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팔천팔배, 백, 원이요…….”


조용하고 힘없는 목소리까지도.


멍청하게 눈만 껌뻑이던 태건이 별안간 챙을 홱 올렸다. 휘둥그레 변한 까만색 눈동자에 상대의 모습이 담겼다. 헐렁한 편의점 조끼를 걸친 고양이 수인은 느닷없는 행동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어깨를 한껏 움츠러뜨리고 몸을 뒤쪽으로 기울인 상태였다.


옆집 남자였다.


“뭐야.”


짜증인지 반가움인지, 묘한 감정에 휩싸인 태건이 빠르게 말했다.


“여기서 일해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물며 고개를 까딱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는, 시선을 비스듬히 떨어트린 채 미동조차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노란색 눈동자는 이따금 이쪽을 훔쳐보나 싶다가도 재차 바닥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나 몰라요? 옆집이잖아요. 옆집.”

“아, 아는데…… 요.”


굼벵이 같은 의사소통에 열이 홱 뻗쳤지만, 태건은 꾹 참았다. 윽박지르는 대신 심호흡이라도 하듯 숨을 깊게 들이마시기나 했다. 지나가듯 내려간 시선에 상대의 가슴께에 달린 명찰이 문득 스쳤다. ‘고영윤’이라고 적힌 플라스틱 명찰은 한쪽 구석이 깨져 있었다.


“이야, 이웃인데 얼굴 보기 참 힘듭니다. 그죠?”

“…….”

“면상에 뭔 금칠이라도 했나?”


농담이라도 건네 분위기를 풀어보려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금칠’ 소리에 움찔한 영윤이 몸을 더욱 움츠러뜨렸던 까닭이다. 안 그래도 좁아터진 어깨가 쭈그러들기까지 하니, 태건은 상대가 무슨 흡사 젓가락으로 다 보일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영윤은 방금 제가 건넨 농담을 비아냥거림으로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주먹을 입가에 대고 헛기침한 태건은 눈동자를 떼구루루 굴렸다. 이 새끼 이거, 사람 무안하게 만들고 지랄. 공사판에선 잘만 통하는데. 좀 웃으면 어디가 덧나나.


어떻게 하지?


식은땀을 삐질 흘린 태건이 생각했다. 십수 년 동안 밑바닥을 전전한 사내가 아니던가. 그러니 구사하는 화법 또한 그에 맞게 저열할 수밖에 없었다. 심심하면 쌍욕에 수틀리면 싸움까지 벌어지는 공사판, 술 마시고 허세 부리며 떡 치는 게 전부인 유흥업소.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괄괄하고 거친 인부도 아니고, 돈 몇 푼에 샐샐거리며 다가오는 매춘부도 아니었다. 태건에게 있어 생전 처음 보는 유형이나 다름없었다. 작고, 마르고, 약하고. 무슨 말을 해도 남자답게 맞서기는커녕 눈치를 보며 덜덜 떠는.


그런 이상한 남자.


“……하셔서.”


어벙하게 눈만 껌뻑이던 태건이 정신을 차렸다.


“예?”

“바, 방해하지 말라고……. 하셔서.”


지금 설마 피해 다녔다는 거야?


이제야 그간 상황을 이해한 태건이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그런 소리를 꺼내긴 했더랬다. 느닷없이 상대가 찔찔 짜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냥 아무 말이나 던지고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갔었지. 반찬통도 받으라는 대로 받았으니 이제 더는 남 방해할 생각 말라고.


“아니…… 그러니까, 형씨. 그건 그냥 남의 잠 방해하지 말라고 한 소리고.”


똥줄을 죽어라 태웠던 지난 며칠이 아까웠으나, 어쩌랴. 애써 좋게 생각한 태건이 다시금 심호흡했다.


“아무튼. 흠.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웃집끼리 통성명이나 좀 합시다.”


그러곤 손을 불쑥 내밀었다.


“강태건이라 캅니다.”


놀란 듯 입술을 뻐끔거리던 영윤도 손을 느릿느릿 움직였다. 굳은살로 거칠거칠한 손바닥에 맞닿는 손가락의 감촉은 놀라우리만치 생경했다. 태건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저, 저는. 그. 고, 고영…….”

“고영윤이라고요? 압니다.”


끝끝내 참지 못한 태건이 말을 잘랐다.


“이름표, 이름표.”


그러곤 영윤의 가슴께를 턱짓했다.


-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