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이한 독일어 단어는 순수한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 계열에서 파생되었으며 영어와 불어에도 
공동으로 통용되는 것으로서 ‘이해 가능한’ 이란 
뜻을 갖고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철학에서 완전히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무엇보다 고대철학에서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nous에, 그리고 플로티누스는 
신플라톤 철학자로서 이것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순수하게 인식할 수 있는 nous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리스 단어 nous는 순수이성으로서 나중에 지성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intellctus로 옮겨진다. 근대에 칸트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이성의 선험성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크게 분석론과 변증론으로 나누고 전자에서는 감각직관, 표상, 공간과 시간, 오성, 범주, 원리, 통각, 자기 의식등을 다루고 
변증론에서는 오성의 오용을 통해 나타나는 이율배반들을 다룬다. 분석론과 변증론 사이에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두,세 페이지의 논의가 
삽입되어 있는데 칸트는 여기서부터 intelligible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실천이성비판>으로 옮겨지면서 심지어 물자체의 세계를 나타내는 단어로까지 사용된다. 순수이성이 실천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나타나는 가지계나 예지계 

여기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주로 현상과 물자체, 
현상계와 본체계, 경험적 대상과 선험적 대상이다. 
그런데 intelligible은 후자에 적용되는 단어로서 
‘이해 가능한’이나 ‘지성적인’으로 번역해서는 
사태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감성이나 오성과 상관없이 오직 이성으로만 인식될 수
있는’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감각직관을 통해 들어온 경험의 자료들이나 오성의 
범주속에 선험적으로 주어진 개념과는 무관하게
순수이성과만 관계하는 단어이다. 우리는 보통 이 
단어를 ‘이해 가능한’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여기엔 ‘감각직관을 통해 들어온 모든 자료들을 제거한 순수이성’이란 의미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은 
감각을 통하여 의미를 상정할 수 있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형용사를 ‘지성적인’이라고 번역해도 사태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성적으로’이란 단어를 반드시 
‘감성의 자료들과 오성의 범주를 제거한’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책을 독일어를 잘하는 
문학가나 어원학자가 번역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어 하나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전체 문맥이 달라지고 철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태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칸트와 
다른 철학자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intelligible을 ‘이해 가능한’이나 
‘지성적인’으로 번역했을 때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3논문> 12절 전체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니체는 여기서 이 단어를 통하여 나타나는 물자체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고찰함으로써 모든 인식에서 
‘해석’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단어의 오역은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 텍스트성의 문제를 불러오고 
이로써 모든 사태를 왜곡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철학의 난해함은 바로 이런 문제에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철학자 박충일 선생님의 코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