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링크: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hypergryph&no=231235
···
새하얀 천장과 새하얀 벽.
눈송이 같은 모포가 백설기 같은 침대 위에서 날 억눌렀다.
이 방의 인테리어를 꾸민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정신병자 만들려고 작정한 놈이었으리라.
몽롱한 의식 속에서, 난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텍사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지.
모포를 걷어차고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
이마 한가운데를 지그시 눌려 뒤통수부터 도로 베개로 꼬꾸라졌다.
"···??"
허무하게 침대로 되돌려진 나는 고개를 들어 미묘한 압력의 근원지를 물색했고,
"아직 일어나지 마라. 안정이 필요하다더군."
아직 앳된 느낌을 지우지 못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그 얼굴은 뭐야."
"왜 텍사스가 아니지?"
프로스트리프는 내 짤막한 감상을 듣고 머리에 손을 짚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렇게나 피를 바닥에 퍼부었던 인간이 어떻게 이리도 건강한지 모르겠어."
잠시 동안 전혀 환자로 보이지 않는 중환자가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쿡쿡대며 낮은 웃음소리를 집어삼켰다.
"···아하하, 보기보다 매니악하구나."
프로스트리프의 선홍빛 홍채가 찌푸려진 눈살 속에서 날 노려봤다.
"뭘, 다른 대원들의 뒤를 밟아서 다 죽어가는 몸뚱이에 손대다니, 내가 보증하는데, 그만한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은 드물어."
프로스트리프의 이가 갈리는 소리는 "객관적으로 말이야." 따위의 추임새에 묻혀 라플란드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냥 거기서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는데···"
"하하하, 텍사스가 그런 걸로 죽을 리가 없잖아. 조금 무례한걸?"
"···너. 너 말이야. 그 여자는 그냥 지친 것뿐이었어. 실질적으로 시체였던 몸은 내 눈앞에 있는 이거 하나뿐이거든?"
불그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손에 들려 있는 기다란 할버드가 까딱거리며 날 가리켰다.
"흐으음, 그렇구나... 하긴,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죽다 살아난 놈과 죽은 놈은 차이가 크긴 해."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는데, 그건 누가 봐도 너의 명백한 패배였어."
"뭐? 아하하, 그런 소리가 아니야. 내 말은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였어."
"···너같은 인간의 말을 이해하려는 내가 멍청했네."
"이를테면, 네가 의식이 없는 날 끌고 가는 동안 내 칼이 움직인다던가."
"···그 정도는 알고 있었어. 난 그 정도로 어설프지 않아."
"아니면, 지금, 여기에 있는 게··· 너랑 나 둘뿐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아차린다던가."
"···!"
하하하, 귀엽기는.
"허세 부리지 마. 평소엔 몰라도, 죽다 살아난 그런 몸으로는 날 죽일 수 없어."
고주파와 비슷한 특징적인 소음이 고막을 울리고 한순간에 기온이 냉각되었다.
"하하하...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랬다가 어영부영 넘어갔었지 아마?"
하얀 루포의 상체가 느긋하게 일어났고, 공기를 얼어붙이는 한기의 근원이 라플란드를 위협했다.
하지만 때로는, 직접적인 흉기보다도 상징적인 무언가가 더욱 위협적일 수 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
정작 라플란드는 위협이나 허세 따위의 목적으로 표정을 제어한 적도 없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지만, 그런 사실은 라플란드 본인조차도 몰랐다.
"그때 제대로 붙었다면 말야... 과연 이 자리에 누워있었던 건 누구였을까?"
"···움직이지 마."
거의 착각이라고 여길 만큼 희미했지만, 소리에 미약한 진동이 서려 있었다.
"아니면 혹시, 조금 다른 장소에서 누워있었을까?"
"두 번 말하지 않겠어."
"너, 너 말이야. 거기서 떨고 있는 가련한 아가씨? 말해봐, 과연 너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
저 할버드의 위력은 가공할 수준임에 틀림없지만, 그 정도의 수준이다.
슬프게도 저 여자는 날 죽일 수 없다.
