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란드가 최애중 하나거든. 그래서 열심히 쓰려고 했는데, 용두사미 수준이네... 아니, 용두사미 수준도 아니려나.
왠지 입은 옷의 착용감이 좀 다르다고 느꼈는데, 라플란드의 방을 빠져나오면서 급하게 입고 나오느라 런닝셔츠를 안 입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도무지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라플란드의 발정기 해결해준 것 까지는 좋았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성격이 반영되어서 조금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렸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속옷을 다시 가지러 발길을 돌렸으니 무척 난감한 일이었다.
다시 그 장소로 가야하는 것은 꺼려지지만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로써, 전투 지휘나 그 외의 몇 가지 업무를 담당하는 이상, 그녀와 다시 얼굴을 보는 것이 불가피한데 지금 피한다고 다음에도 계속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대원을 관리해랴 하는 사람이 대원을 피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니다. 속옷도 다시 찾으러 갈 겸, 급속도로 어색한 관계에 대해서도 풀어버리기로 마음먹는다.
라플란드의 숙소에 도착했지만, 그 자리에서 5분 동안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벨을 눌러서 라플란드를 부르고 어색함을 풀어버리는 계획은 있는데 마음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꿈쩍도 하지 않는다.
지휘할 때에 우유부단하면 대원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에 재빨리 올바른 판단을 내려 결정해야 하는 것처럼, 대원을 위해서 어색함을 풀고자 왔건만, 일상 속의 소심한 마음 때문에 발이 붙잡힌 것은 환장할 노릇이다.
소심함의 극치가 그대로 나타나는 대목은 지금부터였다. 라플란드를 불렀다면 그 이후에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가? 사과를 해야 하는 건가? 박사가 딱히 잘못한 것은 없다. 자기가 해야할 의무이자 임무를 했을 뿐이며 라플란드도 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화를 내야하나? 딱히, 화를 낼만한 구석이 없다. 그나마 있다면 라플란드가 은혜(?)를 모르고 박사를 발로 찼다는 부분인데, 그런 거 가지고 화를 내다니, 완전 쫌생이 아닌가.
너와 이런 관계는 싫어! 라며 이야기를 전할까? 방금 전에 나왔던 방법들보다는 괜찮기는 한데 무슨 고백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쓸데없는 잡생각들이 계속 박사를 방해한다. 그냥 라플란드를 불러서 쉽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을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고 시간만 잡아먹어간다.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고백하러온 사춘기 남학생 같다. 이유없이 짜증은 잔뜩 나는데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한다. 물론, 라플란드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아……좋아.”
지휘할 때 나오는 대범함을 일상에서 적용시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약간의 자기혐오를 하는 시간을 가지며 준비 되지 않았다고 외치던 마음도 다잡았다. 자신은 여전히 없지만 석상처럼 여기 죽치고 있을 수도 없고, 런닝셔츠도 찾아야한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박사로써 대원과의 원활한 관계를 가지는 것. 그 목적을 위해서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숙소의 벨을 누를 준비는 끝났다. 안에서 라플란드가 ‘꺼져’라고 말하는 한이 있다고 한 들, 박사는 본분을 다해야했다.
“어?”
“앗.”
벨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숙소의 문이 열렸다면, 숙소의 주인이 나왔다는 소리다. 적어도 방에 아무도 없지는 않다는 게 증명되었다.
밖으로 나왔는데 박사와 마주친 라플란드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동안의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정말 신기하게도 둘다 입을 꼬맨 것 마냥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할 말 있어?”
먼저 입을 연 것은 라플란드였다. 인사는 생략했다. 인사가 무슨 필요를 하겠냐만 얼굴을 마주친 라플란드에게서 어색한 기류가 돌아서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야 했다. 이는 라플란드도 같은 생각이었다.
“……할 말이 있는데.”
“이제와서 고백 같은 건 아니지?”
“절대 아니지.”
라플란드의 장점이라면 은근히 유머스럽다는 점이다. 다만, 그 유머 대부분이 블랙조크라는 게 흠이다. 예를 들어서 리유니온의 보병 중 한 명의 시체를 마음대로 썰어버리고는 자기가 만든 밀푀유가 어떠냐며 물어본다던지 같은 것 말이다. 그래도 그런 광기가 존재해도 완전히 사회성이 없지는 않은 게 큰 다행이다.
“그, 우리가 했던 거 말인데.”
“난 답답한 게 싫어, 박사.”
“그래, 섹스한 후에 말이야. 너랑 어색하게 있는 게 좀 그래서……아니, 싫어서 말이야.”
라플란드가 웃는다.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익숙하지 않다.
“후훗, 그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건가? 넌 네가 할 일을 했을 뿐이고, 난 좀 당황했었을 뿐인데 말이야……미안.”
