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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가며 계절은 바뀌어간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매미들의 합창은 사라지고 초원의 나무들은 눈이 오기 전의 마지막 치장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조차 저리 시시각각 변하는데 사람이라고 변치 않겠는가. 1달 정도의 시간 동안, 여러 변화가 이곳 로도스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대원들이 입사했다든지, 로도스의 모든 비행선이 용문에서의 정비를 마치고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든지. 그 외에도 꽤나 있지만, 역시 눈에 제일 띄는 변화를 보인 건 블루포이즌일 것이다.
한 명, 두 명, 시나브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녀를 향한 편견의 씨앗은 점차 사라져갔다. 서로 대화하고 악수하며, 혹은 포옹하면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공포감의 소문은 에필로그를 맞이해갔다.

외로움에 떨고 있던 ‘독극물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서, 살짝 뒤늦은 청춘을 구가하고 있는 한 작은 파티시에였다.

이걸 동쪽지방 격언으로 뭐라고 하던 거 같던데... 모르겠다. 아무튼 좋게 됐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겠어?



“그래서, 블루포이즌 양?”
“네, 박사님.”
“뭐하고 있는 거죠?”

30cm나 되려나. 나와 이 처자의 간격이. 너무 가까워서 그녀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선명하게 보일 수준이었으며, 호수를 연상시키는 것만 같은 소녀의 투명한 눈동자는 수염이 자란 내 얼굴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 은은하게 느껴지는 향수의 기운은 덤이다.

“박사님을 보고 있었습니다만?”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밤 10시. 언제나 산처럼 쌓이는 서류 처리를 어느 정도 처리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잠시 소파에 누워 쪽잠을 자고 있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서 어찌어찌 눈을 떠보니 블루포이즌의 얼굴이 보였다.
흐릿했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와서 보아하니 소파의 등받이 부분에 몸을 걸치면서 날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장난기 넘치는 대원들에 익숙해져서 큰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간 이 소녀의 얼굴에 박치기를 할 뻔했다.

“왜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 거야? 내가 놀라서 일어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을 빗으면서, 벗어뒀던 와이셔츠를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은 건지 블루포이즌은 내 옆으로 걸어오더니, 그대로 살며시 소파에 앉았다.

“박사님의 자는 얼굴이 귀여워서 무심코 가까이 가버렸네요.”
“나이 수두룩한 아저씨의 얼굴을 봐서 뭐가 좋다고.”

뭔가 낯부끄러운 말을 들으니 좀 쑥스러워져서, 무심코 뺨을 긁적였다. 어째 요즘 따라 이 녀석이 말하는 뉘앙스가 참 듣기 미묘해진단 말이지.
갈 곳을 잃던 내 시선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블루포이즌이 들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보따리에 고정되었다.

“암튼, 이 시간에 왔다는 건, 다른 디저트를 만들었다는 거려나?”
“네. 디저트라고 하긴 애매하지만요.”

블루포이즌은 손을 뻗어 천천히 보따리의 매듭을 풀었다. 이윽고 스르륵하며 천이 풀리자, 그 안에는 황색 액체가 들어가 있는 밀폐된 유리병이랑 작은 잔 하나가 보였다.

“이건...?”
“두견주랍니다. 청주(淸酒)에 진달래를 담궈 만든 술이죠. 한 달 전에 만들어둔 건데, 숙성이 될 시기가 되어서 가져와봤답니다.”

역시나인가. 생각해보니 동쪽 지방에선 약초나 식물을 식용 액체에 집어넣어 숙성시켜 약재로 쓴다는 말을 들은 거 같다. 꽃을 넣은 술이라... 살면서 마신 술이 편의점 캔맥주 외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보니 꽤나 생소한 느낌이다.
블루포이즌은 뚜껑을 염과 동시에 술잔에 술을 천천히 채워 넣었다. 액체가 흐르는 소리와 함께 동시에 은은하게 새콤한 향이 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받으시지요.”
“고마워.”