그녀가 내 목을 베어내기 전에 분명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겠지.
아아, 아까워라, 무척이나 안타깝다.
만일 그녀가 로도스에 정착하기 전에 나와 마주쳤다면,
얼빠진 안락함에 다시 더럽혀지기 전에 내 검에 맞섰다면,
저 매혹적인 혈색이 탁해지기 전에 과실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면···
고급지고 희귀한 디저트일수록 최고의 품질을 유지한 상태에서 먹어줘야 하는 법이다.
그림의 떡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나의 심정을 좀 알아주면 좋으련만.
그 아츠도, 한껏 수축한 근육들도 그저 나의 입맛만 다시게 할 뿐이라는 걸 몰라주니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마음 같아서는 그 열렬한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사양하지 않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내가 빈손이라는 것 또한 그 이유들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도―
서리창이 이미 내 목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나는 두 손을 들어 유일한 선택지를 골랐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흔히 '항복'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몸짓이었다.
시퍼런 날이 내 목에 닿기 직전에 가까스로 멈추는 데 성공하였지만, 그것에서 흐르는 냉기가 목덜미를 서늘하게 했다.
"뭘,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나올 줄은 몰랐어. 보기보다 감정적인 성격이네?"
"―그게 무슨!!"
"워, 난 네가 내 검들을 숨겨놓는 바람에 지금은 저항도 못하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다고."
"···"
"뭐··· 네가 무방비한 인간을 썰어 죽이는 숨겨진 취미가 있었다면 나도 별 수는 없지만서도."
선홍빛 구체에 칼날처럼 가늘어진 하얀 눈이 비쳤다.
"널 보고 있으면 눈이 내릴 적의 기억이 떠오른단 말이지."
"···분명히 말하지. 날 네놈과 같은 취급하지 마."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피가 아무리 눈을 적셔도 결국 눈은 얼음일 뿐이니."
"자."
난 프로스트리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프로스트리프는 무기를 거두지 않은 채 그 손을 노려보았다.
"···저기? 내 물건들 좀 돌려주지 않을래? 빈손으로 밖을 노닐다 재수 없이 너 같은 친구들을 만나서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거든."
"좋아, 지금이라면 검을 들어도 멋대로 날뛰진 못하겠지."
난 마침내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해, 거나한 웃음을 터뜨렸다.
"풋, 아하하하하!!"
한참 동안 웃음소리가 방 안을 훑어낸 후에야 프로스트리프는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지?"
"으흐흐, 큭··· 으음, 아니, 흐흐흐··· 아무리 그래도 날 너무 무서워하는 거 아니야?"
"뭐라고?"
"뭐, 내 검들은 압수하는 걸로 마음이 놓인다면야 이해는 하겠지만···"
프로스트리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가 날 제압할 자신감이 있다고 판단했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네. 미안해. 내 장난이 조금 지나쳤어."
정직하게 꾸벅이는 내 머리가 제자리에 되돌아오자, 두 자루의 검이 내 손으로 던져졌다.
"오오!"
두 자루를 한꺼번에 받아내려다 검끼리 부딪혀 튕겨나가, 본의 아니게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검을 쥐었다.
"···너랑 같이 있으면 내 머리만 지끈거리는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뚜벅뚜벅 소리 나게 발에 힘을 주며 방의 문 쪽으로 이동했다.
"후후후, 날 무서워하는 녀석들은 많지만, 어린애를 골려준 것 같아서 썩 기분이 좋지 않은걸."
돌아보지 않은 채로 대답이 돌아왔다.
"무서워한 적 없어."
"하하하, 그래, 그랬겠지. 만약 네가 정말로 날 무서워해야 했다면, 넌 진작에 숨을 거뒀을 테니까."
우뚝. 걸음걸이가 무언가에 막힌 듯 멈췄다.
천천히 날 돌아보는 그녀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주었다.
"···됐다. 너 같은 미치광이를 더 상대하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까워."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라플란드의 두 눈은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입가를 적시려 살짝 삐져나온 혓바닥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범상치 않은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프로스트리프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라플란드는 짜임새 있게 엮인 검의 손잡이들을 만지작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감겼던 눈꺼풀들이 살포시 말려올라가고,
"···참, 텍사스를 깜빡했네."