사과를 먼저한 것은 라플란드였다. 눈동자를 돌리고 있지만 그녀가 사과하는 건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다. 라플란드랑 같이 있으면서 그녀에게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모르겠다.
자위하는 라플란드, 술 취한 라플란드, 첫 경험의 고통을 느끼고 무섭다는 라플란드, 부끄러워하는 라플란드, 사과하는 라플란드……이런 귀중한 경험을 하게 해준 켈시 선생에게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겠다.
“어, 아, 아냐. 놀라면 그럴 수 있지.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고마워.”
전투광이긴 하더라도 지킬 것은 지키는 것도 라플란드의 장점 중 하나다. 특정 대상들 앞에서 그걸 참지 못하는 게 흠이지만, 라플란드가 먼저 사과해오며 어색했던 기류는 금방 사라졌다.
역시 괜히 겁먹었네.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소심한 성격 좀 고치던가 해야지.
“그건 그렇고 박사.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는데 말이야. 나는 박사를 믿지만, 박사는 정말로 나를 믿는 건가?”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같은 인사를 하고 문제없이 넘어가나 싶었는데, 꽤 의미심장한 질문을 꺼냈다. 단순히 그 질문을 꺼낸 것만으로 박사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던진 질문에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간파했다. 허나, 그 질문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내가 라플란드를 믿고 있냐고? 간단하게 대답하면 Yes다.
“네가 날 믿는다면, 나도 널 믿어야겠지.”
“글쎄, 당장은 너를 보호하는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청부업자야. 만약에 누군가가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너를 죽이라는 일을 준다면 너를 죽이고, 그 증거를 가져가야겠지. 네 머리통 말이야.”
……맞는 말이다. 로도스 아일랜드 소속이라고 하더라도 외부적인 연결 요소는 로도스쪽에 불이익이 생기지 않는 이상, 크게 관여를 안 한다. 그래서 몇몇 대원들은 별다른 연락 없이 외부로 나가 활동하거나 그렇기도 했다.
대원들은 외부적인 요소를 아예 끊기거나 끊고 로도스에 소속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원들도 대부분 많이 있었다. 라플란드가 그 청부업자 관계를 끊기 않고 들어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지금은 별 문제가 없더라도, 그녀가 박사의 목을 노리는 게 되는 것은 순식간에도 가능한 일이다.
제대로 박사와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까? 진실? 아니면 거짓말? 청부업자의 얼굴은 지정된 것이 없다. 보통은 무표정이겠지만, 라플란드처럼 전투광스러운 인물이라면 싸우면서도 신나게 웃을 수 있는 존재도 있다. 그렇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지금은 달콤한 꿈이라고 하더라도, 이후에 벌어질 악몽을 생각한다면, 미리 차단하는 게 좋지 않을까?”
씁쓸한 미소를 보여준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도, 더욱 깊게 생각보라는 듯이 양팔을 벌린다.
라플란드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알지 못하겠다. 평소 행실은 텍사스나 레드의 앞을 있을 떄를 제외하면 의외로 올바르며, 사고는 치지 않지만, 청부업자라는 직업이 자연스레 경계하게 만들기 딱 좋기에 로도스 소속 이전의 그녀의 직업과 행적이 발목을 붙잡는다. 그녀는 신경쓰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박사로써는 이게 처음에는 굉장히 꺼려지는 편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답이라고, 라플란드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조금씩 신뢰를 쌓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 재수 없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던가.
‘나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다시 한 번 신중한 선택을 부탁한다고.’
라플란드를 받아들인 것으로 선택을 이미 했다고 보았지만, 그 메시지는 박사보다도 한 수 이상은 더 나갔던 것 같았다. 선택의 연속인 인생에서 라플란드 또한 하나의 선택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것 하나가 크고, 많은 것을 바꿔 버린다.
전투 중일 때 어떤 명령을 내리는 것이 좋을지, 판단을 내리고 선택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많은 생각을 해야만 했지만, 사람 한 명을 대상으로 이렇게 깊게 고민하는 것도 처음이다. 하지만, 이미 정해놓은 걸 부정하는 건 거짓말이다. 자신에게도, 라플란드에게도 거짓말 같은 것은 할 수 없다.
“네 의견에는 동의할 수는 없네.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던 네가 로도스 아일랜드의 대원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라플란드가 피식 웃으면서 대답한다.
“너무 단순한 생각 아니야? 네가 기억을 잃어서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인데, 로도스의 박사라는 사람은 무척이나 높은 인물이라고 하던데? 높은 자리에 있다면 타겟이 될 확률이 높잖아?”
아미야에게서 들은 이야기일까?
“그리고, 듣기로는 냉철한 판단의 소유자라고 했어. 어떤 식으로라도 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무조건 처분했다고.”
