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비아 방송 네트워크(CBN) 제1사옥 앞


"안녕하세요, 잭 톰슨 씨 가족분 되시지요?"


"네. 제가 모친입니다."


"우선 자리를 옮기시죠. 여기서 얘기하기도 뭐하니까..."



"굳이 사람들 이목을 피할 정도면 뭔가 비밀스러운 얘기가 있는 모양이네요."


"네... 이해가 빠르시네요."


"애가 이런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집에 이상한 편지가 온 것만 해도 한두번이 아니에요."


"잭도 항상 그 문제로 괴로워하곤 했어요. 라인연구소 취재 때는 다섯 번 정도 저한테 그만둬야 하나 물어보기도 했었으니까..."


"네. 제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혼내고는 했죠. 그 아이는 옳은 일을 했어요. 이런 날도 언젠가 올 거라고 그 애도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 걔 성격이 어디서 온 건지 어머님을 직접 뵈니까 알 것 같네요."


"그 아이가 남긴 게 있다고 하셨지요?"


"취재일지와 자료입니다. 체르노보그와 용문의."


"왜 보도를 하지 않고 저에게 넘기는 겁니까?"


"국장실에 전화가 몇 통 오고 가더니 갑자기 기획이 취소됐대요. 늘상 있는 일이죠. 사실 이 자료도 진작에 폐기처리 지시가 떨어졌어요."


"그렇다면 여기 있는 이건..."


"뭐 걸리면 해고 내지 고소겠죠. 상관없습니다. 기사로 내 주지 못한 것도 속이 뒤집히는데 이렇게 모든 게 없던 일로 되어버리면 밤에 잠도 못 잘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오히려 죄송합니다. 이런 것밖에 걔한테 해 준 게 없어요. 더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나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어쨌거나 그 자료는... 잘 간직해 주셨으면 합니다. 언젠가는 빛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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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 체르노보그, 우르수스




체르노보그에 도착한 것은 천재가 도시를 휩쓸고 지나간 나흘 후였다.


운석은 도시를 초토화시켰지만 그 자리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삶은 생활이라기보다는 연명에 가깝다. 리유니온이 도시를 장악한 이후, 피난 행렬에 뒤쳐져 도시에 남겨진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생존을 그들에게 '허가'받으며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광장에는 사람이 없다. 30일 목요일은 원래 체르노보그에서는 일 주일에 두 번 열리는 큰 장날이다. 하지만 지금 거리에는 더 이상 물건이 들어오지 않는 잡화점을 뒤적이러 나온 사람이 두셋씩 보일 뿐이다. 다섯 번의 시도 끝에 한 명의 행인과 짧은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첨부 영상 1]


"...마스크 쓰고 해도 상관없죠?"


"네. 원하신다면 모자이크와 목소리 변조 처리도 해 드리겠습니다."


"꼭 좀 부탁드릴게요."


"날씨가 많이 추운데 왜 어깨까지 드러나는 얇은 옷을 입고 계신가요?"


"여기 결정 보이시죠? 이게 지금 제 신분증이에요. 지금 비감염자가 밖에 나갔다가 쟤네들한테 걸리면 맞아 죽어요."


"리유니온이 일반 시민을 죽이는 일이 잦나요?"


"허, 어제도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길래 봤더니 저 쪽 건너편에서 연기가 이렇게 올라오는 거예요. 아마 가둬놓고 불을 지른 것 같아요. 일상이죠."


"감염자로써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어요. 이 옷 있잖아요, 예전에는 한여름에도 감기걸린 척하고 코트 입고 다녔거든요? 그 때는 이 어깨가 걸리면 목을 매달리거나 수용소 직행이었으니까. 지금은 우리가 걔네를 패 죽이고 있잖아요. 그런 게 인과란 건가? 잘 모르겠어요."


