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 문제야?"
시의 붓질이 끊어졌다.
"...헛소리 할 거면 꺼져. 아, 미안. 잘못 말했네. 그냥 꺼져."
"동생. 언니 눈에는 다 보인단다. 너 뭔가 고민 있지?"
소파에 누워 턱을 괴고 있던 니엔이 그렇게 물어왔다.
이 여자는 틈만 나면 이렇게 남의 방에 쳐들어와서 뺀질거리기를 좋아한다.
물론, 지금 입밖으로 꺼내 놓은 건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지만.
"..."
시는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다시 붓질을 이어갔다.
또 다른 걸작이 그녀의 손 아래에서 탄생하려던 참이었다.
고요하지만 격렬하게 회전하는 나선.
눈이 시릴 정도의 파란색으로 물든 파도와 새하얀 포말 사이로 튀어나오는 물방울들의 노랫소리.
조류의 선, 바람의 감촉, 얹혀진 돌, 물속에 있는 것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조경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제...
"박사 때문인가?"
삐끗한 붓질이 이번에는 성대하게 도화지를 가로질렀다.
모든 구도를 비틀어 놓는 격렬한 스크래치였다.
"..."
시의 눈썹이 분노로 씰룩거렸다.
반면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니엔의 눈썹은 초승달처럼 휘고 있었지만.
"어. 뭐야. 정곡이었니?"
"너."
시가 붓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 경고야. 내 방에서 나가."
아마 그녀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봤다간 식겁을 할 만치 위험한 신호겠지만, 니엔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리만 몇 번 휘적거렸다.
"아니, 그렇게나 심란한 티가 나는데. 언니로서 그런 동생을 어떻게 버려두겠니."
"주제에 뭘 안다고-"
"그림에 똑바로 집중 못하고 있잖아. 네가 원래 누가 옆에서 뭐라 한다고 눈이나 깜빡할 녀석이던가?"
시가 입을 뚝 다물었다.
당장 여기서 니엔과 한바탕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평소의 관계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 이전에, 자신의 작품에 정직함을 지키는 화가로서의 양심이 시의 행동을 가로막고 있었다.
"...시끄러워."
"세게 반박은 못 하는 것 보니까 스스로도 알고 있긴 한가보네. 그래서. 대체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박사랑 사이 좋은 것 아니었어?"
"그딴 녀석이랑 사이가 좋기는 개뿔이."
"아?"
니엔의 눈썹이 아까보다 더 가파른 각도로 둥그래졌다.
놀리기 딱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것 같은 기색이었다.
"나한테 '박사는 어떤 종류의 그림을 좋아하냐'라고 물어본 건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오죽 급했으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언니한테 물어 봐?"
시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싫어하는 걸 알고 있으면 좀 조용히 있기라도 하지.
그냥 침묵으로 넘기기에는 어쩐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떻게든 다시 입을 열긴 했지만.
"그런 것과 사이가 좋은 건 관계가 없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으래애? 내가 보기에는."
니엔이 피식 웃었다.
"자신 있는 게 그림 그리는 것 하나 뿐인 어떤 방구석 백수가 말이지."
"..."
"마음에 든 남자한테 그걸로라도 어필하고 싶어서 던진 절박한 질문인 것 같은데."
"..."
"그렇잖아. 너 다른 사람은 절대 방 안으로도 못 들어오게 하면서, 박사 왔다 싶으면 항상 문 벌컥벌컥 열어주고. 안쪽에서 얼마나 오래 있건 신경도 안 쓰고."
"그건 그 녀석이 조용하니까 그렇지."
"아. 그렇지. 조용하니까. 실어증 환자가 와도 숨소리가 크다고 쫒아낼 녀석이 그런 이유로 봐줬단 말이지. 그것 참 흥미롭..."
"니엔. 닥쳐."
니엔은 낄낄거리면서 말을 멈췄다.
평소라면 시가 입에서 서릿발 같은 독설을 뿜어낼 때까지 멈추지 않고 쿡쿡 찔러댔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인 일이 있었으니까.
아무튼 동생이 그림에도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심란해 보인다는 것 만큼은 사실이었다.
"말 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너희 남녀 관계를 진보시켜줄 쓸 만한 해결책을 줄 수도 있는 노릇이고?"
"남녀 관계가 아니라는 건 둘째치고, 너도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잖아."
"...그거랑 좋은 조언을 주는 건 별개의 문제 아닐까?"
