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버애쉬&닥터(여) 19금임을 알립니다.




박사는 늘 입던 후드 티 위에 흰 가운을 걸쳤고 안색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창백했다. 그런데도 실없이 헤헤 웃으며 에너지 드링크를 가느다란 손으로 집어들었다. 오늘도 밤새 일할 셈인 것이 분명했다.


사람을 잠들게 하지 못하는 저 흉물스러운 액체가 박사의 몸 안에 흘러들어가기 전에. 실버애쉬는 문에 난 작은 창으로 그녀를 훔쳐보던 것을 그만두고 다급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도록 자제하며 노크했다.


다행히도 그는 늦지 않았다.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박사는 낭랑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누구신가요?”

“나다.”

“아. 실버애쉬 군. 들어오세요.”

“실례하지.”


사리아는 박사를 보고 고전적인 사상을 가졌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를 부르는 박사의 표현만을 보아도 실버애쉬는 사리아의 평가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아. 오늘의 당직은 실버애쉬 군인가 보군요?”

“음. 그 말대로다. 오늘도 이 시간까지 업무에 열중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라니 양이랑 스카디 양 건 때문에.”


실버애쉬 군. 그라니 양. 늙은 학자들이나 사용할 법한 어체를 박사는 습관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마 잃어버렸다는 과거에 그 실마리가 있으리라.


“방금 관제센터에서 로도스의 리더에게 이불을 덮어준 것을 봤는데. 그녀의 일은 어떻게 할 셈이지?”

“앗. 아하하. 이거 참. 그 때부터 보고 계셨다면 먼저 말씀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조금 부끄럽네요.”

“너를 방해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내가 너를 불렀다면 그녀가 깨어나고 말았겠지.”

“아. 네. 그랬겠네요. 으음~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아미야 양이 귀를 늘어트리고 졸고 있길래 무심코 재우고 말았어요. 아미야 양이 하기로 했던 일은 제가 처리해둘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럴 수는 없다.”


네? 하고 반문하는 박사를 보며 실버애쉬는 로도스의 다른 기둥. 켈시의 잔소리 혹은 부탁을 떠올렸다. 본인 역시도 최근 박사가 로도스의 자질구레한 일까지 모두 신경쓰는 걸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켈시 박사가 최근 네 용태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최소한 오늘만큼은 숙면을 취할 수 있게 감시해달라고 내게 부탁하더군.”

“그건... 음. 켈시 양에게는 비밀로 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이왕 하기로 한 일은 전부 처리해 두고 싶어서요. 오늘만요. 네?”

“엔시아가 당직일 때도 같은 이야기를 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도베르만 교관이 당직일 때도 마찬가지였겠지.”

“읏. 알고 계셨나요?”

“명명백백한 일이야.”


체르노보그에서 박사를 구출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용문에서의 사건을 거치면서 박사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있었다. 책임감 때문일까. 자책감 때문일까.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과유불급을 모르는 것은 범인의 어리석음이다.”


박사는 매일 기진맥진할 때까지 신경 단말을 사용해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각 부서의 업무에까지 끼어들어 기력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로 로도스에 붙어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켈시가 알아챌 만도 했다.


“... 그렇지만 시간이 남는데. 시간을 헛되이 사용할 수는 없잖아요?”

“나의 맹우여. 휴식을 취하는 것을 헛된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는 항상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자질구레한 일은 네가 신뢰하는 부하에게 맡기면 된다. 묻도록 하지. 너는 지금 준비되어 있는가?”


박사는 난감하다는 듯 웃다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이. 이건 단순한 시간 죽이기일 뿐이에요. 제게 있어서는 이게 쉬는 거라고요?”


무리하고 있다는 것. 피로가 쌓이고 있다는 것을 박사 본인도 차마 부정하지는 못했다. 호오. 실버애쉬는 재미있다는 듯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렇게 나올 셈인가? 그렇다면 너는 무절제한 한량이 된다. 한량을 바로잡는 고사라면 설산에도 한 보따리는 준비되어 있다만?”

“으. 으읏.”

“둘러댈 생각 말고 솔직하게 말해보도록. 그러면 켈시 박사에 대한 전언의 내용은 조금 생각해보도록 하지.”


박사를 놀려먹는 것은. 만사를 진지하게 사는 편인 실버애쉬에게도 퍽 즐거운 일이었다. 박사는 한숨을 여러 번 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창백했던 그녀가 더 파리해졌다.


