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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손에 거머쥐지 않았을 때에 빛나는 것이다.


근 몇 년간 나를 끈질기게 괴롭혀 온 스스로의 강박이다.
위선적이고 모순적이고, 무익하고 독선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결코 쉽사리 떨쳐낼 수 없었다.
고공비행을 하다가 날개가 녹는 일쯤이야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어루만지던 수정구가 자칫 발길질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다는 신탁을 과연 점쟁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듣고 있어?"

"아, 정말 미안. 조금 깊게 생각할 일이 있어서..."

"뭐야, 좀 더 뻔뻔하게 맞받아치는 걸 기대했는데, 사람 미안하게 만드는 게 취미야? 하핫!"


멋쩍게 볼을 긁적이며 리츠가 말했다.

...실수했다.




그녀와 알게 된지도 어언 3년이 다 되어 간다.
첫 만남에는 나와 그녀 외 몇 명이 더 있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전봇대에 붙어있는 조악한 홍보 용지를 차마 지나치지 못했던 것이 그로부터 며칠 전.

악기 따위는 만져본 지가 7년은 족히 넘었었다.
저녁에 벽장 위를 잠깐 휘저은 후 넥을 손에 걸고 줄을 튕겨 보았다.
첫 음은 괴랄했다. 그러나 반나절 쯤 뒤에는 제법 들어줄 만한 소절이 나왔다.

그 날 밤은 누워서 천장이 사각형 모양의 은은한 노란 빛을 튕겨내는 것을 보며 중학교 시절 마지막 졸업 공연을 떠올렸다.
한참 동안 눈을 뜨고 그러고 있으려니 조금은 선명해진 그 날의 감정이 다가왔다.
이미 지나간 철 없을 적의 추억이라 답하고 표지를 덮어 놓기에는, 스스로가 정말로 즐겼던 나날들이었다.


이틀 뒤, 탁상시계가 잠을 깨워준 주말은 간만이었다.
다소 볼품없는 백팩을 들쳐 메고 종이에 적힌 장소에 혹시나 싶어 가보았다.
볼품없는 작은 오피스텔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인터폰을 누르려던 찰나, 갑자기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그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낮선 사람과의 갑작스러운 조우에 잠깐 벙쪄있던 그녀의 얼굴에, 잠시 후 연고를 알아챘는지 화색이 돌았다.

"—앗, 정말로 왔다! 어서 나와봐, 빨리!"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세 명이 더 얼굴을 비췄다.

이리로 오라는 안내를 따라 희고 길쭉한 접이식 탁자를 앞에 두고 소심하게 앉아있던 나는,
문득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고풍스런 물건들의 존재를 알아챘다.
매우 비싸보이는 티 세트였다.

"아, 그건 친구한테 선물받은 건데, 조금만 기다려. 차 끓여줄게!"



"—그래서 사람을 모집한 거야. 게시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갈 찰나에 겨우 첫 방문이지만, 어차피 한 명만 더 오면 됐으니 목적은 이뤘네!"

다과를 준비해 준 여자가 키득거리며 시원스런 미소를 지었다. 다른 세 사람은 자기들끼리 음을 맞추고 있었다.
장발 여자 둘에 동그란 안경을 걸친 남자 하나였다. 나쁜 사람들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두 밴드를 동시에 병행하다니, 너무 몸이 바쁜 거 아니야?"

"괜찮아, 이건 어디까지나 취미거든.
전부터 있었던 데에선 푸근하고 달짝지근한 노래만 연주하고 있어서, 주말마다 모여서 잠깐 록이란 것도 해보고 싶었어.
물론 일순위는 말할 것도 없이 언제나 전자야! 정말 소중한 친구들과 고교생 시절부터 쭉 함께 해왔던 밴드거든.
다만, 집에 애착이 있는 사람도 가끔 나와서 바깥바람을 쐬며 산책하는 것도 나쁠 게 없다는 느낌이란 말이지."

말은 쉽게 하지만, 장르 전환이라는 게 그리 간단할 것 같지는 않았다. 대단한데, 이 여자.

"작은 영상 채널도 하나 운영하고 있어. 조회수가 카운팅되는 걸 볼 때마다 은근 기쁘다니깐."

나머지 세 사람은 그녀와는 다른 대학에서 같이 경음 동아리를 하고 있었다.
이들과는 연합 축제에서 서로 공연하는 걸 보고 안면을 텄다고 한다.
역시나 친화력도 뛰어난 것 같군. 드러머는 세상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것 같다.

"아무튼, 주말 뿐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해."

"오옷! 영입 성공인가. 그럼 혹시 잠깐 연주하는 걸 봐도 돼?
실력을 따지자는 건 아니지만, 입문자에게 처음부터 하나씩 가르칠 엄두는 사실 잘 안 나서 말이야."

"그렇다면야."



