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숨막히게 싸늘한 공간.
바닥은 딱딱하고 공기는 차가우며 습하다 못해 눅진하고 기분 나쁘게 케케묵은 냄새로 가득찬 곳.
정신을 차리니 기분 나쁠 정도로 음침한 곳에 가둬졌다.
발목에 쇠고랑이 채워져있고 양손도 묶여있고 옷도 다 벗겨져있고, 내 몸에 옷이라곤 고간만 가려주는 애매한 천쪼가리 하나 뿐.
결정적으로 벽의 한 쪽 면에 딱 봐도 튼튼하게 생긴 쇠창살이 여러개 박혀있는 걸로 봐선 감옥 같은 곳에 가둬진 게 분명했다.
옆 나라의 갑작스러운 도발로 인해 발발한 지역간의 분쟁.
해당 지역의 젊은 청년과 군 출신 수인들은 모조리 끌려와서 분쟁 지역으로 등 떠밀려졌다.
나는 비록 아내와 아이가 있는 몸이지만 군수인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도 손에 총이 들려졌다.
그렇게 아내와 눈물의 이별을 하고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분쟁지역으로 들어섰지만, 상황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거점지 방호를 명 받았으나 벌써 적군은 작전선 너머로 밀려들어오고 있었고, 이미 수 많은 시체들이 주변에 나뒹굴고 있는 상태였다.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왔지만, 아직은 따뜻한 시체들을 보니 그런 각오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덜컥 겁에 질려 방심한 사이, 적의 기습을 당하고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에 갇혀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로로 잡혀온 게 분명한 상황.
전세가 어떻게 기울었는 지도 모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도 모르니 머릿속은 혼잡해지기만 했다.
빠져나갈 수는 있을까. 누군가 도와주러 올까.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혼란스러운 정신을 최대한 붙잡아 보고자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파악을 하려 했다.
하지만 정신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볼 수록 내가 잡혀왔다는 사실만이 더욱 와닿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혼란이 절망으로 바뀌려던 순간, 철끼리 부딛히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철창의 문이 열렸다.
예기치 못한 소음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는 두 명의 갯과수인과 한 명의 늑대가 서 있었다.
가운데에 서있다가 내가 있는 철창의 안쪽까지 걸어 들어온 늑대는 고간에 천 한 장만 걸친 나에 비해 굉장히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딱봐도 자신이 지휘관이라는 걸 티내는 용모를 보아하니 초면부터 우리 둘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려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높으신 분이 왜 이런 누추한 곳에 누추한 나를 만나러 왔는 지 이해가 전혀 가지 않았지만 이 늑대는 내가 이해하려 하기도 전에 이미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내 앞까지 와서 나를 지긋이 내려다 보는 늑대.
나도 늑대이긴 하지만 상당히 거대한 몸집의 늑대가 정갈하게 차려입고 나를 내려다보니 같은 늑대라도 그 위압감에 살짝 몸이 움츠러들었다.
조금 겁을 먹고 위축된 상태로 늑대를 올려다 봤지만 늑대는 이곳에 온 이래로 한 마디도 하지않고 조용히 내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늑대가 나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더니 잠깐 씩 웃고는 입을 열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인 즉슨, 자기 나라의 군대가 이미 방어선을 넘어 진격중이며 우리의 1차 방어선은 괴멸당했다.
그리고 내 아군들은 대다수가 죽임 당했고 오직 나만 이 곳에 포로로 잡혀왔다고 한다.
...도대체 ...왜?
죽일 거면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지 왜 나만 잡혀왔다고 말하는 거지?
나에게서 뭘 얻을 수 있다고 나만 살려온 거지?
당장이라도 거짓말하지 말라고 외치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잡혀오기도 전에 이미 내 동료들의 몸은 점점 싸늘해져 갔고,
동료들의 입에선 전장의 함성이 아닌 절망의 비명이 쏟아졌고,
매캐한 화약냄새와 지독한 피비린내는 적군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었다.
어떻게 봐도 승리의 여신은 우리를 등졌다.
그런 상황을 알고 있으니 우리 부대가 괴멸했다는 말을 들어도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군들을 두고 혼자 살아남은 나에 대한 죄책감,
가족들을 위해 반드시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
군수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의무.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최대한 목구멍을 열어 늑대에게 소리쳤다.
웃기지마라. 우리 군은 겨우 이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네놈들을 치러 올 것이다. 지옥에서 내 동료들에게 사과하도록 만들어 주겠다.
있는대로 악을 쓰며 늑대에게 분을 쏟아냈다.
목에서 피맛이 날 때까지 고래고래 소리질렀지만, 이상하게도 늑대는 점점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우습길래 나를 보며 미소짓는 걸까.
욕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금 분을 쏟아내기 위해 침을 삼켰지만.
'탕'하는 소리와 함께 옥 내부에 정적이 돌기 시작했다.
늑대가 허리춤에 있던 권총을 꺼내들고 내 바로 앞의 바닥을 향해 한 발 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입 밖으로 쏟아내려던 내 울분은 총알 자국과 함께 깨져버린 바닥의 타일처럼 조각나버렸다.
갑작스러운 총성과 화약냄새에 격렬하게 뛰는 심장을 뒤로 하고, 떨리는 동공을 천천히 위로 올려 늑대의 표정을 올려봤다.
늑대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 여유로운 미소를 통해, 그 가벼운 손짓 한 번을 통해 읽었다.
읽어버렸다.
내 목숨은 지금 이 남자의 손 아래에 있다는 것을.
생명의 위협을 받고 저절로 막혀버린 목구멍에선 그 무엇도 쏟아지지 않았다.
가슴에서 올라오던 울분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고 도로 가슴속으로 삼켜들어갔다.
토해내지 못한 감정들은 가슴에 계속 쌓이다가 머리를 향해 솟아오르기 시작했고, 분노가 머리 끝에 닿았을 땐 더 이상 그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왜 나만 살아남은 걸까. 왜 우리 군은 패배할 수 밖에 없었을까. 왜 동료들과 함께 죽지 못 한 걸까.
나에게 닥친 모든 상황이 억울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금방이라도 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꾹 참고 왜 나만 포로로 잡아온 건지 알고싶었다.
늑대의 손에는 여전히 권총이 들려있었지만 당장 나를 죽일 것 같지는 않으니 어째서 나를 데려왔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늑대가 권총을 다시 허리춤에 넣고 나를 향해 이유를 말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쓸만해 보이니 한 번 데려와 봤다.
...도대체 무슨 짓을 시키려고 사람보고 쓸만해 보인다는 말은 하는 건가.
아무래도 적군의 포로에게 시킬만한 짓이니 정상적인 짓은 아닐 거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늑대의 요구는 나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 정신 나간 것이었다.
늑대는 내 바로 앞에서 자신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그 바지 지퍼 틈새에 손을 넣어서 자지를 꺼냈다.
갑작스래 성기를 노출하는 그의 행동이 당혹스러웠지만 그의 요구는 당혹스러움을 넘어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그의 요구는 단 두 글자였다.
'빨아'
저도 잡아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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