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소리를 들은 B가 또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나 아까처럼 격렬한 반응은 아니었다. 대신 묘하게 피로해진 눈으로 상대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나 했다. 흰자위 하나 없이 검붉은 눈동자는 핏기가 조금 몰렸는지, 평소보다 훨씬 시뻘게 보였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후 차원 통합이 이루어졌을 때, 절대자……. 마왕이 건재함을 보여주시기만 하면 될 겁니다. 두 세계 모두 그 이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사무치도록 알고 있을 테니.”


적랑이 계약서를 흔들었다.


“다만, 저희에게도 보험은 필요하죠. 어쨌든 지구 출신이신 계승자님께 무턱대고 한 세계를 단신으로 지배했던 힘을 넘겨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

“그렇다고 무조건 저희 편이 되어드리라는 것도 아니랍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적당히 공정한 조율이라면 충분합니다. 거기에 더해…… 만에 하나 부득이한 다툼이 벌어졌을 때…… 약간의 ‘의무’가 추가되는 정도일까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다소 작고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설명을 마친 적랑이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B는 아까부터 그러했듯, 시간이라도 멈춘 듯 멀거니 앉아 있었다. 아래로 접힌 귀, 초점이 풀린 눈, 굳게 닫힌 주둥이. 건장한 남성의 팔뚝만큼이나 두꺼운 꼬리는 소파 바닥에 늘어져서는 미동조차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그다지 긍정적인 반응이 아님은 확실했다. 적랑 또한 이 사실을 내심 알아챈 모양이었다. 상대를 느긋하게 지켜보던 것을 멈추고는, 침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시도인지 대뜸 손뼉을 두어 번 세게 치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이해합니다. 많이 혼란스럽겠지요.”

“…….”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이것’이 무엇인지 구태여 물어볼 필요까진 없었다.


적랑이 바로 행동에 옮겼기 때문이었다. 대뜸 허리를 곧게 펴고는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 시작점이었다. 누가 모델처럼 늘씬한 남자 아니랄까봐, 쓸데없이 작은 얼굴은 곧 널찍한 손바닥 안에 폭 숨겨진 꼴이 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힘이 굉장히 센 무언가가 맨손으로 뼈를 부러뜨리는 소리 같았다. 아니면 방망이로 생살을 곤죽으로 만드는 소리라고 해야 할까. 뭐가 됐든 가만 듣고만 있기엔 썩 유쾌하지 않은 소리였다.


유쾌하지 않기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 또한 매한가지였다. 손등 너머로 반쯤 가려진 적랑의 얼굴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 맞은 죽순처럼 자라나는 주둥이, 살갗을 덮는 진홍색 모피. 정수리 양 맞은편에 튀어나오는 세모꼴 귀 한 쌍까지.


멀끔하니 잘생긴 얼굴이 갯과 짐승의 대가리로 변모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의태를 완전히 마친 붉은 늑대가 어벙한 눈을 한 검은 늑대를 향해 벙긋 웃었다.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주둥이 사이로 날카롭고 억센 어금니가 언뜻 드러났다.


“이제야 본모습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는군요.”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다시금 변형이 시작됐다. 마치 방금 벌어진 일을 녹화하고선 역으로 재생한 화면을 찬찬히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짐승의 세모꼴 귀, 피부 안쪽으로 쏙 들어가는 진홍색 모피. 관절과 생살이 우둑우둑 찢어지는 소리.


아무런 전조도 없이 다시금 변형이 시작됐다. 마치 방금 벌어진 일을 녹화하고, 역으로 재생한 화면을 찬찬히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짐승의 귀, 피부 안쪽으로 쏙 들어가는 보풀 같은 모피, 불거진 부분 하나 없이 건강한 분홍빛을 띤 입술.


“너…….”


일련의 과정을 하나하나, 멍하니 지켜보던 늑대가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거.”


떨리는 목소리였다.


적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상대의 반응을 만끽하려는 듯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B와 비슷한 색채지만 좀 더 밝은 눈동자는 상대를 물끄러미 담았다. 오늘 하루 벌어진 그 모든 일들 가운데, 어느 때보다도 크게 동요하는 짐승의 눈을.


“계약을 맺으신다면, 계승자님께 그 ‘저주’를 풀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드리도록 하죠.”


승리를 확신한 듯, 싱긋 웃은 적랑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하게…….”


그러나 이야기를 제대로 끝마치지는 못했다.


“뭐라고요?!!”


얌전히 듣고 있던 A가 비명을 꽥 내질렀기 때문이었다.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