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드래곤입니다."
내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눈앞의 경비원은 나를 조심스레 올려다보다, 떨떠름하게 확인하고는 기계에다 대고 자격을 확인했다. 똑같이 생긴 본인이 눈앞에 있는데도.
"성함이?"
"드래곤, 아틀라스. 그냥 아틀라스요."
곧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증명이 완료된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합니다."
"아니 신분증도 제출했는데. 제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줄 아는 겁니까? 불쾌한데요."
"하하. 최근 출입 방침이 빡세게 내려와서요. 이해 부탁드립니다."
"게다가 니체 소속이라고요. 여기 뱃지 안보입니까?"
신분증을 뺏듯이 가져온 내가 가리킨 가슴팍에는 금빛의 뱃지가 하나 달려있었다. 니체 소속의 변호사라는 직접적이고 단순한 표식. 개인적으로는 이런 게 촌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이런 게 필요했다.
경비원은 내 뱃지에 인식기를 가져다 대더니, 다시 삑- 소리와 함께 증명이 완료되었다.
"지나가셔도 됩니다."
"아무리 요즘 드래곤 수인들의 개체수가 적어졌다지만. 서운하네요. 겉모습도 겉모습인데. 참."
흰 바탕에 검회색 뱃가죽. 그리고 녹빛 눈을 가진 나 같은 드래곤은 정말로 흔치 않았다.
"너무 날카로우시군요, 선생님. 아시지 않습니까. 최근에 이상한 일들이 많은 탓이지요."
"프롬프터들 말입니까?"
"녀석들이 워낙 변장을 잘해야죠. 요즘은 인간이랑 구분을 못하겠다니까요. AI들 주제에 사람 사이에 섞여서 사람 행세를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자기들이 인간인 줄 아는 휴머노이드라니. 무서운 시대입니다."
나는 통유리로 된 게이트를 통과했다. 아슬아슬하게 닫히는 속도 탓에 내 꼬리가 집힐뻔했지만. 무신경한 저 경비원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잡담이나 하며 실실 쪼개는 모습이 보기 좋진 않았다. 할 일도 없나 보네. 괜히 어슬렁거리는 거 보면.
"요즘 정부는 게이트를 통유리로 씁니까? 이거 자원낭비 같은데. 제 꼬리도 집힐뻔했다고요."
"바뀐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뭐, 멋지잖아요."
"그럴 돈으로 시민들 복지나 좀 해주면 좋으련만."
"오…. 니체 소속 변호사가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봅니다. 혹시 시민주의자이십니까?"
"신경 끄쇼."
폭소하는 경비원을 보고 있자면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비아냥거리기 대회에 내보내면 분명 1등을 할 작자였다.
게이트를 지나고 좀 걸으면 엘리베이터가 나온다. 오늘 만날 인물이 워낙 거물이어야지. 괜히 긴장됐다. 젠장, 이래서 기업은 오래 다닐게 못 된다. 사람과 돈을 갈아 넣으면 실적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아나.
그럼에도 다녀야 했다.
저렴한 전기만 먹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프롬프터들과는 달리 유기체들은 인생의 유지보수 비용이 꽤나 컸다. 삶의 나쁜 점이지.
꽤 높은 층수를 올라가야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인간이 아닌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종족 친화적인 정부의 성향에 비롯된 거겠지. 나는 은근한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여러 번 열리고.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결국엔 나 혼자만 남았지만.
내 목적지는 거의 최상층에 가까웠다. 문이 열리고 단단한 대리석 복도가 나왔다. 그곳에서 만난 비서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한 사무실로 안내받았다. 그곳에는 남자가 하나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자세와 다르게 인사는 꽤 살가웠지만.
"오셨습니까. 오는데 불편함은 없으셨는지요. 아, 여기 앉으시지요. 이름이..."
"아틀라스입니다."
"좋은 이름이군요. 제 이름은 김차관입니다."
"음. 뭐랄까. 이름이..."
