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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
한 주나 두 주에 한 번씩, 레나에게 아로마테라피를 받는 대신 온실의 일을 도와준 것도 몇 번째일까. 켈시도 내가 온실 일을 도와주며 체력이 붙고, 일 효율도 생긴다는 걸 안 이후로 무리하게 휴일이 없는 일을 짜 주지 않기 시작했다.
덕분에 포덴코에게, 그리고 레나에게 엄한 지도를 받고, 그때마다 땀과 흙으로 목욕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저 둘처럼 전문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손끝에서 자라나는 꽃의 생명을, 그 꽃을 바탕으로 피어나는 또 다른 작품의 무게를 어렴풋이 알아갈 즈음의 일이었다.
그날은 포덴코 대신 레나가 온실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맞춰 왔구나. 매번 휴일마다 너무 고마운데."
"안녕하세요, 레나. 오늘은 웬일로 나와 있었네요."
"포덴코는 오늘 식당에 있어. 지금쯤 애들하고 열심히 과자 반죽 하고 있을 거야."
굼이 비정기적으로 여는 요리 교실 같은 건가 보다. 스즈란이나 샤마르라던지, 버블이라던지. 다들 호기심이 많을 나이대니 이것저것 해보고 싶을 테고, 그러면 손이 모자랄 테니 꽃이라던가 좀 들고 포덴코도 나간 모양이다.
"그럼 오늘 일 많아요?"
큰일인데. 매번 포덴코하고 나눠서 일하던 걸, 오늘은 혼자 해야 하나.둘이 해도 제시간 내에 못 끝내는 일이니, 하루 종일 매달려 있어도 안 될 거다. 또 레나한테 혼나겠는데.
"일이 많으면 포덴코를 식당에 안 보냈지. 오늘은 내 보조만 해 줘. 끝나고 포덴코 기다리면서 차라도 한 잔 하고."
한동안 손이 하나 더 늘었다 보니 조금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세상 즐거운 미소를 살짝 피워내고 돌아선 레나가 앞장서서 향기의 장막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 긴장하며 레나의 꼬리를 따라가길 5분 정도, 넓은 테이블 위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종이상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에요?"
하나를 열어 내용물을 보니 호박색의 끈적한 액체가 든 병들이 수십 개가 들어 있다. 어느 꽃에서 나온 꿀이었던가? 그런데 여기 온실에서 꿀을 생산할 정도로 벌을 키우는 것 같진 않았는데.
"성장 촉진제. 내가 앞장서면서 죽은 잎 자르고 벌레 잡을 거니까, 꼭지 자르고 작업 끝난 화분에 꽂아주면 돼. 바닥에 안 흘리게 조심하고. 그것도 꽃으로 만든 거야. 헛되게 흘리면 너무 아깝지 않겠어?"
또 꽃으로 만들었다니. 나중엔 일용품도 꽃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진짜 가볍게 못 쓸 것 같다. 레나는 일상적이라는 듯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도구를 걸어놓은 벽을 뚫어져라 살펴보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멍하니 보던 그때, 금방 시선을 알아챘는지 레나가 이쪽을 보고는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를 한숨이 나왔다.
"뭐 할 말이라도 있니?"
"아니요."
"그럼 말 못할 고민이라던가?"
"어...."
있지만 당사자한테는 정말로 말 못할 고민이라 그저 웃어넘겼다.
레나. 꽃. 포덴코....는 과자 만들러 갔지.
"레나."
"응?"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문득 방금 열었던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촉....뭐라구요?"
"촉진제. 약이라고 해도 돼. 이게 왜?"
"이거 아까 꽃으로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그럼 이걸 만들기 위해 키우는 꽃도 있어요?"
"그건 아니지. 꽃 부분 말고 줄기나 뿌리를 쓰는 것도 있고, 아무리 우리가 잘 키워도 이건 못 쓰겠다 싶은 꽃도 나오니까 그걸 가공해서 다음 꽃을 키울 때 쓰는 거야. 그러고도 남으면 태워서 비료로 써도 되고....가위는 이거 쓰면 되겠다."
어쨌든 버려질 것들로 다음 꽃들을 키우는 데에 들어가는 것이 반복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백파이프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농사 지을 때도 못 쓰게 된 작물을 다음 농사 지을 때 거름으로 쓴다던가.
레나에게 작은 가위를 받고, 구석에 세워져 있던 작은 수레에다가 촉진제 상자와 적당한 크기의 빈 상자를 실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오늘은 그렇게 조금 손발이 여유로운 정원일이 되었다. 레나 뒤를 따라가며 촉진제를 화분에 꽂다가, 레나가 하는 걸 어깨 너머로 보고 있자니 갑자기 돌아봐서 눈이 마주치기도 하고, 작업하는 바로 옆에 앉아 일상 이야기를 하기도 하면서 오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점심은 레나가 준비해온 빵과 우유로 간단히 하고, 잠깐 이야기하며 쉬었다가 다시 오전에 하던 일을, 그때보단 조금 빠르게 계속했다.별다른 일 없이 레나를 따라가고 있다가 무료함에 여기저기 시선을 돌려보던 중, 레나의 등 뒤에 있는 화분에서 죽은 잎이 눈에 들어왔다.
"...."
레나가 하던 걸 기억해서 흉내라도 내 보았더니 뭘 하고 있는가 하고 살짝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별 말을 하고 있지 않은 걸로 봐선 잘못 자른 게 아닌 모양이다. 다음으로 줄기와 잎 사이에 벌레가 있는지, 시간은 좀 걸리지만 유심히 보고 있자니 뒤에서 작은 손이 뻗어나왔다.
"....!"
뒤에서 안기는 것 같은 느낌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마 이제껏 레나하고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게 아닐까.하지만 그 착각도 잠시, 줄기 사이에 숨으려던 빨간 점 하나가 레나의 손가락 위에 올라앉은 채로 눈앞에 나타났다. 이게 무당벌레였던가.
"이건....잡으면 안 되지. 얘는 놓아주면 돼."
다시 한 번 레나의 손이 뻗어나오고 무당벌레는 다시 잎과 줄기 사이로 숨어들었다.
"계속하자, 박사."
"....네."
아무 일 없다는 듯 레나가 돌아섰고, 그제야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 잠깐 사이에 숨쉬는 것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눈치없이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이제 레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레나도 처음 몇 번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보러 오더니, 마지막 줄에 들어서서는 아예 신경쓰지도 않기 시작했다.
"빨리 배우네. 이렇다하게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잠깐 쉴 겸 일어서서 허리를 풀어주던 차에 레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칭찬에 감사하며 더더욱 신중하게 작업을 계속했고, 결국 예정보다 한 시간 반이나 일이 일찍 끝났다.
"고마워, 박사. 오늘 보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나란히 일할 줄은 몰랐네. 덕분에 많이 일찍 끝났어."
