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는 존재는 몹시 약하다.
날카로운 이와 발톱도 없을뿐더러, 도망치기 위한 날개조차 없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머리를 쓴다.
기술, 책략, 그밖의 온갖 것들.
그리고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취하는 공통된 방법이 있다.
무리를 짓는 것이다.
한 마리씩 있을 때는 연약한 원석충이라도, 몇 천 마리씩 무리를 짓게 된다면 사냥꾼의 왠만한 습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게 된다.
집단 전체가 한 마리의 짐승으로 기능함으로써 자손을 남기고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함께 모여서 집단을 이루며 생활하다가, 이윽고 집단이 마을이라 불리고 도시라 불리게 되면서 종국에는 야생의 어둠을 극복한다.
그러나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집단이 언젠가는 서로 싸우게 되는 것 또한 진리라 할 수 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자신들 외에는 적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집단은 그 자체가 한 마리의 거대한 짐승이다. 그러니 어느 힘 없는 한 마리가 집단의 발톱과 송곳니의 은혜를 입게 되면, 그는 그 집단 속에서 개인이기 이전에 짐승이어야만 한다.
사람이라는 것은 몹시도 약한 존재다.
신이 구름 너머에 숨은 지 오랜 세상에서는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 숲의 어둠 속에 있는 짐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은 궤도와 철벽으로 둘러싸인 이동하는 땅 속에서 한 마리의 짐승이 된다.
일단 그 힘을 빌리게 되면 다시는 그 멍에에서 도망칠 길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더욱.
배신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거센 폭풍이 휘몰아치는 테라를 살아나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 피와 연대감으로 이어진 끈끈한 유대인 것이다.
◇◆◆
구름이 달을 가리자 어둠이 주위를 덮었다.
때때로 부드럽게 이는 찬바람에 앞머리가 느긋하게 살랑거린다.
유리를 가벼이 구부려 만든 오리지늄 랜턴 속에서 원석으로 발하는 새찬 불꽃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춥고, 무섭도록 차다.
귀도, 꼬리도, 비늘도, 두터운 털도,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을 실은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얼음을 밟는 듯한 소리를 냈다.
“나쁘지 않은데.”
옅게 먼지가 낀 두터운 코트를 입은 사람이 읇조렸다.
평소에 자주 입던 코트에 그려진 큼지막한 탑형의 문양을 대신이라도 하는 것인양, 왼편의 어깨에 자그맣게 새겨진 노란색의 마크가 두드러지게 보였다.
때때로 입에서 흰 숨이 피어오르며 유리창 너머에 걸린 새하얀 결정을 비스듬히 만지며 눈동자에 선선하게 들어오는 광경을 즐기고 있었다.
가지들이 길쭉이 뻗은 침엽수림과 묵직한 감이 없지 않은 구름들 사이로 내리는 눈으로 비롯된 드넓은 설원.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 남은 새하얀 눈이란 것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테라는 겨울이 자아내는 회백색 경치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줄 아는 이들 보단은 차갑고도 아무런 생명도 잉태할 수 없는, 자라날 수 없는 메마른 땅을 저주하는 이들 쪽으로 저울이 기울 것이다.
용문. 염국의 이동도시. 체르노보그. 우르수스의 이동도시.
리유니온. 종족 구분없이 검은 돌이 박힌 무시무시한 감염자들로 이뤄진 단체.
세간에선 이젠 잊혀진 사건.
“…누구 하나라도 따라와달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지. 이런 시기에 나 혼자서 나올 수 있는 거에 감사해야겠지.”
부쩍 든 생각은 사람이 그립다는 것이었다.
좌석은 넷. 앉은 사람은 하나. 혼자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등에 지기엔 실은 짐의 양으로 보아 수지에 맞지 않았다.
유일하게 뒤따라온 것이 있다면 로도스 아일랜드의 전반에 쓰이는 PRTS.
【박사님.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떠나신 이후로 2시간 32분 지났습니다.】
【추후 보고는 제가 갱신할 테니 여유롭게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고마워.”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유유히 외길로 이어진 이름 모를 국경의 도시를 향해 핸들을 붙잡고 있던 그는 자신의 편린으로나마 남은 찢어진 과거의, 그리고 몇 없는 지금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 이라곤 해도 고작해야 나흘 전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천천히 눈을 감아보며 그때의 그 상황을 되새김질하듯 기억의 나레를 펼쳤다.
◆◇◆
“응, 으응? 뭐라고?”
짧은 꼬리의 필라인 의사를 앞에 둔 사람은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예전에는 테레시아 필두로 이뤄진 미상의 바벨이란 조직에서 지휘관으로 악명이 자자했던 사람. 지금으로는 체르노보그-용문 충돌을 막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뛰어다녔던 이름 없는 영웅들 중의 한 명이다.
그의 표정은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마치 카시미어 기사 경기에서 한 스포츠 기사에게 투자를 했다 팍 꼴아버린 사람의 표정처럼 얼이 빠진, 어이가 없단, 예상하지 못했단 기색이 역력했다.
“말 그대로다. 박사. 넌 조금 쉬어야 할 필요가 있어.”
짧은 꼬리의 필라인 의사. 켈시. 로도스 아일랜드의 중핵 중 하나이며 아미야의 보호자. 감히 살카즈라도 두려워 할 이형의 괴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우수한 메딕 오퍼레이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함선 안의 수많은 오퍼레이터와 환자들에게 칭송받는 우수한 리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켈시는 몇 시간을 걸친 수술의 집도를 끝내고 오랜 집중에 의한 피로를 풀 그 간막, 달콤하지만 길지 않은 휴식을 얻었다. 하지만 켈시가 처음으로 택한 것은 박사의 집무실에 이르러 단도직입적으로 통보에 가까운 말을 건내는 것이다.