"생활에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어려움이라... 전 오히려 좋아졌지요. 예전에는 밤이면 나다닐 수조차 없었으니까. 지금은 외려 쟤네들이 감염자들에게 급식을 해 주거든요. 훨씬 다리 뻗고 살 만해요. 인원수를 속이고 있는 게 걸릴까봐 조마조마한 거 빼면..."


"인원수를 속인다고요?"


"옆집사람 몫을 받아와야 해서요. 그 사람들은 감염자가 아니라서 먹을 걸 구할 길이 뭐 아예 없어요."


"비감염자를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알려지면 불이익을 받지는 않나요?"


"글쎄 모르겠네요. 린치를 당할 수도 있겠어요. 그 정도로 원한이 깊잖아요. 근데 뭐 할 수 없죠. 그 사람들은 요 바로 1주일 전까지 절 숨겨주고 돌봐줬어요. 그걸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요."


"잘 알겠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안전을 위해 편집해 드릴까요?"


"아뇨 그냥 둬 주세요. 그냥... 비감염자도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 있단 걸 쟤네도 알아야 해요. 그냥 모자이크만 잘 해 주세요."




광장에 밤이 찾아오면 두세명씩 보이던 행인들도 자취를 감추고 20분에 한 번씩 순찰을 도는 리유니온 대원들만이 도시의 어둠을 밝힌다. 그들은 자경단을 자처했다. 감염자 '형제'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고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누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이미 천재가 도시를 폐허로 만든 지 나흘이 지났다. 여기에는 어떤 삶이 남아 있는가?


리유니온 대원들에게 취재 요청을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하지만 내가 감염자 신분임을 알게 된 그들은 모두 우호적인 태도로 나를 대했고, 광장 서부에서 우르수스 군의 잔당과 아직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정보도 전해 주었다. 그들의 충고에 따라 근처에 주차해 둔 차를 더 도시 외곽으로 옮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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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체르노보그, 우르수스 - (1)




[첨부 사진 1 - 체르노보그 중앙 광장]


새벽빛을 받은 광장의 모습은 전날 어스름한 노을빛 아래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기괴한 인상을 선사한다. 어둡고 침울한 색조로 덮여있는 것처럼 보였던 광장은 사실 전부 검게 타 버린 것이었고, 운석에 무너져 뼈대를 드러낸 건물들의 철근과 콘크리트들이 녹아서 굽어진 채로 다시 굳어져 버린 모습은 차라리 전위적인 오브제 작품에 가까웠다. 리유니온 대원들은 이 모든 것을 '탈룰라'가 혼자 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탈룰라'를 입에 담는 그들의 말투는 하나같이 황홀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경건함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진작에 자신들을 뒷골목과 수용소로 내던진 국가를 대신해 자신들을 지켜주고 이끌어 줄 새로운 조국과도 같았다.


'탈룰라'는 한 명의 인간을 가리킨다. 그녀는 감염자이며, 리유니온을 이끌고 있다. 테라 반대편의 컬럼비아에서라도 최근 사흘 동안 한 번이라도 신문을 들춰 본 적이 있다면 그 얼굴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의 햇살을 받아 모습을 드러내는 이 광장의 풍경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정말로 단 한 명의 감염자가 이 정도의 파괴를 할 수 있는가? 차라리 천재 그 자체가 할퀴고 간 상처에 더 가까워 보인다.


광석병은 의심할 여지 없이 천재가 가져오는 가장 비극적인 피해 가운데 하나이다. 오리지늄 결정이 가져오는 격통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사람들을 서로 불신하고 반목하게 만드는 감염성이다. 우리의 문명은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오리지늄이 가져다 주는 선물은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았으면서 그것이 함께 갖고 오는 아픔에는 눈을 돌리고 모른 척했다. 하지만 내가 수업 시간에 앞 사람의 머리로 선생님 얼굴을 가린다고 해서 선생님이 날 보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니다. 대가는 에누리없이 청구서로 날아오는 법이고, 아무리 속출하는 감염자를 가두고 숨기려 애를 써도 이미 책상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차서 서랍이 닫히지 않게 되었다. 광석병과 리유니온과 '탈룰라'는 천재에 매달려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우리 문명의 당연한 귀결인 것처럼 우리 앞에 나타났다.