"방해는 안 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최소한 레나 하는 일에 지장이 안 가게만 할 생각이었는데 잘 된 모양이다.
"그러면....오늘 차는 꽃차로 해 볼까."
오늘 썼던 도구와 쓰레기 정리를 하는 사이 손을 씻은 레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유리로 된 주전자와 작은 램프를 가지고 테이블로 왔다. 이어 내가 손을 씻고 점심을 먹을 때 앉았던 자리에 앉았을 때는 주전자에 물과 함께 보라색 알갱이가 떠 있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천천히 돌고 있는 것을 보자니 점점 주전자에서도 향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꽃이에요?"
"이게 라벤더야."
왠지 익숙한 향이다. 여기 온실 말고, 왠지 레나가 퍼퓨머로서 작전에 나갔을 때 현장에서도 맡아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불과 초연 냄새, 후방에서는 약 냄새. 쇠가 부딪히고 흙먼지가 일어나는 와중에 났던 평화로운 향기라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다.
"작전 나갔을 때 주변에서 나던 꽃 향기가 이거에요?"
"맞아. 이게 있어서 같이 나가는 대원들이 좀 더 빨리 진정할 수 있는 거야."
조용한 온실의 테이블 주변에 평화로운 향기가 물결치듯 퍼진다. 여유로웠다곤 하지만 일 때문에 지쳐 있던 몸과 마음이 점차 가라앉는 느낌과 함께, 또 다시 소란스럽고 불의 냄새가 밀려드는 전장이 떠오른다. 천천히 돌고 있는 알갱이를 보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주변과는 반대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기묘한 상황이다. 그때 투명한 주전자의 맨 아래에서 점점 기포가 올라오고, 무색투명했던 물이 수면에서부터 물들기 시작한다. 알갱이는 보라색인데 물은 전혀 다른 색이다.
"이러고 있으니까 되게 편하지."
"네. 향도 좋고, 조용하고. 뭔가 분위기도 있는 것 같구요."
문득 레나가 주전자에 물을 올려놓고, 테이블 주변과 그 바깥쪽의 향기에 둘러싸여 느긋한 오후를 보내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조용한 공간에서, 해가 질 때까지 꽃을 바라보면서.
"그러고 보니 꽃차를 끓여준 적이 한 번도 없었구나."
"전에 포덴코가 끓여줘서 마셔본 적은 있는 것 같아요. 그때는 시원한 향이 나는 것 같았는데."
"페퍼민트겠네. 최근에 포덴코가 다른 화분 하나 해서 키우는 게 있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레나는 주전자 뚜껑을 열었다. 아직 물이 다 끓은 게 아닌데, 조금 덜 뜨겁게 마시려는 셈인가 싶었지만 기껏 끓고 있는 물 위로 새로 물을 더 붓는 것이 아닌가. 기포가 점점 커지면서 요동치려던 수면이 다시 잠잠해졌다.
"물 끓이려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 어느 정도 끓었으니까, 이제 꽃잎을 한 번 골고루 적셔주는 거야."
단순히 물 끓여서 우려내는 게 아니었구나. 그리고 저게 꽃잎이었다니.
"이것도 만들기 어려워요?"
"익숙해지면 할만한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손이 많이 가지. 꽃잎 따서 말리고, 한 번 펴 주고, 오븐에 넣어서 말리고 하는 걸 몇 번 반복해야 하거든."
"저는 못 하겠네요."
"나도 잘 하진 못하는걸. 포덴코가 꽃으로 뭘 만드는 건 나보다 훨씬 더 잘 하지. 나는 아로마오일이나 향료 정도지만. 그래서 온실 물려주는 게 더 기대돼."
주전자 뚜껑을 다시 닫은 레나가 한참 이쪽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떠오른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따라가 봐야 하나, 라고 생각하자마자 금방 돌아온 레나의 양손에는 유리로 된, 조금 넓은 잔이 들려 있다. 자리에 잔이 없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시라쿠사에 들렀을 때 사 와서는 한 번도 안 써봤는데, 오늘은 이걸로 할까."
"어....새 잔이라는 거에요?"
이제 보니 잔에 복잡하고 화려한 무늬가 세공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잔의 면 전체에 서로 다른 꽃들이 새겨져 있고, 한쪽에는 비둘기 두 마리가 그 위를 날고 있다. 레나 앞에 있는 잔도 거의 같은 모양이다.
시라쿠사가 아니면 이런 세밀한 유리 공예는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잔 하나 살 돈이면....내 월급의 어느 정도였지. 아무튼 가벼운 마음으로 잔 산다고 쓸 만한 금액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되게 예쁘지? 나도 한 번 씻어만 놓고 한참 아껴놓고 있던 거야."
"어어....네. 이런 잔 실물로는 처음 봐요. 처음 쓰는 건데 제가 써도 되는 거에요?"
"문제라도 있니?"
그렇게 또 물어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기회니까 군말하지 않고 감사히 쓰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
"아니요. 잘 쓸게요."
"그렇지."
다시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하고, 그제야 레나가 불을 끄고 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워주었다. 잔에 물이 채워지는 청명한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울리고, 주전자에 갇혀 있던 꽃향기가 잔 위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잔이 반 조금 더 차자 레나가 주전자를 치웠고, 투명한 호박색 수면 위에 옅게 피어오르는 김을 타고 짙은 보라색 점들이 춤을 추고 있다. 꽃차가 뜨거우니 불어서 마시라는 배려인지, 아니면 급하게 마시지 말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잘 마실게요."
"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시렴."
주전자를 다시 램프 위에 내려놓은 레나가 두 손으로 잔을 받쳐들었다. 잠깐 향을 음미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숨을 두 번 쉬고, 조심스럽게 잔을 기울여 수면에 입을 맞추었다. 그 우아하고도 물 흐르듯 이어지는 행동에, 손에 잔을 들고 있다는 것도, 잔이 생각보다 뜨겁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일하는 날에 이렇게 여유롭게 차 마시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차가 뜨거우니까 식는 걸 기다리면서 멍하니 있는 것도 좋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것도 좋고....박사는 어때? 차라던가 곧잘 마시니?"
혼잣말을 하는 듯 하다가 내게 바로 질문을 던졌지만서도, 이번에는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생각을 정리한 다음 대답할 수 있었다. 한 번 당했던 게 이런 때 도움이 되는구만.
"굳이 말하자면 커피겠죠. 일부러 차를 마신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일하면서는 떼어놓고 싶어도 뗄 수가 없지. 물론 그렇게 오만상을 다 해가면서 블랙으로 마셔도 잠이 쏟아지고, 오히려 속이 안 좋아지는 걸 생각하면 안 마시는 게 낫겠다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럼 비서로 올 때는 차를 가져오는 게 좋으려나?"
"이 이상 빚을 늘리고 싶진 않은데요...."