"이건..."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나 자신에게 크게 걸지는 않았다.
한 달만 쳐박아 놔도 잊어버리는 게 인간의 뇌인데,
감히 7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조금이나마 들어줄 법한 연주를 기대하는 건 역시 무리였나보다 — 인 줄 알았는데.

"뭐라고 형용하긴 어렵지만 뭔가 감미로운 듯도 하고 뇌리를 팍 찌르는 게 있잖아!
진짜로 몇 년간 손에서 놓은 게 맞아? 그거 치고는 꽤 하는데? 좋아, 합격이닷!"

급조한 듯한 단어를 따발총처럼 재빠르게 늘어놨다.
별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해주니 괜스레 기뻤다.
역시 사람은 칭찬을 먹고 사는 법인가보다.



"—그럼, 매주 주말마다 이 장소로 출석해주면 돼!
제일 늦게 온 사람이 점심값을 지불하는 건 어딜 가나 있는 전통이니깐,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그럼 바이~!"


그렇게 마무리를 짓고 나서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1년이 조금 넘었는데도 전공수업은 여전히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어서 사실상 다니나마나 한 대학 생활이라 늘 스케줄은 텅 비어있었다.
난 딱히 친화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가끔 몇 달에 한 번쯤 그다지 유익하지 않은 양산형 쓰레기 영화를 같이 봐주는 친구 몇 명이 내겐 전부였다.
그러던 찰나 뭐라도 일단 시작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의 지긋지긋한 고독감과 지루함을 달랠 수는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3년 동안 소소하지만 즐거운 추억은 차곡차곡 착실히 쌓여갔다.

그 중에서도 리츠와의 기억이 독보적으로 많았다.
하기사 다니는 대학이 다르니 늘 모일 수는 없는 법이라 종종 연습실이자 자칭 스튜디오에 둘밖에 안 남게 된 날이 많았고,
그때는 같이 밥을 먹거나 오락실이나 들쑤시며 한가한 일상을 보냈다.

그렇게 3년을 지내고 보니, 거의 뭐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매번 옆에 있어주는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 어느새 삶의 낙이 되었다.
나 같이 따분하고 별 볼일 없는 멍청이가 붙어다니는 걸 그녀의 친구들이 본다면 분명 그들 사이에서 평판이 조금 하락할 거라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으나,
야속하게도 사람 마음이 의도한 대로 움직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상상할 수 있는 행복한 미래를 꼽으라면 항상 단상을 차지하는 것이, 그녀와 연인으로써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코 이를 입 밖에 내서 소중한 시간들을 산산조각 낼 생각은 없다.

말했듯이 함께해주는 것만으로 너무나도 과분하다고 생각하니까.
또한 연애라는 건 누구 하나의 일방적인 구애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기에, 그것이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오히려 이를 거부하고 금단의 강을 헤엄쳐 건너려 하는 사람에게는 익사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말하자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르는 셈이다.


—그런 말도 안 되게 멍청한 짓을 기필코 내가 저지르게 하겠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자가,
바로 스스로가 될 것이라는 사실까진 미처 예측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원래 이번 주는 별다른 일도 없고 언제나처럼 연습실에서 다섯 명이서 연습하는 것이 계획이었었다.
그런데 어제 연습이 끝나고 나서, 그때 당시의 나는 술이라도 취했었는지 도대체 무슨 정신이었는지 아직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짜고짜 리츠에게 데이트 신청을 — 명목상으로는 쓸 일도 없는 레스토랑 쿠폰이 두 장 생겨버렸다는 이유로 — 해 버렸다.

결국 선을 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당장 내일 약속을 오늘 저녁에 잡는 헛된 짓을 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데, 또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뻔히 속보이는 제안을 그녀는 일말의 이의제기도 안하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흔쾌히 제안을 수락한 사람의 눈앞에서 바로 번복하는 짓을 한다는 악취미는 내게 딱히 없었다.

그렇게 패밀리 레스토랑의 2인석에 단 둘이 앉아있는 작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지금 연습실에 남아있는 세 명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뭔가 후환이 신경쓰여 괴롭다.

"과연 상냥하신 리츠 님께서는 가엾은 중생을 위하여 한 번쯤은 다시 말해줄 수 있으니까, 이번에는 귀 열고 똑바로 들을 것!"

"...뭐야, 그건. 아무튼 부탁할게."



요약하자면 이거다. 오늘은 뭔가 색다른 일들을 해보자는 것이다.

정말 정직하게도 지난 3년간은 단둘이 만나는 날이면 밥을 먹고 오락실에 들르고 그대로 해산, 이라는 느낌으로,
마치 몸에 있는 근육이란 근육은 뭐든 집채만하게 만드는 데에 집착하는 헬스광이 매일같이 정해진 루틴을 따르는 것마냥 별 진전 없이 지내왔다.
뭐, 여기서 먼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보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둘 중 누구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치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동안 쌓인 한이라도 있는 건지, 무려 악상 노트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위시리스트를 내게 공개한 리츠는,
여기 나열된 모든 것들을 오늘 안에 —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 시도해 보자고 제안했다.