전날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광장의 서쪽 지구를 향했다. 하지만 이미 낡은 정보였던 모양으로, 거리에 늘어선 건물벽에는 석궁과 아츠와 피의 흔적이 가득했지만 지금 거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얼음 같은 적막과 무언가를 태운 듯한 역한 냄새 뿐이다. 다만 전투의 흔적을 파악하기 위해 들어간 세 번째 건물 안에서 우르수스 군의 생존자를 만날 수 있었고,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사흘 동안 이 거리에서 벌어진 시가전의 실상을 단편적으로 전해들을 수 있었다.



[첨부 영상 2]


"......"


"카메라 켰습니다. 인터뷰 진행해도 될까요?"


"있잖아, 당신 정말 리유니온 아니야? 감염자잖아?"


"네. 전 컬럼비아에서 왔습니다. 기자고요."


"기자가 이런 구급법을 이 정도로 숙지하고 있다고? 아니, 뭐 고맙기는 한데..."


"군 복무 경력이 있어서요. 3년도 못 채우고 뛰쳐나오긴 했지만요."


"이봐, 아무리 기자라 해도 여기에는 오래 안 있는 게 좋아. 보면 알겠지만 여긴 이미 도시도 뭣도 아니야."


"저도 서둘러 끝내고 빠져나갈 생각입니다. 당신은 왜 여기에 계속 머물러 계신 건가요?"


"왜였더라... 여긴 내가 맡은 구역이었어. 그 이상 이유가 필요한가...라고 엊그제까진 생각했었는데.


그저께 점심쯤부터 그 시끄럽던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다 멎었어. 무전이야 진작 나흘 전부터 먹통이고. 다들 내뺐구나~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거지.


늦었지... 모든 게 너무 늦었지. 이제 와서 그냥 도망치기에도 몸이 이 모양이고, 감염자들에게 살려달라고 빌기도 늦었고, 총 같은 걸 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기에도 늦었고."


"총... 저격수신가요?"


"내가 돌았지. 이딴 장난감을 살 돈이면 아직 오리지늄이 퍼지지 않은 땅으로 두 마지기 정도는 살 수 있었어.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어, 엄마 말을..."


"여기... 손수건이요."


"빌어처먹을... 고마워, 진짜 고마워. 그래서 뭔 얘기 하고 있었더라."


"전투가 진행된 개략적인 상황에 대한 얘기였죠."


"전투? 그걸 전투라 할 수 있나? 그냥 그것들이 개떼처럼 몰려왔다가 지나가고 나니까 남은 건 피곤죽밖에 없었다고 기사에 써. 나도 자세히는 몰라. 무전으로 들리는 소리라고는 지원 요청이랑, 뭐가 터지는 소리랑, 대장이 폐하가 어쩌고 염병하는 소리랑, 비명소리밖에 없었어. 큰 도움이 못 될 것 같은데."


"충분합니다. 지금 체르노보그 밖에 있는 우르수스 인민들은 여전히 황제의 군대가 폭도들을 손쉽게 제압한 줄 알고 있어요."


"걔네는 원래 그래.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우리나라 기자들은 당신처럼 성실하지 않아. 뭐 대장이 하던 말이랑 똑같은 소리나 갈겨 놨겠지. 하지만 그게 똑똑한 거야.


나도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말씀하세요."


"당신은 왜 기자를 하는 거야? 그것도 이 위험한 데까지 와서."


"그냥 성미에 맞아서요."


"혹시 있잖아, 나라나 인류를 위해서라든가, 뭐 황제 폐하를 위해서라든가 그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다 집어치우는 게 좋아. 그런 게 제 명을 재촉하는 거야. 여길 봐. 리유니온 애들은 바로 문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폐하는 천리 밖 궁전 안에 있지? 다 쓰잘데기없어."