"그 나이 먹으면서 경험 한 번 없는 상폐녀 주제에 추한 소리 하지 마. 그건 순전히 그쪽 희망 사항이지."
"..."
뭐, 이미 동생은 삐질 만큼 삐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애초에 연애 한 번 못 해본 건 자기도 마찬가지면서.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던 니엔의 눈에 문득 이상한 것이 포착되었다.
스케치북.
도화지, 먹, 붓이라는 대단히 고전적인 소품을 애용하는 시에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로도스에서 봉급도 안 받는 녀석이 직접 구입했을 리는 없을 테니. 누군가한테 선물 받기라도 한 건가?
"..."
니엔이 시를 곁눈질로 슬쩍 바라보자, 아까 전에 망친 그림은 내려두고 새로운 도화지를 펼치고 있던 참이었다.
새롭게 먹을 갈고 붓을 준비하는 것을 보니 당분간은 그녀에게 신경을 끌 확률이 높아 보이는 상황이었다.
"흠."
그리고 니엔은 그 모습이 저 스케치북을 마음대로 봐도 좋다는 암묵적인 허락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살금살금 다가가 스케치북을 펼쳐보니, 누군가 볼펜으로 쓱쓱 그린듯한 크로키가 스케치북 전체에 꽉꽉 들어차 있었다.
'쟤가 그린 건 확실히 아니네.'
어쩐지 엉성하고 삐뚤빼뚤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작품이겠지.
'그런데 이게 왜 이 녀석 방에 있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누군가 거센 동작으로 그녀의 손에서 스케치북을 채갔다.
"누구 마음대로 남의 방에서 물건 함부로 만지래."
드물게도 귀까지 붉어져 있는 동생이었다.
평소에 한결같은 무표정만 걸고 다닌다는 걸 생각하면 틀림없이 이례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니엔의 입꼬리가 거의 귀에 걸릴 정도로 찢어졌다.
동생이 이렇게 다채로운 반응을 보여줄만한 대상은 그녀를 제외하면 한 명 밖에 없었으니까.
"아. 아하. 그런 거였어?"
"뭐가."
"그거 박사가 그린 거야?"
시가 샐쭉하니 그녀를 흘겨보고는 몸을 홱 돌려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니엔에게서 뺏어든 스케치북을 소중하게 무릎 위에 올려두는 것을 보니, 굳이 방금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어보였다.
"뭐야. 난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네? 선물도 받고."
"곧 버릴 거야.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 나빠."
어라.
방금 말을 꺼낼 때 만큼은 평소의 독기가 확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박사 얘기만 나오면 늘 올리고 다니는 단단한 벽이 허물어지는 녀석인데.
"왜 기분이 나빠지는데?"
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꾹 다물었다.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예전부터 시는 진짜로 기분이 나빠지면 항상 이 상태가 되어버리곤 했다.
주로 자기가 부끄러운 이야기를 억지로 캐내려고 하면 이런 반응이 나왔지.
여기까지 온다면 니엔으로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로 완고하게 그녀를 무시해버린다.
"그래. 그럼 박사한테 가서 물어봐야겠다."
물론 그건 평소대로의 이야기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먹힐 만한 카드가 한 장 있었다.
그렇게 말을 꺼내자마자 시가 고개를 홱 돌리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그걸 니가 왜 물어봐."
음.
입질이 온다.
예상대로 이 건은 '남한테 얘기하면 쪽팔려 죽는 일'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사건인가 보다.
그리고 니엔의 예상대로라면, 시는 그런 일을 남이 이야기하게 두느니 차라리 자기가 실토하는 타입이다.
"음, 내 동생을 기분 나쁘게 만든 놈팽이를 호되게 질책하기 위해?"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니까 괜히 참견 하지 ㅁ..."
"응! 알았어! 지금 물어보고 올게!"
"...아. 아아! 아아아아아! 알았어! 얘기해줄 테니까 닥치고 앉아!"
결국.
니엔은 거의 입에서 용암이라도 토해낼 만큼 얼굴이 시뻘개진 동생의 앞에 빙글거리며 착석할 수 있었다.
물론, 시가 입을 연 것은 니엔이 절대로 소문 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20번도 넘게 맹세한 이후였다.
◆
"후..."
시가 마지막 획을 그려넣은 붓질을 마무리하자, 어느 순간 다가온 건지 박사가 컵을 슬쩍 내밀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차가 담겨있었다.
