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 모니터 화면에 띄워둔 서비스 기획안을 끝없이 노려보던 민준은 뻐근한 뒷목을 꾹 주물렀다. 프리랜서 IT 기획자의 삶이란 클라이언트의 변덕에 맞춰 기획서를 엎고 밤을 새우는 일의 연속이었다. 뻑뻑해진 눈도 식힐 겸, 민준은 현관에 쌓여 있던 빈 택배 박스들을 챙겨 들고 지하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어스름한 형광등 불빛이 내려앉은 지하. 서늘한 초록색 페인트 바닥 위로 어둑한 그림자가 흩뿌려진 공간 한구석에서, 민준은 흠칫 걸음을 멈췄다.

플라스틱 수거함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등짝.


어제 민준이 잘못온 택배를 전하려고 만났던 701호 수인이었다.


넉넉한 검은색 후드 집업과 통이 넓은 회색 스웻팬츠로 온몸을 칭칭 감싸고 있었지만, 천 쪼가리 하나로 가리기엔 골격이 품은 질량감이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두 명은 너끈히 가려질 만큼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 그 아래로 묵직하게 쌓아 올린 뼈와 근육, 그리고 그 위를 덮은 체지방의 둔탁한 부피감이 뒷모습만으로도 숨을 턱 막히게 했다.


‘늘 이 시간에 분리수거를 하러 나오는 건가.’


그런데 그 위압적인 덩치 위로, 모자 밖으로 빼꼼 빠져나온 빳빳한 황색 귀가 쫑긋거리며 기분 좋게 리듬을 타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언밸런스한 광경이 시야를 꽉 채우는 순간, 민준의 심장이 쿵, 하고 요란하게 바닥을 쳤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몽글몽글한 덩어리가 훅 부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다가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제 마음이 앞서 저 소심한 수인을 놀라게 할까 봐 민준은 애써 입술을 꾹 깨물어 표정을 다잡았다.


‘자연스럽게. 아주 우연히 마주친 무해한 이웃처럼. 부담 주지 말고.’


속으로 수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민준은 발소리를 죽여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킨 그는, 입가에 가장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뒤 입을 열었다.


"아,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



약 30분 전.


편의점 심야 알바를 마친 지후는 좁은 휴게실에서 육중한 몸을 간신히 펴고 숨을 몰아쉬었다. 두 다리로 이 둔탁한 체중을 버티며 밤새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내는 일은 매일이 지옥 같았다.


지후는 편의점 조끼를 벗고 습관처럼 자신의 검은색 후드 집업 소매를 코끝에 대고 킁킁거렸다. 다행히 편의점 튀김 냄새는 배지 않았고, 출근 전 들이부었던 섬유유연제의 포근한 머스크 향만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지후는 현관에 쌓인 박스들을 챙겨 곧장 지하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서늘한 지하에 도착해서야 지후는 억눌러두었던 황색 귀를 밖으로 꺼내놓고 편안하게 팔락거렸다.


"아,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그때, 등 뒤에서 불쑥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1701호 남자였다.


순간 지후의 커다란 몸이 시멘트벽처럼 단단하게 굳어졌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며칠 내내 머릿속을 헤집어놓던 그 맑고 반듯한 얼굴을 다시 마주했다는 벅찬 기쁨. 너무 좋고 설레서, 가만히 있던 풍성한 꼬리가 붕붕 요동치려는 것을 허벅지에 힘을 꽉 주어 간신히 참아냈다.

하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뒤를 돈 순간, 차가운 현실이 지후의 목을 옥죄었다.


‘안 돼. 방금 전까지 땀 뻘뻘 흘리면서 박스나 뜯어 제끼던 내 꼴이 얼마나 흉할까.’


강박적으로 몸을 씻고 섬유유연제로 향기를 뒤집어써 봐야, 이 미련하게 거대한 몸집과 투박한 인상은 숨길 수가 없었다. 과거 자신을 조롱했던 사람들처럼, 저 다정한 눈빛 역시 자신의 거친 모습을 보고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자격지심이 덜컥 목덜미를 잡았다.

다가가고 싶지만, 혐오스러운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지후는 황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처박고, 제 흉한 얼굴을 가리듯 후드 모자를 푹 눌러쓰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 급했다. 피하려던 두꺼운 발목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빈 유리병을 밟고 바스락, 찌그러졌다.


"앗, 조심해요!"


유리병이 미끄러지는 마찰음과 함께, 민준의 눈앞에서 거대한 산맥 하나가 속절없이 기울어졌다. 민준은 들고 있던 박스를 내팽개치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남자의 팔뚝을 강하게 낚아챘다.

완벽한 오판이었다.


탁. 손에 잡힌 701호 남자의 팔뚝은 사람의 살갗이라기보단 굵은 통나무에 가까웠다. 얇은 천 너머로 만져지는 터질듯한 전완근의 단단함에 민준의 눈이 커졌다. 민준의 평균적인 체격으로는 그 압도적인 질량과 가속도를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다.


