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알 수 없는 푸른 심연. 모든 생명을 상냥하게 안아주는 것 같은 따스한 반짝임.

기억에 없는 곳을, 너와 같이 걸어간다.



[점심시간입니다. 각 대원들은 하던 일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하십시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점심시간입니다. 각 대원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점심시간 알림은 무의식의 저편에 있는 남성을 강제로 끌어냈다. 지끈거리는 머릿속 단말마와 함께 박사는 천천히 감긴 눈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푸른색의 배경과는 달리, 그의 눈앞에 있는 건 표면이 유리로 되어있는 테이블과 그 너머에 있는 소파였다.
얼마만의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깨우다니. 묘하게 짜증이 난 박사는 작은 소리로 혀를 차며 몸을 빙글 돌려 지금 누워 있는 소파가 자신이랑 마주치도록 누웠다. 머리 앞쪽 전체를 감싸는 최고급 쿠션의 푹신함. 그리고 뭔가 익숙한 소금 향이 박사의 코를 맴돌았다.

“일어났어?”

이윽고 귀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박사는 손님이 온 것을 알아채고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머리가 부드러운 무언가에 살짝 부딪히며 다시 드러누웠다. 잠이 덜 깨서 몸을 헛디딘 것인가 싶어 눈을 비비면서, 박사는 점점 선명해지는 시야 너머를 보았다. 부딪힌 걸로 추정되는, 검은색의 벨트로 조여져 강조되고 있는 회색 천으로 감싸인 거대한 남반구. 그리고 그 위에서 비단과도 같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은색 머리카락. 박사의 기억에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스카디...? 이건...?”
“박사가 불편하게 자길래 좀 편하라고...”

소위 말하는 무릎배게. 잠이 깨면서 박사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를 인식했다. 즉 방금 전에 몸을 돌리며 박사가 얼굴을 파묻은 건, 쿠션이 아닌 스카디의 부드럽고 풍만한 상반신. 잠결이었다지만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다시 떠올리니, 박사는 곧바로 자신의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붉어진 그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며, 스카디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기분 좋았어? 자는 내내 얼굴이랑 잠꼬대가 귀엽던데.”

확인사살로 들어오는 그녀의 말은 박사의 양심을 쿡쿡 찔렀다. 하다못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표한 채, 박사는 곧바로 일어나서 구석에 있는 세면대로 달려갔다.

면도를 끝으로 얼굴 단장을 깨끗이 한 걸 확인한 후, 박사는 기지개를 펴며 자신의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처리했을 서류더미가 다시 쌓여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미야가 오후 서류를 미리 가져다 둔 것이라 추측했다. 시에스타에서 돌아오자마자 업무 지옥이라니. 그는 자신의 처지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잔 해. 박사.”

스카디가 건넨 머그컵을 받으며 박사는 창가로 걸어갔다. 표정은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이런 건 아직 서투른 건지, 커피에서 석탄 냄새가 나며 맹물을 마시는 것 같은 밍밍함이 느껴졌다.

“맛 어때?”
“괜찮네.”

허나 박사는 이것 나름대로 좋은 거라며 연신 검은 액체를 홀짝거렸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맑은 하늘과 광활한 평원, 그리고 옆에 사랑스러운 그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에서 고급 브랜드의 풍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박사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스카디는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각자의 손은 상대의 온기를 탐하며 덩굴줄기처럼 얽혀갔다.

“날씨 좋네.”
“그러게. 산책이라도 나가고 싶게 말이야.”
“끝나고 같이 걷는 건 어때? 박사도 운동이 필요할 거 같은데 말이야.”
“사이드로카가 날 갈구는 걸로 봐줘...”

다른 여성 오퍼레이터의 이름이 나온 것에 스카디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 볼을 살짝 부풀렸다. 그런 모습이 귀여운 듯 박사는 실실 웃으며, 사과의 의미로 은색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마음속 순간적인 질투는 입맞춤과 함께 땡볕 아래 얼음처럼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스카디는 비어있는 손으로 슬쩍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며칠 전에 박사랑 나누었던 한 가을밤의 열기는 고스란히 그녀의 몸 안에 남아, 마음속에 진하고 깊은 한 감정을 상기시켰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부디 마지막까지 계속됐으면 하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메멘토(memento). 있는 힘껏 개화하고 있는 이 기분을 매번 감사히 여기며, 스카디는 박사랑 저 너머의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박사.”
“응?”

저주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다가오는 수많은 흉흉한 파도들은 몇 번이고 다가와서 모든 걸 집어삼킬 것을 직감으로 알아채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가 있게 되었다.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힘내자, 둘이서 같이...”
“그래.”

바운티 헌터이자 로도스의 가드 오퍼레이터, 스카디는 오늘도 희망을 품고 미래를 향해 걸어간다. 언제건 옆에서 지탱해 줄 굳건한 동반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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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후기


2월부터 시작해서 어느새 6월 초순이 됐네.  후련하면서도 섭섭한 기분이다.
본디 신뢰도 300 시리즈는 단편으로 낼 생각이었고, 성녀님편도 원래는 3편으로 끝내려 했음. 그런데 호평을 받으면서 의도치 않게 장기연재가 되버렸더라. 그 덕택에 작법서도 찾아보고 조사도 해보며 필력을 늘리는 기회가 된 거 같아.

시즌 2가 언제 될지 모르겠네. 슬슬 취업이나 그런 것도 걱정이 많아질 시기라 당장 못 쓸 듯. 다만 히로인 셋은 정해둔 상태니 되도록 빨리 돌아올게.

마지막으로, 새로운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야!

+) 존댓말 쓰지 않는 게 낫대서 후기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