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시 선생님께

 

저번에 전해주신 물건은 잘 받았어요.

그 보급품들은 언젠가 핀마나의 자유를 위한 밑거름이 될 거에요.

다녀간 폴리닉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하 오랜만에 쓴 편지인데 너무 일 이야기만 하는 것 같네요.

편지를 시작할 때는 날씨 이야기부터 하라고 들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방 안에만 있었어요.

그래서 바깥에는 어느 계절의 밤바람이 부는지,

밤낮은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나는지 잘 알 수 없게 되었어요.

 

베리를 앞마당에 묻은 후로 아마 두 달,

아니 석 달이 다 되었네요.

나가지 않은 동안 잡초도 많이 자랐겠죠.

그래도 옆에 리사가 같이 있으니까 외롭지는 않을 거예요.

 

아직도 베리와 함께 마당에서 뛰어놀던 리사가 눈에 선해요.

리사의 방에서 리사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지우면서 생각했었어요.

해가 지나서, 언젠가 리사가 쓰던 방에서 리사의 흔적들이 전부 사라지고 나면 저도 이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고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죽은 딸을 지워버리려고 애쓰는 제가 이상하게만 느껴져요.

벌써 3년에나 지났는데 리사는 변함없이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어요.

 

앞마당의 긴 수도꼭지로 베리를 씻기던 리사

입에 양념을 묻히고 생글생글 웃던 리사

거리 가득한 인파 속에서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리사

총성과 함께 고꾸라지던 리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건

그것 때문에 이토록 찢어지게 아픈 건

아무도 이런 경험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겠죠.

 

그날 광장에 리사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까요?

감염자와 시민들을 위해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잘한 일이라고 잘못은 군부에게 있다고.

다들 그렇게 말해주었어요.

 

과거에는 그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는 거란 생각도 했었어요.

사람은 언제나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고

자신이 얻은 것을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하죠.

 

하지만 그렇게 그들이 지켜야만 했던 것들이 리사의 목숨보다,

수많은 딸을 잃어야 했던 수많은 부모들의 아픔보다 중요했던 걸까요?

 

오직 이해로만 평화를 살 수 있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어떻게 해도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켈시, 어쩌면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아닌가요?

 

우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군부와 싸워왔어요.

폴리닉은 그런 우리를 돕기 위해 음식과 약품을 가져다주었죠.

켈시, 당신과 로도스가 보낸 선물이었어요.

하지만 싸움은 피와 살, 그것을 이루는 음식들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로도스는 무력을 갖추려는 제약회사인가요?

아니면 제약회사가 되려는 민간군사기업인가요?

 

리사가 어릴 적부터 저는 그 아이에게 사람을 지키는 아츠를 가르쳤어요.

사람들이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

리사가 그런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서요.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요.

딸에게 그것을 알려주지 못한 저의 나약함이 리사를 죽인 것이겠죠.

 

이곳은 서로의 선을 가지고 경쟁하는 곳이 아니에요.

이곳은 타인을 비틀어 자신을 채우려는 욕망 아래에 짓눌려 있어요.

 

우리는 오늘 총과 칼을 만들었어요.

지난 석달 동안 이 방을 거쳐간 무기들이 내일 더 많은 아이를 살리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 아이들은 총과 칼로 쟁취한 자유 아래에서 뛰어놀게 되겠죠.

이해와 사랑은 그때 주고받아도 늦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로도스에서 오는 더이상의 지원물자는 받지 않겠어요.

로도스는 이제 저희와 연관되어서는 안 돼요.

 

지금의 판미나는 다른 여러 국가와 복잡한 정치적 문제로 얽혀 있어요.

그들이 지켜보는 한, 이 싸움은 언제까지나 계속되겠죠.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날 때, 패배자의 이름을 악의 명단에 새길 거에요.

그곳에 적히는 이름은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겠죠.

 

저는 리사의 복수를 하려는 건지도 몰라요.

군부의 독재자가 끝내 평화를 가져올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부디 우리를 지원하는 대신 이 모든 것을 기록해주세요.

 

무엇이 옳았는지.

싸움을 택한 우리가 어떻게 기억될지.

결국,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을지.

 

이 비극을 반복하고자 하지 않는다면요.



*미얀마랑 용문 생각하면서 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