"그 발언이 보도되면 불경죄로 간주되어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어요. 편집해 드릴까요?"


"참나.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야 그게. 마음대로 해."


"그리고... 컬럼비아에는 황제가 없으니까요."


"하, 그렇네. 그럼 훨씬 낫네."


"그 이외에 뭔가 특이사항은 없을까요?"


"글쎄... 아, 당신 혹시 '아자젤'이라고 들어봤어? 그 영감이 말하는 걸 보면 무슨 구호소 같았는데."


"아뇨, 처음 듣습니다."


"그 방금 다 해져서 당신이 새 걸로 갈아준 붕대 있잖아. 그걸 나한테 갖다 준 할아버지가 있어. 그 아자젤의 비품이라고 하면서. 아마 그 할아버지도 거기 사람일 거야. 붕대 감는 건 참 서투르긴 했지만 아마 맞을 거야."


"한 번 알아 보겠습니다."


"혹시 만나게 되면 정말 고마웠다고 좀 전해줘. 키가 멀대같이 크고 백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사람이 있을 거야. 꼭 좀 전해줘. 지금 이렇게 살아서 당신과 얘기하고 있는 것도 그 사람 덕분이야."


"같이 가셔서 직접 말씀드리시죠.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이봐,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날 도와줬다가 쟤네한테 걸리는 날이면 당신도 같이 죽어. 그냥 조용히 당신 혼자 가. 그 영감이 저 쪽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갔으니까 당신도 그 쪽으로 가서 다시 찾아 봐."


"그러면... 알겠습니다. 여기서 숨어 계세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럼 물이나 좀 갖다 줘. 살아있으면 말야."




컬럼비아에는 황제가 없다. 하지만 우르수스에는 황제가 있다. 그리고 고대 용문에도 황제가 있었다.


더불어 용문에는 이런 속담도 있었다. "황제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모름지기 그의 백성이 먹고사는 문제를 다른 무엇보다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며, 이를 배반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우르수스와 용문, 그리고 컬럼비아는 과연 백성을 하늘처럼 우러러보았는가? 우르수스는 인민들의 눈과 귀를 속이고 그들을 이웃의 시민을 학살하는 전쟁터로 내몰았다. 용문은 그의 시민인 감염자들을 돌볼 책임을 방기하고, 그들을 보이지 않는 빈민가 지구에 몰아넣고 일자리를 빼앗은 채로 복지의 곳간을 걸어 잠갔다. 컬럼비아는 오리지늄이 가져오는 이기에 취해 광석 입자에 오염된 땅과 사람들은 못 본 체하고 매년 수 조 단위의 국가예산을 오리지늄 가공업과 군수업 지원, 아츠와 생명공학 연구에 쏟아부었다.


리유니온은 어제오늘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다. 물론 그들이 일간지 1면을 장식하게 된 것은 닷새 전이 처음이지만 그들은 수 년 전부터 용문, 카시미어, 볼리바르, 빅토리아, 극동 등 전 세계에서 시위를 일으키며 빼앗긴 자신들의 권리를 되돌려 줄 것을 주장했다. 사회학의 권위자들은 그보다 5년도 더 전부터 이미 감염자에 대한 인권유린이 위험 수위에 달했음을 경고해 왔다. 하지만 우리의 오리지늄 문명은 한사코 입에 쓴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았고, 예견된 오늘의 참사를 막지 않았다. 먹을 것을 빼앗긴 백성에게 남은 선택지는 결국 봉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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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체르노보그, 우르수스 - (2)




우르수스 병사가 가르쳐 준 방향을 따라가니 체르노보그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감염자들의 격리 구역으로 사용되었던 지구에 도착했다. 감염자 빈민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폐허 속을 뛰노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닷새 전까지는 해 아래를 걷는 것조차도 그들에게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이었을 텐데, 이 참극이 이 아이들의 꿈을 이루어 준 것을 생각하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이러니에 휩싸이게 된다. 이 전쟁에서 희생자는 대체 누구이고, 또 가해자는 누구일까?