...뭔가 잔혹한 피의 복수라도 계획하고 있는 건가?

알 수조차 없는 리츠의 의도는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겠지만, 나도 마음에 그리던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껏 들떴다.
이 음침한 생각이 부디 내 얼굴에 드러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부디 바라지만,
뭐랄까, 오늘은 정말로 위험하다.


그리하여 시작되었다. 정말이지 연인들이나 할법한 일들로 일정이 가득 차있는 이상한 데이트가.




— 라고는 해도, 역시나 첫 행선지는 코스 요리가 나오기 전부터 수저를 받쳐주는 냅킨 한 장처럼, 우리에게 제일 익숙한 오락실로 정해졌다.

인형 뽑기의 집게발이 물건을 집는 용도가 아니라,
순진하게 지폐를 투입한 어리석은 자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도발적인 댄스를 보이기 위해 설계된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5000엔을 일말의 제지할 틈도 주지 않고 투입해버린 리츠에 의해 내 양손은 반강제로 때묻은 조이스틱을 잡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경과했다.
...도저히 안 되겠는데, 이건.

마지막으로 플레이하고 전액을 탕진한 때가 고교 1학년생이었던 내게 있어서 사실상 당연한 결과나 다름없었지만,
7세그먼트 디스플레이에 적힌 숫자가 150을 나타내게 될 때까지 기적적으로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하니까 슬슬 삶 자체에 회의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리츠도 할 말을 잃었는지 한참 전부터 심각한 표정으로 플라스틱 진열대 안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마지막 3코인쯤 남았을 때, 갑작스럽게도 그녀가 돌발행동을 했다.

"우와앗!? 뭐, 뭔 짓이야?"

"그냥 맡기고 있어 봐!"

리츠가 난데없이 내 양손을 조막만한 그녀의 손으로 덥석 움켜쥔 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이럴 바에야 그냥 나를 밀어낸 뒤에 본인이 직접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적잖이 당황한 나는 일침조차 날릴 수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생각을 멈추고 그저 손을 내어맡기고 있는 도중에 문득 귀를 때리는 건 경쾌한 비프 음악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첫 번째 시도만으로 제일 커다래보이는 놈의 위상을 배출구 바닥까지 추락시켰다.

"꺄핫! 드디어 뭘 좀 해내는구나!"

...본인이 다 한 것 같지만 제 분수를 아는 나는 그냥 입을 닥치고 있었다.
여전히 내 양손을 붙들고 흔들어재끼는 그녀의 행위에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심장 박동을 1BPM만큼도 주체할 수 없는 금쪽 같은 이 순간에 다시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자, 감 잡았지? 이제 다시 한 번 해 봐!"

...응? 뭘 어떻게 하라고?


리츠에게서 해방되고 다시 원위치로 복귀한 내 양손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야, 방금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처리하는 작업에 이미 과부하된 내 뇌는,
덜덜 떨리는 손발을 제대로 제어할 명령을 도저히 내릴 수가 없는 상태였으니까.

결국에는 한참을 헤매이다 결국 조이스틱에서 손을 놓고 말았다.

그런데, 일생에 세네 번쯤 발동된다는 제로의 영역에 돌입하기라도 한 건지,
놀랍게도 집게에 무언가가, 확실하게 잡혀 있었다!
역시나 사람을 피말리게 하는 이 악의적인 기계는 얼마 안 가서 그 작은 피규어를 다시 떨어뜨리긴 했지만,
이건 한 시간 동안 헛걸음만 한 내게는 달에 찍힌 발자국만큼이나 큰 도약이었다.

"호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앗!
말하자마자 진짜 들어 올리는데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설마 힘을 봉인하고 있었던 거야!?"

그럴 리가 있나. 그저 우연이다.

하지만, 이걸로 뭔가 감을 잡은 것 같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본의 아니게 흔들리는 손가락이 우연히도 집게발을 회전시키는 테크닉을 구사하게 했고,
이 고전적인 성공 레시피로 마침내 잡는 데까지는 성공했다는 전말이었다.

뭐, 그동안의 삶에서 내게 영영 작별을 고한 3만 엔은 그 시점이 돼서 다시 귀환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계속해! 엇, 좋은 위치에 걸린 것 같은데? 그렇지잇, 잡아, 잡아!"

결국에는,

"드디어 해냈다아아아아아아—!!"

—라며 방방 뛰며 팔을 휘젓는 열성적인 리츠와는 정반대로,
곧 링에 오르는 복싱 선수마냥 수 킬로쯤 될 만한 식은땀을 하루아침만에 몽땅 흘려버린 나는,
인형이 배출구로 낙하하는 순간까지 지켜본 직후 기진맥진해서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마지막에 가서 시범을 보고 두어 번만에 성공시키다니, 의외로 학습능력이 뛰어나잖아? 다시 봤어!"

