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냐! 난 조금 긁힌 거다! 놔라! 나는 가지 않으니까!”


“그러시겠지, 그래도 약속한 게 있어서 그건 무리라고?”


그녀가 아끼는 강철 건틀릿에 흠이 생기는 걸 조금 질린 눈으로 보다가도, 에프이터는 금방 넉살좋은 웃음을 걸쳤다. 플린트가 퍼퓨머, 수수로, 안셀, 폴리닉, 그리고 히비스커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료 오퍼레이터의 속을 썩여가면서 제 몸을 축내는 일이라면 요즘 로도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평소 망설임 없이 싸움터에 뛰어들면서도 제 몸 간수는 잘 하는 에프이터의 입장에서 의료실은 그녀와 제법 거리가 있는 공간이었기에, 가비알의 의료실을 한 번에 찾아내기란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여전히 버둥대며 건틀릿의 금속 외피를 조금이라도 뜯어내고파하는 플린트를 두고, 에프이터는 맞은편의 오퍼레이터가 지나갈 수 있게 몸을 틀어주며 씩 웃었다.


“설마 그 가비알에게 당하고도 계속 같은 짓을 할 만큼 대범한 녀석이 있을 줄은.”


“그윽……그 정도로 나는 굴하지 않아.”


“정말 활기 넘치는 후배가 생겨버렸는걸……너무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돼?”


“누가 네 후배냐!”


지금의 모습이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음을 알면서도 플린트는 눈을 부라렸다.


“애초에 너와 나는 초면이야!”


“흐흠, 주먹, 발차기, 그리고 연기에 관해서는 모두 내 후배인 법!”


“뭐? 넌 강한가?”


말로 대답하는 대신 자연스레 몇몇 형을 취해가며 걸음을 내딛자 옅은 벽안에 서린 감정이 짜증에서 호기심으로 색을 바꿨다. 철의육합은 다른 종족이나 유파의 무술가가 보기에 화려한 동작이 많다. 플린트는 호승심이 끓은 모양이었다.


“한 번 붙지.”


“물-론 충분히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정말이냐! 그럼…….”


“근데 지금은 말구.”


자동문 옆에 가비알의 명패가 붙어있는 걸 제대로 확인한 뒤, 에프이터는 눈에 띄게 초조해하는 플린트를 무시하며 인식기에 ID카드를 가져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문이 잠겼는지 열리지 않는다. 이 의료실의 주인이 파견 작전이나 인프라 관리에 동원되지 않았단 걸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에프이터에게 있어서는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엥?”


“후후, 뭐야. 부재중인 것 같은데. 이 참에 훈련실이라도 같이 쓰는게 어때.”


“너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니?”


에프이터는 맨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자신도 모르게 건틀릿으로 문을 두드려서 기물을 파손한 적이 몇 번 있기 때문에 이럴 때는 조금 신경을 써서 몸을 움직여야 한다. 문 너머에서 뭔가 인기척,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린 뒤 익숙한 목소리가 미묘하게 낯선 다급함과 함께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뭐야, 누구야?”


“선생, 나야! 다른 친구들이 말하길 말썽쟁이를 선생한테 좀 데려다 달라던데?”


“……하아. 잠깐만.”


한기 서린 문장과 달리 의료실의 문은 에프이터의 예상보다 오랜, 그러나 플린트의 바람보다 짧은 시간이 지나서야 열렸다. 언제나와 같이 초목의 깊은 녹색을 머리카락으로 흘러내리며 모습을 드러낸 가비알이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훔치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아무 잘못도 없는 에프이터마저 주춤하게 만드는 시선이다. 질량을 가진 눈빛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함이리라. 그러나 그녀가 평소의 예리한 미소를 다시 걸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비알이 말했다.


“미안, 합법적이고……앞으로 우리의 작전에 영향을 미치는……연구를 하고 있었거든.”


“뭐 그렇구나. 선생이 미안할 게 뭐가 있겠어? 우리가 더 미안한 걸.”


이럴 때 ‘무슨 연구를 하기에 양말도 안 신은 데다가 신발도 꺾어 신은 거야?’ 라거나, ‘어떤 영향을 미치는 연구라 몸에서 그렇게 흥분한 티가 나는 거야?’ 따위에 대해선 묻지 않는 게 어른인 법이다. 에프이터는 플린트 이전 로도스의 신입으로 들어왔던 아다크리스에 대해 떠올리며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빨리 자리를 피해주는 게 좋겠다. 뭐 방정맞은 후배는 따끔한 맛을 좀 보는 편이 좋겠지만. 건틀릿의 힘을 풀자 바닥에 착지한 플린트가 원념 어린 눈으로 에프이터를 바라 보았다.


“다음에 꼭 복수하겠어.”


“으음~그……다음이 있다면…….”


“무슨 소리냐?”


“이런 소리겠지?”


달칵 닫히는 문틈 사이로 에프이터는 가비알에게 사과의 의미를 담아 눈인사를 건넸다. 뭐 전해질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가비알과 어쩌면 다른 아다크리스 사이에 홀로 남겨진 플린트에 대해서는 ‘괜찮은 걸까?’, ‘뭐 괜찮겠지? 죽이기야 하겠어?’, ‘아! 오늘 오후 제조소 로테이션 나던가!?’의 흐름으로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치워버린 뒤, 에프이터는 잰걸음으로 인프라를 향했다.


.


“젠장할, 저 녀석……다음에…….”