사실 지금까지 아로마테라피를 받은 걸 생각하면 몇 번 도와준 걸로는 아직도 모자라다고 생각한다. 이런 꽃들을 몇 송이나 썼을까, 그리고 그 향료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어갔을까.
"빚이라고 생각할 거 뭐 있어.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건데. 하는 김에 나는 꽃차 연습도 되고. 오히려 나는 박사가 정원 일 도와줘서 더 고마운걸. 같이 이야기할 시간도 늘어나고. 말동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은데."
그 말에 왠지 모르게 안도된다.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은 좋으니까 사적으로, 내지는 휴식 시간을 같이 보내곤 싶어도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종종 있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레나가 일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게 계속되다 보면 결국 사적으로 보내는 시간도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는 친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도 아직 긴가민가하다. 사실 레나가 이래저래 듣기 좋은 말을 하고는 있지만 그게 아로마테라피를 받는 손님이나, 내지는 직장 동료나 상사를 대하는 태도일 수 있으니.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되고서 보니, 나는 레나를 이성으로 보고 있지만 레나는 그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당장 몸이 닿는다거나 하는 것도 아로마테라피라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의도치 않은 사고가 있었다 하더라도 무심히 넘겼다거나. 그리고 아까 뒤에서 붙어서 손을 뻗은 것도 단순히 내가 앞에 있었을 뿐, 그게 어떤 모양새로 느껴질지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레나는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늘 차를 마시는 것도 그저 일이 빨리 끝났으니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 정도일 수 있고.
"왜 그러니?"
"....아니요."
이어지는 질문을 피하려 찻잔을 들고 홀짝였다. 라벤더 향기와 함께 산뜻한 바람이 코끝을 간질인다. 라벤더 말고도 허브 계열의 향초가 같이 들어간 모양이다.평소면 별거 아닌 이야기도 가볍게 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묘하게 불편한 느낌이 든다. 레나도 살짝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고.
"여기 온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네."
"그러게요. 작전이라던가 소란이라던가 엄청 많은 일들도 있었구요."
내가 기억을 되찾고 얼마 안 가서 레나가 메딕 오퍼레이터 퍼퓨머로서 여기 왔으니 시간이 그 정도나 된 셈이다.리유니온과의 전투가 끝나고 작은 소란 정도만 이어지고 있어서, 오퍼레이터들도 어느 정도 풀어지고 있는 차다.
"그러고 보니 레나는 이 일들 끝나면 어떻게 할 거에요?"
"어떤 일들?"
"일단 리유니온하고 전투도 끝났고, 어디하고 크게 싸우고 있는 곳도 없으니까요. 미노스로 돌아가고 싶다고도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이렇다할 이변이 없다면 나는 로도스에 계속 있고 싶어. 이렇다하게 갈 곳도 없고."
"미노스에 가족들이 있지 않았어요? 안 가셔도 되는 거에요?"
"왜? 박사는 내가 떠났으면 하는 거야?"
"뭐....그건 아니지만, 갈 곳이 없다고 한 게 좀 걸려서요."
"그게 말이지...."
레나가 처음으로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 잠깐 사이에 여유로웠던 분위기가 확 가라앉은 걸로 봐선, 말실수라도 한 게 아닐까.
"뭐, 아직 글로리아 일도 남았으니까. 다른 일도 하나 있고."
"다른 일이요? 그건...."
"다녀왔어요, 선생님!"
기묘한 타이밍에 조용한 분위기가 깨지고, 꽃 향기에 갓 구운 쿠키 향기가 섞여 스며들기 시작했다. 한 나절 동안 주방에서 과자 만드는 일을 돕던 포덴코가 돌아온 것이었다.
"어머, 마침 잘 됐구나. 포덴코, 타이밍 좋게 왔으니, 쿠키는 여기 내려놓고 가서 네 잔을 들고 오렴."
"꽃차 끓이셨네요? 금방 올게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온화한 향기가 다시 온실에 퍼졌다. 잠깐, 레나가 조금 전에 보였던 무거운 표정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잠시, 금방 테이블로 돌아온 포덴코가 티타임에 끼어들면서 화제는 포덴코로 넘어갔다.
다음 날 밤 열두 시.
누군가에겐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고,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기도 하면서, 아주 바빠지기도 하는 기묘한 시간이다. 날짜가 바뀌는데도 사실 그 순간으로 보면 무언가 바뀐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건 신기하다.
오늘 비서 오퍼레이터였던 프틸롭시스는 이미 퇴근했고, 사실 오늘 안에 처리했어야 할 일은 끝났지만 한 시간 정도만 더 하자는 생각으로 아직 자리에 앉아 있다. 몸 쓰는 일 때문에 체력이 붙긴 붙은 모양이다.
결국 레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은 채로 어제 오늘이 지나갔다. 한동안은 같이 일하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걸까.아니면 누군가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이라도 조금 구하는 게 좋으려나. 인간 관계에 대한 일이니 결국 정하는 건 내가 해야겠지만.
잠깐 몸을 풀고 일어서서 뜨거운 커피를 타고 있던 그때, 찬 바람 한 줄기가 실내로 들어왔다. 이 세상의 본질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은 새빨간 발걸음이 실내에 울려 돌아보니 빨간 코트를 걸친 메신저 오퍼레이터가 창문을 닫고 있었다.
"불 켜진 거 보고 들어왔어. 안녕, 박사."
머리카락과 어깨에 새하얗게 앉았던 얼음이 녹아 그림자가 지는 와중에, 이미 새하얗게 변해버린 고글을 벗으며 안젤리나가 인사했다.
"늦게까지 고생 많네. 날도 추운데."
"응, 엄청 추워. 그래도 마침 박사한테 바로 줄 게 있던 차였거든. 원래 내일 아침에 주려고 했던 거지만. 컬럼비아 출신 감염자 자매인데 로도스 아일랜드에 오고 싶다고 해서 지원서류 받아온 거야."
안젤리나는 얼어붙어 잘 열리지 않는 가방을 열어, 빨간색 밀랍으로 봉된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이러면 이제 내일 일어나자마자 바로 라이타니아로 갈 수 있겠어. 조금 더 잘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춥겠다. 코코아라도 마실래?"
"진짜?"
발갛게 물든 얼굴 위로 환희가 피어났다. 어차피 물 끓이던 중이었으니 한 잔 더 늘어난다고 문제될 건 없겠지.물을 더 끓이는 사이 안젤리나는 코트와 가방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난방기 앞 소파에 가서 앉았다.
"일부러 갖다 주고, 고맙다. 내일 아침에 켈시한테 넘겨줄게. 코코아 여기."
"와아, 잘 마실게."