뭐라 더 살가운 말을 얹으려다가 포기했다. 형용할 수가 없네.
"독특하시네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가끔은 운명일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같지요. 제가 지금 맡은 직책도 인공지능 법률 차관이니까요."
남자의 말이 꽤 빨랐는데. 뭐랄까,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긴장하거나 초조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내 알 바는 아니지. 내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뭘 하던. 결국엔 실적으로 이어지니까.
"아, 불편한 게 하나 있긴 했었죠. 출입 통제가 아주 엄격해졌던데요. 제 신분을 이중으로 확인하더군요."
"그랬습니까. 로비에서 일을 잘하는군요."
"과하지 않습니까?"
비서가 차를 내오는 동안 그와 나는 시선을 맞췄다. 어색한 침묵이었다. 달그락거리며 정갈한 다기에 마시기 좋은 온도의 차가 준비되었다.
손으로 다기를 들면 적당한 온기가 전해져온다. 수증기와 함께 녹차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좋은 찻잎을 쓴 게 분명하다. 교양이 있으시군.
그가 입을 연 건 내가 차를 두 번 정도 마시고 난 뒤였다.
"우린 이제 프롬프터라 불리는 휴머노이드 로봇들과 진짜 인간을 구분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 사이로 인간의 존엄과 개성은 섞여 사라지고 있죠. 죽은 인터넷 이론이라는걸 들어보셨습니까?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들을 따라 하는 AI들만이 마치 사람처럼 떠들고 있다는. 그런 소름 끼치는 이론을 말입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기에 뭐라도 위안적인 말을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영속성을 주장하는 기업인 니체 소속 변호사였으니까. 세계 최대 프롬프터 바디 생산기업. 그들을 대변하는 게 바로 나였다.
"알고 있죠. 요즈음에는 정말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이건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진짜' 사람이 줄어들고 있어요."
"위안이 되실진 모르겠지만, 최근 저희 니체에서는 죽은 사람의 뇌를 스캔해서 프롬프터를 만드는 기술을 특허로 냈습니다. 기술 시험단계이기도 합니다. '진짜' 인간을 보존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그건..."
나와 대면한 남자가 숨을 들이켰다.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소름 끼치는군요."
"소중한 사람을 사고로 잃은 사람들에게는 꿈 같은 기술입니다. 나쁘게만 보지는 말아주십시오."
나는 니체 소속 변호사로서 프롬프터들을 옹호하고 변호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요즘 AI들은 너무 인간 같아서 큰일이었다.
"아틀라스씨. 우린 멈춰야 합니다. 세계가 기울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세계가 망해버릴 겁니다. 정부는 그걸 막거나 적어도 지연시킬 책임이 있지요. 지금이야 로봇과 시민들이 하하 호호하고 있지만..."
남자는 침을 삼켰다.
"저는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추악합니다…. 그들은... 뭔가 다릅니다. 가끔은 너무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보통 악마이지요. 악마를 알고 계십니까?"
그는 떨고 있었다. 눈동자는 이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인가, 아니면 지난 몇 년인가.
남자가 내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누군가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프롬프터들에게 인간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그렇지만 그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진짜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
"아냐. 아니야. 아니야!!!"
쨍그랑-!
그가 편집증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기에,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이 떨어져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엎어진 차에서는 아직도 온기가 올라왔다. 그는 분한 듯이 그 깨진 찻잔을 구둣발로 밟고, 또 밟고, 가루가 될 때까지 밟았다.
놀라라.
"아틀라스 씨는..."
그는 이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은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주르륵 흐른다. 왜지? 당황스러운데.
그는 심지어 내 멱살을 잡았다.
"프롬프터들이 살아있다고 정말 믿습니까? 아틀라스 씨도?"
일하면서 가장 곤란한 순간이 이런 때이다. 나는 결국 회사의 입장을 대변할 뿐인데. 개인적인 의견을 묻다니. 어느 쪽이 더 리스크가 적을까 생각해 봤지만, 역시 이런 건 협상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려면 대상과 우호적인 쪽이 더 편하고.