라플란드가 의외로 자신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게 놀랍다.
“그런데도 날 믿겠다는 거야?”
박사가 했던 선택을 다시 할 수 있게 ‘기회’가 새롭게 주어졌다. 그런데, 이 선택에 의미가 있을까? 그 재수 없는 메시지는 무시하고, 그녀에게 신뢰를 얻고자, 그리고 신뢰를 주고자 해왔던 것들인데, 이제 와서 모두 없던 일로 처리하자는 일을 벌이자고?
“대원들을 신뢰하고, 그들에게서 신뢰를 얻는 건 중요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신뢰를 하지는 마.”
로도스에서의 활동을 다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박사에게 켈시 선생이 했던 충고였다.
“기억을 잃어서 실감이 안 나겠지만, 그게 네가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 중 하나야. 너를 믿고 따라오는 녀석들도 있겠지만, 너를 이용하는 녀석들도 분명 있을 테니까.”
다른 이에게서 신뢰를 얻되 그 대상을 너무 신뢰는 하지 말라했던 켈시 선생. 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지금으로서의 박사는 켈시 선생은 믿고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녀 말고도 아미야를 비롯해 신뢰받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늘어나지만, 그럴수록 켈시 선생의 따끔한 한 마디가 떠올라 누구가를 신뢰를 하는 것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를 신뢰해도 될 만한 사람인가? 하고 의심을 하게 만들어 불안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이지.”
라플란드에게 대답했다.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보세요, 로도스의 박사님? 생각은 해보고 하는 대답이야?”
어처구니가 없다는 게 얼굴로 다 들어난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답변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지휘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기억상실증 환자인데, 그거라도 있어야 누군가를 제대로 뒷받침 해줄 수 있지 않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라서 널 믿는 거다. 내가 대원들을 믿으면, 언젠가 대원들이 날 믿어줄 거라고. 그나마 내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일이란 말이야.”
기억을 읽은 박사에게, 처음이나 다름 없는 로도스에서의 업무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업무도 업무지만, 켈시 선생, 실질적으로 로도스에서도 높은 직위를 가진 사람에게 ‘박사를 믿지 못한다.’ 이 한 마디는 기억을 잃고 헤매는 박사에게는 안 그래도 큰 부담에 더 큰 부담을 짊어지게 하는 발언이었다. 말고도 로도스 이외의 다른 세력들과 협력 관계를 맺기 위해 협상 자리에 나가는 일도, 로도스나 그 외의 다른 소속의 대원들을 돌보는 일도, 적들을 죽여서라도 제압을 해야 하는 리유니온과의 전투도, 하나 같이, 처음 해보는 일이나 다름없는 박사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그런 부담을 안고 활동을 하던 것에 대해 보답이라도 하듯이, 다른 세력과의 협력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인 교섭은 좋게 끝나는 편이었다. 아미야나 켈시 선생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며 다른 세력과 협력 관계를 만들고 그 소속의 유능한 대원들을 고용하는 것 성공함과 동시에 작전 하나하나 승리로 이끌어나갔다.
대원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역할과 작전을 지휘하는 역할은 박사의 담당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부담이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대원들이 늘어나는 만큼, 자신도 수뇌부의 인물 중 하나인 만큼, 모두가 자신에게 기대어 있다는 부담은 스트레스로 변질되었고, 이에 따라서 부담을 줄일 방법을 찾아야 했다.
터무니없게도 그 부담을 줄일 방법이라는 게 대원들을 믿어주는 것이었다. 켈시 선생이 이야기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법이었다.
대원들을 믿어주는 것을 그들이 느끼게 된다면, 자연스레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까. 라는 무척 막연한 방법이었다. 당연히 이 방법을 들은 켈시 선생이나 도베르만 교관 같은 인물들은 어처구니 없어하며 막연하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그렇게 했다가는 호구 잡힐 거라면서, 협력하는 세력 중에서는 알 수 없는 꿍꿍이가 있을 거라며, 지금 어떤 사람들하고 협력 관계인지 아냐면서 질타와 지적, 여하튼 좋은 소리 1도 못 들었다.
그런데 어쩌겠나. 기억을 잃은 박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호구가 잡혔다던가, 꿍꿍이가 있다던가 한다면, 그들을 진심으로 만들게 하면 된다고.
“이러는 것도 한계가 있겠지만, 나도 그때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어. 그래서 널 믿는 거야.”
박사로써, 이상한 짓을 당하지 않게, 지금보다 자신의 능력을 올리거나, 기억을 되찾거나, 해결해야 할 일은 여전히 산더미 같았다. 당장 눈앞의 해야할 일도 많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일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목숨을 걸고 기억을 잃어버린 자신을, 희생자까지 내면서 자신을 구했던 대원들을 위해서라도.
“풋.”
라플란드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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