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그곳은 좁은 방의 침실이었다. 우중중하지만 섬세한 직물로 만들어진 이불에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나를 배려해준 듯의 느낌. 그러나 다른 사람이 움직이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아서 잠시 편안함을 만끽하려 했지만.
“여기는 어디?”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당혹감을 느끼며 다급하게 허리를 세웠다.
순간적으로 뇌 속이 녹슨 수레바퀴가 된 것처럼 사고가 순조롭게 돌아가지 않는다. 상황파악을 위해 침대에 내려가려는데 다리에 위화감을 느꼈다. 오른쪽 발목에 쇠사슬 달린 족쇄가 달려있다. 그 쇠사슬은 방 밖까지 뻗어있었고 그 길이는 꽤 길었다.
마음속에서 복잡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 속에서 뭉실 떠올리는 기억은 전쟁터였다. 작전 도중에 탈룰라를 만나고 수많은 리유니온들과 대치했다. 치열한 교전 도중에 건물 위에서 커다란 잔해가 떨어졌고 그것이 내 머리로 다가오는 순간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전투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족쇄로 봐서는 나에겐 좋은 상황은 아니다. 이럴 때는 사고가 돌아가네.
그때 밖에서 발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박사. 깨어났어?”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탈룰라였다. 그녀는 날카롭게 나를 쏘아대곤 내 얼굴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상처는······, 없는 것 같네.”
그녀 특유의 매섭게 바라보는 눈빛은 위축되게 만들지만 그것과 별개로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잡혔구나 하는 당혹감 보다, 그녀의 표정이 진심으로 안도하는 모습이 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전장에서 목격했던 모습과는 딴판이라고 무방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서 의구심을 가질 여유는 없다.
“탈······룰라. 여기는 어디지?”
나의 물음에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여기는 내 별장이야. 하지만 아무도 이 건물의 존재를 모르지만.”
“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로 바싹바싹 쪼여드는, 그리고 불안한 감정이 매몰차게 밀려왔다. 탈룰라는 승자의 입장이기에 저렇게 여유가 넘치지만.
“그런데 날 왜 붙잡아 둔 거야? 협상으로 쓸려고?”
“협상이라······. 재밌는 말을 하네.”
“묻는 말에나 대답해. 탈룰라.”
만약에 내가 인질이라면 날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죽이지는 않겠지······. 그런데.
“협상은 없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확고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압박감을 주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자, 탈룰라는 말을 계속했다.
“로도스는 네가 죽었다고 생각할걸?”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건물 잔해가 떨어지기 전에. 기억 안 나?”
나는 아무 대답 없이 바라만 보았다.
“뭐, 결과적으로 잔해에 깔리기 전에 내가 널 구해준 거야. 워낙 빠르게 잡아온 탓에 로도스는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거짓말.”
“아, 물론 흙먼지로 시야 방해한 덕분에 더더욱 속이기 쉬었어. 그 토끼가 얼마나 울부짖던지.”
“지랄하지마!”
“이상한 마법 같은 걸 쏘는 바람에 얼굴에 상처가 날 뻔했다고. 음,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별 수 없네. 어차피 너에게 확인할 방법은 없으니.”
그녀는 나한테 이 저택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넌지시 뜻을 전달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넘겨줄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나를 여기에 붙잡아 두는 거지? 차라리 빨리 죽이는 게······.”
“죽고 싶어?”
고개를 올려 탈룰라는 바라보니, 그 눈동자에는 전장에서 볼 때랑 똑같이 아무 감정이 비춰지지 않은 살의의 눈빛이었다.
나는 또 다시 침묵했다. 상황만 적절하다면, 침묵을 고수하는 편이 어떤 말보다도 강력한 대답이 되지만 사실은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기에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박사. 몇 년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 하나?”
갑자기 탈룰라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이런 말을 했다.
“네가 너랑 이야기도 나눴나?”
“아아, 맞다. 기억상실이라고 그랬지?”
그녀는 기분이 상했는지 잠시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내가 너에게 구혼하고, 너는 거절했던 거.”
뭐?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지.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해. 슬슬 결혼해도 될 때가 아닌가 싶어.”
무엇을 말하는 건지 머리가 못 따라간다. 그러니깐. 결, 뭐?
