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달빛이 밝았던 밤이었다. 나의 지나간 삶속에서도 앞으로 찾아올 시간중에도 이처럼 밝은 순간은 없겠지, 주변은 풀벌레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고 별이 반짝이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듯 고요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되짚어보자면 그것은 유영하는 정적이었다. 마치 아득한 태고의 기억이었던 것처럼, 필사적으로 머릿속에서 조각조각으로 각인되버린 그 순간의 파편들을 흡사 어린아이가 힘겨운 퍼즐을 맞추듯 쥐어짜내었다. 역설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엇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충실하게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둘 수 있었을 순간을... 나는 그 소중했던, 나와 그 사람과의 조우를 누군가에게 빼앗겨버린 것처럼 끄집어낼 수 없었다.
"뭐야,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정지된 세상을 산산히 깨버리는 단발의 총성과도 같았던 그녀의 대답.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 나 자신이 오래 전에 이미 바스러져 없어져버린 무존재하는 사물처럼 느껴져버렸고 오로지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은 그 곳에 그녀 한 사람 뿐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음성, 유구한 세월속에서 망각의 동물은 원형 그대로 온전히 간직하고 싶었던 주체의 의지를 조소하듯 그녀의 형상과 음성을 야금야금 갉아먹어왔었다. 비록 반쪽짜리 인간이지만 그 반만큼의 분량으로도 몸뚱아리는 맡은바 제 역할을 구역질날정도로 필요 이상으로 해오고 있었다. 그게 죽을만큼 싫어서 이 지옥같았던 종착점없는 삶의 계주를 간신히 인내하고 버텨오던 매 순간 순간, 허락된 모든 시간 시간마다 나는 공을 들여 그녀가 내 머리와 마음 속에 남긴 유물들을 기억하며 각인하려고 애를 써왔다. 어느 시점부터는 도무지 자신의 육체라는 불량한 곳간에 그녀의 유물들을 고이 모셔둘 수 없어서 손에 잡히는, 눈으로 항상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그 사람을 새겼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소중했던 그 사람과의 추억과 잔존물을 남겨왔던 것이다.
그것도 잠시, 한 시진이 지나고 하루가 가고 달포가 지나며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는 것을 수백번이나 되풀이하면서 서서히 서서히 자신도 알지 못하게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절대로 잊지 못할 것만 같았던 그녀에 대한 기억들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고, 한심한 나 자신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져간다. 그녀와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들이 역사라는 이름의 강 물결에 떠밀려 점점 흘러가버린다. 그녀가 날 보며 해주었던 말과 행동들이 차츰차츰 옅어져간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그 고운 얼굴이 시나브로 부서져갔다.
고작해봐야 100년 남짓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숫자이상의 의미로 체감되지 않을 422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있어 상실과 부여잡음의 끝없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매일같이 부여잡았고 또 놓쳐버렸다. 온전하게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의 기억이라도 잡아낸 날이라면 그것을 놔주기 싫어 잡고 또 되잡았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광활한 우주 속에서 미천한 미물에 불과한 나의 보잘것없는 노력.. 그 사람 없이 세상에 혼자 남게 된 세월 동안 숱한 사건들이 날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채 감정을 추스리지도 못한 이듬해부터 7년 동안 조선은 전쟁의 고통으로 신음했다. 모든 것을 앗아가버렸다. 나와 관련된 모든 장소와 소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인연의 고리에서 피어난 애중한 추억들이 하나둘씩 박살나버렸다. 한 사람이 죽어나가고 두 사람이 죽어나가고 내 손을 잡고 뒷일을 부탁한다며 미안하고 고마웠다라고 말한 사람들의 숨소리가 옅어져가면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나에게 예고도 없이 한번에 휘몰아쳐왔다. 그 비통과 눈물의 아픔 속에 그녀도 자리잡았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죄스러운 회고를 할 수는 없었다.
..........
