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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푸른 하늘의 기억
처음에는 무척이나 현실적인 꿈이라고 생각했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꿈. 곁에서는 누군가가 함께 있어준다. 그것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탓에, 오리하라 코헤이는 잠에서 깨워졌을 때 무슨 일인 일어난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으...음, 푸른 하늘이......어, 어라? 나가모리?"
바로 옆에서 이불을 확 걷어치운 채로 서 있는 소꿉친구, 나가모리 미즈카는 중얼거리고 있는 코헤이의 얼굴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학교를 가야하는 날이면 언제나 반드시 코헤이의 집에 들러서 좀처럼 잘 일어나지 못하는 그를 깨워준다. 그것은 코헤이가 초등학생 시절에 이 나카자키초로 이사를 와서 함께 놀기 시작한 뒤로 줄곧 계속되어 온 익숙해진 습관이었다.
"코헤이. 아직 잠이 덜 깼나 보네.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좋아."
미즈카가 커튼은 촤악 걷었다. 확실히 밖에는 상쾌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코헤이는 위화감을 떨쳐내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멍하니 있지 말고 준비해야 해. 이제 시간이 별로 없어."
미즈카가 재촉하듯 가방과 갈아입을 옷을 건네자, 코헤이는 마지못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이 하늘』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은 꿈속의 일을 생각하면서, 코헤이는 달리고 있었다.
그 뒤에선 미즈카가 발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어오고 있다. 아침에 약한 코헤이는 제대로 걸어서 등교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에, 매일 아침 이렇게 미즈카와 함께 달리게 된다. 아침을 먹자마자 달리는 것은 분명 몸에 안 좋을 것 같지만, 그 덕에 매일 아침 지각을 면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때, 달리는 동안에도 코헤이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터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 꿈이 신경 쓰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이었던 것 같은데......뭐였더라?'
누군가가 옆에 있는 듯한 기운. 하늘을 올려다보고있는 자신.
그곳에는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아서 굉장히 기분이 편치 않았다.
도대체 뭐였을까.
갑자기 미즈카가 외친다.
"코헤이, 코헤이......! 앞을 봐!"
코헤이가 앞을 본 순간, 펄럭이며 흔들리는 검은 무언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코헤이의 몸에 충격이 몰아쳤다.
"꺄아아악!"
그 검은 물체가 소녀의 땋은 머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스팔트에 엎드려서 장렬하게 전사한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뒤의 일이었다.
"이래선 마치 내가 잘못한 것 같잖아."
"맞잖아! 네가 아니면 누구 잘못이라는 거야!"
살벌한 표정으로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귀여운 외모가 분노에 의해 일그러져 있다. 아마도 화내고 있지만 않다면, 얌전한 느낌의 미소녀일 것이다.
"저기, 거기 너도 다 봤지!?"
소녀는 미즈카에게 지원군을 요청한다.
미즈카도 차마 감싸줄 방도가 없었는지, 난처한 듯 눈썹을 찌푸린다. 묘하게 기운차게 화를 내고 있는 이 소녀에 비하면, 미즈카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미덥지 못했다.
"응, 이건 코헤이가 잘못한 거려나......"
"그치? 사과하라고!"
"그래, 확실히 방금은 내가 잘못한 걸지도 모를지도 아닐지도 모르겠네."
"너무 돌려 말하는 거 아냐! 아앗, 다리를 다쳤잖아. 서둘러야 하는데 어떻게 할 거야!"
서둘러야 한다는 소녀의 말에, 코헤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실은 나도 서둘러야 하거든. 그런 이유로 나가모리, 뒤는 맡길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코헤이는 이미 달려나가고 있었다.
당연히 지각 직전인 건 미즈카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뒤에서 울려 퍼지는 소녀의 고함과 미즈카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력 질주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건 방금 전 소녀의 교복은 근처 학교의 교복이 아니다. 고로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좀처럼 보기 드문 그 소녀의 파워풀한 고함을 떠올리며, 코헤이는 교문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
"정말, 너무해, 코헤이."
미즈카도 결국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코헤이가 앉아 있는 창가 맨 뒷자리로 다가왔다.