“이 별장도. 네가 실종되기 전에. 정확히 말하면 로도스로 다시 합류하기 전에 짓기 시작한 건물이거든. 박사를 갖게 된다면 결혼하고, 여기에 살고 이제 어디에도 못 가게 할 거라고 결심했어.”
나의 의사는 전혀 필요 없는 모양이다. 이 자식이 농담하는 건지 생각했지만 그럴 여자는 아니다. 이건 진짜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나는 너의 동료들을 죽인 원수야.”
직접 칼 끌을 맞춘 건 아니지만 나의 지휘로 인해 수많은 리유니온들과 메피스토를 죽였다. 그 일을 잊지는 않을 텐데.
“그래. 확실히 나는 네가 미워.”
탈룰라는 나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쓰러뜨렸다. “그런데 말이야.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 녀석들은 죽어도 신경 안 써. 단지 네가 날 벗어나려하고 배재하려는 행동이 가증스럽지만 한편으론 동경하는 부분도 있어. 결국은 왜곡된 사랑이겠지.”
탈룰라는 침대에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면서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내 옷소매를 붙잡더니 셔츠를 벗겼다.
“무, 무엇을 할 생각이야.”
불안한 생각이 든다.
“부부가 침대에서 할 행동이라면 무엇이지? 아아, 결혼은 안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부 아니겠어?”
멋대로 말하지 말라며 소리치려고 했지만 갑자기 그녀가 입술을 겹쳤다. 입에 삽입된 혀가 입안을 유린하듯 빨아들였다. 긴 세월동안 나를 갖지 못해 감정을 소화하지 못하고 애증이 한층 더 깊어져만 갔을까. 영문을 모르겠다.
“박사······.”
탈룰라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괴롭힌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다정했다. 부드러운 저음이 내 귓가를 간질이며 천천히, 착실하게 침투했다.
멈추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그녀의 혀가 말을 삼키고 말았다. 탈룰라는 이루고 싶었던 목표를 달성했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이란 믿음. 그것이 나에겐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부드럽게 내 배를 슥 문지르며 더듬다가 내 바지로 손을 향했다. 저항하려고 하면 그녀는 힘을 세게 쥐어 내 몸에 멍만 더 생길 뿐이었다. 공포심은 결국 무력감으로 변했고 나는 그녀와 원치 않은 쾌락을 누렸다.
◇◇◇◇◇
몇 번이나 반복된 행위에 의해 내 몸은 의사와 상관없이 흥분이 갔고 농락당하며 그녀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다.
“으, 읏.”
가슴의 젖을 손으로 자극하면서 그녀의 다리 사이가 젖은 것을 느끼고 그 액을 정성껏 핥았다. 이제는 그녀가 내 품에 없으면 안 될 몸.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무릎과 허벅지로 입술을 옮겼다. 꿀 같은 신음을 내뱉자 젖은 그곳에다가 손가락 하나를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뭐야. 미끈미끈하네. 한 개 더 집어넣어도 괜찮겠네.”
바로 두 개의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휘저었다. 내가 부드럽게 애무하자 탈룰라는 전류가 흐르는 듯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자, 잠깐만.”
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기쁨과 쾌감에서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온몸에 전율을 느낄 때 내뱉은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랑합니다. 나의 남편.”
◇◇◇◇◇
‘재앙’은 인류에게 절망을 안겨주었지만, 인류는 그 속에서 ‘오리지늄’이라는 희망을 찾아냈다. 그렇게 오리지늄 광석의 대규모 개발은 인류 문명을 현대로 발전시켰으나 그 끝엔 ‘감염’이라는 더 큰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국에선 ‘감염자’의 존재를 부인했지만, 감염 사실이 발각된 자들의 실상은 죽임당하거나 추방당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감염자들은 모든 것을 뒤엎고자 ‘리유니온’이라는 혁명의 물결에 가담했고 결국 승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리유니온의 리더인 탈룰라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가 살고 있었다는 저택은 방화에 의한 화재로 전소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고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아무도 행방을 찾을 수 없는 그녀. 진실은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다.
◇◇◇◇◇
작은 마을의 시장에서 한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은 듯 두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박사. 나 저거 먹고 싶어.”
오랜만에 불린 별칭이 반가워서 난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네 박사라고 불리는 것도. 멀리 떨어진 이곳이라면 괜찮겠네. 탈룰라.”
화목한 부부의 모습.
역사서엔 그 어디에도 기록이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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