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던 소꿉친구.


“응.”


그 사실을 깨닫자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산뜻했다. 엷게 웃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좀 고역이기는 했다. 야구라는 종목에 대해 잘 아는 편도 아니었거니와, 서너 시간을 가까이 불편한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야만 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날씨는 또 어찌나 더웠는지, 가만 앉아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오늘 있었던 일들이 마냥 지루하거나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도리어 반대에 가까웠다. 새파란 하늘 아래에 펼쳐진 광활한 경기장도, 철제 배트에 맞부딪히던 야구공 소리도, 태양 너머까지 닿을 듯 높이 뻗던 공의 궤적까지도. 모두 내겐 특별했다.


어쩌면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되게 멋지더라. 너.”


혹여 빈말로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싶어 몇 마디 더 얹었다. 녀석에게선 곧장 반응이 되돌아왔다. 주둥이를 쌜룩거리던 최호범은 시선을 스르르 피하나 싶더니, 이내 두툼한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어대기 시작했다. 땀이 말라붙은 모피는 금세 부스스 헝클어졌다.


“흠. 그게. 음. 다행이네.”


한참이나 목을 가다듬던 최호범이 중얼거렸다.


“너. 음. 여기 와 보고 싶어 했잖아.”


끝에 덧붙인 이야기는 다소 뜬금없었다.


“그래? 내가?”

“어릴 때. TV 보다가.”


나는 멍청하니 고개나 끄덕였다. 녀석의 집에 얹혀살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듯싶었다. 몸이 약하기도 했고, 소심하기도 했던 시기라 밖에 잘 나다니질 못했었지. 그런 나와 놀아주기 위해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거실에서 TV 보기가 전부였고.


나도 모르는 과거를 녀석이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참 신기했다. 막상 당사자인 나는 별생각 없이 읊조린 이야기였을 텐데 말이다. 구태여 나를 오늘 경기에 초대한 것도 그 희망사항 때문이었나. 그때 내 모습이 어지간히도 불쌍해 보였나.


“소원 하나 풀었네. 땡큐.”


의아하긴 했으나,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자 녀석 또한 웃었다. 소리 하나 없이 주둥이만 기묘하게 비틀어 올린 미소. 끝이 꼬부라져서는 잔뜩 부푼 꼬리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뒤쪽을 향하다 못해 모피 아래로 파묻히다시피 접힌 귀까지도.


“흠. 그게. 음. 방학 이제 며칠 남았더라?”

“일주일일걸.”

“짧네.”

“그러니까. 중학교 땐 좀 길었던 것 같은데…….”


하품 때문에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노곤한 눈을 끔뻑이던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시동이 들어온 승용차는 주차장을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멀찍이 우리 학교 야구부원들이 버스에 우르르 승차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미소를 매단 채로.


태양은 차츰 산등성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조금씩 불그스름해지는 하늘을 보다 보니, 문득 이런저런 사실이 새삼스레 실감됐다. 오늘 하루가 지나면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테고, 그러고선 머잖아 개학을 맞이하겠지. 이 모든 일들을 추억으로 접어둔 채로.


“개학하면 다시 보겠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 불만도 기대도 없었다마는, 어째서일까. 나는 지금 묘하게 들떠 있었다. 처음으로 지금을 괴롭히는 걱정 대신 막연한 앞날에 찾아올 무언가를 상상해 본 것이다. 이른 아침 교실, 나를 알아보고 인사할 친구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인사말.


창가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최호범.


“그래. 그때 보…….”

“좋았어, 그럼!”


나지막이 대답하려던 내가 어깨를 들썩했다.


“우리도 소고기다!”


운전석 쪽에서 우렁찬 고함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