의외라는 말이 걸렸지만 전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지저분한 성공이었다.

"그, 그랬으면 좋겠지만 한 시간 내내 일말의 발전도 보이지 못했는데..."

"아냐, 이미 스테이터스가 착실히 쌓인 상태에서 교착 상태를 해결해줄 열쇠가 필요했던 거야. 분명해!"

피스를 내밀며 활짝 웃고 있는 리츠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3년 내내 봐왔음에도 과도할 정도로 항상 긍정적이다.
그런 부분 때문에, 저 치명적인 미소에 치여 이렇게 리츠를 좋아하게 됐지만 말이다.



조금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펌프 기기 앞에 섰다.

이번에는 리츠가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볼 차례인가.
음, 이걸로 완벽한 쓰레기 합격이다.
하지만 저 난공불락의 리츠가 실패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귀하디 귀한 장면이 될 것은 분명했기에,
그녀를 응원하면서 동시에 이면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다.


뭐, 그치만 역시나다. 마치 이 날을 위해 한 달동안 연습만 해온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벽한 실력이었다.

문득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그녀의 옆모습에 그간 함께 록밴드를 해오면서 보았던 장면들이 겹쳐졌다.
3년이란 시간은, 솔직히 오래 보았다, 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그저 그런 기간이다.
특히나 매일 보는 것도 아닌, 일주일에 겨우 이틀은 누군가를 완전히 알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리츠가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언제나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지금에 와서는 그녀의 고교 시절 경음부에서의 모습은 어땠을지 직접 구경할 수는 없다.
그치만 그녀는 늘 틈만 날 때면 매일같이 있던 방과 후의 소소한 다도회나 매년 있던 여름방학 합숙과 문화제 공연,
특히나 귀여웠던 한 후배의 모습을 묘사하며 재잘재잘 떠들곤 했었다.
졸업이란 것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그러나 어떻게 극복해냈는지 또한 하나도 빠짐없이 전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정말로 정말로 소중했다고, 항상 이야기를 마치기 전마다 꾹꾹 강조했다.
그러니까 언제나 열중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차마 숨길 수 없는 환희를 얼굴에 내비치며 정말로 즐겼을 것이다.
결코 잊을 수조차 없는 그녀만의 특제 미소를 지으며 심벌을 두들겼을 것이 눈에 선하다.

분명, 리츠는 그런 사람이다.



—라고 다소 진중한 생각에 빠져 있던 도중에 깜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더니, 그녀가 다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서 뒹굴고 있었다.

"아—아야야야야야야야—!! 다리에, 쥐, 쥐가———앗!! ...으읏, 멍하니 쳐다보지 말고 좀 도와줘!!"


...이건 반칙이다. 무지무지무지 귀엽다!!
간신히 입꼬리가 광대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참아내며, 열심히 다리를 주물러줬다.
이건 비상 사태이니 면책 특권쯤은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겨우 쥐가 풀렸는지 옷깃을 추스르고 일어나는데 왠지 표정이 뚱해 보였다.

"...야."

"...네, 넵?"


"너어어, 이 자식, 남의 고통을 보고 비웃기나 하고 말이야, 진짜 극악무도하잖아—앗!
그 헤벌쭉한 표정을 조금이라도 숨기려는 노력을 좀 해 보이라고!!"

갈매기 입을 하고 미처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자국을 다 닦아내지 못한 상기된 얼굴로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아프지는 않다. 하지만 맞고 금방이라도 피를 토하고 쓰러질 듯한 치명적인 폭력이다.
슬쩍 보니 왠지 장본인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이건 그야말로 엄청난 수확이잖아!




오락실에서의 리얼 버라이어티 쇼를 마친 이후에는 나와서 잠깐 디저트 카페에도 들르고,
— 충격적인 가격의 딸기 쇼트케이크를 무척이나 고집했다 —
갑자기 각종 키링들이 걸려 있는 액세서리 숍으로 향하더니 뭔가를 급히 받아 주머니에 쑤셔넣기도 했으며,
— 도대체 뭘 받아온 건지 말해달라고 사정해도 어째선지 전혀 입을 열지를 않았다 —
시장가에서 각종 볼거리들을 더 구경하다가 마지막으로 붕어빵을 하나씩 사들고 10분 정도 걸어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다.


노래방이다.



일단은 여자랑 노래방을 오게 되면 뭘 불러야 할지 전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감미로운 발라드? 전파송?
...결코 아니겠지만 엔카?

이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 카운터에서 소형 룸의 두 시간치 요금 결제를 마치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자!"

그녀가 리모컨을 내게 들이밀며 말했다.

"첫 선곡의 기회는 네게 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상냥하게 거절했다.

"받아!"

"먼저 해."

"받으라구!!"

"아니 나는 괜찮———마침 스타트는 내가 끊고 싶었는데 준비된 것 같으니 해볼게!"


