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기억을 모조리 잃었다고 가정하지.”

 

그래서?”

 

집 주소도 친구의 이름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지.”

 

동문반복인데.”

 

하지만 그 사람은 빅토리아식 요리법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가정하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사람이 빅토리아 요리를 끔찍하게 잘 만드는 요리사였나 보네. 그 요리법이 손에 익어서 집 주소보다 익숙했다던지.”

 

그럼 나는?”

 

투구 안에서 박사의 눈이 클로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클로저는 모른척 시선을 피했다.

 

글쎄. 슬슬 감 잡히지 않아? 집 주소보다 전쟁이 익숙한 장군님이었다던가? 아니면 냉혹한 전쟁 병기였다거나?”

 

아니.”

 

그럼 뭔데? 의학적인 소견을 들이대도 난 몰라. 와파린이나 켈시 같은 의사가 아니니까.”

 

그게 아냐. 기억을 모조리 잃었다고 했잖아.”

 

그게 어쨌는데?”

 

집 주소도 모르는 사람이 전쟁에 대한 기억만 남아 있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러면? 뭔데?”

 

기억을 주입당한 거지. 전쟁에 관한 것만.”

 

클로저의 얼굴이 굳어졌다. 박사의 투구 안쪽에서 무거운 정적의 공기가 흘러나와 삽시간에 방 안을 채웠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것은 박사 자신이었다.

 

막 이래.”

 

풋 웃는 박사를 보며 클로저는 한숨을 쉬었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린 아미야한테 하지 마.”

 

?”

 

몰라서 물어? 농담인 줄도 모르고 안절부절댈 거 아니야.”

 

방금 너처럼 말이지.”

 

몇 달 전까지 로도스의 복도를 헤매던 그 남자가 맞는 것인지. 클로저에게 박사는 어딘가 오싹한 데가 있었다. 그가 줄곧 이야기한 전쟁 기술도 그렇지만, 그는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을 잃었다고는 말하지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클로저는 애써 말을 돌렸다.

 

하여간 곧 아미야가 오니까. 처신 잘하라고.”

 

아미야는 뭐하러?”

 

오늘부터 아미야가 작전 편성 담당관이야. 그리고 지금 네 일정은 오퍼레이터 편성에 자문하는 거고.”

 

난 또. 내 일정이 너랑 노가리 까는 건 줄 알았지.”

 

로도스에서 한가한 건 자랑이 아니야. 그리고 나는 구매팀 결제받으러 온 거고.”

 

내가 왜 농담에 일일이 응수해주고 있는 거지? 클로저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걸터 앉아 있던 집무실 책상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때 문 너머에서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벨도 있고, 그냥 들어오라는 안내문도 있는 마당에 구태여 노크를 하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들어와.”

 

박사의 목소리가 아미야를 문 안으로 들였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클로저 씨도요. 제가 너무 빨리 왔나요?”

 

클로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내 볼일은 다 끝났어. 가서 박사한테 다음 일이나 줘. 저 한가한 녀석한테는 쉴 시간도 주면 안 돼.”

 

그리고 그녀는 쿡쿡 웃으면서 아미야를 스쳐 방을 나갔다.

 

아미야는 뭔가 곤란한 듯 우물주물대며 말했다.

 

. 역시 빨랐나보네요. 박사님도 쉴 시간이 필요하실 텐데. 조금 있다가 다시 올게요.”

 

뭐가 아미야한테 처신 잘해라냐. 클로저. 박사는 입 안에 굴러다니는 불평을 삼키고 손짓으로 아미야를 불렀다.

 

괜찮아. 저기 소파에 앉아. 가져온 서류부터 봐야겠어.”

 

아미야는 더 사양 않고 집무실 한쪽의 소파에 앉아 탁상에 서류를 늘어놓았다. 박사도 그녀와 마주 앉았다.

 

첫번째는?”

 

. 일단은 이거에요.”

 

아미야가 늘어놓은 서류 묶음 중의 하나를 박사에게 밀어주었다.