"너도 도망쳐 온 거야?"
"그치만, 내가 잘못한 게 아닌걸."
미즈카가 난처하다는 듯이 변명한다.
"뭐, 됐어. 그나저나 그 여자애, 겉모습이랑 갭이 엄청났지."
종이 울리자 미즈카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1분 뒤, 코헤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교단에 가련한 소녀가 서서 싱긋 미소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오옷, 갑자기 수염이 미소녀로 변신했다. 설마 이런 고난도 기술을 쓸 수 있었을 줄은!'
4월부터 몇 달간 알고 지냈는데 그런 기술을 쓸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선보여 줬으면 좋았을 거라는 등의 쓸데없는 생각을 했지만, 담임인 와타나베 시게오, 별명 『수염』은 그 소녀 옆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눈이 더러운 것을 거부했을 뿐인 듯하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그 미소녀는 아까 코헤이와 부딪쳐 고함을 질렀던 바로 그 소녀였다. 코헤이는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나나세 루미-
수염이 칠판에 소녀의 이름을 적는다.
"오늘부터 우리 반의 새로운 친구가 될 전학생이다."
수염의 재촉에 나나세 루미는 입을 열었다.
"나나세 루미입니다.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전근 사정으로 이렇게 학기 중에 전학을 오게 되어버려서 너무 불안했지만, 여러분 모두 정말 즐거운 분들인 것 같아 안심했어요."
생긋 웃어보인다.
그 미소의 귀여움에 남학생들이 일제히 술렁인다.
20분도 채 되기 전에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고함을 질러대던 것이 환각이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미즈카 쪽을 보자, 그녀는 코헤이의 추측을 뒷받침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욕설을 들을 각오를 하며 울적해진 코헤이와는 정반대로, 다른 남학생들은 미소녀 전학생의 등장에 교실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럼, 오리하라."
"......네?"
갑자기 수염이 코헤이를 불렀다.
"복도에 책상과 의자를 가져다 놨으니, 네 뒷자리에 잘 옮겨줘라."
창가에 있는 이 자리만, 확실히 책상이 하나 부족하다. 전학생의 자리라면 여기밖에 없을 것이다.
수염은 그렇게 말하고는 모든 게 해결됐다는 표정으로 퇴장했다.
담임이 없으니 이때다 싶었는지, 남학생 무리가 한꺼번에 루미의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코헤이는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복도까지 책상과 의자를 가지러 나가서, 문을 열어 둔 채로 책상을 질질 끌며 교실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한 번 자신의 자리 뒤에 놓으려 했으나, 갑자기 다른 생각이 떠올라서 자신의 책상을 마지막 줄로 옮기고 아직 가벼운 책상을 그 앞에 놓는다. 거기까지 하자 1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
"고마워. 책상 가져다줘서."
자기 자리로 온 루미가 코헤이에게 미소를 짓는다.
아무래도 아침에 있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코헤이가 자기 앞의 책상을 가리키자, 루미는 책상에 가방 속 물건들을 넣기 시작했다.
"다리는 이제 괜찮은 거야?"
뒤를 돌아본 루미는 잠시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코헤이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살벌한 눈빛으로 변했다.
"오늘 아침은 장난 아니었지. 요근래 보기 드문 파워풀함이었다고 생각해."
고함을 질러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루미는 억지로 화를 억누르고는 교단에서 미소 지었을 때와 똑같은 웃음을 얼굴에 띄었다.
"......오리하라 군이랬지. 잘 부탁해."
그대로 등을 돌리고 수업을 들을 준비를 시작하자, 교사가 들어오고 반장이 구령을 외쳤다.
*
쉬는시간. 루미의 주변으로 몰려든 남학생들의 해일에 밀려 피신한 코헤이의 곁으로 미즈카가 다가왔다.
"나나세 양, 어때 보였어?"
"글쎄, 뭔가 완전 고양이 흉내를 내고 있고, 잘 모르겠네. 저래선 아침이랑 다른 사람이잖아."
"분명, 얌전해 보여도 속은 아주 굳센 아이일 거야. 코헤이에게는 그런 타입의 애가 어울리는 거 아냐?"