라플란드의 두 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지면을 딛고 일어섰다.
그녀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 의료 대원이 이를 보면 까무러칠만한 광경이었다.
라플란드는 상기된 감정을 느끼며 빙판을 미끄러지듯 프로스트리프가 사라진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지만
철컥, 미묘하게 둔탁한 소리에 막혀 문고리를 돌리지 못했다.
"···얼어 있잖아."
로도스의 평화와 안녕을 향한 소망이 담겨 있던 얼음은, 문고리와 함께 산산이 박살 나버렸다.
???
슬쩍, 가벼운 무게와 우수한 활동성을 잡으면서도 심플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겸비한 롱부츠가 약간 움직였다.
찌지직, 번들거리는 가죽 부츠가 바닥을 긁어대며 가감 없이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얼핏 정면을 바라보는 모양인 얼굴이었지만 카우투스의 본능 덕인지 그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결국 빨려 들어갈 듯 새하얀 시선에 혼백이 붙들린 듯한 그 소녀는 애처롭도록 불안에 떨었다.
뻣뻣하게 굳은 사지 위로 식은 구슬땀이 송글송글 솟아났고 보석처럼 빛나던 눈은 애써 허공을 바라보며 자신의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무시하였다.
'···뿌리칠 수가 없어!'
아무런 경계심 없이 복도를 돌아다니지 말았어야 했다.
로도스 내부라고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다 못해 걷어 차버린 것이 너무나도 후회되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뒤돌아 섰을 때 발소리를 지울 수 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아니, 이제 와서 그런 일을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텍사스 씨의 뒤를 밟았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리를 건너, 그녀가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는 장소에 들어와, 주인모를 핏자국을 길게 늘어뜨리며 텍사스 씨의 이름을 즐겁게 불렀다.
펭귄 로지스틱스에서 배운 갖가지 기술들을 동원해 도망쳐도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양 주위에서 '짜잔'하고 나타나 버린다.
그런 상대를, 나 혼자서 따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텍사스 씨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직접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나로서는 이 비정상적인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만 할 것이다.
···죄송해요, 텍사스 씨. 저도 최대한 피해보려고 했지만, 이제 다른 수가 없어요···!
"저···"
쫑긋, 루포의 세모난 귀가 흔들리고, 그 소름끼치게 창백한 얼굴이 조금 들렸다.
"응? 나 부른 거야?"
엑시아 씨나 나의 미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웃음기를 마주하자 선명한 불길함이 나를 감싸는 듯했다.
"호, 혹시··· 소라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 거야?"
"으응~?"
―어째서 모르는 일인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거야!
"왜 그런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너에겐 아무런 용건도 없어."
"아니, 그··· 아까부터 계속, 소라를 따라다니는 것 처럼 보여서···"
"아아~ 그거?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거슬렸어?"
겉보기에는 친절하고 상냥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불안감을 부추겼다.
이상하게 조용한 엑시아 뒤에 늘 따라오는 난리법석을 겪으며 기른 감각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신중히 단어를 골라 나열했다.
"아니! 거슬린 건 아니야! 그냥··· 혹시 텍사스 씨를 기다리는 건가 해서."
라플란드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더니 어딘가 찝찝한 듯 대답했다.
"뭐, 비슷하지."
"아, 역시 그렇구나! 텍사스 씨는 엑시아랑 배달하러 나가서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거야!"
"응,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응?"
당황하여 내 표정이 흐트러지는 와중에도 라플란드는 이상하리만치 냉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내가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가 뒷말을 가로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난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알겠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깊이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고― 두 사람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
"···"
···텍사스 씨, 엑시아, 라플란드, 로도스, 목숨, 위험, 시간, 장소, 미래, 위기.
온갖 복잡한 생각이 얽혀 사고의 중심에서 튕겨져 나갔던 이성이 이 상황을 벗어날 실마리를 끄집어냈다.
"저기···"
살짝 쳐졌던 회색 귀가 다시 움찔거렸다.