표정을 보니 괜히 간볼 때는 아닌 것 같아서 일단 뜻을 굽혔다.
어떻게든 내가 먼저 부르게 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서려 있는데,
저렇게 뭔가에 집착한 상태의 리츠는 될 때까지 전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몸소 습득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도대체 뭘—이라 고민하던 찰나 문득 뒤통수를 후리고 가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래, 그거다. 며칠 전에도 재차 말했던 거니까, 확실할 것이다...!



"—응? 와앗, 이거 우리가 이번에 낸 신곡이잖아!! 수록된 줄 어떻게 알았어?
에헷, 생각보다 우리 활동에 진심인가 보네, 지금 싸인해줄까!? 혹시 종이 있어?"

반응을 보니 성공한 듯싶다.




리츠와 알고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그러니까 재작년 즈음이다.

항상 그녀가 가슴을 쭉 펴며 지겹도록 자랑하고 다니는 '방과 후 티타임'이란 밴드,
이쯤 들어왔으면 밴드에 대한 관심이 안 생길래야 도저히 안 생길 수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검색 신공이란 것, 쉽지는 않다지만 일단 해보았으나, 그때 시점으로는 뜨는 정보가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 관련된 영상이 딱 하나 있었는데, ...당사자에게는 꽤나 안 좋은 추억일 것 같아서 잽싸게 종료하고 그날 본 것을 잊었다 —

그래서 그날도 입을 열기만을 줄곧 기다렸다가 말이 나오는 타이밍을 잽싸게 가로채서, 그 곡들은 혹시 어디서 들을 수 있냐고 물어봤다.


...리츠가 의외로 얼굴을 붉혔다. 뭐야, 이건.

평소엔 그렇게나 홍보에 진심이었으면서 미처 누군가한테 실제로 곡을 들려주는 건 부끄럽다는 것 같다—고 말하게 냅두진 않았다. 끝까지 추궁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졌다는 표정의 그녀에게서 사운드클라우드 비공개 링크를 얻어내면서 인간 승리를 이뤄냈던 기억이 있다.

그날 흥겨운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가벼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어폰을 착용했다.
곧이어 숭고한 내 손가락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뭐지, 도대체 이건? 그래, 문학이나 음악, 미술 등의 예술을 구가할 힘이 내게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일단 첫 인상을 말하라고 해보면, '굉장히 정신이 없다'는 한 줄 평론가나 할 법한 비평 이상의 문장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방금 들은 곡이 그저 좀 따로 노는 부류였을 것이라고 애절히 되뇌이며 다음 곡을 재생했다.
그 다음 곡도 듣고, 그렇게 올라와있는 것들은 끝까지 다 들어보았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분명 첫 곡으로 들은 곡이 불운이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이런 항정신성 약품들을 비커에 몽땅 풀어놓고 멋지게 포장해놓은 듯한 곡들이 한두어 곡 더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나머지 노래는 — 이전에 리츠가 입에 올렸던 표현을 빌리자면 — 푹신푹신, 포근포근, 둥실둥실,
기타 등등의 단어를 무한히 나열해서 얻을 수 있는 인상이라고 하면 될까.

방과후 티 타임이 고교 경음부실에서 시작되었다는 얘기 그대로,
여고생들이 학교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각종 희노애락들을 녹여낸 듯한 분위기가 지금의 노래 제작까지 쭉 이어져왔던 것 같다.
그러니까, 풋풋해서 좋다.

하지만.


엄청나게 오글거리고 오글거리고 오글거려 손발이 뒤틀릴 지경까지 가는 이 통한을 도대체 어디에다 풀어낼 수 있을까?

놀랍지만 내게도 남고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쯤 이 곡들을 들었었다면 이 분위기에 동조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각종 소득세, 부가세, 월세, 피를 토하며 작성한 리포트에 붙은 F라는 정품 인증 마크 — 등의,
사람의 마음을 까맣게 물들이는 괴물들과 불편한 동거를 시작해버린 지금의 나에게는 조금 무리다.

그래, 리츠. 너도 지금쯤 애꿎은 인형이나 이불 뭐시기를 정형적인 움직임으로 끝없이 걷어 차고 있겠지. 아마 이 밤 내내.
연주자의 심경도, 보컬의 심경도 모두 이해가 되었기에 — 작곡가의 정신 상태는 이해할려고 열심히 노력해봤지만 무리였으나 —
잠시나마 나는 일본에서 사람의 감정에 대해 제일 통달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조금 과장한 측면이 있긴 하다. 뭐, 이 정도야 달짝지근이라는 적절한 형용사로 갈무리해줄 수 있는 한계선 내에는 들어간다.

그치만 여전히 장르로써 표현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노래 하나하나에 새겨져 들어간 그녀의 추억들과 애정과 손가락, 피크, 스틱들이 이루는 경쾌한 왈츠 스텝,
(믿어지진 않지만) 밤새 고심한 듯한 가사의 소절마다 달려 반짝거리는 아련하고 애틋한 의미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목적의식에서 발현된 것이 아닌, 다같이 모여 음악을 한다는 행위이자 목적 그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듯한 순수한 즐거움.