[첨부 영상 3]


"아저씬 누구야?"


"음... 다른 나라에서 왔는데, 길을 몰라서 좀 헤매고 있어."


"어디 가려고?"


"'아자젤'이란 데가 어디 있는지 아니?"


"에~ 아자젤? 거기 부서졌는데?"


"......어쩌다가?"


"어쩌기는 우르수스 군대랑 싸우다가 그랬지. 병원 건물 안에 틀어박힌 새끼들을 잡으려고 리유니온이 건물을 통째로 터뜨렸다고 했어."


"안에서 진료받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헬라그 할아버지가 미리 대피시켰다고 들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헬라그...라 하면 혹시 키 크고 흰 머리가 이렇게 긴 할아버지 얘기하는 거니?"


"맞아! 요 주변에 사는 애들은 다 알 걸? 진료받으러 가면 맨날 과자 주니까 안 아플 때도 맨날 뻥치고 가서 과자 받아오고 그랬는데."


"아자젤은 감염된 사람들에게도 진료를 해 줬나 보네?"


"그야 당연하지, 감염자 진료소인데. 아저씨도 진료받으러 온 거 아니야?"


"아니... 난 헬라그 아저씨랑 얘기를 좀 하러 왔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니?"


"할아버지라면 아자젤이 무너지고 나서 사라진 거 같아. 통 소식을 못 들었어."


"전쟁 때문에... 진료소도 무너지고 할아버지도 사라져서 많이 섭섭하겠네?"


"글쎄? 할아버질 못 만나는 건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리유니온 때문에 저 개새끼들이 다 죽었잖아. 난 좋은데, 아저씨는 안 그래? 감염자잖아?"


"아저씨는... 잘 모르겠네."


"아저씨가 리유니온이 얼마나 쎈지 아직 못 봐서 그래. 이따 해 질 때 저기 수용소 입구로 가 봐. 하루동안 죽인 체르노보그 새끼들을 싹다 모아놓고 그 때 태운단 말야? 진짜 한 무더기야 한 무더기. 개쩔어."


"그래... 그래, 생각나면 가 볼게. 일단은 아자젤이 있었던 위치를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 그래? 나 따라와."




[첨부 사진 2 - 진료소 "아자젤" 폐허]


전 세계를 통틀어 컬럼비아는 감염자의 인권이 가장 보호받고 있는 축에 속하는 나라이다. 하지만 컬럼비아 안에서 감염자가 보편적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누구보다도 의료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임에도 말이다. 공공보건기관은 광석병 감염 방호장비 부족을 이유로 감염자의 출입을 금지했고, 병원 개개의 재량에 맡겨진 사설의료기관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거의 모두가 감염자에게 손을 내밀기를 거부했다. 생존권 보장에 관한 헌법 조항을 들고 법정으로 나온 감염자 단체의 헌법소원이 공공이익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로 기각결정을 받은 것이 재작년 4월의 일이다. 인류애로 똘똘 뭉친 극소수 의료인들의 온정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컬럼비아의 감염자에게 아자젤과 같은 감염자 진료소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감염자 진료소가 같은 감염자의 손에 파괴되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을 것이다. 감염자를 위해 떨치고 일어난 단체가 감염자를 구호하는 시설을 파괴하고 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전쟁의 셈법에 따라 부수적 피해로 처리해야 할까? 그것이 다수의 최대 이익을 좇아 간 컬럼비아 대법원의 판결과 무엇이 다른가? 이 진료소를 세우고 지켜 왔다는 '헬라그'라는 그 사람은 이 폐허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이러니는 점점 깊어지기만 한다.