"응?"
"오지랖일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조금 화났어?"
"···??"
"아, 아니! 아니었다면 미안해! 소라는 아이돌이니까, 아무래도 사람의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감정의 변화에 조금 민감하거든···"
"계속 웃고는 있었지만, 오늘은 뭔가 평소와는 느낌이 다른 것 같았거든··· 내가 뭔가 도울 일이라도 있다면···"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다가 문뜩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흐흐, 이거 신경 쓰이게 했구나. 맞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야."
과장스러운 표정변화 속에서 진의를 읽어내려 노력했지만, 모든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다가도 진실처럼 느껴졌다.
"나 원··· 텍사스를 따라가려고 등방 도구까지 챙겨서 나서는데, 나는 중상자라서 로도스의 내부시설에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중상···? 그렇게 아픈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실제로도 별 문제 없어. 고작 관통상 하나 가지고 원칙이니 뭐니 날 위해서라느니 따분한 소리나 늘어놓으니···"
관통상? 그렇게 큰 상처라면 분명 눈에 뜨일 텐데?
"설마 그 배에 두른 붕대가 그거 때문이야?"
"아, 맞아. 텍사스가 깔끔하게 찔러줬지."
"테, 텍사스 씨가 널 찔렀다고?"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가고, 눈앞의 이상한 여자는 자랑거리가 생긴 아이처럼 덩달아 흥분했다.
"하하하, 아직 하루도 안 된 상처야. 한번 볼래?"
"허리 한복판을 그 장검에 관통당하고도 어떻게 그리 멀쩡하게 다니는 거야?!"
"히히, 텍사스가 기술적으로 찔렀거든. 본인은 숨기려고 하지만, 그 녀석은 어딜 어떻게 찔러야 사람이 죽는지 아주 잘 아니까."
뭔가 들으면 안되는 내용인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을 스쳐지나갔지만, 텍사스 씨에 대한 정보를, 특히 과거사를 알아낼 기회는 정말로 없다.
"텍사스 씨가···?"
그런 내 머릿속을 훤히 내다보는 듯이 라플란드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하하하, 여러가지 일이 있었으니까.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
순식간이었다. 덫에 뛰어든 토끼는 이미 사냥감일 뿐이다. 뛰어난 위장술, 지략, 각력을 지녔더라도 한순간에 모두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렇다 하더라도, 황소는 흔들리는 붉은 천을 거부할 수 없고,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저기, 혹시―"
"아,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분명 몇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을 터인 라플란드의 손이 급작스레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면 보기보다 네 담력이 강한건가?"
억척스레 입을 틀어막혀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가로저으려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촉에 머리털이 곤두섰다.
아주 차갑고, 가늘고, 명확한 감각이었다.
정처없이 방황하던 시선이 라플란드의 텅 빈 검집을 확인했고, 입을 압박하던 차가운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훤히 드러난 내 표정을 소믈리에처럼 음미하며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 지었다.
"···자, 어디까지 했더라?"
새하얀 얼굴이 한없이 상냥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동안에도 검은 의복으로 감싼 몸은 날 옥죄었다.
입에 가득 고인 침을 넘기지도 못한 채 겨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그뿐이었지만 명백한 의사를 읽어들인 라플란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흠, 그래? 아쉽네."
라플란드는 식탁에 앉아 스테이크를 썰 나이프를 집어 드는 것 마냥 가벼운 동작으로 느긋하게 검을 움직였다.
의도적인 압박감이 부단히 날 가로지르는 동안 그것이 칼날이 아닌 칼등이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
그녀는 금속의 냉기가 진하게 남은 목을 살짝 문지르는 나를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텍사스는 이런 거에 좋아 죽거든. 지금쯤이면 내 다리나 팔에 바람구멍이 몇 개 생겼겠지."
텍사스 씨···
새하얗게 물든 머리가 다시 산소를 공급받으며 몇 가지 사실들을 조합해냈다.
"확실히, 텍사스 씨가 정말로 널 싫어했다면 이렇게 늘어지는 모양새는 아니었겠지."