일이 좀 남았지만 애를 앉혀놓고 할 수도 없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며 나도 안젤리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손으로 컵을 잡고 코코아를 입김으로 식히고 있었는데, 그 짧은 사이에 입술을 새로 바른 모양이다. 코코아에 입김을 부는 와중에 그쪽만 선명하게 보인다. 아무리 밖에서 한참 있었다지만 금방 들어갈 건데, 변함없이 외모 관리에 엄청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근데 매번 일이 이렇게 많아서 어떻게 해? 운동이라던가 할 시간도 없을 것 같은데."
"가끔 몸 쓰는 일 하고 있으니까. 오늘 일 해 보니까 체력 늘어났다는 걸 알겠더라."
"오오, 진짜? 그럼 같이 밤새서 떠들래?"
"너 내일 라이타니아 간다며."
대답 대신 안젤리나는 싱긋 웃고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조금 뜨거운지 금방 입술에서 뗐지만.
생각해 보니 안젤리나는 한참 또래 친구들하고 있으면서 이런저런 시간을 보냈을 터다. 사춘기가 끝나가는 시기였던 만큼 이성에 대한 관심도 있었을 테니, 여자 입장에서 이성과 관계를 쌓아나가는 방법도 어느 정도 알지 않았을까.
마침 괜찮은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물어서, 부족한 게 있다면 갖춰나가는 시간을 좀 더 챙기는 게 나을 것 같다.내일 비서 오퍼레이터는 사리아. 이 사람은 담을 쌓고 살았을 것 같으니 안 되겠지.
"뭐 좀 하나 묻고 싶은데."
"응? 뭔데? 이번에는 어디가 궁금해?"
안젤리나는 이번에도 다른 도시 이야기일까 하며 평소 내가 말을 걸 때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있잖아."
그 말에 코코아 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려던 안젤리나가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거렸다. 새하얀 김 사이로 그 나이대 산뜻한 미소 대신 놀란 표정을 짓고, 빨간 눈이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이내 금방 장난스러운 미소로 바뀌었다.
"박사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흐흥, 어떤 사람일까. 그래서?"
"고백을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타이밍이라던가, 말이라던가."
그 얼굴에서 다시 미소가 걷히고 잠깐 생각에 잠겼는지 눈동자가 위쪽을 향했다. 무언가 내 머리 위를 보는 것처럼, 이리저리 생각에 잠기며 내 물음을 되풀이했다.
"고백을 한다면 어떻게....타이밍이나, 말이라던가. 고백을 한다면....고백....말이지."
망가진 축음기처럼.
"고백을 한다면 어떻게....그건 사실 사람에 따라 다른데. 고백받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고백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할 수 있는 거랑 그게 먹힐지 안 먹힐지 다 다르니까, 뾰족하게 이렇다 라고는 못 하겠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 안젤리나는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아는 건 그래도 좀 옛날 이야기겠지만....이거 하나는 확실해. 요즘 들어서는 고백이란 게, 관계의 시작이 아니라 확인인 거야."
"관계의 확인이라고?"
내가 알고 있던 것 아니면 동화 같은 데서 나오는 것과는 또 다르다.물론 동화도 너무 옛날에 나온 거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처음 보는 왕자가 처음 보는 공주한테 청혼한다던지.
"예전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나, 좀 본 적은 있어도 말 붙인 적 없는 사람한테 자기 마음을 전하고, 받아들여지면 거기서부터 서로 알아나간다고 했다더라고. 근데 요즘은 그게 아니라....둘이 눈이 맞고, 어느 정도 친해지면서 서로 알아가다가 어느 타이밍이 되어서야 고백을 하는 거야. 물론 그 정도로까지 친해져 있다면 거기서 조금 더 진전이 되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고백을 받는 쪽이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그 관계는 그대로 끝나는 거지."
너무 당연하다는 듯 안젤리나는 칼로 자르는 것처럼 분명히, 그리고 명료하게 대답했다.
"말 한번으로 어렵게 쌓은 관계가 그대로 끝난다니....그건...."
어떻게 보면 레나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두근거렸던 거라던지, 별거 아니지만 즐겁게 이야기한 것들도, 가끔 같이 일했던 시간마저도 전부 없던 일이 되는 셈이다. 그런 게 전부 없어지면, 레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쉬워하면서 정리할까, 아니면 가볍게, 깔끔히 털어버릴까.
"뭐....그렇기야 하지만, 사실 그렇게 고백을 하면 어떻게 되든 그전같은 관계가 되긴 힘들어. 그건 고백하는 쪽이 감당해야 하는 것도 맞아. 그래서 일부러 고백 안 하고 애만 태우는 사람도 있었어."
안젤리나는 코코아 잔을 다시 입술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로까지 친해져 있고, 한쪽이 언제든 반대쪽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내가 아는 건 그 정도였어. 물론 테라 전체가 전쟁터가 되어버리고 나선 좀 바뀌었겠지만."
"그럼 요즘은?"
"요즘은 모르겠어. 나도 이제 학생이 아니고....그대로 몇 개월이나 지났으니까. 로도스 아일랜드에 와서 또래 애들하고 만났지만서도, 그런 이야기 한 적은 한 번도 없고....아니, 이제 나한텐 그것도 사치지."
생각도 못한 말에 당황했다. 안젤리나가 이렇게나 주눅든 말을 하는 것은 처음 봤다.물론 나도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얘는 더더욱 한창 때다. 이성에 관심도 많을 시기고, 꾸미고 싶고, 최신 유행을 챙기고 싶은 나이대다.
"감염자가 되고서부턴....전부 내려놔야 했으니까. 복고풍 음악도, 최신 유행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게 다 버리고 혼자 빌딩 숲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이젠 나와 상관없는 소식들을 전하기 시작했거든."
....테라 전역을 시커먼 폭풍이 할퀴기 전까지는.
"그래도 그 사람은 감염자든 아니든 평등하게 마음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그 사람도 이미 누구한테 마음을 뺏겼더라고. 좋겠다. 그 누구는. 감염자가 아니니까 평범하게 연애 같은 것도 할 수 있는 거구나...."
망가진 축음기가 내는 가냘픈 소리는 점점 꺼져갔다. 테라의 모든 사람들이 원래의 삶을 잃어버렸던 그 순간을, 축음기는 마지막 힘을 다해 울부짖고 있었다.
안젤리나는 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코코아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지금 건 그냥 한 소리야.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라이타니아 가야 되니까, 먼저 들어갈게. 코코아 잘 마셨어, 박사."
"조심해서 다니고. 잘 자."
"나는 그렇게 쉽게 안 잡히는걸."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겨든 안젤리나가 문 앞으로 가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말고."