해질녘이 되기 전에 우르수스 병사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 폐건물을 찾아갔다. 하지만 내가 그 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그 건물에서 나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한 명이 아니고 여섯 명이었다. 다섯 명은 리유니온의 완장을 차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며, 한 명은 점심에 만났던 우르수스 병사의 시신이었다. 리유니온 대원들은 내가 '동포'인 것을 확인하고는 반갑게 웃으면서 함께 들고 있던 시신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단검으로 심하게 난자를 당한 탓에 식별하기 힘들었지만 오른쪽 팔에 새로 갈아서 묶어 준 붕대가 그대로 매여 있었다.


그들은 이 저격수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던 듯 하나같이 매우 고양되어 있었다. 그가 자신들의 '동포'를 열 명이 넘게 사살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자신이 당황한 우르수스 병사가 겨눈 총의 사선에서 벗어나 그에게 접근해서 권총을 겨누어 제압했는지를 장황하게 떠들고 있었다. 왜 그냥 권총으로 죽이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총알을 아끼고 싶었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그들의 이야기는 이어졌지만 부들거리는 다리의 힘이 풀리지 않도록 하얘져 가는 정신을 모두 쏟아야 했던 난 거의 듣지 못했다.



시체를 따라서 도착한 곳은 역시나 감염자 격리 지구 입구였다.


아자젤의 위치를 알려 준 소년은 이 지구를 '수용소'라고 불렀다. 그 표현은 비유가 아니다. 어제 만난 감염자 시민이 말한 '수용소'도 여기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여기는 체르노보그 감염자들의 무덤이었다. 그렇다면 입구에 파여 있는 이 직경 10m 정도의 구덩이는 감염자를 태우기 위해 만든 것일까, 아니면 우르수스 군인들을 위해 닷새 전에 새로 생긴 묫자리일까? 이 전쟁을 시작한 쪽은 누구일까?


누구를 위해 만들었든, 지금 이 안에는 수백 명의 우르수스 군인과 체르노보그 시민들의 시신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리유니온 대원들은 우리가 들고 온 마지막 공물만을 기다린 듯 곧바로 구덩이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겼다. 그제서야 나는 오늘 하루종일 내 코를 괴롭힌 역한 냄새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첨부 영상 4]


"이봐 너, 뭘 찍고 있는 거야?"


"그냥 좀 찍어 놓고 싶어서요."


"당신 기자야?"


"그냥 쪼그만한 데 몇 번 투고해 본 게 전부예요."


"하여튼 카메라 꺼. 허튼 수작 부리지 마."


"알렉스! 그냥 놔 둬."


"왜 그래?"


"지휘관님 명령이다. 그냥 둬."


"지휘관?"


"...그럼 할 수 없지. 순찰돌고 올게. 여기서 불 좀 쫴. 이 새끼 이상한 짓 안 하나 감시도 좀 해주고."


"수고해~"


"......"


"희한하네. 당신 감염자잖아? 그런데도 기자 같은 걸 할 수 있는거야?"


"컬럼비아니까요. 좀 눈칫밥은 먹지만요."


"좋은 데 사네..."


"아까 지휘관이라고 하셨는데... 리유니온 지휘관분이 제 얘기를 하셨다고요?"


"뭐,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보고가 들어간 정도지. 별다른 말은 없었어. 지금 우리한테 당신은 그냥 우리 동포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아니라 지휘관님한테 감사드려. 민간인을 건드렸다는 말이 그 분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내일은 이 구덩이 속에 우리도 같이 들어갈 거야."


"민간인... 방금 제가 봤을 때는 여기에 일반시민들도 같이 들어가 있었는데요."


"그야 그렇지. 원한이란 게 어디 그렇게 말 한 마디로 싹 사라질 수가 있나. 그리고 이 민간인들은 우리 전리품이 아니야. 여기 현지 감염자들이 갖고 온 게 십중팔구겠지."


"리유니온이 아니고요?"


"뭔 소리야? 당연히 리유니온이지. 당신 아직 이해를 못 했네."


"......"