 

염국 에스텔시아 농장 안전 관리 임무의 편성 건

 

박사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에스텔시아 추출물은 광석병 억제제의 중요한 원료 중 하나에요. 저희는 염국의 농장에서 30% 이상의 에스텔시아를 수급하고 있어요. 그런데 최근 농장 인근에서 염국의 소수민족 분리주의 단체가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에요. 분리주의 단체가 농장을 습격해서 염국과의 협상 카드로 사용할 가능성에 대해 켈시 선생님이 언급하셨어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침은 뭐지?”

 

당연히 염국과 분리주의 단체의 갈등에 관여할 생각은 없어요. 되도록 원만하게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저희가 손쓸 수 있는 부분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아미야의 표정이 어두웠다.

 

분명히 그녀는 분쟁지역의 의료지원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서 스스로 그 가능성을 지워버렸고, 지금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다.

 

현실적인 답변이야. 확실히 지금까지의 행보로 봐서 염국과 분리주의 단체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하겠지. 우리가 관여하는 것도 염국 측에서는 용납하지 않을 거고.”

 

맞아요. 하지만 분리주의 단체의 무력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요. 저희 측에서 보낼 대원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래서 1차적인 파견 대원은 이렇게 해봤어요.’라고 말하면서 아미야는 박사가 보고 있는 서류의 아래쪽 문단을 가리켰다.

 

로사, 지마 등 우르수스 학생 오퍼레이터들이 눈에 띄었다.

 

좋은 편성이야. 확실히 이 작전 규모에 적합한 대원 중에서는 지마와 로사네 꼬맹이들이 가장 방어에 능하지. 저런 분쟁을 가까이하면서 배우는 것도 있을 거고.”

 

감사합니다. 박사님. 그럼 이대로 진행해도 좋을까요?”

 

박사는 대답하는 대신 서류를 놓고 아미야를 지그시 보았다.

 

박사님?”

 

냉혹한 전쟁 병기’. 클로저는 기억나지 않는 박사의 과거를 그렇게 말했다. 농담처럼 지나가듯이 말했지만, 지금의 로도스에 필요한 건 분명히 전쟁 병기가 맞다. 점점 사상자가 늘어가는 로도스가 기대하는 것은 철저히 상대를 파괴하는 단호함. 그리고 피해를 가중하는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냉담함이다.

 

하지만 언제나 아미야의 표정만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쟁 병기로서의 박사를 원하는 지금의 로도스가,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는 이 현실이 고통스럽다는 듯이.

 

박사는 물었다.

 

장군님은 한가한가?”

 

?”

 

헬라그말이야. 분명히 전선에서 돌아오셨을 텐데.”

 

아미야는 급히 수첩을 꺼네 메모를 확인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 현재 배치 계획은 없으세요. 아자젤의 동료분들을 돌보고 계시는 모양이에요.”

 

좋아. 그럼 그분을 함께 파견하도록 하지. 아자젤의 의료 오퍼레이터들도 함께.”

 

한순간 아미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가 가셨다. 박사도 그녀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지 않았다면 쉽게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여간 표정 숨기는 데는 도가 튼 녀석이다. 해봐야 고작 고등학생 또래의 여자애가 어떻게 살면 이렇게 될 수 있는 건지.

 

아미야는 정색하고 물었다.

 

하지만 그럼 당초보다 부대 규모가 훨씬 늘어날 텐데요. 그러면 예산 차원에서도 문제가…….”

 

대신 우르수스 꼬맹이들과 아자젤 외의 전투 인원은 전부 편성에서 제외해.”

 

? 그럼 유사시 농장 방어에 문제가 생기고 말 거에요.”

 

박사는 아미야의 반론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에프이터와 레이즈를 투입해.”

 

그건 어째서?”

 

분쟁을 중재할 거야.”

 

에프이터, 염국의 우르수스인. 무비스타. 유명인. 감염자. 그리고 소수민족.