사무실 문은 소리없이 그 마지막 말을 잘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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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섭에서 레식 업데이트가 되면서 퍼퓨머 패러독스가 업데이트됐는데, 포덴코가 퍼퓨머 부르는 호칭이 언니더라.다시 써야되네 아 ㅋㅋㅋ
PC로 또 안올라간다
피드백은 더 환영
앞글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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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
한 주나 두 주에 한 번씩, 레나에게 아로마테라피를 받는 대신 온실의 일을 도와준 것도 몇 번째일까. 켈시도 내가 온실 일을 도와주며 체력이 붙고, 일 효율도 생긴다는 걸 안 이후로 무리하게 휴일이 없는 일을 짜 주지 않기 시작했다.
덕분에 포덴코에게, 그리고 레나에게 엄한 지도를 받고, 그때마다 땀과 흙으로 목욕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저 둘처럼 전문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손끝에서 자라나는 꽃의 생명을, 그 꽃을 바탕으로 피어나는 또 다른 작품의 무게를 어렴풋이 알아갈 즈음의 일이었다.
그날은 포덴코 대신 레나가 온실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맞춰 왔구나. 매번 휴일마다 너무 고마운데."
"안녕하세요, 레나. 오늘은 웬일로 나와 있었네요."
"포덴코는 오늘 식당에 있어. 지금쯤 애들하고 열심히 과자 반죽 하고 있을 거야."
굼이 비정기적으로 여는 요리 교실 같은 건가 보다. 스즈란이나 샤마르라던지, 버블이라던지. 다들 호기심이 많을 나이대니 이것저것 해보고 싶을 테고, 그러면 손이 모자랄 테니 꽃이라던가 좀 들고 포덴코도 나간 모양이다.
"그럼 오늘 일 많아요?"
큰일인데. 매번 포덴코하고 나눠서 일하던 걸, 오늘은 혼자 해야 하나.둘이 해도 제시간 내에 못 끝내는 일이니, 하루 종일 매달려 있어도 안 될 거다. 또 레나한테 혼나겠는데.
"일이 많으면 포덴코를 식당에 안 보냈지. 오늘은 내 보조만 해 줘. 끝나고 포덴코 기다리면서 차라도 한 잔 하고."
한동안 손이 하나 더 늘었다 보니 조금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세상 즐거운 미소를 살짝 피워내고 돌아선 레나가 앞장서서 향기의 장막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 긴장하며 레나의 꼬리를 따라가길 5분 정도, 넓은 테이블 위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종이상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에요?"
하나를 열어 내용물을 보니 호박색의 끈적한 액체가 든 병들이 수십 개가 들어 있다. 어느 꽃에서 나온 꿀이었던가? 그런데 여기 온실에서 꿀을 생산할 정도로 벌을 키우는 것 같진 않았는데.
"성장 촉진제. 내가 앞장서면서 죽은 잎 자르고 벌레 잡을 거니까, 꼭지 자르고 작업 끝난 화분에 꽂아주면 돼. 바닥에 안 흘리게 조심하고. 그것도 꽃으로 만든 거야. 헛되게 흘리면 너무 아깝지 않겠어?"
또 꽃으로 만들었다니. 나중엔 일용품도 꽃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진짜 가볍게 못 쓸 것 같다. 레나는 일상적이라는 듯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도구를 걸어놓은 벽을 뚫어져라 살펴보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멍하니 보던 그때, 금방 시선을 알아챘는지 레나가 이쪽을 보고는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를 한숨이 나왔다.
"뭐 할 말이라도 있니?"
"아니요."
"그럼 말 못할 고민이라던가?"
"어...."
있지만 당사자한테는 정말로 말 못할 고민이라 그저 웃어넘겼다.
레나. 꽃. 포덴코....는 과자 만들러 갔지.
"레나."
"응?"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문득 방금 열었던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촉....뭐라구요?"
"촉진제. 약이라고 해도 돼. 이게 왜?"
"이거 아까 꽃으로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그럼 이걸 만들기 위해 키우는 꽃도 있어요?"
"그건 아니지. 꽃 부분 말고 줄기나 뿌리를 쓰는 것도 있고, 아무리 우리가 잘 키워도 이건 못 쓰겠다 싶은 꽃도 나오니까 그걸 가공해서 다음 꽃을 키울 때 쓰는 거야. 그러고도 남으면 태워서 비료로 써도 되고....가위는 이거 쓰면 되겠다."
어쨌든 버려질 것들로 다음 꽃들을 키우는 데에 들어가는 것이 반복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백파이프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농사 지을 때도 못 쓰게 된 작물을 다음 농사 지을 때 거름으로 쓴다던가.
레나에게 작은 가위를 받고, 구석에 세워져 있던 작은 수레에다가 촉진제 상자와 적당한 크기의 빈 상자를 실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오늘은 그렇게 조금 손발이 여유로운 정원일이 되었다. 레나 뒤를 따라가며 촉진제를 화분에 꽂다가, 레나가 하는 걸 어깨 너머로 보고 있자니 갑자기 돌아봐서 눈이 마주치기도 하고, 작업하는 바로 옆에 앉아 일상 이야기를 하기도 하면서 오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점심은 레나가 준비해온 빵과 우유로 간단히 하고, 잠깐 이야기하며 쉬었다가 다시 오전에 하던 일을, 그때보단 조금 빠르게 계속했다.별다른 일 없이 레나를 따라가고 있다가 무료함에 여기저기 시선을 돌려보던 중, 레나의 등 뒤에 있는 화분에서 죽은 잎이 눈에 들어왔다.
"...."
레나가 하던 걸 기억해서 흉내라도 내 보았더니 뭘 하고 있는가 하고 살짝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별 말을 하고 있지 않은 걸로 봐선 잘못 자른 게 아닌 모양이다. 다음으로 줄기와 잎 사이에 벌레가 있는지, 시간은 좀 걸리지만 유심히 보고 있자니 뒤에서 작은 손이 뻗어나왔다.
"....!"
뒤에서 안기는 것 같은 느낌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마 이제껏 레나하고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게 아닐까.하지만 그 착각도 잠시, 줄기 사이에 숨으려던 빨간 점 하나가 레나의 손가락 위에 올라앉은 채로 눈앞에 나타났다. 이게 무당벌레였던가.
"이건....잡으면 안 되지. 얘는 놓아주면 돼."
다시 한 번 레나의 손이 뻗어나오고 무당벌레는 다시 잎과 줄기 사이로 숨어들었다.
"계속하자, 박사."
"....네."
아무 일 없다는 듯 레나가 돌아섰고, 그제야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 잠깐 사이에 숨쉬는 것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눈치없이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이제 레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레나도 처음 몇 번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보러 오더니, 마지막 줄에 들어서서는 아예 신경쓰지도 않기 시작했다.
"빨리 배우네. 이렇다하게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잠깐 쉴 겸 일어서서 허리를 풀어주던 차에 레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칭찬에 감사하며 더더욱 신중하게 작업을 계속했고, 결국 예정보다 한 시간 반이나 일이 일찍 끝났다.
"고마워, 박사. 오늘 보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나란히 일할 줄은 몰랐네. 덕분에 많이 일찍 끝났어."
