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ladimir Ilyich Lenin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반동적 철학들에 대한 비판적 논평

경험비판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
감각과 감각 복합체
마흐(Mach)와 아베나리우스(Avenarius) 인식론의 근본 전제는 그들의 초기 저작들에 노골적이고 간단하며 명징하게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저작들로 돌아가서 이 저자들이 추후에 수정한 내용이나 그 내용에 대한 검토를 뒤로 미룰 것이다.
마흐는 1872년에 이렇게 썼다.
오로지 다음의 것들만 과학의 할 일이 될 수 있다.
1. 관념 연관의 법칙을 밝혀내기. (심리학)
2. 감각 연관의 법칙을 밝혀내기. (물리학)
3. 감각과 관념간의 연관의 법칙을 설명하기. (심리-물리학)
이는 매우 명징하다.
물리학의 주제는 감각들의 연합이지 감각의 이미지인 사물들이나 물체들의 연합이 아니다. 그리고 1883년에 마흐는 그의 역학에서 같은 사유를 반복한다.
감각은 '사물의 상징(symbol)'이 아니다. '사물'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감각들의 복합체에 대한 정신적 상징에 불과하다. 세계를 진짜로 구성하는 요소(elements)들은 사물(물체)들이 아니라 우리가 보통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 즉 색깔, 소리, 압력, 공간, 시간이다.
12년 동안의 "반영(reflection)"의 과실로 나온 이 "요소(elements)"1란 표현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현재는 일단 마흐가 여기서 명시적으로 사물이나 물체은 감각의 복합체이며, 감각이 사물의 상징(이미지나 사물의 반영물(reflecion)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이라는 반대 입장에 대항하여 그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상당히 분명하게 세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두겠다. 전자의 이론은 철학적 유물론이다. 예를 들어, 잘 알려지지 않은,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건립한 인물인, 유물론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거듭하여, 그리고 예외없이 사물과 사물의 정신적 사진 혹은 이미지에 대한 그의 저작들에서 그러한 정신적 이미지들은 감각에서 비롯됨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말하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알려져야 할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근본적인 입장으로 보인다. 또한, 이 철학의 이름으로 책을 내는 모든 이들에게 특히 알려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흐주의자들께서 들여오신 엄청난 혼란으로 인해, 일반적으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우리는 반뒤링(Dühring)론의 1절로 돌아가 다음을 읽어드릴 것이다. "...사물과 그것들의 정신적인 이미지는..." 또는 철학적 파트의 1절을 읽어줄 것이다.
그러나 사유는 이러한 원리들(지식의 기초적 원리라던가)을 어디서 얻는가? 그 자체로부터? 아니다... 그러한 형식들 절대 사유 자체로부터 창조되고 파생될 수 없다. 오로지 외부 세계로부터만 가능하다. 원리들은 탐구의 시작점이 아니며, (유물론자이기를 원하지만 유물론을 일관되게 주장할 수 없는 뒤링의 주장처럼) 오히려 탐구의 결과다. 자연과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원리들에 제약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 원리들은 자연과 인류의 권역 속에서 타당한 한에서 유효하다. 이것이 물질에 대해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개념이다. 이에 반대되는 뒤링 씨의 개념은 사물들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관념들로부터 실재 세계를 빚어내려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엥겔스는 이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개념"을 예외없이 모든 곳에 적용하여, 유물론에서 관념론으로의 최소한의 일탈을 위해 가차없이 뒤링을 공격한다. 반뒤링론과 포이어바흐론을 주의깊게 읽은 이라면 누구라도 엥겔스가 사물과 인간 뇌, 우리의 의식, 사유 등등 속의 사물의 반영에 관해 말하는 예시를 찾을 수 있다. 엥겔스는 우리가 뒤에서 자세히 논할, 일관적인 유물론이 "상징"이라는 용어 대신 "이미지", 사진, 반영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감각이나 관념을 "상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장의 문제는 유물론의 형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반대와 철학에 있어서 두 개의 근본적인 노선 간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사물에서 감각과 사유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사유와 감각에서 사물들로 나아가야 하는가? 전자, 유물론적 노선은 엥겔스가 선택한 노선이다. 후자, 관념론적 노선은 마흐가 선택한 노선이다. 어떤 회피나 궤변도 사물이 감각 복합체라는 에른스트 마흐의 독단론이 주관적 관념론이며 버클리주의의 단순한 회귀라는 분명하고 명백한 사실을 지울 수 없다. 만약 마흐의 말대로, 물체들이 "감각의 복합체들"이라면, 또는 버클리의 말대로, 물체들이 "감각의 연합물"이라면, 이는 필연적으로 전체 세계가 나의 관념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제에서 시작한다면 나 자신 이외의 다른 타자의 실존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흐가 그랬던 것 만큼, 아베나리우스, 페촐트(Pelzoldt), 그리고 다른 이들은 유아론을 거부할 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논리적 부조리를 울부짖지 않고서는 유아론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마흐주의 철학의 이 근본 요소들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마흐의 저작들 중 몇몇을 더 인용해줄 것이다. 여기 감각의 분석에서 인용해온 예시들이 있다.(나는 코틀랴(kotlyar)의 러시아어 번역본을 사용했다.)
우리는 지점 S을 가진 물체를 본다. 만약 우리가 S를 만진다면, 즉, 그것을 우리 신체에 접촉시킨다면, 우리는 따끔거림을 느낀다. 우리는 따끔거림 없이 S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따끔거림을 느끼자마자 우리는 피부 위에서 S를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시각적 지점은 영구적인 핵이며, 상황에 따라 따끔거림이 돌발적인 무언가로 추가되곤 한다. 유사한 사건들의 주기적인 반복에 의해 우리는 마침내 물체의 모든 속성들을 '효과'로 간주하도록 스스로를 습관화한다. 그 효과는 영구적인 핵에서 촉발되고 몸체를 매개체로 하여 자아에 전달된다. 이 효과가 바로 우리가 감각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사람들은 유물론적 주장에 적응하도록, 감각들을 우리의 감각 기관에 대한 물체, 사물, 자연의 작용의 결과로 느끼도록 스스로를 "습관화"한다. 철학적 관념론자들에게 무척이나 해로운 이 "습관"을 (모든 인류와 모든 자연과학에 의해 수용된 습관!), 마흐는 좋아하지 않으며, 이를 파괴하기 위해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그러나 이로써 이 핵들은 감각적 내용 전체를 박탈당하며, 벌거벗은 추상적 상징들로 변환된다...
가장 대단하신 교수시여, 참으로 오래된 교설이 아닙니까! 이것은 물질이 벌거벗은 추상적 상징들이라고 말한 버클리를 문학적으로 재탕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벌거벗은 이는 에른스트 마흐다. "감각 내용"이 객관적 실재이며, 우리와 독립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을 그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로지 "벌거벗은 추상적" 나만이 남는다. 실수로 이탤릭체로 써진 나는 "이 세상에 실존하는 것이 자신뿐이라고 생각하는 미친 피아노"와 똑같다. 우리 감각의 "감각 내용"이 외부 세계가 아니라면 공허한 "철학적" 몸짓에 참가하는 중인, 벌거벗은 나만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이 어리석고 무익한 작업을 보라!
1. 요소(element)는 보통 원소로 번역되나 마흐주의와 관련해서는 요소로 번역되는 것이 통상적이었기에 요소로 번역하였음.
영문 출처: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08/mec/one1.htm
레닌도 한국어썻네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