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렸을때 검은 드래곤본 플린트는 정신없이 교미하고 있었고, 그의 위에서 늑대 수인은 헐떡거리고 있었다.
은빛의 갈기, 푸른 눈동자. 숨을 시근거리는 짐승의 냄새. 그가 쥐고 있던 날이 선 단검들은 땅바닥에 내던져진지 오래였다.
지금은 그저 플린트를 핥고, 또 핥고, 또 핥을 뿐.
존재를 녹여 제 안에 집어넣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맹렬하면서도 또 온순하게 플린트를 핥아냈다.
"저기..."
"응?"
"칼스 씨라고 했던가..."
"그래, 그게 내 이름이지."
고개를 일으킨 은빛의 늑대 수인은 푸른 눈동자로 플린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수에 찬 눈으로 마치 꿀이라도 떨어지듯이.
"내 반려."
"그런 거 아니라니까..."
플린트는 옆에서 나뒹구는 성검을 잡았다. 모두 이것의 잘못이었다.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금껏 상대했던 누구보다 몸짓은 부드러웠고, 손길은 따스했으며, 무엇보다 눈빛이 부드러웠으니까.
그러나 바로 그게 문제였다.
이 늑대는 정말 마치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대 이름은 무엇이오."
"플린트..."
"플린트, 달빛도 그대의 이름을 사랑하겠군. 아름다워."
이름 세글자에도 이렇게 아첨을 해대는걸 보면 성검의 위력이 정말 대단하긴 한가보다.
주변에 있던 추적자 나머지 셋은 이 늑대가 붙어있는 나에게 달려들기는 부담스러웠는지 저들끼리 교미를 즐기고 있었다.
"어쩌자고 이런걸 만들어선..."
"무슨 말이오."
플린트는 성검을 내동댕이쳤다. 발로 차고 위로 흙을 뿌리고,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검을 저주했다.
"젠장!!!"
"너무 많은 화를 내는 것은 좋지 않소, 그대. 어서 나의 품으로."
품을 벌리는 늑대의 모습에 플린트는 기가 찼다.
"이거 실수하는 거야 당신. 방금까지 날 죽이겠다고 그 푸른 두 눈 흉흉하게 부라리고 칼 휘둘러오던 건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늑대는 잠시 고민했다.
"그게 전부 당신을 만나기 위한 신의 안배였나 보오."
"아니라고!"
살겠다고 저질렀지만 수습할 길이 없었다. 플린트가 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했다.
"마을 사람들도, 평범한 사람들도 내가 다 망쳐버렸어..."
"그대의 고민을 내게도 나누어주오, 나의 반려."
"..."
오른편에서 달라붙는 늑대의 얼굴을 밀어내고 플린트는 자리에 섰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 차가운 새벽의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온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겠지.
저지른 일은 돌아오지 않는다. 쇠를 두드리기만 해서는 실수로 깨뜨려버린 검날을 이어 붙일 수 없었다. 더 뜨겁게 달궈서 불완전하게 이어 붙이거나, 아니면 녹여버리고 처음부터 만드는 수밖에.
그리고 그럴 땐 주변에 있는 재료들로 최대한 대처를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저기, 눈덩이 괴물 소속 용병대 맞죠."
"수석 칼잡이 칼스라고 하오. 새벽보다 더 고요하고, 밤에 부는 바람보다 은밀한-"
"맞다는 거죠."
"...그렇소. 나의 하나뿐인 달이여."
늑대가 부숭한 털로 플린트를 감싸 안았다. 걸치고 있던 옷들은 성검이 발동했을때부터 벗겨져 바닥에 나뒹굴었으니, 여기 있는 모두는 나체였다.
밤공기로 차가워진 비늘을 따뜻한 털이 감싸니, 기분이 썩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레이스토스토스에 대해서 아시나요..."
"우리의 물주시지. 가장 큰 손이자,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 대마법사. 지금도 그의 물건을 수송하는 중이었지. 그녀는 왜 찾는 거지?"
그레이스토스토스. 그 대마법사는 행방이 묘연해 찾아내기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접근해서 먼저 말을 걸어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런데 그녀라니?
"그녀? 그레이스토스토스는 수컷이 아니었나.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라고 들었는데."
"대외적으로만 그렇게 보여줄 뿐이지, 그녀는 멀쩡한 암컷이야. 집착이 심하고 치즈케이크를 좋아하지. 하지만 케이크에 체리가 올려진 건 먹지 않아. 맛이 변한다고 하던가."
응?
"왜 이렇게 아는 게 많아."
"그녀가 날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한때의 불장난에 불과했지. 진정한 반려를 만났으니 상관없소."
"그게 무슨 소리니."
"비록 분노한 그녀가 우리를 불지옥으로 떨어뜨린다고 하더라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정확히 요약해서 말해봐."
"나는 그녀의 약혼자였소."
...
인생이 이렇게 꼬일 수는 없었다.
대마법사의 약혼자를 가로채버리다니.
아무래도 천벌을 받을 것 같았다.
* * *
플린트와 네 명의 끈적한 추적자들은 좀 전에 야영을 하던 캠프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반응을 한 것은 용병대장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칼...스...? 그 모습은..."
"반려를 찾았소."
"그레이스토스토스를 여기서?"
마차 안에 있던 사람들도, 밖에 나와 있던 용병들도 모두 두 눈을 크게 뜨고 칼스를 바라봤다.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다.
칼스는 완전한 늑대 수인이 되어있었다.