“…켈시, 누가 봐도 쉬어야 할 쪽은 내가 아니라 너처럼 보이는걸.”
“배려 없는 예의는 자기만족이 되기 십상이다. 박사.”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데.”
로도스 아일랜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잃었다.
박사의 구출, 용문과의 계약 이행, 체르노보그 충돌의 방지를 위한단 명목으로.
“지금은 하나라도 더 많은 손이 필요한 시기야.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일하는 비전투직 직원들은 물론이고 환자들마저 이번 사건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과 다친 사람들 때문에 다들 분위기가 완전 가라앉았어.”
”현장지휘 뿐만이 아니라 인사 관리에도 한턱 걸치고 있는 이상에야 나도 이런 분위기의 타파에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즈음은 알고 있어.”
박사는 공개모집에 등록된 오퍼레이터들의 프로필을 바라보던 손을 가벼이 내려두며 가지런히 모았다. 그러곤 켈시를 향해 피로에 점칠되어 붉은 핏기가 선 두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 와중에 자기 상사란 사람이 휴가를 써서 여행을 간다니. 난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진 않은데 말이야, 아니면 예전에는 그랬나?”
“76시간 21분. 그 의자에서 식사를 제외하면 어시스턴트의 도움도 없이 계속 일한 시간이다.”
“이성 회복제는 일반적으로 중추 신경계를 자극해 일시적인 정신적, 육체적 기능의 개선 효과가 있는 의약품이야. 하지만 그 과다 사용으로 인해 나오는 부작용은 공통적으로 두통, 불면증, 신경과민, 식욕감소, 어지러움 등등이 있지.”
“너는 충분히 잘해주고 있어. 박사.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한숨도 자지 않고 계속해서 몸의 한계까지 일하는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정도로 나는 얌전한 의사가 아니야.”
“너도 그렇게 다르진 않잖아. 약물까지 쓰면서 힘들게 일하고 있어. 나 혼자 쉴 수는…”
“아미야도 너를 걱정하고 있다. 그 아이는 이제부터 상상도 하지 못할 거대한 중압감에 짓눌리는 일상을 반복할 거야. 그 아이에게 또 다른 부담을 주려고 생각하지 않길 바라.”
“….”
박사는 그 이후로도 계속해 말의 꼬리를 잡고 잡아 추격할 자신은 있었다. 지휘와 달리 과거의 그에겐 사람들을 계속해서 고무시킬 달변가의 소질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박사의 앞에 선 켈시의 표정과 그 말들의 압박에 비롯해 얼마 남지 않은 박사의 이성이 호소하기로는 이 이상으로 저항하다간 좋은 모습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것을 여실히 주장하고 있었으리라.
“로도스 아일랜드 함선은 용문과 우르수스 어느 쪽에서도 색적할 수 없는 루트로 국경을 빠져나가고 있어. 달리는 함선에서 뛰어내리란 소리는 아니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정확히 이틀 후에 도착할 도시에 잠시 물자 보급을 위해 1주일 간 머무를 예정이다. 적어도 약 5일 간의 공백이 생길 테니 그 틈에 도시 주위을 돌아다니면서 조금이라도 쉬어두라고 말하고 싶다.”
“엔테르크 시는 테라의 북부에 위치한 덕택에 새하얗게 물든 초원으로 유명한 모양이야. 또한…”
박사는 이어지는 설명에 가벼이 손을 들었다.
“그만하면 충분해. 잘 알았어. 알았다구. 다른 사람을 보내도 좋을텐데, 직접 나한테 찾아와서 그 소중한 휴식을 갉아먹고 있단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할게. 피곤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런 시기에 내가 나가버리면 인사팀 직원들에게 원성을 살 것 같은걸. 혹시 그런 걸 노리고 있는 건 아니지? 나는 사내 정치 같은 거 관심 없어. 켈시.”
앞에 선 필라인은 이 이상으로 길게 말을 이어붙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용무는 끝이다. 나중에 정식으로 계획서를 올려서 제출해줬으면 한다.”
그리곤 등을 돌려 그 야릇한 인상이 남는 등을 과감히 보이며 집무실로부터 나가려는 사이에 박사가 한 마디를 더 끼얹었다.
“부탁이 있어.”
“?”
“나 혼자만 쉴 순 없지. 다음은 네가 쉴 차례란 걸 약속해줘. 켈시.”
“…고려하겠다.”
◆◆◇
지평선 너머로 눈가루를 말아 올리며 한 무리의 버든비스트들이 또 사라져 갔다.
엔테르크 시는 대부분의 지역이 겨울만 되면 눈에 갇히는 북부에 위치한다.
겨울이 되면 도시의 대부분이 눈으로 뒤덮이는 반면, 그 외의 계절에는 기후가 온화하고 비가 자주 내려 비옥한 목초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것으로 목축업이 발달했다는 것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5일 간의 휴양이라.”
박사는 위에서 흐르는 눈이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는 것과 같이 오묘한 기대감에 뒤덮혀 있었다. 리유니온과 치열하다면 치열한, 싱겁다면 싱거운 전투의 지휘를 하며 느낀 것은 오퍼레이터의 경외도 있지만 엄연히 자신이 외부인이란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알아보는 오퍼레이터들 또한 있었다. 하지만 그 기색을 일부러 입밖까지 내뱉을 정도로 부주의한 이들은 아니었지만.
그런 와중에 이런 여행길에 올라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을까.
과한 열망은 그릇된 흥분을 초래하기 마련이었다.
여행.
하늘은 한없이 푸르게 펼쳐져 있다.
홀로 들판을 가는 나그네에게는 고독이 따르기 마련이랴.
잼다
이제 세계를 돌며쉬는거? - dc App
잘쓴다
제목만 보고 트릴비 시리즈인 줄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