"방해는 안 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최소한 레나 하는 일에 지장이 안 가게만 할 생각이었는데 잘 된 모양이다.
"그러면....오늘 차는 꽃차로 해 볼까."
오늘 썼던 도구와 쓰레기 정리를 하는 사이 손을 씻은 레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유리로 된 주전자와 작은 램프를 가지고 테이블로 왔다. 이어 내가 손을 씻고 점심을 먹을 때 앉았던 자리에 앉았을 때는 주전자에 물과 함께 보라색 알갱이가 떠 있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천천히 돌고 있는 것을 보자니 점점 주전자에서도 향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꽃이에요?"
"이게 라벤더야."
왠지 익숙한 향이다. 여기 온실 말고, 왠지 레나가 퍼퓨머로서 작전에 나갔을 때 현장에서도 맡아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불과 초연 냄새, 후방에서는 약 냄새. 쇠가 부딪히고 흙먼지가 일어나는 와중에 났던 평화로운 향기라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다.
"작전 나갔을 때 주변에서 나던 꽃 향기가 이거에요?"
"맞아. 이게 있어서 같이 나가는 대원들이 좀 더 빨리 진정할 수 있는 거야."
조용한 온실의 테이블 주변에 평화로운 향기가 물결치듯 퍼진다. 여유로웠다곤 하지만 일 때문에 지쳐 있던 몸과 마음이 점차 가라앉는 느낌과 함께, 또 다시 소란스럽고 불의 냄새가 밀려드는 전장이 떠오른다. 천천히 돌고 있는 알갱이를 보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주변과는 반대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기묘한 상황이다. 그때 투명한 주전자의 맨 아래에서 점점 기포가 올라오고, 무색투명했던 물이 수면에서부터 물들기 시작한다. 알갱이는 보라색인데 물은 전혀 다른 색이다.
"이러고 있으니까 되게 편하지."
"네. 향도 좋고, 조용하고. 뭔가 분위기도 있는 것 같구요."
문득 레나가 주전자에 물을 올려놓고, 테이블 주변과 그 바깥쪽의 향기에 둘러싸여 느긋한 오후를 보내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조용한 공간에서, 해가 질 때까지 꽃을 바라보면서.
"그러고 보니 꽃차를 끓여준 적이 한 번도 없었구나."
"전에 포덴코가 끓여줘서 마셔본 적은 있는 것 같아요. 그때는 시원한 향이 나는 것 같았는데."
"페퍼민트겠네. 최근에 포덴코가 다른 화분 하나 해서 키우는 게 있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레나는 주전자 뚜껑을 열었다. 아직 물이 다 끓은 게 아닌데, 조금 덜 뜨겁게 마시려는 셈인가 싶었지만 기껏 끓고 있는 물 위로 새로 물을 더 붓는 것이 아닌가. 기포가 점점 커지면서 요동치려던 수면이 다시 잠잠해졌다.
"물 끓이려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 어느 정도 끓었으니까, 이제 꽃잎을 한 번 골고루 적셔주는 거야."
단순히 물 끓여서 우려내는 게 아니었구나. 그리고 저게 꽃잎이었다니.
"이것도 만들기 어려워요?"
"익숙해지면 할만한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손이 많이 가지. 꽃잎 따서 말리고, 한 번 펴 주고, 오븐에 넣어서 말리고 하는 걸 몇 번 반복해야 하거든."
"저는 못 하겠네요."
"나도 잘 하진 못하는걸. 포덴코가 꽃으로 뭘 만드는 건 나보다 훨씬 더 잘 하지. 나는 아로마오일이나 향료 정도지만. 그래서 온실 물려주는 게 더 기대돼."
주전자 뚜껑을 다시 닫은 레나가 한참 이쪽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떠오른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따라가 봐야 하나, 라고 생각하자마자 금방 돌아온 레나의 양손에는 유리로 된, 조금 넓은 잔이 들려 있다. 자리에 잔이 없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시라쿠사에 들렀을 때 사 와서는 한 번도 안 써봤는데, 오늘은 이걸로 할까."
"어....새 잔이라는 거에요?"
이제 보니 잔에 복잡하고 화려한 무늬가 세공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잔의 면 전체에 서로 다른 꽃들이 새겨져 있고, 한쪽에는 비둘기 두 마리가 그 위를 날고 있다. 레나 앞에 있는 잔도 거의 같은 모양이다.
시라쿠사가 아니면 이런 세밀한 유리 공예는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잔 하나 살 돈이면....내 월급의 어느 정도였지. 아무튼 가벼운 마음으로 잔 산다고 쓸 만한 금액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되게 예쁘지? 나도 한 번 씻어만 놓고 한참 아껴놓고 있던 거야."
"어어....네. 이런 잔 실물로는 처음 봐요. 처음 쓰는 건데 제가 써도 되는 거에요?"
"문제라도 있니?"
그렇게 또 물어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기회니까 군말하지 않고 감사히 쓰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
"아니요. 잘 쓸게요."
"그렇지."
다시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하고, 그제야 레나가 불을 끄고 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워주었다. 잔에 물이 채워지는 청명한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울리고, 주전자에 갇혀 있던 꽃향기가 잔 위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잔이 반 조금 더 차자 레나가 주전자를 치웠고, 투명한 호박색 수면 위에 옅게 피어오르는 김을 타고 짙은 보라색 점들이 춤을 추고 있다. 꽃차가 뜨거우니 불어서 마시라는 배려인지, 아니면 급하게 마시지 말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잘 마실게요."
"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시렴."
주전자를 다시 램프 위에 내려놓은 레나가 두 손으로 잔을 받쳐들었다. 잠깐 향을 음미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숨을 두 번 쉬고, 조심스럽게 잔을 기울여 수면에 입을 맞추었다. 그 우아하고도 물 흐르듯 이어지는 행동에, 손에 잔을 들고 있다는 것도, 잔이 생각보다 뜨겁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일하는 날에 이렇게 여유롭게 차 마시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차가 뜨거우니까 식는 걸 기다리면서 멍하니 있는 것도 좋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것도 좋고....박사는 어때? 차라던가 곧잘 마시니?"
혼잣말을 하는 듯 하다가 내게 바로 질문을 던졌지만서도, 이번에는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생각을 정리한 다음 대답할 수 있었다. 한 번 당했던 게 이런 때 도움이 되는구만.
"굳이 말하자면 커피겠죠. 일부러 차를 마신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일하면서는 떼어놓고 싶어도 뗄 수가 없지. 물론 그렇게 오만상을 다 해가면서 블랙으로 마셔도 잠이 쏟아지고, 오히려 속이 안 좋아지는 걸 생각하면 안 마시는 게 낫겠다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럼 비서로 올 때는 차를 가져오는 게 좋으려나?"
"이 이상 빚을 늘리고 싶진 않은데요...."