"뭘 어떻게 해야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생긋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미즈카가 말을 계속했다.
"의외로 운명적인 만남일지도 몰라. 자리도 가까우니 대화할 일도 많을 것 같아."
이런 화제는 딱히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미즈카는 코헤이 주변에 새로운 여자애가 나타날 때마다, 그 애를 칭찬하며 코헤이와 맺어주려고 부추기는 듯한 말을 하는 버릇이 있다
코헤이는 노골적으로 기운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또냐. 이걸로 몇 십 번째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도 그럴게 코헤이는 제대로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걱정 되는걸."
코헤이의 입장에서는, 미즈카가 자기 자신은 돌보지 않고 남의 일을 챙기는 모습을 보는 게 오히려 걱정될 정도다.
코헤이의 친구들조차 미즈카가 코헤이의 연인이라고 믿고 있는 인물이 있을 정도였으니, 사정을 모르는 다른 남학생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미즈카 본인이 정작 사랑의 기회를 몇 번이나 놓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물없는 소꿉친구 사이라는 편안함에 취해, 다른 남자를 찾으라는 충고도 하지 않은 채 지금의 상황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미즈카 쪽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을 것이다.
*
점심시간. 이 반 남학생의 3분의 2가 창가에 있는 루미의 자리에 모여 있었다.
매점에서 빵을 사고 돌아와 보니, 코헤이의 책상은 이미 다른 남학생들에게 빼았겨 루미의 책상 옆에 붙여져 있었다. 앉아있는 녀석을 걷어차서 책상을 되찾을까 생각했지만, 겨울에 들어섰는데도 묘하게 후끈거리는 공기에 짜증이 나서 그대로 뒤로 돌아섰다.
"왜 그래, 코헤이?"
교실을 나가려고 할 때, 사이좋은 이나기 사오리와 함께 도시락을 먹고 있던 미즈카가 불러서 멈추게 되었다. 여전히 초등학생처럼 우유를 마시면서 식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코헤이는 슬쩍 자신의 책상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보이는 대로야. 옥상에서 먹고 올게."
"엄청 추울 거야. 내 책상에서 먹으면 되는데."
"뭐, 옥상은 좋아하니깐 혼자여도 괜찮아."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에 따뜻해 보이는 햇빛이 비치고 있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코헤이는 그대로 교실을 나갔다.
*
확실히 하늘은 푸르고 맑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추위를 품은 바람이, 코헤이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휘날린다. 당연히 옥상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으으음, 잘못된 선택이었나.'
그렇다고 해서, 다시 돌아가 교실에서 먹는 것도 뭔가 꺼려졌다.
어쩔 수 없이 물탱크 옆에 앉아 빵 봉지를 뜯고는 한 입 베어 물었다.
누군가가 금속으로 된 옥상 문을 연 듯 하다.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온다. 코헤이는 자기 일은 제쳐두고, 호기심 많은 인간의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생각으로 뒤돌아보았다.
"옥상 역시 추워."
미즈카였다.
코헤이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그럴듯하게 말한다.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잖아."
"굳이 허세부리면서 참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아?"
그런 말을 하면서도 미즈카는 코헤이 옆에 살포시 앉더니 자신의 점심 도시락통을 꺼냈다. 조금 먹은 흔적이 있다.
역시 사오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코헤이를 찾으러 온 모양이다.
"잘 먹겠습니다~"
"이나기랑은 안 있어도 돼?"
"응. 코헤이에게 가겠다고 말해뒀어. 그나저나 정말 춥네."
"그렇게 추우면 그냥 돌아가."
코헤이가 쌀쌀맞게 말해도, 미즈카는 신경쓰지 않고 꼼지락거리는 손놀림으로 젓가락을 다루며 햄버그 조각을 입에 집어넣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추위는 보통이 아니었다.
"역시 내 자리에서 같이 먹었으면 됐을 텐데."
"그렇다고 해서 너까지 올 필요는 없잖아."
"이런 곳에서 추위를 견디며 점심을 먹고 있다니...... 역시 코헤이에겐 제대로 챙겨 줄 사람이 필요해."