 

그녀의 존재는 감염자와 비감염자, 다수와 소수민족의 규격을 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분리주의 단체와의 협상에서 에프이터는 그녀의 정체성만으로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논리적이지는 않지만박사는 그녀가 가진 마음의 힘을 믿었다.

 

그리고 레이즈, 염국의 감찰사이자 수완 좋은 행정가.

 

레이즈와 에프이터 사이의 공통점은 국적뿐만이 아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그녀들의 안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정의감에 대해 박사는 알고 있었다. 그 정의감은 레이즈의 정론에 막대한 설득력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을 레이즈의 가장 큰 무기로 만들었다. 염국과 협상해야만 한다면, 로도스가 앞세워야 하는 것은 당연히 레이즈다.

 

두 사람이 있다면 염국과 분리주의 단체에 당면한 무력 충돌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항구적이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유보시킬 수는 있으리라.

 

지금 염국의 상황은 산발적인 지방의 동란을 일일이 신경쓸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않아. 최근의 재앙에도 대처해야 하고, 우르수스 제국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오히려 이동도시 외의 영토에는 신경 끄고 싶은 게 본심이겠지. 그렇기에 협상은 매우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어.”

 

아미야는 잠자코 박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분리주의 단체. 나는 그들에 대해 잘 모르지만 단 하나는 장담할 수 있어. 그들이 굉장히 열악한 의료환경에 놓여있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야. 아자젤의 의료지원을 대가로 무력충돌을 방지하는 거지.”

 

박사님…….”

 

그렇게 감동하지 마. 세계 평화를 지키자! 뭐 이런 마음으로 세운 계획은 아니니까.”

 

박사는 고개를 젓히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말했다.

 

로도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재산은 의료설비나 돈이 아니라 오퍼레이터야. 난 그들의 목숨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잘 싸우는 게 아니라 싸우지 않는 거지. 나뿐만 아니라 대원들도 그걸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특히 우르수스 꼬맹이들은 말이야.”

 

그리고 아미야도.

 

걔네 또래인 네게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 꼬맹이들은 아직 많이 어려. 특히 지마는 싸움 외의 수단에 대해 배울 기회가 필요하겠지. 로사도 조숙한 만큼 의식과 경험 사이의 간격을 매울 만한 계기가 있어야 했어. 그리고 걔네를 포함한 우르수스 아이들이 가진 마음의 상처도싸움이 아니라 이런 경험으로 치유해야만 하는 거겠지.”

 

제가 그저 을 하는 동안. 박사님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셨군요.”

 

아미야는 미안한 듯 박사에게 묵례했다.

 

박사님께 배우는 건 정말 도움이 되는 것들뿐이네요. 감사합니다. 박사님.”

 

박사는 짐짓 겸손함을 가장하며 웃었다.

 

전혀. 내가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전부 그 자리에서 짜낸 대답에 지나지 않아. 분명히 허황된 부분이 없지 않겠지. 구체적인 사안은 담당 오퍼레이터들이나 레이즈헬라그도 괜찮겠지. 그들과 상담하도록 해.”

 

. 꼭 그렇게 할게요. 박사님.”

 

박사는 소파에 가로로 누워 묵은 숨을 토했다. ‘그럼 한 건 해결인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박사님. 그럼 이번엔 이쪽 서류를 봐주시겠어요?”

 

아미야는 아직 탁상에 놓여있는 서류묶음 중 하나를 박사에게 내밀었다.

 

. 끝난 거 아니었어?”

 

아니요. 박사님. 지금 막 열한 가지 안건 중의 하나를 다 보신 참인데요. 남은 열 가지도 잘 부탁드릴게요. 방금 내신 것 같은 멋진 대안, 기대하고 있어요!”

 

기대하고 있어요!’라니. 뭐냐 그 신경 쓰여요!’ 같은 대사는.

 

나머지는 다음에 하면 안 될까?”

 

안 돼요!”

 

…….”

 

박사는 마지못해 소파에서 일어나 다음 서류로 눈을 가져갔다. 아미야는 공책에 지난 안건의 자문 내용을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저러니 이제 와서 대충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박사는 곤란한 미소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