"텍사스 씨는 스스로에게도 둔감한 면이 있으니까, 분명···"
"···어어, 왜 그래?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라플란드는 내 얼굴에 흰자가 사방으로 드러난 눈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잠시간 내 얼굴을 충분히 감상한 뒤에 상체를 원래대로 되돌리며 미약한 신음소리를 늘여뜨렸다.
"···히히, 얼굴은 순진하고 귀엽게 생겼는데 말이지."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아하하··· 뭐, 텍사스 씨의 머릿속은 잘 아니까."
"그거 참 부러운걸. 나한테도 좀 알려줄 수 있을까?"
"으음··· 그건 좀 곤란해. 텍사스 씨와 있었던 일들은 말해주기 힘들거든."
우와··· 라플란드도 입꼬리가 내려갈 때가 있구나.
"···하하하! 이건 정말로 곤란한데! 난 사람 입을 열게 하는 재주는 없거든! 뭐, 비명이나 살려달라는 애원을 내지르게 하는 법은 꽤 잘 알지만···"
으으, 조금만 긴장을 풀면 바로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할거야···
"그러니까 그러지 말고 좀 알려줘. 응?"
라플란드는 여전히 밝은 표정이었지만 수없이 '미소'를 연습해왔던 소라는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도 텍사스 씨의 어엿한 동료다.
비록 눈앞의 라플란드나 엑시아보단 든든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텍사스 씨를 도울 것이다.
이런 압박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엑시아가 실컷 비웃어도 할 말이 없으니까!
"흐으음, 그렇게나 말해주기 싫어?"
"미안하지만 텍사스 씨에게 직접 묻는 편이 빠를거라고 생각해···"
라플란드는 그윽하게 미소지으며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 보이네···"
그러고는 손을 탁 탁 소리나게 털고 "그럼 어쩔 수 없지" 라며 빙그레 웃었다.
"그, 그러면 소라는 연습하러 가는 길이었거든, 이제 슬슬···"
"연습?"
"소라는 매일 아츠를 연습해야 하거든. 엑시아나 텍사스 씨에 뒤쳐지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더 해야지."
"그런가? 내가 보기엔 이미 실력은 충분해 보이는데."
"어, 그래? 라플란드에게 그런 말을 들을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뭘, 나는 감각적으로 알 수 있어. 노력과 등진 삶을 살았던 쓰레기들과 살기 위해서 갖은 수를 다 쓰는 놈들은 척 보면 티가 나거든."
"내가 보기에, 너는 적어도··· 죽기 직전까지 그 간드러진 눈빛을 간직하면서 차갑게 식어가겠지."
어··· 칭찬인 거겠지?
적어도 쿡쿡대는 웃음소리에 비아냥이나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으음, 잘은 모르겠지만 좋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그러자 라플란드는 화려하게 몸을 숙이며 *시라쿠사 인사*로 화답했다.
시라쿠사 식의 인사··· 겠지? 워낙 다양한 제스쳐가 섞여서 확신이 서질 않았다.
"텍사스가 널 어어엄청 신경 쓰는 이유도 조금은 짐작이 가는 것 같기도 한걸."
"텍사스 씨가 날 그렇게나 신경 쓴다고?"
"후후, 그래! 그 녀석이 듣는 음악의 리스트만 봐도 알 수 있지."
그건 솔직히 엄청 기쁘다···
얼굴 근육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헤실 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흉터가 그어진 얼굴이 미묘하게 히죽였다.
"나도 네가 어떻게 죽을지 꼭 좀 보고 싶어졌어."
···어?
"하하하, 농담이야! 그걸 기다릴 바에야 텍사스가 좋아할 만한 선물이나 좀 찾아보는 편이 훨씬 좋겠지."
"···텍사스 씨가 좋아할만한 선물?"
은밀히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해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 부분은 조금 길어질 텐데···"
도발적인 쓴웃음에 공연히 오기가 생겨 나는 눈빛으로 다음을 재촉했다.
"어쩔 수 없네, 그럼 가자."
"가자니? 어딜 가자는 거야?"