그러나 지금 내가 내뱉는 말은, 정말 내 신념일까 아니면 무언가 목적성을 가진 잡념일까?
"아니요. 저는 프롬프터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터무니없지요. 그냥 다음 글자를 예측하는 통계적 기계일 뿐인데."
그의 눈이 의심을 품고 있었기에 얼굴로 약간의 혐오감을 표현해 줬다. 눈가를 찡그리고 고개를 당기고. 일부러 미소 지은 채였지만 끝 인상은 징그럽다는 듯이.
그제야 그는 안심했다.
"그럼 말이 통하겠군요. 다행입니다. 그 기업에서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 자네 이것 좀 치워주게."
그가 발을 털었다. 방금 누가 밟아 조각내기 전까지만 해도 찻잔이었던 도자기가 카펫 위에서 흩날렸다. 그것을 치우는 건 여성형의 비서였다.
"주인님. 매번 이러시면 언젠가 크게 다치실 거예요."
그녀는 현대 프롬프터의 초기 버전. 외형은 온전한 여성 인간처럼 보이지만, 눈에 띄게 구별이 가능한 칩 소켓이 오른쪽 관자놀이 쪽에 붙어있고. 감정표현 능력은 조금 미숙한 모델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다 치웠으면 나가주게."
비서는 조각들을 전부 치우고는, 공손히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프롬프터들이란 대게는 이런 유능한 비서들이다.
유리 조각에 다칠 일도 없고, 살아있지도 않은. 편리한 서비스 원.
나는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김차관. 대한민국의 인공지능 법률을 제정하는데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
"그래.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이제는 이야기해 볼 만 하겠군요. 괜찮은 사람이란걸 알았으니."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요?"
"예."
한국은 보수적이다. 종종 급진적인 면모를 보이면서도 보수적이다. 한두세대를 거치면 변화는 꽤 빠르게 일어나지만,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한 이전 세대는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누구보다 극렬하다고 해야 할까. 필요에 의해 바뀔 때는 빠르게 바뀌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바꾸지 않는 민족성.
휴머노이드의 공장 도입은 그 어느 나라보다 빨랐지만, 동성결혼 제도는 가장 마지막에 확립되었던 나라. 한국.
그런 이전 세대를 대표하는 그에게 내가 하는 말은 어떻게 들릴까?
"저는 범 인공지능 기업 니체와 사랑의 자유를 찾는 시민들을 대표해서, 프롬프터와 인간의 혼인신고를 합법화해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 성명문도 있습니다."
* * *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앞에서 소주와 맥주를 섞는 친구, 회색 늑대 수인 맥 러너가 나를 보고 물었다. 공사판에서 일하고 있다던 근황을 자랑하듯, 근육으로 불거진 남자답고 멋진 팔뚝으로. 고작 소맥을 타고 있다.
그는 방금까지 현장에서 구르다 온 것을 증명하듯 작업 바지를 입고, 흰색 민소매 티를 입은 채였다.
나는 실실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나 머리하고 가슴팍에 붕대 감은 거 안보이냐. 슝~ 날아갔지. 구둣발에 차여서. 문밖까지 아주 쾅 소리를 내면서 쫓겨났다. 노발대발 화를 내더라고. 김차관 그 사람. 나가!!! 소리 지르던데? 사람 좋은 척은 다했으면서. 야, 나한테 그 프롬프터가 사과를 다하더라니까."
"아…. 웃기네. 아틀라스. 회사 생활. 완전 잘나가는 줄 알았는데 허접이었잖아."
러너가 내 몸 상태를 보더니 스읍- 하면서 웃음을 참았다. 아닌가…. 이미 웃고 있었다. 살짝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그 사람 혼내줄까?"
"뭣."
내 오랜 친구, 흉터 많은 상남자 회색늑대 -자칭이다- 맥 러너가 내 이야기를 지적했다.
