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내리치는 소나기가, 침잠하던 정신을 인양했다. 


 통풍창을 무섭게 두들기는 빗소리에, 머리가 지근거린다. 눈을 뜨자 인공적인 빛이 시신경을 날카롭게 헤집는다. 랩탑의 새하얀 화면에는, 전진을 멈춘 검은 수직선만이 점멸하고 있었다. 


 얼마나 잠든 걸까. 눈을 돌려 확인한 시간은 새벽의 한창을 달리는 중이었다. 잠기운이 가시자, 잊고 있던 피로감이 관자놀이를 타고 물씬 올라온다.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손바닥으로 눈을 문지르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몸을 한껏 뒤로 젖히고 깊은 한숨을 토하자, 날숨에 끌려 나온 수면욕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더 자면 편안해질 거야. 

정 불안하면 알람을 켜두자. 

30분 아니 15분이라도 괜찮으니 어서.


 무조건 기각이다. 기절하기 전까지 작성하던 문서는, 켈시에게 올라가는 안건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수마에게 충분히 시간을 빼앗겼다. 안일하게 쪽잠을 잤다가 일을 망친다면, 켈시의 서늘한 시선을 면전에서 받아내야 한다.


 살생부 명단에 오르고 싶다면, 그보다 좋은 방법도 없겠지. 그 무시무시한 여장부의 눈초리를 떠올리자, 속이 메스꺼워 견딜 수가 없었다. 


 과로로 말미암은 불면증과, 사내 갈등이 빚을 스트레스성 위염. 어느 쪽을 택할지는, 논할 가치도 없었다. 의자에 껌처럼 달라붙은 몸을 억지로 떼어내고는, 집무실 안을 훑기 시작했다. 


 잠 깨는 사탕이 담겨있던 통에는, 방부제만 들어있었다. 옆에 두었던 머그컵을 쥐자, 안에 든 각얼음들만 저들끼리 부딪치며 달그락댄다. 커피 포트도 바닥을 드러냈다. 아니 그러기 이전에 필터는 청소했는지 의문이다. 마지막 당직 대원이 엠브리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커피 포트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열어본 서랍에는, 텅 빈 스낵 봉지만 들어있었다. 이것도 엠브리엘의 소행이다. 그녀를 제외하고, 와사비맛 포키를 먹는 정신병자를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랍에 쓰레기를 은닉한 저의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외부에 있는 탕비실에 가야 한다. 그 곳이라면, 잠을 깰 좋은 방법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박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집무실의 출입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혹시나 싶어 열어본 냉장고에는, 민트초코 아이스바만 들어있었다.


 아이스바의 주인에게 죽음 있으라.





 예상한 대로, 탕비실은 천혜의 보물 상자나 진배없었다. 마카다미아 초코칩과 제로 코크, 치즈맛 프레첼과 에너지 음료. 몸에는 더럽게 안 좋지만, 끔찍하기 그지없는 업무 강도를 그나마 버티게 만들어주는 귀중한 연료다. 이게 없었다면 진작에 잿더미로 돌아갔을 목숨이다. 수명을 갉아먹는 금기의 조합이라도,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주전부리를 너무 많이 들고 온 점이다. 집무실을 나갈 때는 문제가 안되지만, 들어갈 때는 보안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잠금의 해제에는 대원에게 부여되는 임시 패스워드와 대원 카드의 인증, 패턴 인식이 필요하며, 이 제약은 켈시 박사를 제외하고 모두에게 부여된다. 그러니까 품에 무언가를 잔뜩 안고 있는 사람이 집무실의 주인이라 하여도, 몸통박치기로 문을 열 수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의 무지에 감탄을 한 나머지, 두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집무실에 둔 바스켓을 왜 까맣게 잊었을까. 평소라면 잘만 챙겼을 물건을. 고막을 매섭게 두들기는 장대비가 머릿속까지 헤집어놓은 탓일까. 아니면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가 일으킨 코티솔이, 기어코 해마까지 손상시키는 것일까.


 우선 지금은, 원인 규명을 할 시간이 아니다. 그보다는 업무가 더 중요했다. 품에 안고 있던 군음식을 내려놓고는, 호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들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카드를 인식하려는 찰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박사. 혹시, 바스켓 필요해?"

 "……리드?"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직면한 머리가, 브레이크를 힘껏 밟는다. 리드가 쪼그리고 앉아 물건을 바스켓에 담기 시작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박사, 다 담았어. 들어가자."


 그녀에게 어떤 단어를 꺼내면 좋을지, 여전히 결정할 수 없었다. 바스켓을 손에 쥔 채로 자신을 올려보는, 저 풀색 눈동자에 담긴 의도를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맨살을 찌르는 불안감을 이기기 위해, 없는 침이라도 만들어서 삼킨다. 스쳐가는 단어를 잡아, 그녀에게 간신히 던진다.


 "그래."


 단언컨대, 당직 스케줄표에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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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