응시하더니, 이내 미친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


라플란드의 동공이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고, 이내 어느 한 지점에 멈추었다.


"텍사스..."


라플란드의 팔이 축 늘어졌다.


"...하하하, 하흐, 하하하하...."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음을 털어내는 라플란드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야, 텍사스! 하마터면 진짜로 죽일 뻔 했잖아."


라플란드의 무릎이 꺽여 몸 전체가 내려앉았고, 라플란드의 얼굴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응...? 아닌 척 해도 소용없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히히히... 네가 가지고 있는 거, 내 꺼거든."


"..."


"왜 돌려주지 않았어?"


"...돌려줄 수 없었던 걸지도."


라플란드는 웃었지만, 도리어 입고리는 평소보다 조금 내려왔다... 이제야 웃음이라고 부를만한 미소가 되었군.


"네가 날 너무 좋아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헛소리."


"아아아... 맥이 다 빠져버렸어."


라플란드의 얼굴이 내 어깨에 파묻혔다.


미약하게 라플란드의 몸이 떨렸다.


...무거워.


"일어나."


"..."


"라플란드?"


...


...젠장


제시간에 의료 오퍼레이터를 불러 올 수 있을까?


손에 쥐고 있던 라플란드의 하얀 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너무 무거웠다.


온 몸에 달라붙은 빗물을 먹은 옷, 내 위에 죽은 듯이 쓰러진 라플란드의 몸이 너무 무거웠다...


일어나려는 의지와는 반대로, 시야마저 천천히 좁아졌다.


"...라플란드, 일어나."


"라플란드..."


"젠장..."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약속이니 뭐니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다가오는 선홍빛 형체를 마지막으로 인지하며, 내 의식은 풀리듯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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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건 진짜 오랫동안 썼다 휴;;

난 코로나 영향 그다지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ㅋㅋㅋ 아 ㅋㅋ

원래 텍사스 생일에 딱 맞춰서 올리려고 했는데 소란의 법칙에 라댕이 나오는 거 보고 개그 분위기를 좀 빼서 갈아엎느라 날짜를 못 맞췄음


다음은 라텍 순애줘팸주종뷰빔불륜야쓰설 쓰고 싶은데 지금 할 일도 똑디 못해서 쓸 수 있을지는 몰겠다

솔직히 이것도 재밌게 잘 썼는지 모르겠음 ㅅ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