사실 지금까지 아로마테라피를 받은 걸 생각하면 몇 번 도와준 걸로는 아직도 모자라다고 생각한다. 이런 꽃들을 몇 송이나 썼을까, 그리고 그 향료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어갔을까.
"빚이라고 생각할 거 뭐 있어.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건데. 하는 김에 나는 꽃차 연습도 되고. 오히려 나는 박사가 정원 일 도와줘서 더 고마운걸. 같이 이야기할 시간도 늘어나고. 말동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은데."
그 말에 왠지 모르게 안도된다.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은 좋으니까 사적으로, 내지는 휴식 시간을 같이 보내곤 싶어도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종종 있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레나가 일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게 계속되다 보면 결국 사적으로 보내는 시간도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는 친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도 아직 긴가민가하다. 사실 레나가 이래저래 듣기 좋은 말을 하고는 있지만 그게 아로마테라피를 받는 손님이나, 내지는 직장 동료나 상사를 대하는 태도일 수 있으니.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되고서 보니, 나는 레나를 이성으로 보고 있지만 레나는 그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당장 몸이 닿는다거나 하는 것도 아로마테라피라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의도치 않은 사고가 있었다 하더라도 무심히 넘겼다거나. 그리고 아까 뒤에서 붙어서 손을 뻗은 것도 단순히 내가 앞에 있었을 뿐, 그게 어떤 모양새로 느껴질지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레나는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늘 차를 마시는 것도 그저 일이 빨리 끝났으니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 정도일 수 있고.
"왜 그러니?"
"....아니요."
이어지는 질문을 피하려 찻잔을 들고 홀짝였다. 라벤더 향기와 함께 산뜻한 바람이 코끝을 간질인다. 라벤더 말고도 허브 계열의 향초가 같이 들어간 모양이다.평소면 별거 아닌 이야기도 가볍게 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묘하게 불편한 느낌이 든다. 레나도 살짝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고.
"여기 온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네."
"그러게요. 작전이라던가 소란이라던가 엄청 많은 일들도 있었구요."
내가 기억을 되찾고 얼마 안 가서 레나가 메딕 오퍼레이터 퍼퓨머로서 여기 왔으니 시간이 그 정도나 된 셈이다.리유니온과의 전투가 끝나고 작은 소란 정도만 이어지고 있어서, 오퍼레이터들도 어느 정도 풀어지고 있는 차다.
"그러고 보니 레나는 이 일들 끝나면 어떻게 할 거에요?"
"어떤 일들?"
"일단 리유니온하고 전투도 끝났고, 어디하고 크게 싸우고 있는 곳도 없으니까요. 미노스로 돌아가고 싶다고도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이렇다할 이변이 없다면 나는 로도스에 계속 있고 싶어. 이렇다하게 갈 곳도 없고."
"미노스에 가족들이 있지 않았어요? 안 가셔도 되는 거에요?"
"왜? 박사는 내가 떠났으면 하는 거야?"
"뭐....그건 아니지만, 갈 곳이 없다고 한 게 좀 걸려서요."
"그게 말이지...."
레나가 처음으로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 잠깐 사이에 여유로웠던 분위기가 확 가라앉은 걸로 봐선, 말실수라도 한 게 아닐까.
"뭐, 아직 글로리아 일도 남았으니까. 다른 일도 하나 있고."
"다른 일이요? 그건...."
"다녀왔어요, 선생님!"
기묘한 타이밍에 조용한 분위기가 깨지고, 꽃 향기에 갓 구운 쿠키 향기가 섞여 스며들기 시작했다. 한 나절 동안 주방에서 과자 만드는 일을 돕던 포덴코가 돌아온 것이었다.
"어머, 마침 잘 됐구나. 포덴코, 타이밍 좋게 왔으니, 쿠키는 여기 내려놓고 가서 네 잔을 들고 오렴."
"꽃차 끓이셨네요? 금방 올게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온화한 향기가 다시 온실에 퍼졌다. 잠깐, 레나가 조금 전에 보였던 무거운 표정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잠시, 금방 테이블로 돌아온 포덴코가 티타임에 끼어들면서 화제는 포덴코로 넘어갔다.
다음 날 밤 열두 시.
누군가에겐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고,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기도 하면서, 아주 바빠지기도 하는 기묘한 시간이다. 날짜가 바뀌는데도 사실 그 순간으로 보면 무언가 바뀐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건 신기하다.
오늘 비서 오퍼레이터였던 프틸롭시스는 이미 퇴근했고, 사실 오늘 안에 처리했어야 할 일은 끝났지만 한 시간 정도만 더 하자는 생각으로 아직 자리에 앉아 있다. 몸 쓰는 일 때문에 체력이 붙긴 붙은 모양이다.
결국 레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은 채로 어제 오늘이 지나갔다. 한동안은 같이 일하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걸까.아니면 누군가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이라도 조금 구하는 게 좋으려나. 인간 관계에 대한 일이니 결국 정하는 건 내가 해야겠지만.
잠깐 몸을 풀고 일어서서 뜨거운 커피를 타고 있던 그때, 찬 바람 한 줄기가 실내로 들어왔다. 이 세상의 본질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은 새빨간 발걸음이 실내에 울려 돌아보니 빨간 코트를 걸친 메신저 오퍼레이터가 창문을 닫고 있었다.
"불 켜진 거 보고 들어왔어. 안녕, 박사."
머리카락과 어깨에 새하얗게 앉았던 얼음이 녹아 그림자가 지는 와중에, 이미 새하얗게 변해버린 고글을 벗으며 안젤리나가 인사했다.
"늦게까지 고생 많네. 날도 추운데."
"응, 엄청 추워. 그래도 마침 박사한테 바로 줄 게 있던 차였거든. 원래 내일 아침에 주려고 했던 거지만. 컬럼비아 출신 감염자 자매인데 로도스 아일랜드에 오고 싶다고 해서 지원서류 받아온 거야."
안젤리나는 얼어붙어 잘 열리지 않는 가방을 열어, 빨간색 밀랍으로 봉된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이러면 이제 내일 일어나자마자 바로 라이타니아로 갈 수 있겠어. 조금 더 잘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춥겠다. 코코아라도 마실래?"
"진짜?"
발갛게 물든 얼굴 위로 환희가 피어났다. 어차피 물 끓이던 중이었으니 한 잔 더 늘어난다고 문제될 건 없겠지.물을 더 끓이는 사이 안젤리나는 코트와 가방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난방기 앞 소파에 가서 앉았다.
"일부러 갖다 주고, 고맙다. 내일 아침에 켈시한테 넘겨줄게. 코코아 여기."
"와아, 잘 마실게."