따뜻한 정도를 보니 방금 우려온 것이다.
"...고마워."
시가 조용히 감사를 표하자, 박사가 목례하고서는 몸을 돌려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각종 도구들을 늘어놓은 그녀의 주변 못지 않게 온갖 서류들로 엉망진창인 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진이 빠질 정도로 격무에 시달리는 것이 틀림없겠지.
그런 와중에도 용케 자신을 챙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
박사가 건네준 차를 홀짝거리며, 시는 조용히 업무를 처리하는 박사를 관찰했다.
새삼 생각하는 건데.
이 차 말인데.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좋다고. 항상.'
시는 너무 뜨거운 차를 싫어했다.
하지만 미지근한 차는 더더욱 싫어했다.
그녀가 선호하는 것은 자신의 까다로운 성미만큼이나 대단히 맞추기 어려운, 그 폭이 좁은 특정 온도 뿐이었지만.
저 남자는 항상 정확하게 그 구간을 잡아내곤 했다.
그것도 이번엔 자기가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 때에 맞춰서 가져오고 말이야.
마치 언제쯤이면 완성하겠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 처럼.
"..."
수완이 좋은 남자다. 끔찍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관류해온 그녀로서도 이런 인간은 처음 만나볼 만큼.
말은 하루에 한 두 마디나 할까 싶을만큼 과묵했지만,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통달해 있는 것 같은 남자였다.
로도스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절머리를 내고 도망칠 만큼 고약한 성미를 가진 시조차도, 이 남자에게는 어느 순간부터 전혀 심술을 부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할 정도였으니.
애초에, 자신은 지금 저 남자가 어시스턴트로 삼아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그림만 그려대고 있는데도, 여지껏 자신에게 뭐라 말 한 마디 한 적도 없다.
오히려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도와주었으면 도와주었지.
'...재수 없어.'
괜히 짜증이 나서 일부러 그런 식으로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그 한 마디 이후로는 전혀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서 욕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하루가 지날수록 싫어할만한 점은 줄여오고, 좋아할만한 점은 늘려오는 남자를 어떻게 헐뜯을 수 있단 말인가.
ㅉ
그래서.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시는 이 남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어떤 것을 계기로 그렇게 되었냐고 한다면 그녀로서도 대답하기 곤궁하겠지.
그냥. 어느 순간부터.
모래에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완고한 절벽이 포기하지 않고 몰아치는 파도에 결국은 깎여나가는 것처럼.
이 남자가 은은하게 뿌리는 편안함에 자기도 모르게 감화되었다고 해야 할까.
"..."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고, 슬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겠다.
"저기, 박사."
그리고 그 사실을 보고하려고 박사를 부르자마자, 박사가 화들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뭐야? 왜 그래?"
바위나 다름없이 항상 무뚝뚝한 남자가 저렇게 놀라는 것을 보니, 괜히 호기심이 동한다.
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사의 책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박사가 뭔가를 급하게 서랍에 집어넣었다.
"...흠."
시가 콧숨을 짧게 내뱉으며 허리에 손을 짚었다.
"저기. 박사. 그렇게 굴 거면 처음부터 티를 내질 말던가. 뭔데 그렇게 숨기는 거야, 궁금하게."
박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별 것 아니라는 뜻이겠지.
"뭔데?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다시 고개가 도리도리.
자신이 알아도 되는 것이면 로도스의 기밀 같은 것은 또 아닌 모양이다.
시가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자신에게 숨길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음. 설마 싶긴 하지만.
"혹시 그... 춘화 같은 거?"
좀 더 격렬하게 도리도리.
자신을 뭘로 보냐는 뜻이렸다.
"..."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시는 박사가 방금 닫은 서랍을 다짜고짜 벌컥 열어젖혔다.
"...! ....!!"
박사가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시는 이미 그 안에 있던 물건을 꺼내들던 참이었다.
"...그림?"
스케치북에 연속으로 그려진 크로키였다.
전문가 중에서도 꼭대기에 앉아있는 그녀가 아니더라도 엉성하다고 생각할 만큼 선들이 누덕누덕 기워져 있는 그림들.
박사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축 늘어졌다.
아마 이런 그림을 그녀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지.
"흠."
하지만 시는 짧은 날숨을 한 번 내뱉더니, 박사가 스케치북을 꽉꽉 채우면서 그린 그림들을 모두 훑어보았다.
당장 비웃음을 살 거란 박사의 예상과는 달리 더 없이 진지한 눈이었다.