복수할 테다, 까지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플린트는 몸을 움츠렸다. 에프이터가 있어서 그나마 예의상 갖추고 있던 상냥함을 내려놓은 가비알의 그 눈빛, 지적생명체가 바퀴벌레를 향해 보내는 눈빛이라 해도 이보다는 큰 자애를 품고 있으리라.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생명을 내려보는 듯한 모습에 플린트는 크게 위축되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렇게 많이 안 다쳤다.” 따위 뿐이었다. 불난 집에 장작을 던져넣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잠시 플린트의 변명을 듣던 가비알이 나직하게 말했다.


“할 말은?”


“……나는.”


“할 말은?”


“…….”


“할 말은?”


“그건, 누구야?”


미안하다, 라고 말하려던 플린트를 제친 목소리는 흰 커튼 너머의 침대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잠깐, 토미미! 가만히 있어달라고 했잖아?” 그러나 당황한 가비알에 대해선 아랑곳 않는듯,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를 낸 뒤에 목소리의 주인공은 커튼을 걷고 모습을 드러냈다. 토미미……라고 불린 사람은, 차가운 무채색을 몸에 끼얹은 듯한 생김새였으나, 누가 보더라도 분명히 가비알과 같은 아다크리스의 종족적 특징을 분명히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풀어진 옷매무새를 느린 손길로 다듬었다.


“당신은, 누구죠?”


온화한 말투에서 쏟아지는 듯한 위압감에 눌려 플린트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나, 나는 플린트다.”


“뭐하는 사람?”


“이 사람은 내가 맡은 환자야. 아…….”


귀찮게 됐네. 가비알의 뒷말을 들으며 플린트 역시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만 남겨두고 홀랑 내뺀 에프이터나 자기 방에 있으면서도 문을 잠궈 두었던 가비알, 그리고 침대에서 튀어나온 토미미가 뜻하는 바를 말이다. 파악을 마치자 플린트가 느끼기 시작한 것은 부담감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방해해선 안 될 타이밍에 방해해선 안 될 사람을 방해한 모양이다. 에프이터는 상황을 이용해 자신을 샌드백으로 내줬고 말이다. 토미미의 무감정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플린트는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고 보았다.


“미안하게 됐다.”


“아니에요…….”


토미미는 잠시 고개를 좌우로 까닥였다. 괜히 섬뜩한 몸짓이 아닐 수 없다.


“가비알이 자기 일을 하는 걸, 보고 싶기도 했죠.”


“토미미.”


“사실인걸.”


“하아.”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는가 싶더니, 가비알은 별 말 없이 그녀의 아츠 스태프와 함께 의자 세 개를 끌고 왔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 앉은 토미미에게서의 시선과 함께 기묘한 치료가 시작되었다.


상처를 보여줘, 여긴 조금 긁힌 정도다, 이제 그 말은 못 믿어, 어디까지 들출 셈이냐, 이건 분비액에 당한 거잖아…… 결국 약간의 약물과 오리지니움 아츠, 그리고 적당한 폭력을 동반한 치료를 마치고 나자 몸은 멀쩡하지만 의지는 상처입은 리베리가 남았다.


스태프를 치우는 가비알에게 토미미가 말을 걸었다.


“능숙하네요.”


“당연하지, 나는 프로니까.”


하지만 컵에 담긴 물을 단번에 마시는 모습에서는 약간의 피로가 느껴졌다.


“플린트, 미리 말해두지만 다음에는 정말 어떻게 할 지 모르겠네. 환자를 돌보는 건 내 일이지만 망나니를 돌보고 싶진 않단 것만 알아둬.”


“알겠다…….”


“알았으면 얼른 나가. 볼일이 있으니까.”


“알았다.”


재차 상황을 인식하고 플린트는 벗어두었던 외투를 입으려 했다……토미미의 손에 자신의 외투가 쥐어진 것을 보기 전까지는. 기묘한 침묵 속에서 세 사람의 시선이 오갈 곳을 잃은 듯이 이리저리 섞인 뒤, 가비알이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낸다.


“토미미? 뭐해?”


하지만 그녀는 친구(연인?)의 의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는, 작은 발소리를 내며 자동문으로 다가간다. 토미미가 문을 잠근 뒤 돌아서자 플린트는 사태의 이상을 감지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희고 검은 아다크리스가 여상한 투로 말했다.


“그렇지만, 너무 오래 참았고…….”


무얼 오래 참아?


“가비알 혼자서 감당해 줄 것 같지, 않으니까…….”


뭘 감당한다는 거야? 너는 왜 긍정하려는 거냐?


“자, 잠깐만. 토미미. 둘은 초면이잖아!”


“가비알, 둘이, 꽤 친해보여요.”


그래서 질투도 조금 난다고 하면 좋을까요. 좀 전에 매만졌던 옷매무새를 제 손으로 다시 흐트리기 시작하는 토미미를 보며 플린트는 전에 없던 위기감을 느꼈다. 무심코 주먹을 올리며, 그녀는 말했다.


“나를 여기서 내보내라!”


“몇 시간 정도만 내주세요.”


“그럴 리 있겠냐! 바보가! 널 패고 나가주겠어!”


생명-아니 정조의 위기를 느끼고 깃털을 부풀리는 플린트를 보며 토미미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리베리 대신 자신의 동족이자 절친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준비해 둬요.”


아아, 가비알은 허망한 심정으로 옛 절친과 재회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타종족을 포함한 쓰리섬에 참가하게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아, 이 멍청이가.


당신 상대는 아다크리스 한 부족의 우두머리라고요.



떡치는부분은 상상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