일이 좀 남았지만 애를 앉혀놓고 할 수도 없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며 나도 안젤리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손으로 컵을 잡고 코코아를 입김으로 식히고 있었는데, 그 짧은 사이에 입술을 새로 바른 모양이다. 코코아에 입김을 부는 와중에 그쪽만 선명하게 보인다. 아무리 밖에서 한참 있었다지만 금방 들어갈 건데, 변함없이 외모 관리에 엄청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근데 매번 일이 이렇게 많아서 어떻게 해? 운동이라던가 할 시간도 없을 것 같은데."
"가끔 몸 쓰는 일 하고 있으니까. 오늘 일 해 보니까 체력 늘어났다는 걸 알겠더라."
"오오, 진짜? 그럼 같이 밤새서 떠들래?"
"너 내일 라이타니아 간다며."
대답 대신 안젤리나는 싱긋 웃고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조금 뜨거운지 금방 입술에서 뗐지만.
생각해 보니 안젤리나는 한참 또래 친구들하고 있으면서 이런저런 시간을 보냈을 터다. 사춘기가 끝나가는 시기였던 만큼 이성에 대한 관심도 있었을 테니, 여자 입장에서 이성과 관계를 쌓아나가는 방법도 어느 정도 알지 않았을까.
마침 괜찮은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물어서, 부족한 게 있다면 갖춰나가는 시간을 좀 더 챙기는 게 나을 것 같다.내일 비서 오퍼레이터는 사리아. 이 사람은 담을 쌓고 살았을 것 같으니 안 되겠지.
"뭐 좀 하나 묻고 싶은데."
"응? 뭔데? 이번에는 어디가 궁금해?"
안젤리나는 이번에도 다른 도시 이야기일까 하며 평소 내가 말을 걸 때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있잖아."
그 말에 코코아 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려던 안젤리나가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거렸다. 새하얀 김 사이로 그 나이대 산뜻한 미소 대신 놀란 표정을 짓고, 빨간 눈이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이내 금방 장난스러운 미소로 바뀌었다.
"박사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흐흥, 어떤 사람일까. 그래서?"
"고백을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타이밍이라던가, 말이라던가."
그 얼굴에서 다시 미소가 걷히고 잠깐 생각에 잠겼는지 눈동자가 위쪽을 향했다. 무언가 내 머리 위를 보는 것처럼, 이리저리 생각에 잠기며 내 물음을 되풀이했다.
"고백을 한다면 어떻게....타이밍이나, 말이라던가. 고백을 한다면....고백....말이지."
망가진 축음기처럼.
"고백을 한다면 어떻게....그건 사실 사람에 따라 다른데. 고백받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고백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할 수 있는 거랑 그게 먹힐지 안 먹힐지 다 다르니까, 뾰족하게 이렇다 라고는 못 하겠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 안젤리나는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아는 건 그래도 좀 옛날 이야기겠지만....이거 하나는 확실해. 요즘 들어서는 고백이란 게, 관계의 시작이 아니라 확인인 거야."
"관계의 확인이라고?"
내가 알고 있던 것 아니면 동화 같은 데서 나오는 것과는 또 다르다.물론 동화도 너무 옛날에 나온 거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처음 보는 왕자가 처음 보는 공주한테 청혼한다던지.
"예전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나, 좀 본 적은 있어도 말 붙인 적 없는 사람한테 자기 마음을 전하고, 받아들여지면 거기서부터 서로 알아나간다고 했다더라고. 근데 요즘은 그게 아니라....둘이 눈이 맞고, 어느 정도 친해지면서 서로 알아가다가 어느 타이밍이 되어서야 고백을 하는 거야. 물론 그 정도로까지 친해져 있다면 거기서 조금 더 진전이 되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고백을 받는 쪽이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그 관계는 그대로 끝나는 거지."
너무 당연하다는 듯 안젤리나는 칼로 자르는 것처럼 분명히, 그리고 명료하게 대답했다.
"말 한번으로 어렵게 쌓은 관계가 그대로 끝난다니....그건...."
어떻게 보면 레나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두근거렸던 거라던지, 별거 아니지만 즐겁게 이야기한 것들도, 가끔 같이 일했던 시간마저도 전부 없던 일이 되는 셈이다. 그런 게 전부 없어지면, 레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쉬워하면서 정리할까, 아니면 가볍게, 깔끔히 털어버릴까.
"뭐....그렇기야 하지만, 사실 그렇게 고백을 하면 어떻게 되든 그전같은 관계가 되긴 힘들어. 그건 고백하는 쪽이 감당해야 하는 것도 맞아. 그래서 일부러 고백 안 하고 애만 태우는 사람도 있었어."
안젤리나는 코코아 잔을 다시 입술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로까지 친해져 있고, 한쪽이 언제든 반대쪽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내가 아는 건 그 정도였어. 물론 테라 전체가 전쟁터가 되어버리고 나선 좀 바뀌었겠지만."
"그럼 요즘은?"
"요즘은 모르겠어. 나도 이제 학생이 아니고....그대로 몇 개월이나 지났으니까. 로도스 아일랜드에 와서 또래 애들하고 만났지만서도, 그런 이야기 한 적은 한 번도 없고....아니, 이제 나한텐 그것도 사치지."
생각도 못한 말에 당황했다. 안젤리나가 이렇게나 주눅든 말을 하는 것은 처음 봤다.물론 나도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얘는 더더욱 한창 때다. 이성에 관심도 많을 시기고, 꾸미고 싶고, 최신 유행을 챙기고 싶은 나이대다.
"감염자가 되고서부턴....전부 내려놔야 했으니까. 복고풍 음악도, 최신 유행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게 다 버리고 혼자 빌딩 숲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이젠 나와 상관없는 소식들을 전하기 시작했거든."
....테라 전역을 시커먼 폭풍이 할퀴기 전까지는.
"그래도 그 사람은 감염자든 아니든 평등하게 마음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그 사람도 이미 누구한테 마음을 뺏겼더라고. 좋겠다. 그 누구는. 감염자가 아니니까 평범하게 연애 같은 것도 할 수 있는 거구나...."
망가진 축음기가 내는 가냘픈 소리는 점점 꺼져갔다. 테라의 모든 사람들이 원래의 삶을 잃어버렸던 그 순간을, 축음기는 마지막 힘을 다해 울부짖고 있었다.
안젤리나는 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코코아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지금 건 그냥 한 소리야.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라이타니아 가야 되니까, 먼저 들어갈게. 코코아 잘 마셨어, 박사."
"조심해서 다니고. 잘 자."
"나는 그렇게 쉽게 안 잡히는걸."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겨든 안젤리나가 문 앞으로 가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말고."
사무실 문은 소리없이 그 마지막 말을 잘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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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섭에서 레식 업데이트가 되면서 퍼퓨머 패러독스가 업데이트됐는데, 포덴코가 퍼퓨머 부르는 호칭이 언니더라.다시 써야되네 아 ㅋㅋㅋ
PC로 또 안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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