이건 그야말로 — '방과후 티 타임'이라고밖에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그렇구나, 이런 밴드를 하면, 분명히 즐겁겠네.
그 이후로 내 등교 mp3에는 언제나 이들의 노래가 들어갔다.




그렇게 충격적인 조우와 함께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은 방과후 티타임의 새 소식을 한 달 전쯤에 리츠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동인 써클로 조직을 변경해보는 건 어때?"

"아앗——!? 이 정도면 들어줄 만 했잖아! 너는 도대체 어디의 무엇이 문제인 것이냐!!"

뭐어, 지난번의 그 곡이랑 별반 다르지 않을 법한 인상이지만.



"정식 발매한 거, 정말로 축하해, 리츠. 커다란 진전이네."

솔직하게 축하해줘도 별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리츠는 그야말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바로 그 노래가, 머릿속에서 뽑아낸 최선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정식 발매곡은 노래방에 수록될 가능성이 높고, 또 그녀들도 마다하지 않고 강력히 추진했을 것이다.
그래서 검색이라도 되면 부르자고 입력했는데 설마, 바로 재생되어 버렸다. 말하는 순간 첫 박자도 놓쳤다.

이런, 일단 부르는 데 열중해볼까.



"—후."

심상치 않은데, 뭔가 역린을 건드렸을지도 모르겠—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어디 개그맨 공채라도 지원, 푸풉... 지원이라도 한 거야?
큿... 이건, 그야말로 재능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푸풉! 꺄하하하하핫!! 진짜— 개 못 부르네!!
원곡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아니, 들었겠지! 아니라면 그 이상한 리듬킵이—꺄하하하하하하하하!!"


지금 주먹과 나 자신의 싸움을 열심히 벌이는 중이다. 동시에 정신 붕괴의 압력으로부터도 버텨내야 한다.

적어도 좀 정상적인 곡이었다면 별 문제 없었을 테지만.

괜히 원곡의 수많은 엇박들을 어설프게나마 따라해 보려고 했다가... 지금 이 사단이 났군.
카메라에 찍힌 건 확실하다. 뭔가 밴드에 단체 메세지라도 보내려는— 아니 당장 그만둬!

"이, 이건 원곡자가 반드시 보고 피드백해야 하는 초 레어 영상이라고! 방해하지 마앗— 앗, 내 스마트폰 당장 내놔!!"


그렇게 10분 정도는 치고 받았다.



일단 아무 유명곡이나 재생시키고 강제로 리츠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더니 다행히도 염상을 멈추고 그대로 불러 주었다.
보컬은 분명히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데도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넌 무슨 만능 엔터테이너냐?

"뭐야, 왜 눈을 감고 있어? 혹시 자는 건 아니지?"

감상 중이었습니다.

"다시 네 차롄데, 크흡... 아, 아무튼 이번에는 제대로 불러보라고!"

마이크를 건네 받은 후에도 불경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대로 무시했다.
불상사의 충격은 아직도 훤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면, 이번에는...

같이 부를 수 있는 곡으로 해볼까?



그렇게 처음의 고민이 무색하게 팝, 발라드, 전파송, 애니송, 새삼스럽지만 엔카도 포함해서, 한참을 즐겼다.
나중에는 수화기를 들고 무계획적인 시간 추가를 남발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기가 막히게도 리츠는 여러 방면으로 잡지식이 많은지, 못 부르는 곡이 없었다.
최근에 종종 연주를 잠깐 멈춘 휴식 시간에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건, 그런 부류였기 때문인가...

아무렴 어때. 마지막에는 나도 열성적이 되어서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마이크와 성대를 무한히 혹사시켰다.
방을 나올 때쯤 부축을 받지 않으면 걷지 못할 정도로 진을 다 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항목들은 폐기하기로 했지만,
만화방에서 밴드 만화가 있는지도 슥슥 뒤져보고, 메이드 카페에서 식사 대신 메이드복을 시착한 리츠의 모습을 보고 전두엽이 일부 손상되기도 했으며,
아무쪼록, 그렇게 해서 착실히도 하루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와서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벌써 만개해 있었다.
오늘따라 왠지 더더욱 맑고 투명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별에 소원을 빌었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그건... 이뤄졌을까? 이루는 날이 오긴 하는 걸까?
지금도 반쯤은 이미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으려나.



뒤이어 취객이 비틀거리며 따라나왔다.



