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닿아 있는 난간의 온도는 바깥의 더운 공기 탓인지 꽤나 뜨겁게 느껴졌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것 따위 아무 상관 없다.
어차피 이 순간만 지나면 의미도 없는 것들이니까.
대형 고양잇과가 6층짜리 건물에서 뛰어내린다고 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다른 곳으로 갈 힘도, 돈도 남아 있지 않다.
수북하게 박혀 있는 흰색 털 사이사이로 한여름의 바람이 스쳐 간다.
보통이라면 뜨거운 바람에 불쾌함을 느꼈겠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이런 미풍조차 감사하게 느껴진다.
"이제 좀 쉬고 싶어..."
몇 년도 걸리지 않았다.
여유롭고 화목했던 가정이 순식간에 무너진 건.
서로를 무서울 정도로 사랑했던 부모님은, 아버지의 도박을 시작으로 서서히 망가져 갔다.
빚이 쌓일수록 두 분의 다툼도 커져 갔고, 결국 그 끝은 어머니의 불륜이었다.
그마저도 얼마 못 가 세상을 뜨셨지만.
부인을 잃은 남편이 할 수 있는 게 술과 노름밖에 더 있겠나.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는 건 굴러다니는 빈 술병과 이자뿐이었다.
악몽 같던 몇 년의 시간이 더 지나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나는 해방될 줄 알았다.
그의 장례식을 치르면서도 부모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폭력과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 생각은 한없이 짧았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깨달았다.
세상은, 본인이 빌린 적도 본 적도 없는 돈을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갚게 만든다는 걸.
말도 안 된다며 발악도 해봤고, 아무 관련 없다고 빌어도 봤다.
돌아온 건 밤새도록 맞아 가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갚겠다는 피범벅의 각서 한 장뿐이었다.
고작 22살이었다.
다른 집이었다면 평범하게 대학 생활을 즐겼을 나이.
나는 다니던 대학마저 포기하고 하루에 두 탕, 세 탕을 뛰며 죽어라 돈을 벌었다.
큰돈을 준다면야 위험한 공사판에도 서슴없이 출근했다.
모든 걸 버리고 번 돈으로도 원금은커녕 이자조차 갚기 힘들었다.
그렇게 병신같이 살기를 5년...온몸은 멍투성이에, 손에는 어디서 다친지도 모를 상처들만 가득하다.
생일임에도 남들 다 먹는다는 케이크는커녕 술 한 병 살 돈조차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숨을 붙들고 살아온 걸까.
죽자. 이 거지 같은 세상.
그렇게 죽겠다는 마음으로, 다른 곳도 아닌 초라한 내 원룸 방 창문을 열고 난간에 기대 있는 게 지금이다.
살면서 이렇게 바람이 부드럽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여름 햇살은 따가웠지만, 오늘따라 그 열기조차도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제 모든 걸 놓을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뛰어내릴 거면 조용히 하지 그러냐."
낯선 목소리에 몸이 움찔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도, 낡은 구두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묵직한 존재가 들어온 걸 알 수 있었다.
삶은 언제나처럼 방해받는다.
죽음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건가.
"누구...세요."
나는 고개만 살짝 돌려보았다.
자그마한 방을 가득 채울 것 같은 덩치의 그는 주름진 갈색 털과 굵은 어깨,
콧등을 따라 깊게 그어진 흉터를 가진 채, 낡은 가구처럼 오래된 위협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돈 받으러 왔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눈빛은 매섭게 번뜩였다.
언젠가 봤던 얼굴일까.
처음 보는 것 같지는 않은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없어요. 아무것도. 이자도 못 냈고, 남은 것도 없어요."
나는 체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내 방을 둘러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래, 없겠지. 모든 놈들이 다 그렇게 말해.
근데 말이야…. 너, 좀 더 성실했으면 어땠을까?"
그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성실'이라...그 단어엔 이골이 난다.
나는 창틀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해봤어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고요!"
그의 눈이 살짝 흔들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한 번 터진 감정은 폭발하듯 끊임없이 쏟아졌다.
"알바? 새벽부터 밤까지 닥치는 대로 뛰었어요!
주운 물건도 팔아봤고, 대출도 닥치는 대로 알아봤어요!
근데 그럼 뭐해요? 아무리 죽도록 벌어도 이자조차 다 못 갚는데!"
오랜만에 소리쳤던 탓일까. 내 목소리는 힘없이 갈라졌다.