"연습실 가는 중이었다며? 여기서 계속 서있는 것도 좋지만 다른 대원들의 핀잔은 귀찮거든. 거기 무기 들고 가도 되지?"
라플란드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괴이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잠깐만! 연습실은 그쪽이···!"
"늦은 사람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하자."
엉뚱한 방향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라플란드를 전력으로 뒤쫓았지만 결국 내가 항상 사용하는 연습실에서 여유롭게 기다리던 그녀에게 노래를 열심히 불러줘야 했다.
???
"텍사스, 오늘 상태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것도."
"하하, 그렇게 나오시겠다면 나도 생각이 다 있지."
"···어제 일이 좀 있었다. 그것 뿐이야."
"뭐어? 일이 있었는데 치사하게 혼자서 낼름 받아먹었단 말이야?"
"사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우린 원래 그러잖아."
"우리 사이에 섭섭하네! 다음에 애플파이 남아도 나 혼자서 다 먹을거야!"
"애플파이는 가끔 먹어야 맛있다."
"그럼 오늘 먹으러 가자! 내가 마침 끝내주는 가게를 찾았는데―"
"내가 기억하기론 복귀하기 직전에도 하나 먹었다만."
"응? 그건 간식이잖아? 식사용 애플파이랑 간식용 애플파이는 별개의 음식이라고!"
"아무튼, 오늘은 사양하겠다. 소라와 저녁 약속이 있어서."
"어, 나도 너랑 밥 먹을려고 그랬는데."
"유감이군."
"그렇게 간단히 날 포기하지 마! 나랑 밥 먹고 싶어하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그럼 그녀석들이랑 먹어라."
"내가 너랑 먹으려고 일부러―"
"여, 텍사스!"
···오늘은 날 찾는 손님들이 많군.
엑시아와 라플란드가 *라테라노 인사*라며 괴기한 인사를 나누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텍사스, 실내에선 금연이거든!"
"나도 안다. 젠장."
"오, 나한테 한 개비 있어."
"필요 없다."
주머니를 뒤지려던 라플란드의 귀가 살짝 처졌다.
"그보다 너는 벌써부터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알고 있다만?"
"헤헤, 내가? 정말로? 어림도 없지."
엑시아가 라플란드의 복부를 감은 붕대를 슬쩍 보더니, 왼 손바닥에 주먹을 살짝 쳤다.
"그럼, 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가지 마라, 빌어먹을.
라플란드의 시선이 날 사로잡은 틈을 타 엑시아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하아···."
라플란드가 킥킥대더니 과장스럽게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그럼, 나도 이만."
허리를 꺾으며 요란하게 인사를 했다.
"쿡쿡,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텍사스면 사족을 못쓰는 소라도 기겁하겠다."
"뭐라고···?"
"잠깐, 그러고 보니 어째서 네가 그 방향에서 나오는 거지?"
"응? 방향?"
"거기엔 제조실과 무역실, 그리고 훈련실밖에 없다."
"음~ 글쎄, 아마도 박사가 내게 무역 업무라도 맡겼던 게 아닐까?"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얼굴이군.
"너한테서 서류 냄새는 안 나는데."
"내가 좀 깔끔하잖아."
"···소라는 어딨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 평소에 있는 곳에 있지 않을까?"
소라는 이 시간이면 항상 훈련실에 틀어박힌다···
피냄새는 나지 않지만, 훈련실의 체취와 유사한 독특한 냄새는 느껴졌다.
"설마 훈련실에서 단련이라도 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내가 기억하기로 최근에 너가 훈련실에 출입했던 기록은 없었는데."
라플란드는 말을 빙빙 돌리며 히히덕거렸다.
"···만에 하나라도, 소라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언제는 동료들을 믿는다더니?"
"네 팔다리를 잘게 씹어서 내장에 처박아 목 너머로 쑤셔 넣어주마."
라플란드는 늘 그러하듯 기쁘게 웃었다.
"하하하하, 이거 참 고마운데. 친절한 경고··· 진심으로 감사하지."
"···"
"그래도 뭐, 내가 너였다면 곧바로 죽여버렸겠지만. 히히."