마지막 항목은 보자마자 어떻게든 지워버렸어야 했다. 패착이다.
그야, 설마 당당하게 '술' 단 한마디를 적어놓고 무조건 해야 한다며 땡깡을 부리던 사람이,
설마 증류주 한 잔만에 거하게 취하고, 삶에 대한 한탄과 회포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할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덕분에 알지도 못하는 N여대의 언젠가 한 번은 패고 싶다는 학생 두 명, 교수 다섯 명,
연합 공연 도중 예고도 없이 관객석으로 다이브했다는 시대를 앞선 기타리스트, 아르바이트 도중에 접객하게 된 기가 막히는 치매노인 한 명,
그리고 기타 등등의 멋진 성함을 들어 버렸다. 철인같은 리츠도 내심 고생이 참 많구나.
그 후 고교생 시절, 방과 후 티 타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취미삼은 록 밴드로 점점 화제가 옮겨가더니, 최종적으로 나를 향했다.

그렇다.
나는 갑자기 왜!?

떨떠름하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줬는데, 무슨 나는 눈치가 드럽게 없다나, 가끔 걷어차고 싶은 때가 있다는 등 못할 말을 다 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언어는 해석하는 데 실패했다. ...다시는 술을 먹이나 봐라.


그렇게 부축해서 어찌저찌 리츠의 집 근처까지 도달했다. 택시를 타기에는 그렇게 멀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이 민폐녀를 처리할 방법이 보통 사람이라면 잘 안 떠오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는... 참 길었지...?"

"네 그 꼴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길었던 성싶구나."

"조용히 해... 임마... 너는 아무 것도 모르잖아...?"

"...또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제 좀 예상이 가능하게 말해줄래?"


리츠가 갑자기 우뚝, 하고 멈춰섰다. 마침 집에 도착한 건 아무래도 우연인 듯싶다.
그러더니, 상상도 못할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네가 어제 데이트 신청을 해줬을 때, 사실 무척이나 기뻤지만 딱히 내색하지 않았어."


...어?


"드디어 뭔가 답을 해주려나, 하고 큰 기대를 마음 속에 품고 있었는데도 끝까지 그럴 기미는 안 보이는 듯 하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이렇게 진지한 리츠의 모습도 난생 처음 보는데...


"넌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놈이야.

도대체가, 관심도 없는 사람과 구태여 시간을 내서 밥을 먹고,
진부한 인생사를 구구절절 들먹여 가면서 진심을 알아줬으면 하는 사람이 도대체 일본 어디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랑 시간 내서 놀았던 그 많은 나날들 중에, 진짜 단 한 번도 원래 잡혀있던 일정이 없었을 것 같아?

유우카, 아야노, 켄타 이 셋이서 동아리 일정때문에 연습에서 빠지는 건 잘도 봐왔으면서,
어째서 나도 유이, 미오, 무기, 그리고 도쿄에 있어서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아즈사랑,
만나서 소소하게 수다를 떨거나, 시내로 내려가서 하루 종일 놀기만 한다던가,
전철만 타고 전국 일주를 한다던가, 아무 생각도 없이 당일치기 런던 여행을 기획한다던가,
그런 상상만 해도 즐겁고 두근거리는 추억들을 쌓아 올리고 싶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거야?

물론, 너 때문에 이런 것들을 포기했다는 건 아냐.
지난 주에도 다같이 사쿠라고에 놀러가서 사와쨩이랑 간만의 티 타임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 대신 너를 선택했던 일들도 수없이 많아.
당장 3주 전의 일요일만 하더라도 유이가 끝내주는 라면 맛집을 찾았다면서,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청했었어. 그때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알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이미 유이도 알고 있어. 물론 미오, 무기도.

내가 방과후 티 타임 얘기를 종일 지껄였던 것처럼,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네 얘기를 자주 꺼냈어.
분명히, 언젠가는 눈치채고 내 마음을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만류? 그런 것도 없었어. 처음에는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하긴 했지만, 얼마 안 지나서 분명히 내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듬직하고 어딘가 믿을 구석이 있고, 그리고 뭣보다 같이 음악을 해줄 수도 있을 사람일 거라고 믿는다고 말해줬어.

사실 넌 그다지 듬직하게 생기지도 않았어.
둔감하고, 우유부단하고,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난다는 것도 있고.
그런데 넌 내가 여태껏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이야.

기억나는 지 모르겠지만, 하루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려서 종일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가,
겨우 거리를 지나던 널 만나서 간신히 친구들이랑 합류한 적도 있었지.
그날 저녁은 내가 지불하겠다고 해서 너도 흔쾌히 따라왔어.
그런데 내내 말을 거는데도 넌 허공만 쳐다보면서 요지부동이길래, 홧김에 그날은 별로 먹지도 않고 집에 먼저 갔어.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초췌한 얼굴로 우리집 문을 두드렸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말이 안 되잖아. 전날 아침에 내가 거쳤던 모든 전철역들을, 오밤중에 잠을 포기하면서 모조리 들쑤시고 다니다가,
일곱 시간 만에 키즈역 플랫폼 벤치 밑에서 발견했다며 들고 온 내 스마트폰을 보면서, 나는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고.
그렇게 날... 소중히 여겨주면서... 어째서... 어째서 내 마음은 전혀 알아채주질... 못 하는... 거야...?"