미즈카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왜 밥과 추위 이야기가 거기까지 가는 건데."
고작 추운 하늘 아래에서 빵을 씹고 있는 정도로, 여자와 사귀는 것을 권유받는 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다른 여자와 사귀려 해도, 미즈카가 옆에서 챙겨 주고 있으면 다가올 사람도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추위 속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사실이다.
코헤이는 억지로 빵을 씹어 넘긴 뒤, 차를 들이켰다.
"자, 가자."
"잠깐만, 코헤이. 빨라."
늘 보던 미즈카의 도시락통 안에는 아직 반 정도 반찬이 채워져 있었다. 달걀말이의 크림 옐로 빛깔이 식욕을 돋운다.
"느리네. 나머진 교실에서 먹어."
"먹는 도중에 일어나는 건 싫은걸."
일어서려던 코헤이의 바지를 미즈카가 반쯤 울먹이는 얼굴로 잡아당긴다.
하는 수 없이 코헤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
"신경 쓰지 마."
"천천히 먹어도 돼?"
"네, 네, 그러세요."
코헤이는 맥 빠진 웃음을 띄우면서, 미즈카가 다 먹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다. 미즈카가 느리게 먹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다.
*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는 벌써 종이 울리려던 참이었다.
옆자리의 악우, 스미이 마모루가 뭔가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코헤이와는 죽이 잘 맞아서, 같이 붙어 다니며 철없는 장난을 치거나 어울려 노는 소년이다. 뭐, 절친이라고 말해도 지장 없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뭐 하냐, 스미이. 공부하고 있는 건......아니겠지, 역시나."
"당연하지. 지금 난 대규모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야. 공부 따위와 같은 취급 하지 마."
"대규모 프로젝트? 그거 거창하네."
스미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스미이를 포함한 코헤이의 친구들은 농담에 목숨을 거는 멍청함을 신조로 삼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대책 없는 놀이 패거리들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린애 같은 단순한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코헤이도 당연히 스미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미이는 ‘훗’ 하고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늘 그러듯이 느끼한 포즈를 잡는다. 하지만 장난꾸러기의 모습이 짙게 남아있는 스미이에게는 치명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 우리 반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아주 순조롭게 진행 중이지. 내일 오전 안에 공개할 수 있을 거야."
내일 오전 중으로 맞출 수 있는 이야기가 거대 프로젝트인지는 매우 의심스럽지만, 그런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코헤이는 고개를 끄덕여 두었다.
"전학생도 왔으니 이번엔 거대한 프로젝트가 될 것이 확실해. 기대하고 있으라고."
수업종소리가 울리고 수학 교사가 들어왔다.
반장의 기립 구령이 떨어지자 코헤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음 날 아침. 비가 내리는 고요한 하늘에 미즈카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평소처럼 코헤이를 깨우려던 미즈카는 이불을 걷어치운 순간 눈에 들어온 극도로 충격적인 물건에 패닉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불 아래에 있던 코헤이의 몸은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였다.
코헤이는 부자연스럽게 벽 쪽으로 몸을 움츠려 보았다.
"나가모리, 너...... 이런 짓까지!"
"이불을 치울 때부터 옷이 없었다구!"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알몸을 보여줄 텐데."
"농담할 시간 없어. 정말로 지각해버릴 거야."
미즈카가 거칠게 옷과 가방을 건네줬다.
누명을 씌워 거북한 기분이 들게 해서 우위에 서겠다는 계획은 간파당한 듯 하다. 그렇게 되니 이 모습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다. 코헤이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니, 나는 나가모리에게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거든......"
"그런 거 보고싶지 않아!"
"같이 목욕하던 시절과 비교해서 얼마나 늠름해졌는지 알고 싶지?"
"목욕 같은 거 같이 한 적 없어."
"엥? 잠깐만......"
코헤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전까지는 전부 농담이었지만, 분명 미즈카와 목욕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볍게 생각에 잠겼다.