"잘 그렸네."
"...?"
"딱히 이러쿵저러쿵 품평할 생각은 없어. 네가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건 오롯이 네 것이니까. 네가 애정을 담아서 그리고 싶은 걸 그렸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박사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는 동안 시는 다시 스케치북의 첫 장부터 천천히 그림들을 살폈다.
전부 똑같은 대상을 그린 그림들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녀는 그림의 대가다.
화가가 이걸 그릴 때, 어떤 마음으로 그렸는지. 어떤 것을 그렸는지. 무엇을 그리고 싶었는지 정도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너, 이 녀석 엄청 좋아하는구나?"
이 녀석이라고 함은 당연히 그림의 모델에 대한 이야기였다.
박사가 몸을 움찔 떨었다.
"글쎄. 하지만 그렇게 성격이 좋아보이는 녀석은 아니네. 제멋대로에, 괴팍하고, 남들이랑 어울리기 싫어하는데다가, 뭐든지 천상천하 유아독존... 넌 어쩌다 이런 녀석을 좋아하게 된 거야?"
그녀가 대상에 대한 해석을 늘어놓으면 늘어놓을수록, 박사의 시선이 점점 기묘해졌다.
상념에 몰입한 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래도 뭔가 한 가지는 기가 막히게 잘 할 것처럼 느껴지고. 그리고, 음..."
해석을 이어가려던 시가 갑자기 입을 딱 다물었다.
박사가 의아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길이로 침묵이 흐르고, 이내 시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자구나."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시가 스케치북을 닫았다.
표정에는 평소에 띄우고 다니는 무심한 무표정보다 훨씬 더 묵직한 그림자가 깔려있었다.
틀림없이, 끔찍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 뭐. 그럴수도 있지."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시에게, 박사는 당황하면서도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갔다.
"응? 뭐?"
박사가 열심히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준다고? 이걸 나한테?"
시가 난감한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내려다보았다.
이걸 받는다고 해서 자신한테 무슨 득이 있을까 싶지만.
필사적으로 메달리는 박사를 보니 안 받는 것도 미묘하겠단 생각도 같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
결국, 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받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
"이게 전부야. 그러니까 다 들었으면 내 방에서 썩 ㄲ.... 왜 그렇게 웃고 있는데?"
"ㅁ, 멍청, 내 동생이지만, 진짜, 아, 아하하하하!"
배를 붙잡고 한참동안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니엔은, 시가 진지하게 무기를 뽑아드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할 때쯤에야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한테 홀라당 넘어간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셨다 그거지?"
"...절대 아니고, 절대 아니지만. 대충은 비슷해."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그 남자가 주는 선물을 차마 거절할 수는 없어서, 그렇게 짜증이 나도 그걸 결국엔 받아온 거고?"
"...그래."
"거기에다가 아무튼 선물이긴 선물이라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거고?"
"..."
입을 꾹 다무는 시를 보고, 니엔은 다시 박장대소했다.
다행히, 니엔은 시가 검으로 손을 가져가기 직전에 입을 열 수 있었다.
"그거 너잖아."
"뭐?"
"박사가 그린 거. 너잖아."
무슨 소리지.
제멋대로에, 괴팍하고, 남들이랑 어울리기 싫어하는데다가, 뭐든지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여자가 자신이라고?
"어. 그거 너야."
"..."
그러고 보니.
자신이 좀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시는 이전에 자신이 박사의 그림에 대해 내렸던 평가를 떠올렸다.
'요약하면...'
박사는.
자신을 아주 아주 좋아한다는 뜻이군.
음.
그렇단 말이지.
"..."
시는 심호흡을 했다.
"동생."
"..."
"동생. 들려? 얼굴 한 번 찌르면 빨간색으로 즙 나오겠다?"
"...나가. 진짜로. 이제부터 그릴 게 있으니까."
"그래? 박사한테 답례라도 하려고?"
시는 대답하지 않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니엔은 고함을 치는 것 보다도 더 큰 긍정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힘 내, 시."
그렇게 중얼거린 니엔이 조용히 방을 나섰다.
얼굴에는 신난 미소가 큼지막하게 걸려있었다.
그거야.
지금부터 아주 일이 재미있어질 예정이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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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이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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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첸 야설쓰던 게이임? 필력 여전히 ㅆㅅㅌㅊ노
오랜만에 보는 핲갤 소설이라 더 재밌네
와 무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