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죽기 직전, 눈앞에 자신이 살아온 삶이 스쳐지나간다고 한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죽기 직전에 뭘 보게 될까.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잃어버린 기억이라도 다시 볼 수 있는 걸까? 그렇게라도 기억할 수 있다면 차라리…….


하늘이 재앙이라도 쏟아 내리려는 것처럼 무거운 표정으로 황무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호위도 없이 홀로 걷는 남자가 있었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돌아가려는 박사의 등 뒤로 하얀 그림자가 다가와 입을 틀어막고 목에 칼을 겨눴다. 그림자는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누구게.’하고 속삭이고 아주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던진 것처럼 키득거렸다.


왜 대답이 없어? 기억 안 나? 제대로 떠올려봐. 누구에게 원한을 샀는지.”

라플란드.”

후훗, 안녕. 박사. 나인지는 어떻게 알았어?”

하얀 피부. 그리고 피 냄새.”

하하하. 역시 예리하네.”


라플란드는 칼을 거두고 박사의 눈앞으로 나왔다.

라플란드는 검은 코드 한 장만 걸친 채 그녀의 기억처럼 색이 바랜 몸 위에 돋아난 돌덩이를 가리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옷에는 온통 핏자국 튀어있었고 칼날에는 잘라낸 지방들이 엉겨 붙어있다는 점일 것이다.

라플란드는 광석병에 걸린 자신의 몸과 피 묻은 칼을 드러내고 다니는 걸 좋아했다. 다른 사람과 자기 스스로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박사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지 눈썹을 찌푸렸다.


좀 씻는 게 어때. 꼬질아.”

뭘 모르네. 박사. 핏자국은 빠지지 않아. 아무리 씻으려고 해봐야 부질없는 짓이라고.”

의사생활 오래했으니 그 정돈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빼려고 하면 결국 빠지기 마련이라고. 여차하면 내가 핏자국 잘 빼는 법이라도 알려줄까?”

. 필요 없어.”

또 기습?”

, 그렇지. 어때, 기억났어? 누구에게 원한을 샀는지?”

……전혀.”

유감이네.”

유감이야. 그래도 뭔가 죽을만한 짓을 했으니까 노려지는 거겠지.”

또 시체 구경하고 싶지? 따라와.”


라플란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등을 돌려 안내했다. 박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원하는 걸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늘 그랬다.

그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나면 그녀가 멋대로 따라갔고, 그녀가 그를 공격하는 자를 죽이면 그가 멋대로 수습했다. 그와 그녀의 사이에는 말도, 동의도 없었지만 항상 매끄럽게 흘러갔다.


그가 가로질러 가려던 황무지 광장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목이 잘린 중무장병력과 반토막난 캐스터, 갈기갈기 찢긴 덩치 큰 살카즈 용병들. 박사를 죽이러 온 암살자들은 하나같이 실력 있고 위험한 자들로 구성되어있었다. 아마 그가 광장으로 들어섰다면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로 죽게 되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플란드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 중 하나를 걷어차며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내가 직접 만든 밀푀유 맛은 어때?”

……위험했네.”

그래. 조금만 더 했으면 날 이길 뻔했으니까.”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날아오는 차가운 강철이 생각나자 라플란드는 살을 찢고 뼈를 가르는 감각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아 전율이 일었다. 박사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저었다.

다음부턴 이런 무모한 짓 하지 마. 나한테 알리던가, 혼자 도망가던가.”

너한테 알려주면 금새 작전을 짜버릴 것 아니야. 그렇게 압도적으로 이겨서야 재미가 없지. 그리고 내가 도망가면? 네가 싸울 방법이라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그냥 솔직하게 고마워해도 돼.”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말은 신경 쓰지 마.”


박사는 팔을 걷어붙이고 시체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시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아직 숨이 붙어있는지 확인하고 자세를 바로잡아준 뒤 눈을 감겨주었다.

라플란드는 지금껏 그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런 황무지 한가운데에서는 박사 외엔 신경 쓸 게 없었기 때문에 질문을 던졌다.


그 시체들, 왜 치우는 거야? 네가 죽인 것도 아니면서.”

네가 죽였으니까.”

흐응곧 비가 올 거야. 대충 끝내고 그만 돌아가자고.”

이것만 하고. 누가 좀 도와주면 일이 더 빨리 끝날 텐데.”

. 난 그런 쓸데없는 짓에 힘쓰고 싶지 않아.”

그럼 먼저 돌아가던가. 난 아마도 괜찮을 거야.”

라플란드는 그의 말처럼 먼저 돌아가는 게 낮겠다고 생각했지만 잠시라도 그에게서 눈을 떼면 구름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또 왜 그런 기분을 신경 써야 되는 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자리에 앉아 그를 지켜보았다.

박사가 시체를 수습하면서 그의 몸이 라플란드처럼 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그가 죽인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에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짜증이 나서, 라플란드는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일일이 살아있는지 확인할 필요 없다고. 여기 있는 녀석들, 분명 내가 다 죽였으니까.”

시끄러워.”

하지만 사실인걸. 그 녀석들이 질질 짜면서 도망치는 걸 쫓아가서 갈갈이 찢어버렸지.”

……도망치는 사람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잖아.”