아직 어릴 때였다. 여자아이와 함께 욕조에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항상 가지고 있던 장난감과 함께하지 않으면 목욕을 할 수 없던 소녀. 그 장난감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단히 소중한 일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뭔가 머릿속에서 걸려 있는 게 찜찜했지만, 미즈카가 재촉하는 바람에 전신 누드인 상태로 방에서 쫓겨났다.
*
"코헤이, 앞으로 그런 장난 치지 마. 나, 깜짝 놀랐다구."
"다음엔 더 좋은 작전을 생각해 둘게."
"정말, 그런 건 필요 없다니까."
비가 오는 날에도 지각 직전인 것은 변함없다.
두 사람은 물웅덩이를 차며 학교로 급히 달려갔다.
'......어라?'
시야 한구석에 분홍색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공터 한구운데, 분홍색 우산을 쓰고 가만히 서 있는 소녀가 있었다. 코헤이 일행과 같은 학교 교복이었기에 무심코 얼굴을 확인하고 말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같은 반 여자아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윤기 나는 긴 머리가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분명, 이름이 사토무라 아카네였을 것이다.
여학생 중에 친한 학생이 그리 많지 않은 코헤이는 벌써 12월에 접어드는데도 사토무라 아카네와 대화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카네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이 말라 죽은 풀들 사이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그 때문에 미즈카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옆을 보고 있어서 발걸음이 느려진 코에이를 앞서가던 미즈카가 부른다.
"코헤이, 지각할 거야."
어딘지 모르게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도 감돌고 있어, 결국 코헤이는 그 친하지 않은 반 친구에게 말을 걸지 않은 채 학교로 달려갔다.
*
1교시 수업 도중, 스미이로부터 쪽지가 건내져 왔다.
『어이. 어제 말했던 그 일에 대해서다. 꼭 봐 둬. 다 읽으면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고.』
대충 자른 루즈리프 노트 조각으로 눈길을 떨군다.
-2학년 A반 여학생 인기 투표 개최
우리 반에서 진행하는 여학생 인기 투표의 실시를 보고드립니다.
투표는 남학생만 참여. 비밀리에 진행.
공정성을 위해 여자애들에게는 알리지 말 것.
투표 접수 마감은 내일(4일) 방과후. 스미이에게 제출할 것.
5일에 결과 발표. 기대하시라.-
아마, 전학 온 루미에게 달라붙는 남자 무리를 보고 생각해 낸 것이겠지. 코헤이로서는 잘 모를 일이지만, A반 여학생 중에는 미인이 많다고들 한다.
아마 루미를 노리는 남자들을 중심으로 달아오를 것이 틀림없다.
"어이, 이런 게 돌고 있다고."
코헤이는 아무 생각 없이 앞자리의 루미에게 쪽지를 전달했다. 루미가 힐끗 코헤이에게 시선을 주더니, 쪽지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여자한테 건내면 안 된다고 했었나?'
그렇게 생각을 해 보았지만, 쪽지는 이미 루미의 손에 전달되었다.
루미는 그대로 쪽지를 읽고 있는 듯하다.
그런 성격의 루미라면 미스 콘테스트 흉내 같은 것을 보고 무슨 말을 할지 뻔하다.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잠깐 복도로 와 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어째서 말하기도 전에 대답하고 있는 거야."
"나나세의 행동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어쨌든 일단 나와봐."
활짝 웃으며 루미는 코헤이의 손을 끌고 복도로 나갔다.
*
"진짜로 하는 거야. 순위가 쭉 나열될걸."
복도 구석으로 끌려간 코헤이는 입을 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루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코헤이를 바라본다.
"어떻게 물어보려던 걸 먼저 대답하는 거야."
"그러니깐 읽을 수 있대도. 일단 전부 사실이야."
루미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반 남자애들의 이상형을 정한다는 거지? 아앗, 신경 쓰여!"
아무래도 반 하나에서 개최되는 정도의 인기 투표를 무슨 '소녀의 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침소봉대(針小棒大:작은 일을 크게 부풀려서 말함)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루미가 진심으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기에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어떻게 되든 금방 결과가 나와. 푹 자면서 기다려."
루미가 주저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코헤이를 보았다.