"저기 구덩이에 돌 던지면서 놀고 있는 애들 보이지? 쟤네한테 이 X자 완장을 채우고 마스크를 씌우면 쟤네는 누구지? 리유니온이야. 당신도 똑같아. 원한다면 지금 이 완장만 차면 바로 우리와 한 팀이 될 수도 있어. 가질래?"


"사양할게요..."


"사실 있잖아, 여기에 군인이랑 민간인은 없어. 감염자랑 비감염자가 있는 거겠지. 우리 지휘관님은 참... 좋은 분이야. 존경도 하고 있어. 하지만 이 부분을 받아들이길 좀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 당신도 그래 보여."


"네. 어렵네요."


"헤, 당신 여기 있기에는 너무 사람이 순해. 비감염자가 죽는 걸 볼 때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로도스 같은 놈이란 소리 듣기 십상이야."


"로도스? 로도스 아일랜드도 리유니온과 관계가 있나요?"


"관계고 자시고 닷새 전에 여기 왔었잖아? 아... 그 때 여기 없었으면 모르겠구나. 나도 왜 왔는지는 못 들었는데, 하여튼 여기 와서 깝치다가 탈룰라한테 걸려서 저쪽 광장에서 대판 얻어터졌지. 나도 그 때 거기 있었거든."


"그럼 광장이 모조리 불타버린 것도 그것 때문인가요?"


"그거 맞을거야. 이 구덩이를 들여다봐봐. 뭐가 보여?"


"불과, 살덩이와, 피요."


"그치? 그 때 광장도 이거랑 똑같았다고 생각하면 돼."


"로도스..."


"나는... 들어가서 한 잠 잘란다. 당신도 그만 나가보는 게 좋아. 체르노보그에서 말이야."




'수용소'를 빠져나와 내 차로 돌아올 때까지 가능한 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오늘 하루 동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깊이의 아이러니를 얼마나 체험하고 온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차문을 닫고 눈을 감고 나서야 오늘 하루 내내 참아왔던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로도스 아일랜드는 감염자를 위해 설립된(혹은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는) 제약회사다. 대외적으로 감염자를 위한 구호활동과 각국 정부와의 교섭을 행하고 있으나, 안전 보장이나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각지의 경험있는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어 여론의 강한 의심을 받고 있는 회사다. 하지만 그들이 리유니온과 교전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리유니온 대원의 말대로 그들이 비감염자의 편을 든 것일까? 리유니온은 로도스가 우르수스나 용문 정부와 결탁하여 감염자를 탄압하고 있다고 믿는 듯하다.


리유니온. '탈룰라'는 리유니온을 세운 이후 수 차례 성명을 통해 감염자라면 누구나 X 마크가 새겨진 완장 하나만 차면 리유니온이 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단순히 상투적인 모병 광고 문구라고 생각되었던 그 말은 사실 오늘의 이 감염자와 비감염자간의 극한대립을 내다본, 혹은 의도한 것인가? '탈룰라'와 리유니온은 정말로 테라 위의 모든 감염자를 자신들의 전쟁에 끌어들이려 하나? 감염자 자신들의 삶의 터전까지 파괴해 가면서? 민간인을 최우선으로 보호한다는 그 지휘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대원은 내 취재 활동을 이미 자신의 지휘관이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그들이 내 동선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우르수스 병사를 발견했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리유니온 대원의 말대로 그들이 '동포'인 내 활동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제는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 병사는 이미 '수용소' 앞의 구덩이에서 불과 살덩이와 피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체르노보그의 감염자 아이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평화란 대체 무엇일까?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는데, 어디서부터 실이 엉켜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인생에는 이런 종류의 문제가 많지만, 완벽하게 해결되는 일은 드물다. 이럴 때는 누구나 칼로 매듭을 끊고 도망치고 싶게 마련이다. 하지만 난 아직 체르노보그를 떠날 수 없다. '헬라그'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해줘야 할 말이 있다.


이 직업을 갖게 된 이후 처음으로 내가 기자가 된 것을 후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