블루포이즌이 건넨 술잔을 받아서 조심스레 한 모금 들이켰다. 이윽고, 꽤나 기분 좋은 달달한 풍미가 목 너머로 꿀꺽하고 들어갔다. 도수가 좀 있는 편인지, 혀에서 식도까지 화끈, 이라는 두 글자가 떠오르는 것 같을 열기의 흔적이 느껴졌다.

“한 잔 더 받으시겠습니까?”
“오, 부탁할게.”

풍류라고 하던가. 목 너머로 넘어가는 술 한 모금과 함께, 창밖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밤하늘과 밝은 보름달이 문득 눈에 밟혔다. 뭔가 감성에 젖어 시라도 써야 될 거 같지만, 아쉽게도 문학적 소양이 전혀 없는 이과계 사람에겐 무리일 듯싶다.

그래도 나름대로 폼 좀 잡겠답시고, 창가로 걸어가 의자에 앉아서, 밖의 풍경을 안주 삼아서 다시금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달빛 아래로 은은하게 비치는 초원을 바라보며 마시니, 뭔가 색다른 풍미가 살아나는 거 같았다.

한 모금, 또다시 한 모금. 잔업을 처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잠시 뒤로 한 채, 잠시간의 유흥에 빠져 들어갔다.



새근새근 콧소리가 의자에서 들려왔습니다. 비어있는 술잔을 한 손에 쥐신 채, 박사님께서는 어느새 잠들어버리셨습니다. 두견주의 도수가 비교적으로 높은 것도 있겠습니다마는, 그동안의 피로가 제일 큰 영향을 끼쳤겠지요.

조심히 술잔을 빼낸 다음에 소파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박사님을 덮어드렸습니다. 날씨가 점점 선선해지면서 면역력이 약해질 시기인데, 혹여라도 감기에 걸리시면 안 되니까요.

술잔과 술병을 정리하고 남아 있는 서류 정리도 끝마쳤습니다. 다행히 분류 작업만 남았던지라 큰 어려움 없이 처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시 의자로 다가가서 주무시고 계시는 박사님을 바라봤습니다. 평소의 늠름하고 멋있으신 모습과는 다른, 평온한 듯이 눈 감고 계시는 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두근거리는 제 심장박동을 무시할 정도로 무언가에 홀리듯이 바라보게 만듭니다. 보면 볼수록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지게 만들고, 더 다가갈수록 무심코 제 앞에 있는 이분을 어루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릅니다.

박사님. 친애하는 박사님. 당신은 상냥하면서도 짓궂습니다. 당신을 바라볼수록 제가 점점 욕심쟁이가 되어가요. 박사님의 손을 잡고 싶어요. 박사님이 절 더욱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박사님이 제일 소중히 하는 사람이 저였으면 좋겠어요.

알아요. 박사님께선 로도스의 지도자이시고 누구에게나 상냥하시다는 걸. 어쩌면 저에게 베푸신 친절도 그 ‘평범한 친절’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걸.

상관없습니다. 진달래의 꽃말처럼, 전 지금 매일매일이 박사님을 보는 것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계속 천천히 다가가면 언젠가는, 박사님이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실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세상에 불가능한 건 없다는 걸 알려준 건, 다름아닌 박사님이니까요.

“그러니, 이 정도는 용서해 주실 수 있겠죠...?”

살며시 박사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매우 짧지만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충동적으로 일으킨 행동에 대한 반작용인지 얼굴이 화끈거리며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려서, 황급히 보따리를 들고 문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박사님의 주무시는 모습을 잠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박사님. 부디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날도 계속. 그 상냥한 모습으로 제 옆에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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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달래의 꽃말은 '사랑의 기쁨'. 식용이 가능한 분홍색 꽃인데 독초임. 그만큼 청독이랑 어울리는 꽃이라 생각해서 넣어봄.

@ 청독이편 끗. 이 다음이 에이야긴 한데, 필자가 좀 바쁜지라 당장 장편을 쓰는 건 힘들 거 같음. 한동안은 그림이나 단편으로 종종 글 올릴게 ㅇㅇ 끝까지 봐준 핲붕이들에게 언제나 감사하고 있음. 덕분에 계속 글을 쓸 수가 있는 거 같아.

@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