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은 이쯤하고, 슬슬 이제 안내해 주실까요?”
A를 바라보며, 남자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한시가 급하니.”
이래저래 주저하는 것도 잠시였다. 한숨을 나지막이 내쉬는 것을 마지막으로 A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고분고분한 행동이 썩 마음에 든다는 듯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이어 A의 곁을 거의 밀착하다시피 한 채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빠르게 만나게 될 줄이야. 저도 참 운이 좋네요.”
온갖 능청을 떨어대면서.
“아니죠. 어찌 보자면 운이 안 좋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
“이왕 온 김에 이곳저곳 구경할 생각이었거든요. 제가 사는 곳과는 여러모로 많이 다른 세계이다 보니.”
어디 관광이라도 온 듯한 발언이었다. A는 일언반구 없이 묵묵히 걷기나 했다. 상대에게서 대답이 돌아오든 말든 줄줄 들려오는 온갖 이야기. 이렇게나 문화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느니, 상상 이상으로 높은 건물이 많아 신기하다느니 등등.
그럼에도 A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반응은커녕 상대를 돌아볼 생각조차 않고, 시선은 마냥 앞쪽으로 고정한 채다. 목적지까지 걸어가려면 30분은 넘게 걸릴 테지만, 막막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질 않았다. 진짜 막막한 것은 정작 바로 옆에 있었으니.
사람 탈을 뒤집어쓴 이계 생물.
그냥 이계 생물도 아니었다. 무려 마왕 휘하 네 명의 군단장 중 하나인 ‘혈랑’의 쌍둥이 형이란다. 이 주장의 신빙성은 다름 아닌 A가 보증할 수 있었고 말이다. 저 서글서글한 인상의 의태를 풀자마자 떡하니 튀어나오는, 세상 익숙하기 그지없는 늑대의 대가리.
이계 몬스터는 종류 불문 발견 즉시 이능부에 신고하는 것이 원칙이라지만, A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분명 그럴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약속만 잡아놓고 따로 할 일이 있다며 쌩하니 사라지고 하루 동안 신고는커녕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더랬지.
A가 이런 짓을 저지른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온순한 성정 때문이었다. 자아가 있든 없든 인류에게 공격성을 내비치곤 하던 일반적인 이계 생물에 비해 눈앞의 남자는 제법 무해해 보였던 것이다. 소심하다 못해 음침했던 어젯밤의 남자뿐만이 아닌, 실실 웃으며 조잘조잘 떠드는 지금의 남자까지도.
둘째로는 전쟁 직후 지구가 이계와 맺었다는 상호불가침 협정의 존재였다. 강력한 아티팩트를 통해 맺은 계약이다 보니 일종의 강제성이 동원된다나. 때문에 지구든 이계든 서로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 사이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물론 앞선 두 가지는 사실 변명에 불과했고, 진짜 이유는 막상 따로 있었다.
“최근에는 영화관이라는 곳을 가 봤는데…….”
저놈이 내 첫사랑이랑 똑 닮았으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기괴망측한 이유였다. 별안간 아찔해진 A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야가 깜깜해지자마자 선명하게 떠오르는 지난밤의 기억. 침침한 가로등 조명에 타오르듯 빛나던 진홍색 털, 어둑한 색채가 섞인 노란색 눈동자.
자취방 서랍장에 고이 모셔둔 늑대인간 컬렉션.
그중 무려 45페이지에 걸쳐 정리해 둔 군단장 ‘혈랑’과 판박이인 생김새!
어찌나 닮았던지, 요즘 뜸하게 찾던 공책을 간밤에 다 펼쳐봤을 지경이었다. 그런들 의문이 풀리는 것도 아니긴 했지마는 말이다. 제아무리 쌍둥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나. 키나 털 색깔로부터 시작해서 모질과 눈동자, 하다못해 털 무늬까지 따다 박았는데.
진작 신고해야 했을 이계 생물을 여태껏 내버려 둔 것도 다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다른 종족도 아니고 늑대인간을, 그것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첫사랑과 빼닮은 늑대를 보자마자 순간 정신이 쏙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경계심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짝사랑 운운도 8년이 넘은 시점이다 보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별 감흥이 없긴 했다. 어린 시절 TV 화면을 통해 키운 마음이라 그리 절절할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설렘보다는 반가움과 신기함이 앞섰다고 해야 할까. 과거에 응원하던 가수를 우연히 만난 팬처럼.
이래저래 수상해 보이긴 하는데.
그렇다고 이능부에 신고해서 잡혀가게 하고 싶지는 않고.
별 사건도 안 터졌는데 그냥 내버려 둘까, 싶은 마음이 살짝 생기기도 하고…….
“그건 그렇고.”
이래저래 복잡한 심경에 휩싸인 A가 옆을 흘끗 돌아봤다.
“그분과는 어떤 관계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언제 지구 여행기 낭송을 멈췄는지,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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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이랑 털무늬 묘사까지 아는건 극한의 점붕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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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모아서 볼수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