"저기, 오리하라......현재 순위랄까, 그런 거 알 수 있을까?"
"뭐, 스미이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되니깐. 다만, 아직 그렇게 표가 많이 모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래도 괜찮으니까 물어봐 줄래?"
코헤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일단 교실로 돌아가더니, 1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가볍게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린다.
"......놀랐어."
"왜 그래?"
긴장해서 굳어버린 얼굴의 루미를 바라본다.
코헤이가 장엄하게 전한다.
"나나세, 네가 압도적인 1위다."
"와아, 거짓말. 진짜로?"
"2위랑 2표 차이지만."
루미는 갑자기 코헤이의 머리를 세게 쳤다.
"뭐가 압도적이야, 바보!"
"단, 현재 전체 투표수는 5표야. 비율로 따지면 거의 우승 확정 아니냐?"
"그렇긴, 하네......"
루미는 어딘가 안도한 표정으로 변한다.
코헤이가 이어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삼일 동안, 너, 남자애들의 환상을 깨뜨리지 않도록 지내야겠네. 실수로라도 남자 앞에서 방귀 같은 거 뀌지 마."
"뀌겠냐!"
"뭐, 별일 없는 이상 나나세라면 괜찮겠지."
"응, 힘낼게."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미의 뒤로, 다음 수업을 맡은 영어 교사가 보인다.
두 사람은 교실로 돌아갔다.
*
"......으아아......앗."
수업 직후, 코헤이는 책상에 없드렸다.
영어를 잘 못하는 루미를 위해 몰래 답을 알려주느라 정작 자신이 지목당했을 때 대답하지 못해서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다.
루미는 남자애들의 환상을 깨뜨리지 않고 무사히 고비를 넘긴 덕분에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코헤이는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루미 쪽을 바라보면서 스미이 쪽으로 걸어왔다.
"나나세는 역시 강세냐?"
"직접 봐봐."
스미이가 집계 중인 루즈리프 노트를 코헤이 앞에 펼쳐 보여주었다.
무심코 시선을 내리던 코헤이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나나세 루미 4
나가모리 미즈카 3
슬슬 절반 정도의 표가 모였을까. 하지만 다른 여학생들에게 모인 표는 놀라울 정도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미즈카의 친구인 이나키 사오리와 사토무라 아카네의 이름도 보인다. 하지만 어느 정도 표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루미와 미즈카 뿐이었다.
"나가모리가 그렇게 인기가 많다고? 믿기지 않는걸. 걔한테 투표하는 놈은 나 정도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동정 표로 말이야."
"그래?"
의외라는 듯이 스미이가 되물었다.
"으음, 아닌가?"
코헤이가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 스미이는 가볍게 웃었다.
"나가모리 팬클럽은 전부터 있어 왔다고. 난 나가모리 양이 1위가 될 거라고 본다."
"안 돼, 안 돼. 어짜피 나나세가 반격할 게 틀림없다고."
"그럼, 점심 내기할까?"
"오케이. 내기 성립."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미즈카는 다른 남학생들로부터 호감이 가는 여자아이로 여겨지고 있는 모양이다.
자신도 모르게 미즈카의 자리까지 걸어가서 의아해하는 미즈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 코헤이."
"아니, 얼굴을 구경하러 왔을 뿐이야. 그럼."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미즈카의 얼굴을 떠올린다. 확실히 얼굴은 나쁘지 않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도 찰랑거리고 아름답다. 어느 부위든 평균 이상이며, 배치된 모습 등이 절묘하다고 할 수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에게 흔히 나타나는 날 선 인상도 없고 부드러운 분위기다. 게다가 코헤이를 지극정성으로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많은 남자가 그녀를 주목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결점이 없을 뿐이잖아.'
코헤이는 어딘지 모르게 근질거리는 듯한 기분을, 스미이에게 점심을 사야만 한다는 위기감 때문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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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CG가 그대로 들어가 있는 삽화
아닌 것도 있지만 대부분 원작 CG랑 같다
코헤이와 같이 등교하는 미즈카
넘어진 나나세
우유랑 밥을 같이 먹는 나가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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