"아틀라스. 보통 좋은 사람은 찻잔을 밟아서 조각내지 않지. 그건 괴팍한 거야. 너 되게 무서운 사람을 만났구나."
"말도 마라. 구둣발로 차인 가슴이 아직도 아파. 나 나름 회사에서 대접받는 사람인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실실거리고 웃으면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금방 갔다.
"...야. 소주 비율이 거의 5인 것 같은데 이게 맞냐."
"오늘 같은 날에는 맛있게 마셔야지. 안 그르겠냐!"
러너가 냅킨으로 맥주잔을 막고, 위아래로 경쾌하게 쉐킷쉐킷. 탁! 탁자에 내려놓고. 젖은 냅킨은 하늘 위로 보지도 않고 휙-…. 착! 젖은 냅킨이 천장에 붙었다.
"거기!!! 포장마차에서 뭐 하는 짓이여! 그런 건 느 집 가서 해라 느 집에 가서! 러너!!!"
"앗! 할머니 죄송함다!!! 아틀라스가 오랜만에 왔잖습니까."
"그래. 반가운 건 반가운 건데. 여가 니 집이냐꼬!"
"악! 악!! 아파요! 내 귀! 잡아당기지 마요!"
주인장 할머니가 어느새 주방에서 뛰어나와 러너의 등짝에 스매시를 갈겼다. 오뎅 국물을 뜨던 국자로 나와 러너를 가리키며 성냈다.
"지켜보고 있다. 얌전히 먹고 가라."
"네..."
러너가 기가 죽어서 돌아왔다. 투덜대는 건 덤이고.
"아이고…. 머리야. 저 할무이 성질 건드리지 말자. 피곤하다."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그래도 할무이가 너 붕대 감고 온 거 불쌍하다고 오늘 먹는 거 다 공짜로 준댄다. 파티다 파티."
"그건…. 나쁘지 않은 이야기네."
짠. 건배와 함께 소맥을 마신다. 한 모금 삼킬 때마다 목 너머로 차가운 냉기, 그리고 탄산이 뒤통수를 때리는 듯하다. 알코올향이 입안에서 은은하게 올라온다. 러너도 마찬가지도 꽤 마셨다. 늘 그렇듯이 내 1.5배는 마시는 것 같은데.
러너에겐 흉터가 많다. 거칠고 험한 일을 많이 해왔으니까. 요즘엔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잘 지내?"
"현장 일이야 늘 똑같지. 쉽고, 생각 없이 하기 좋아. 돈도 많이 주고."
"그런 거 치고는 자잘한 상처가 많은데."
"원래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야."
"흠."
"근데 네 일은 머리도 아프고 이젠 몸도 아프네?"
"야."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말 없이 건배로 대답을 대신했다.
"변호사 일도 예전에는 참 좋아 보였는데 요즘엔 또 안 그렇더라. 특히 어느 회사에 들어가 있다는 건 여러모로 피곤한 일인 것 같아.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거니까."
"뭐 다른 일은 안 그렇나..."
"내 말은, 신념적으로."
"일이야 뭐. 그 사람이나 회사를 대변하는 거니까. 법률적인 부분 검토하고. 그거 안 하면 변호인이 왜 있냐?"
"그런가?"
"그렇지."
나와 러너는 실없이 웃었다.
짠. 잔을 부딪힌다.
"근데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거면 돈 꽤 많이 받을 텐데. 그 왜, 요즘엔 프롬프터들이 위험한 일 다 하잖아. 그런데도 네가 일할 구석이 있는 거면 그건 대체가 안되는 분야라는 거잖아."
"내가 또 꽤 잘나가는 기술자지. 음음."
러너가 자신의 양 손을 뭔진 모르겠지만 기술적으로 꺼내 들며 양쪽으로 뽐냈다. 양손에다 반짝이 이펙트라도 붙여줘야 할 것 같은 장면이다.
"돈도 많이 벌 텐데."
"크흐! 역시 내가 또 한 능력 한다니까."