잠깐 훌쩍이던 리츠가 다시 이어서 말했다.

"어제 네 말을 듣고 나서, 사실 잠도 별로 못 잤어.
아침에 뭘 입고 가야 할 지, 코스는 어떻게 정해야 할 지, 입술은 무슨 톤으로 해야 제일 예쁘게 바라봐줄지,
뭐 하나도 미리 안 정해놓고 도저히 잠에 들 수가 없어서, 결국에는 몽땅 하고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한시름 놓을 수가 있더라.
그래서 오늘은 뭔가 있을 줄 알았어.

당장 너랑 색다른 하루를 보내는 것만 해도 너무 좋지만, 네가 무언가 결심이 섰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게 아닐까.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으니깐 오늘 하루를 미친 듯이 활기차게 보낼 수 있었던 거야.
근데 기미가 안 보이더니,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들다니.

사실 록 밴드도 몇 개월쯤 하다가 그만둘 예정이었어.
처음부터 말했었잖아, 어디까지나 취미였다고.
방과 후 티타임이 프로 데뷔를 위해 한 발자국 나아설 때, 이런 것들에 시간을 뺏겨서 활동에 지장이라도 생기는 건 정말로 싫었으니까.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붙잡고 있었을까?

첫 앨범 발매하고 성과가 생각보다 좋아서 슬슬 녹음 일정, MV 촬영 등 할 일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야.
그래서 별 쓸모없는 강의는 수강 취소하고, 필수, 전공 과목들을 최대한 한 군데 몰아넣어서,
매니저님께 양해를 구하고 가까스로 확보한 요일들로 활동 일정을 재조정했어.
이도 무리다 생각될 때즈음엔 이미 졸업해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필요하면 자퇴하면 되니까 별 상관은 없어.

어쨌든 절대로 주말을 침범하지 않게 노력 꽤나 했다고.
왜, 라고 묻겠지. 당연하잖아. 내 인생의 1순위 목표는 방과 후 티타임이라는 이름으로써 부도칸에 서보고,
그 다음은 도쿄 돔, 그 다음은 해외 진출을 고려해볼 수도 있겠지, 뭐 암튼 그런 거야.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음악이 전부라고.
그리고 너를 만난 거야. 만나서 몇 개월, 몇 년이 흐르니까, 그 옆에 너도 반드시 서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어.
너와 함께 음악을 하는 것도,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게 전부야.

...그리고, 이런 표정 따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어느새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리츠."

"...왜?"


그녀가 울고 있는게 너무나도 싫었다.

사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마음을 일단 전해보자고, 전날에 거울을 보며 끝없이 되뇌었었다.
2주 전부터 준비해놓은 일정도 있었지만, 리츠의 노트를 보고 이건 필요 없겠다 싶어 굳이 꺼내어 보여주지 않았다.

전하는 게 더 일찍이었어야 했는데.

1년 전이라도.

3개월 전이라도.

일주일 전이라도.

부디, 한 시간 전이라도.

이 지경까지 끌고 간 내 자신을 스스로 한계까지 책망하고 매도했다.



그래서 내 입으로,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를 막았다.

한참 동안을 그랬다. 어느 새 보니 두 팔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직 쌀쌀하긴 해도 늦봄이다.

하늘을 보니, 별은 아닌 하얀 조각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그 중 유난히 빛나는 한 조각이, 리츠의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눈이네."




내 사랑하는 연인이 조용히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무언가를 꺼내 주었다.

이건... 그때 그 키링이다.

한 쌍이 세트로 된 키링은, 하나는 U, 하나는 I로, 동글동글한 알파벳을 두꺼운 윤곽선이 감싸고 있는 귀여운 모양새였다.

I를 건네받아, 가방 고리에 연결했다.

"그 사이에 필요한 건, 여기 있어."

얼굴을 붉히고 언제나 보던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만든 하트를 보여 주었다.

무척이나 예쁜 노란 머리다.




보름달 또한 그 빛을 받아 노랗게 빛났다.



[널 헤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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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악한 글솜씨입니다만, 이 문장을 읽고 계시다면 여기까지 봐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특히 스크롤 신공 없이 한 문장 문장을 깊게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팬심이란 건 떄로는 효율성을 높여 주는지, 오늘 다섯 시부터 지금까지 쭉 작성하다가,

방금 마침표를 찍고 제대로 된 수정도 거친 게 없지만 아무튼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에 올려 보았습니다.

일본 남녀의 일상에 관한 지식은 별로 없지만 제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현실성을 구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았습니다.

뭐, 세상 사는 것들이 그리 크게 다르겠습니까?

아무튼 긴 글 보시느라 수고 많으셨을테니, 이만 말 줄이겠습니다.

부디 재미와 감동이 느껴지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 혹시 오늘 응상을 가시는 리츠단이 계시다면, 노란 봉을 평소보다 조금 더 힘차게 휘둘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