수인화는 실버울프족이 진정으로 반려를 맞이했을 때만 일어나는 일이었으며, 한번 변하면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칼스가 열심히 떠들어둬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내 세상의 하나뿐인 보석을 소개하오. 플린트요."
플린트는 멋쩍게 칼스의 등 뒤에서 나왔다. 다른 이들에게 먼저 모습을 보이면 경계할게 뻔하니 자신의 뒤에 숨어있다가 나오라는 칼스의 지시였다.
"아까 그 드래곤본이잖아? 분명 처리하라고 보냈을 텐데. 이게 무슨 짓이지?"
"처리? 그 입을 조신하게 놀리는 편이 좋을 것이오. 내 반려를 모욕하지 마시오."
"칼스! 감히 대장에게 무슨 말을!"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칼스의 완강한 태도에 놀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늑대들의 맹목적인 사랑이란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용병대장은 이마를 짚었다.
"하... 네가 한번 꽂히면 막 나가는 성격이란건 알고 있었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똑바로 설명해야 할 거야."
누군가는 대놓고 비명을 질렀다.
"칼스, 이게 도대체... 심지어 수컷이잖아!"
"예... 전 수컷이죠..."
늑대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사소한 문제이오."
"이거 그레이스토스토스가 알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이래?"
"...그런 철없는 여자는 모르오."
"회피해서 될 일이 아니야! 애초에 우리가 옮기고 있는 물건도!"
"용병은 용병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면 될뿐이오."
사람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몇몇은 석궁과 칼을 들고 있었지만 칼스를 직접 겨누지는 못하고 있었다.
칼스의 눈길이 닿으면 모두 무기를 내렸다.
"저기, 제가 조금만 설명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플린트는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가 헐벗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옆의 늑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액체과 털과 냄새로 범벅이 되어있었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커다란 대검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들고 있는 이 검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제 실수 때문인데-"
"아하, 그걸로 칼스의 정신을 망쳐놓은건가?"
용병대장은 여전히 내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칼스가 으르렁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지간히도 제대로 세뇌했나보군."
"이 분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그레이스토스토스를 찾아 대검을 파괴해달라고 해야한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칼스가 저 모양이라니. 최고 전력이 빠져버려서 희생은 불가피하겠어."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실래요..."
"지금 당장 칼스를 돌려놔라 드래곤본.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을 용서해주지."
"그러니까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라니까요."
"협상은 결렬이라고 봐도 되겠지?"
이 용병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 늑대가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었나?
"칼스, 확실히 정해라. 너는 어느편이지? 지금까지 생과 사를 함께했던 동료들인가, 정체모를 수법으로 한순간에 널 꾀어낸 저 드래곤본인가. 넌 이제 둘 중 하나를 죽이게 될거다."
마지막 문장은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정신적인 세뇌나 공격을 받았을 경우에 대처용으로 사용하는 항세뇌 문장이었다.
그동안 동료들과 함께한 시간과 유대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단시간의 세뇌로 생긴 기억 속의 빈공간이나 모순을 지적해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분명 그런 전략이었지.
취미로 읽던 모험가 서적에서 읽어서 알고 있었다.
이들은 칼스를 포기하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널 베어버릴수도 있다."
순간 칼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봤다.
한발자국, 두발자국, 늑대의 발걸음이 숲의 고요를 깨운다. 자세를 낮춘 한마리의 은빛 늑대, 그가 든 두자루의 단검은 용병들을 향했고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나 또한 그래야 한다면."
"하! 미쳤구나 칼슨! 진짜 우리를 다 죽일셈이냐?!"
"로이스, 그만. 내가 이야기하겠다. 거기 드래곤본, 그림자의 손에서 나온거냐?"
진짜 그런거 아닌데.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플린트는 설명을 위해 팔을 휘적거리다가 이내 할 말을 잃었다.
그걸 무슨 의미로 받아들인건지 용병들이 기겁을 했지만.
"그만! 적대하지 않겠다. 그레이스토스토스의 보구를 노린거지? 넘겨주겠다. 대신 우리 칼스를 원래대로 돌려놔! 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을 건드렸어."
"후... 알겠으니까. 내 비늘 한 점 건드리지 마세요."
용병들끼리의 사이가 끈끈하다고는 들었지만 가지고 있던 물건을 담보로 삼을정도였나 싶었다.
성검의 효과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적용되는지는 몰랐지만 플린트는 간단하게 명령했다.
"칼스 씨, 예전처럼 어울려주세요 제발. 날 죽이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원래도 그러려 했는데 저들이 우리를 적대한거요. 나는 그대를 지킬 뿐이고."
"나는 그냥 묻고 싶었던게 조금 있었을 뿐이야! 칼싸움하러 온 게 아니라고!"
"언제나 그대의 곁에 있겠소."
플린트의 질린 표정을 본 건 용병대장 뿐만이 아니었다.
성검을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성검은 언제 그랬냐는듯 곁으로 굴러와 언제든 오른손으로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지만.
플린트는 무릎을 꿇고 용병대장에게 거의 애걸복걸했다
"제발 제 저주받을 성검을 부숴주세요..."
"그대 무릎을 꿇지 마시오. 나의 마음이 아프오."
상황을 주시하던 용병대장은 긴장을 풀고 플린트와 눈높이를 맞췄다.
"...들어나 보지."
상호간 무장은 해제되었고, 그제서야 눈덩이 괴물 용병대와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
같이 돌아온 추적대원 셋은 거의 탈진 직전이었기 때문에 마차 안으로 옮겨져 진료를 받았다. 그들의 진단 결과는 과도한 정력 소모로 인한 탈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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