"윽!"

"아!"


지후의 몸이 추락하며, 그를 꽉 붙잡고 있던 민준마저 거대한 중력에 휩쓸려 허공으로 딸려 들어갔다. 짧은 비명과 함께 지후의 넓은 등이 초록색 페인트 바닥에 쾅, 하고 처박혔다. 그리고 반동이 채 사그라지기도 전에, 민준의 몸이 남자의 거대한 흉통 위로 무방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우당탕탕. 요란한 마찰음과 함께 두 육체가 빈틈없이 맞붙었다.


"흐윽...!"


민준은 제 밑에 깔린 압도적인 덩치에 훅 숨이 막혔다. 자신이 엎어진 곳이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뜨겁고 두꺼운 수인의 육체 위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넉넉한 옷 아래 감춰져 있던 질량감. 얼떨결에 짚은 두 손바닥 아래로, 과거 유도로 다져졌을 무식하게 단단한 대흉근과 그 위를 부드럽게 덮은 체지방의 둔탁한 감촉이 생생하게 밀려들었다. 평범한 성인 남성인 민준이 양팔을 벌려도 도저히 한 품에 안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두께와 너비였다.


쿵, 쿵, 쿵.


커다란 짐승의 심장 박동이 민준의 손목을 타고 거칠게 울렸다. 얽혀버린 숨결 사이로, 땀 냄새 하나 없는 포근한 머스크 향이 훅 끼쳐왔다. 섬유유연제를 얼마나 들이부은 건지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깨끗한 냄새.

자신을 가볍게 튕겨낼 듯한 위압적인 육체와, 코끝을 간지럽히는 순한 향기의 지독한 괴리감. 민준은 제 가슴 아래서 숨을 헐떡이는 남자의 굵직한 목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하며, 등줄기를 타고 기묘한 충동이 뻗어나가던 그 순간이었다.


"...!"


몸을 일으키려 무심코 다리에 힘을 주던 민준의 숨이 ‘헉’ 하고 멎었다.

자신의 허벅지 안쪽, 남자의 넉넉한 회색 스웻팬츠 위로 믿을 수 없이 묵직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뭉근하게 짓눌려 온 것이다.

단순한 천의 두께로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거대한 수컷의 적나라한 부피감과 흉흉한 열기. 제 다리 사이를 뚫고 들어올 듯이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민준의 이성이 완벽하게 타버렸다.


순간 민준의 맑은 흑갈색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밑에 깔린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지후 역시 온몸에 벼락이 내리친 것처럼 굳어버린 채 민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후는 극심한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남자가 뼈라도 다쳤을까 봐 놀란 마음도 잠시, 자신의 가장 은밀하고 짐승 같은 부위가 저토록 다정하고 반듯한 남자의 허벅지에 노골적으로 비벼졌다는 사실에 뇌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거대한 제 육체 위로 완전히 포개진 남자의 마른 몸, 목덜미에 닿는 더운 숨결.

그 물리적 자극에 심장이 흉곽을 뚫고 나올 것처럼 발작하기 시작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터질듯한 설렘과 주체할 수 없는 수컷의 본능이 끓어올랐다. 이 끔찍한 몸집으로 감히 제 이상형을 품에 안고 발정해 버렸다는, 그 걷잡을 수 없는 수치심.


툭. 투둑. 툭.


결국, 어떻게든 티를 안내려고 억눌러두었던 풍성한 황색 꼬리가 페인트 바닥을 미친 듯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적나라하고 짐승 같은 본능의 소리가 지하를 울리는 순간. 지후는 귓바퀴부터 굵은 목덜미까지 시뻘건 열기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 반응과 아래에 서서히 단단해져 가는 뻐근한 열기에,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아, 아, 안, 괜찮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지후는 불에 덴 사람처럼 허둥지둥 민준의 허리를 밀어내고 짐승처럼 몸을 일으켰다. 제 꼬리와 앞섶의 부푼 흔적을 가리듯 허리를 엉거주춤 굽힌 채 횡설수설 외치고는, 거대한 몸을 폴더처럼 반으로 접어 꾸벅 인사를 남겼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상구 쪽으로 내달렸다.

쿵쾅거리는 무거운 발소리가 계단을 쿵쿵 울리며 도망치듯 멀어졌다.


"......"


어두운 페인트 바닥 위. 나뒹구는 택배 박스와 빈 유리병 사이로 덩그러니 남겨진 민준은, 텅 빈 허공과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번갈아 보며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하아... 도망가 버렸네."


땅이 꺼져라 뱉어낸 한숨이 공허하게 흩어졌다.

남자의 두꺼운 가슴을 짚었던 두 손바닥, 그리고 허벅지 안쪽을 빈틈없이 찌르고 들어왔던 그 폭력적일 만큼 묵직한 열기의 감촉이 지독하게 남아 있었다. 코끝을 맴도는 달콤한 머스크 향의 잔향을 들이마시며, 민준은 제 이마를 짚은 채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