나의 울분에도 불구하고 곰은 무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입꼬리를 비틀며, 나를 내려다봤다.
"하루에 세 탕이라도 뛰지 그랬어. 그래도 부족하면 몸이라도 팔았어야지.
그것도 안 해보고 이렇게 죽겠다고 찌질대는 거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해온 모든 노력들이 한순간에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바닥만 보고 있자, 곰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뒤, 틱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담배 냄새가 풍긴다.
실내에서는 금연인데...
그렇다고 돈 받으러 온 사람에게 '담배 좀 꺼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할 용기 따위는 없다.
돈도 없지만, 깡도 없는 사람이 나니까.
곰 또한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이, 담배 연기를 마시고 뱉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다 계획된 건지도 모르고, 병신같이..."
"그게 무슨...!"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분명히 말했다.
전부 계획된 것이라고.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나와 관련 있다는 의미겠지.
그러나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곰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어차피 죽을 놈이 무슨 상관이겠냐."
마치 알아도 무슨 쓸모가 있냐는 듯, 곰은 담배를 이어 피웠다.
그러다가, 곰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나를 바라봤다.
곧바로 들려오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
"계획된 거라고. 지금 네 꼬라지가."
"알아듣게 얘기해!"
들어서는 안 될,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은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좁은 방안에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에, 곰은 인상을 구겼다.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인데 표정마저 그러니, 정말 위협적인 육식수가 따로 없었다.
"들은 그대로라고."
곰은 약간의 짜증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마치 별거 아닌 소식을 전하듯, 아무런 감정 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그 말 한마디가 내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버렸다.
눈앞이 핑 돌고,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가슴이 죄여온다.
그러나 곰은 내 상태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병신 같기는. 네 아비가 도박판에 발 담근 거? 어미가 바람난 거?
그게 다 ‘우연’인 줄 알겠지? 좆도 아니야."
내 다리가 풀렸다.
벽을 짚고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면 좋았겠지. 근데 안타깝게도, 이 세상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썩은 구석이 많아."
곰은 무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구겨진 종이.
그는 천천히 그것을 내 발치에 던졌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보증인란에 있는 익숙한 이름, 낯익은 도장.
그리고 그 위에 쓰여 있는, 낯선 이름.
'OOO'
숨이 막혔다.
눈앞이 흐려졌다.
"이게... 무슨..."
"네 가족을 천천히 썩게 만든 장본인이지. 지금도 잘만 살고 있어.
좋은 집에, 좋은 차 끌고. 참고로, 니네 어미랑 바람난 놈이랑 같은 놈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거지."
나는 주저앉은 채 입술을 떨었다.
분노인지, 허탈함인지, 모든 감정이 뒤섞여 가슴을 파고든다.
곰은 담배를 꺼트리며 말했다.
"왜, 알고 나니까 화나냐? 망가진 인생이 네 탓이 아니란 게 억울해?"
싸구려 도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몸은 이를 버티지 못한다.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곰은 ‘사내새끼가 짜고 있네’라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놈 찾고 싶으면, 나랑 얘기 좀 해야겠지?"
"...갑자기 그게무슨..."
"그건 네가 선택하는 거지. 지금처럼 이렇게 찌그러져 있을 거면, 그놈 이름도 다시는 못 듣고 죽는 거고."
나는 바닥을 응시하던 시선을 들어 곰을 바라봤다.
그의 눈엔 어떤 동정도 연민도 없었다.
오직 계산된 현실만이 담겨 있었다.
"선택해. 기회는 지금뿐이야."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채업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독이든 빵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전부 가져가. 내 목숨까지도. 그 사람만 찾을 수 있다면 뭐든 다 줄 수 있어."
어차피 죽으려고 했던 삶이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내 인생, 아니 우리 가족의 인생을 망친 그놈만 찾을 수 있다면,
독이든 빵 정도는 몇 개라도 먹어줄 수 있다.
그런 내 대답에,
곰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만족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는 중얼거렸다.
"좋다. 그놈을 찾아주면, 그 대가는 너다."
나와 곰의 거래가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다크모드 눈뽕 좀 고쳐주사미ㅣㅣㅣㅣㅣㅣㅣ
비밀번호 막 입력해서 모르겠음... ㅈㅅ
감사콩
맛있네 다자져와!!
생각보다 인기가 없는것 같아서 유기예정...
안되에ㅔㅔ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