무척이나 절묘한 때에 그녀가 내 앞에 찾아왔다. 어딘가 낯은 익지만 긴가민가했었던 목소리에 뒤돌아봤던 순간 세상은 정지했다. 기억이란 도화지 위의, 세월로 인해 흐려졌던 그녀라는 그림이 눈 앞에서 복원되어가는 환상을 보았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나를 불러세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나에게로 다가왔다. 이윽고 그 인영(人影)은 온전히 사람의 형체를 띠었다. 사실, 처음 뒤돌아봤을 땐 어둠 속에서 달빛을 등지고 오는 그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언뜻 보아 파악한 그 자는 신장이 170cm가 조금 덜 되어 보이는 슈트 한벌을 빼입은 여자였다. 파악이 잘 되지 않는 상황속에서도 그런 신체적 특징들은 사람들을 400년도 넘게 지켜보고 같이 살아온 덕분일까 자신있게 확신할 수 있었다. 권총 한 자루를 겨눈채로 내 쪽으로 걸어오는 그 사람, 정자세로 시선을 나에게 못박은 채로 상체는 미동도 없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오는 모양새로 봐서 아마도 어떠한 특수한 훈련을 받은 걸로 보였다. 이윽고 채 3미터도 되지 않을 거리까지 다가온 그녀는 멈추어섰고 여전히 나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걷혀진 그림자 밑에서 오늘밤의 달과도 같은 얼굴이 보였다. 억겹의 세월이 지났어도 알 수 있었다. 크고 예쁜, 날 바라보던 눈, 오똑한 코, 백옥과도 같이 하얀 피부때문에 더욱 빛나는 붉은 입술. 언젠가 제가 설부화용이라고 오글거리는 칭찬을 해줬던 바로 그 모습을 말이다. 비록 날 쳐다보는 눈빛이 날카롭고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는 점을 빼고.. 힘이 빠져버려 나도 모르게 어깨 위로 들고 있던 두 손이 내려가고 말았다. 꼼짝말라는 그녀의 말과 같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건 그녀뿐인것처럼. 머릿속이 그 사람으로 가득찼고 이윽고 그녀의 형상이 일그러져 버렸다. 나... 실로 오랜만에 눈물이란 걸 흘리고 있는 건가?
"여울아"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튀어나온 내 목소리에 미동도 하지 않던 그녀의 표정이 흔들린다. 힘이 들어가 작아졌던 눈이 커지고, 주름이 잡혀있던 미간은 어느새 그 자취를 감추었다. 제 짝과 이별하여 살짝 벌어졌던 입술도 이내 동요를 감추려는 듯 다시 닫혔다.
"뭐야,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담여울, 수백년동안 기다려 온 나의 사랑, 소중한 내 사람. 시간이 흐를수록, 계절이 바뀔수록, 지나간 세월이 겹겹이 쌓여갈수록 짙어지고 가득찼던 나의 사랑. 무엇으로도 잊을 수 없었던 나에게 있어 유일한 이름, 여울이..
당장이라도 이 주체할수 없을 정도로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토로하고 싶고, 달려가 끌어안고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수없이 그리고 기다려왔던 그녀의 얼굴 또한 지척에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대답없는 나의 말을 대신하듯 그녀가 재차 물어왔다. 이내 그녀의 경계가 풀어졌다. 총을 쥔 채로 앞으로 향하고 있던 두 팔은 그 중심을 잃고 천천히 하강했고 그와 더불어 그녀의 얼굴엔 처음의 경계가 아닌 의문이 피어올랐다.
"날 알아요?"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 이러는 걸까. 실로 오랜만에 대면한 놀라움때문일까? 그녀를 만난 반가움때문일까? 슬픔이었을까? 기쁨의 환희라고 부르는 그런 것이었을까. 아무 의미도 없을 이상한 누군가와의 찰나의 만남일 그녀와, 반천년만에 사랑하는 나의 정인을 재회하게 된 나 사이에는 조화될 수 없는 갭이 있었겠지. 여울이에게 들려줬던 나의 말들은 이미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그녀가 숨을 거두기 전에 강하게 외쳤던 내 마음 속 선언만큼은 내 의지가 담겨있어서 그런지 장구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어젯밤에 했던 말처럼 뚜렷히 기억해왔다. 하루에도 수십수백수천번을 다짐하고 결심하고 그 마음을 재확인하고 되새기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녀를 눈앞에 두고 속으로 되뇌일 날만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마치 마법처럼 그 꿈이 내 눈앞에서 실현됬다. by Pain아님.
'널 다시 만나면, 그땐 내가 먼저 널 알아볼께, 널 다시 만나면, 그땐 내가 먼저 널 사랑할께.' 라고 했던 혼잣말, 지금은 그녀 앞에서 털어 놓을 수 없다. 내가 왜 자기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지금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을 향해 눈물을 머금고 있는지 알려줄수는 없다. 알려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글쎄.. 아는 거도 같고, 모르는 거도 같고.."
뜻밖의 답변에 그녀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펴오른다. 그녀의 모습 뒤로 이제까지 들어오지 않던 광경이 눈에 잡혔다. 밤하늘에 상현달로 보이는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 달빛을 머금고 푸르스름한 빛을 영롱히 띠고 있는 도화나무 한 그루가 슬프고도 아름답게 걸려 있었다. 법사의 말이 들려온다. '초승달이 걸린 도화나무 아래에서 만난 인연은 여울아씨와는 상극이니라.' 언젠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와의 인연을 제 멋대로 시작해버린 여울이. 전조도 없이 찾아온, 바람처럼 다가온 운명과 비극을 사랑 하나로 받아내며, 내가 만들어낸 슬픈 비극이라는 짐의 무게만큼 무거웠던 내 몸을 지탱해준 여울이...
이젠 내가 먼저 너와의 인연을 받아내줄께, 담여울이라는 불러도 불러도 아프지 않을 이름을 내가 먼저 들려줄께. 이젠 너를 잃지 않을꺼야.
'그리고 멈쳐졌던 나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by Pain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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