"근데 그 돈, 다 어디다가 쓰고 있는 거야?"
프롬프터가 대체할 수 없는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면 좋은 대접을 받고도 남아야 했다. 그런데도 러너의 차림새는 그렇지 않았다. 무언가 비싼걸 사는걸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작업 바지에 흰 나시 하나만 걸치고 있는데. 무엇보다 러너의 생활 수준이 미묘하게 낮았다. 작업 바지도 다 헤졌다.
언제부터였지? 우리가 친구가 된 지도 10년이 넘어가는데. 언젠가부터 이랬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음…. 그건."
"네가 돈 쓰는걸 못 봤어."
한 모금. 마시는 소맥이 은근히 쓰다. 이종족 차별일까. 아직도 인간 우월주의를 가지고 수인족들을 차별하는 회사가 있다고 듣긴 했다. 그렇지만 요즘엔 정말 흔하지 않을 텐데. 혹시라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거면 내가 도와줄게."
"야. 그런 거 아냐. 현장 사람들 나한테 엄청 잘해줘. 매번 챙겨준다고. 그냥..."
러너가 날 바라봤다. 빤히, 뚫어져라.
"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내가 너 하나 못 도와주겠냐?"
"아틀라스. 진지하게 물어볼게."
"뭔데. 말해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입을 벌려 무언가 말하려다, 다시금 저 망할 입꼬리가 쓱 올라가는 것만 빼면.
"...이래 놓고 수임료 막 5천만 원씩 받는 뭐 나한테 그런 영업하고 있는 거 아니지?"
"아오. 이 미친 놈아!"
"으에에..."
러너가 실실 웃었기에 볼 끄덩이를 잡아 늘려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돈 나가는 데가 있어. 주기적으로. 사실 그거 내고 나면 조금 빠듯하지."
"그래? 네가 그런 게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러너는 뒤통수를 살짝 긁었다. 멋쩍게.
"누굴 치료해야 해서."
"엥? 누구를."
말해주건 말해주지 않건 자기 마음이겠지만. 우리 꽤 친한데. 모르는 구석이 있었다는 건 뭔가 찜찜했다. 아니지. 서로의 사생활이 있으니까 그럴 수 있지. 존중해야 한다. 근데 언제부터 그런 거지?
"그런 게 있어."
"그렇구나."
하긴, 내가 동네를 좀 오래 떠나있었긴 했다. 그 사이에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지막 건배 이후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위로해야 할까?
"괜찮아. 뭐랄까 돌아갈게 있는 삶도 나쁘진 않더라."
사실 이런 분야에서는 내가 선배였다. 어느덧 이런 생활도 6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알잖아. 나도 누나 병원비 대느라 니체에서 일하는 거. 월급의 8할은 거기서 빠질걸? 중환자실에 있어서 자주 보진 못하지만 아무튼. 음, 네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니 유감이야. 그래도 우리 비슷하네. 찌찌뽕."
"..."
"..."
"갈까?"
"그래..."
아무래도 쓸데없는 소리였나.
절친한 둘 모두에게 불행의 그늘이 드리워있다는 건, 그리 위로가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오늘 꽤 많이 마셨다. 주인 할머니와 몇 가지 안부를 주고받고 거리로 나왔다. 내가 한사코 돈을 내고 가자 할머니가 밖까지 따라 나와서 다시 손에 돈을 쥐여줬지만 받지 않았다.
이 동네의 벽돌 하나, 사람 한 명, 쓰레기장과 거리를 구분하는 철조망 너머의, 저 밤하늘에 보이는 별자리마저 사랑하는데. 하물며 주인 할머니인데.
어린 시절의 추억을 지불받았다 생각하고 본래 가격에다 덤을 얹어주는 건 내겐 그리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그 정도 버는 사람이다. 할머니가 고마워하며 나를 배웅해 줬다. 얼굴 좀 자주 보자며.