“... 대가를 미리 치루고 싶었을 뿐이에요.”

“대가라니?”

“아직은. 작전 실패에 대한 대가를 피가 아니라 이성과 자본 정도로 끝낼 수 있으니까요.”

“체르노보그의 일을 아직도 신경쓰고 있군.”

“신경쓰지 않고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실버애쉬 군. 로도스의 대원들은 저를 위해 희생했어요. 그렇다면 저 역시 로도스의 사람들을 위해 희생해야 도리가 아닐까요?”


조곤조곤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는 박사를 보고서. 실버애쉬는 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너는 이미 해야만 하는 것은 다 했다.”

“다 했다고요?”

“로도스 아일랜드는 대원들에게 계약서에 적혀 있는 대로 충분한 연봉과 보너스. 장비. 사내 복지 혜택 등을 제공하고 있다. 그 안에는 위험수당 역시 포함되어 있지. 그걸로 된 것이다.”


박사는 반쯤 납득하는. 반은 납득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원들과의 계약. 그 이상의 책임을 그녀는 지려 하고 있다. 실버애쉬가 보기에는 이것은 순전히 감정의 문제였다. 박사가 가진 선한 마음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로도스 아일랜드 내에서 감염자들은 통합운동의 범죄자들이나 빈민가의 빈민들에 비해서 훨씬 인간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

“그리고 생로병사(生老病死)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지.”


그리고 사람이 언제 죽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이라도 되는 것이 아니라면. 실버애쉬의 말에 박사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적어도 일을 더 할 생각은 사라진 것 같았다. 이걸로 약속은 지켰다.


그러나 곧 박사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작은 흐느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실버애쉬는 낭패감을 느꼈다.


‘조금 지나쳤나.’


그는 조금 더 박사를 가까이했다. 이 방식이 과연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동생을 달랠 때처럼 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몸은 부드러웠다. 손을 뗄 때도 일순간 온기가 남았다.


박사는 충혈된. 눈물이 맺힌 눈으로 실버애쉬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덧없고. 매력적이었다.


여자가 반 뼘 거리를 두고 남자를 올려다보는 묘한 ‘남자와 여자의 거리’ 속에서 실버애쉬는 얼마 전 취한 박사와 침대 위에서 뒤엉켰던 때를 떠올렸다. 그날 밤에는 그녀의 붉은 꽃이 흰 시트 위에 흐드러지게 피었더랬다. 약한 모습을 드러내던 박사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박사가 말을 안 들으면. 조금 피곤하게 만들어도 좋아. 당신의 부탁이라면 들을 테니까.’


어떻게든 박사를 푹 자게 만들어달라는 켈시 박사의 부탁도 떠올랐다. 실버애쉬는 지금 그 자신의 욕망과 켈시의 부탁을 모두 만족시킬 최선의 방법을 떠올렸다.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 단단해졌다. 물론 켈시는 결단코 그런 의도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을 테지만.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실버애쉬는 단호하게 다가가 박사의 입에 입술을 맞추었다. 움찔. 그녀의 몸이 튀었지만. 저항은 없었다.


박사의 눈이 크게 떠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숨이 가빠오는데도 불구하고 실버애쉬가 떨어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였다. 의자에 앉은 박사를 실버애쉬는 붙들어 안아 올려. 벽에 억지로 기대게 만들었다.


“....!”


그제서야 박사가 바둥댔지만. 바위같이 단련된 그의 완력 앞에서는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오히려 남자의 욕망에 기름을 부었을 뿐이다. 총명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흐릿해질 때쯤. 실버애쉬는 입을 떼었다. 두 입술 사이에 타액이 가교처럼 질척하게 연결되었다. 허벅지에 단단하게 부풀어오른 것을 가져다댔다.


“엔시.. 오.. 디스.. 군....”


박사가 엔시오디스 실버애쉬의 이름을 불렀을 때. 헐떡이며 약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때의 박사는 너무나도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피식자를 앞에 둔 굶주린 포식자의 기분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시간 죽이기라면 좋은 방법이 있는데. 해보겠나?”

“잠깐만.. 기다-”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박사의 입은 실버애쉬에 의해 막혔다.


밤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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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애쉬X여닥터 짤을 뒤늦게 보고 끄적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