한 번 무기에 손을 댄 상대를 죽이는데 이유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 ? 마음에 안 드나봐? 누가 겁쟁이였는지 들려줄까?”


박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플란드의 계속된 도발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동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라플란드는 그 눈이 몹시 짜증나서 등을 돌려 자리를 뜨려는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귓가에 환청이 울려 퍼졌고 몸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나가려는 것처럼 고통이 부풀어 올랐다. 몸 안의 모든 장기가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하는 것 같은, 말로 표현하기 복잡한 고통. 또 시작이었다.

라플란드가 가슴을 부여잡고 이를 가는데 어느 새 박사가 다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 늘 일어나는 그거지.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마저 해.”


라플란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휘청대는 모습은 설득력이 없었는지 박사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라플란드는 그를 뿌리치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결국 그의 어깨에 매달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지면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젠장.”

너무 격렬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말했잖아. 약이라도 좀 먹던가. 이번엔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이라고? , 이런. 놔두고와버렸네.”

그럴 줄 알고 내가 가져왔어.”

……저리 치워.”

얌전히 먹어. 네가 좋아하는 사과맛으로 가져왔으니까.”

치우……라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게. 먹기 싫으면 막아봐.”


라플란드가 한껏 이를 세우며 으르렁거렸지만 박사는 겁먹은 기색 없이 그녀의 입을 강제로 벌려 알약을 집어넣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라플란드는 약을 삼키는 대신 입 밖으로 뱉어버렸다.

라플란드는 박사가 이를 가는 모습을 보며 히죽 웃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 멍청이가…….”


라플란드는 검정색 피를 토하고 축 늘어졌다. 그 때 그녀의 머릿속에 늘 열망하던 소멸의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라플란드가 붙잡고 있던 의지의 끈을 놓아버리자 눈앞이 점차 희미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어두워졌다.


결국 이렇게 되나.’


치료도 거부하고 목숨을 건 싸움을 몇 번이나 반복해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항상 텍사스나 자신에게 원한 가진 녀석에게 죽는 게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쉬지는 않았다. 한 때는 살아갈 이유라는 게 존재했던 것도 같지만 광석병에 걸리고 하루살이 같은 나날을 보내온 그녀에겐 아쉬워할만한 건 남아있지 않았다.

라플란드는 죽을 때 자신의 눈앞에 어떤 것이 떠오를 지 기대했다.

그 때 문득, 이젠 박사를 볼 수 없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어차피 이제 아무 상관도 없게 될 마당에 왜 그가 눈에 밟히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무척, 보고 싶어졌다.

라플란드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의 얼굴을 보기로 하고 눈을 떴을 때 박사의 얼굴은 생각보다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 오히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라플란드가 눈을 뜬 것을 본 박사는 입을 떼고 그녀의 뺨을 때리며 뭐라고 소리 질렀지만 빗소리 때문에 그가 뭐라고 하는 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더니 곧이어 손을 가져다댔다.

시체라도 겁탈하려는 거냐는 농담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순간 그의 손이 가슴을 무지막지하게 내리눌렀다.

아팠다. 라플란드는 고통에 입을 뻐금거렸지만 숨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고통은 신경 쓰지 않고 한 차례, 두 차례 뼈라도 부러트릴 것처럼 거세게 압박했다. 그녀가 그의 손을 떼어내려 하자 그가 다시 입을 맞추고 숨을 불어넣었다. 입 안 가득 산소가 불어넣어지자 그제야 라플란드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살리려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라플란드는 그에 맞서 때리고 할퀴었지만 그녀의 목숨을 억지로 붙들어 넣는 박사의 손은 우르수스 인처럼 억세게 느껴졌다.

박사는 그녀가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 약을 씹더니 입을 맞춰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라플란드는 그를 떼어내기 위해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입 안에 피비린내가 번졌지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라플란드는 속수무책으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약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입 안에 달콤한 사과맛과 짭쪼름한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목구멍 너머로 그 저항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 넘어갈 때마다 라플란드의 몸에 기운과 감각이 돌아왔다.

감각이 반쯤 돌아오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의 몸이 추위에 떨며 온기를 갈구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박사의 몸은 갈구하던 것만큼이나 부드럽고 따뜻해서 라플란드는 저항을 포기하고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마침내 기운이 완전히 돌아왔다고 판단했는지 박사가 입을 떼려하자 라플란드는 그를 붙잡아 다시 입을 맞췄다.

말은 필요 없었다.

박사는 그녀의 옷을 벗겨냈고 라플란드는 그의 옷을 거칠게 찢어버렸다.

박사의 손이 라플란드의 얼굴과 목을 어루만지며 점차 가슴으로 내려가는 동안 라플란드는 그의 등을 할퀴고 입 안을 깨물었다. 라플란드는 아직 입 안을 감도는 사과향을 양념 삼아 굶주린 흡혈귀처럼 그의 피를 게걸스레 빨아들였다.

박사의 물건이 그녀의 속으로 들어오고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이는 동안 쏟아져 내리는 비는 양수를 씻어내는 산파처럼 몸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라플란드는 절대로 씻어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던 핏자국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며 무아지경에 빠졌다. 머릿속에 섬광이 터진 것처럼 눈부시고 강력한 빛으로 뒤덮이며 라플란드의 의식이 툭 끊겨버렸다.

그 뒤로 뭘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서, 어쩌면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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