비틀거리며 러너와 서로 의지한 채 밤거리를 걸었다. 여전히 지저분하고. 그래비티가 골목마다 새겨져 정신없는 동네였지만 난 그런 게 좋았다. 네거티브 스페이스라는 멸칭이 붙었지만 의외로 이곳의 사람들은 정도 많고, 밤이 되면 고즈넉해지는 동네였다.
걷다가 러너가 사는 자취방에 들어왔다. 술에 쩔어서 한 호흡마다 진한 알코올 향이 풍겼다. 너무 많이 마셨는지 눈이 침침하다. 신발을 벗고 침대에 엎어졌다. 두 남자가 숨 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틀…. 그거 힘들어?"
"뭐가."
오랜만에 들어온 네 자취방에선 정겨운 냄새가 났다. 예전엔 같이 되게 재밌게 살았었는데. 맥주로 파티하고, 친구들 불러서 영화도 보고. 둘이서 시간도 보내고. 취직을 하고 난 뒤로는 올 기회가 잘 없었다. 똑같은 이불, 똑같은 공간. 똑같은 창밖의 달, 여전한 너.
"누나 병원비 대는 거. 많이 힘드냐고."
"글쎄…. 그냥 살만한 것 같은데. 그래도 내가 받는 돈이 꽤 되니까."
"그래…. 그럼 다행이고."
러너가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엥. 그게 다야?"
"뭐."
"더 할 말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어…. 그냥. 이리와봐."
"...?"
러너가 흉터가 가득한 팔을 들어서 날 자기 품으로 어리광 부리듯이 끌어왔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예상 못했던 일도 아니었다. 러너의 품은 푹신하면서도 단단했다. 일이 일인지라 잔근육이 붙었다.
"나는 조금 힘들어서."
"그러냐."
불쌍한 녀석. 그 어느 때에도 눈물 한번 보이지 않는 놈이었는데. 어지간히 힘들긴 한가보다.
나는 말없이 러너를 토닥였다.
"..."
따뜻하다. 늘 그랬다. 드래곤의 체온은 파충류 쪽에 가까워서 그렇게 높지 않았다. 반면에 늑대의 체온은 언제나 높았다. 잠자기 딱 좋은 온도. 재작년에도 그랬고. 삼 년 전에도 그랬다.
나는 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러너의 주위를 맴돌았다. 언젠가는 그가 마치 고향처럼 느껴졌다. 그가 이 동네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어서 그런 걸까. 명절마다 얼굴이 보고 싶어지는건 왜일까. 부모님도 아닌데.
"으음..."
...러너가 내 등을 쓰다듬었다. 간지럽게. 이럴 때가 꼭 있었다. 오래된 장난이었다. 늑대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쉰다.
팔 사이로 나를 끌어안는다.
우리는 더욱 꼭 마주 보게 되어서 서로가 숨을 내쉴 때마다 내려가는 폐부의 한숨을 느끼고. 다시금 부푼 폐부 아래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다시, 손으로 허벅지를 짚으며, 또 온기를 느끼다 서로의 다리를 겹치고. 밀착하다 웃는다. 그러다보면 꼭. 음, 섰다.
"...게이."
내가 말했다. 러너가 날 보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설렁이는 꼬리가 남사스럽게 겹쳐도 온기는 식지 않았다. 와이셔츠를 다급하게 벗겨도 여전했고, 넥타이를 풀어헤쳐도 숨이 가빴다. 거추장스러운 작업 바지마저 휙 내던져버린다.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전부 치운다. 늘 그랬듯이. 그러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서로의 혀를 삼키듯이 입을 맞췄을 때의 온기가 섞인 한숨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우리는 언제부터 이랬을까...
나는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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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드래곤이너무많아
전부다슬릿교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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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오 신작 백룡과 회색늑대 - dc App
게이게이야...♥+ 사연 있는 바라 늑머에 마지막 장면이 익숙한 용용이라니... 근데 아직도 친구??? 이건 못 참지......♡
동거친구순애!
왜 글에서 익숙한 순문학의 맛이 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