"···!!"
미처 생각이 머리속에 나타나기도 전에, 내 몸은 라플란드에게 튀어나갔다.
상처 탓인지 라플란드의 반응은 현저히 느렸고, 나는 라플란드가 검을 뽑기 직전에 그녀의 양 팔을 검등으로 후려쳤다.
"크하악!"
이어서 검의 끄트머리로 라플란드의 머리를 내려치고, 그녀의 무릎을 차 꺾었다.
"으윽···"
힘없이 무너지는 라플란드의 뒷목을 발로 누르고 라플란드의 검을 뽑아 입가로 가져갔다.
"···"
"뭐야, 안 죽여? 시시하네~ 아야, 발! 아파!"
난 검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라플란드의 오른손을 잡았다.
"아아아악!!"
···부러졌군.
그러거나 말거나, 난 손을 조금 더 조심스레 입가로 가져갔다.
"···"
"텍사스, 아프다고······ 히히···"
나는 라플란드의 몸에서 내려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들었다.
"아야야야···"
마지막 남은 가능성을 고려해, 라플란드의 입가에 코를 가져다대었다.
"···"
"하하하, 어디 잘~ 확인해 보라고."
라플란드가 입을 크게 벌리더니 그대로 내게 얼굴을 디밀었다.
···축축하고 눅눅한 감촉이 느껴지는 듯 하여, 충동적으로 그걸 물어버렸다.
"아아악!!"
내 행동에 스스로 놀라서, 순식간에 그걸 뱉어냈다.
"아야··· 헤헤헤···"
"너··· 거짓말이었나?"
라플란드의 입에서 혈액이 터져나와 하얀 피부를 붉게 물들였다.
라플란드는 혀를 길게 내빼어 잇자국을 보이더니, 대답 대신 내 얼굴을 짙게 핥았다.
"윽···"
뜨뜨무리하고 기분나쁜 감촉이 비릿한 비린내와 함께 날 희롱했다.
"아 아 아···"
라플란드는 스스로가 상처를 벌리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동작 자체는 느긋한 태도를 끝까지 유지했다.
"으음, 애시당초 난 그런 말은 안했거든."
"헛소리."
"내가 이러는 이유는 네가 더 잘 알잖아? 텍사스는 얼굴에 피를 칠하고, 라플란드는 사지에서 피를 잔뜩 흘려대지. 아하하, 정말 최고야···"
이 미치광이는 분명 가슴속 깊이 우러나는 진심을 지껄이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침을 한 번 내뱉고 라플란드를 업어들었다.
"아아아아아악!! 살살해! 살살!"
"엄살 부리지 마라."
"아야야, 어쩌려고?"
"외출 금지령을 어긴 환자를 다시 의료실에 구금한다."
"나 외출 금지령은 지켰거든?"
"헛소리. 외출 금지령은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제한하는 명령이다."
"뭐? 로도스 밖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네에···"
"다시 들어가면 편히 쉴 수 있도록 침상에 구속시켜 주마."
"그거 참 재밌겠네."
···
"이번에야 말로 분명 죽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요란스러운 동료들도 나름 익숙해져서 말이다."
"지금 나보고 동료라고 한 거야?"
"닥쳐"
"하하하! 이거야 원, 나도 보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 들어봐, 소라가 나한테 들려준 노래인데 말이야···"
"제발 그 주둥이 좀 다물어라."
"??~ ???~"
젠장, 이 녀석을 들고 있어서 귀를 틀어막을 수도 없군.
난 미련없이 라플란드를 내던졌다.
피투성이 루포가 힘없이 꼬꾸라지며 끔찍한 노랫소리 대신 신음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신경을 긁어대는 웃음소리로 변모했다.
그대로 내버려 두고 소라에게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런 상태로 만들고 방치했다간 목숨이 위험할 것이다.
고장 난 것처럼 웃기만 하는 라플란드를 억지로 다시 주워들어 들처메었다.
···라플란드는 이후 2번 정도 바닥에 내팽개쳐진 후에야 의료실에 감금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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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사람 많은 시간대 맞냐
재밌게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