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소녀의 미션


루미에게 여러 번 요구받아 스미이에게서 몇 차례 인기 투표 진행 상황을 확인하게 된 코헤이는 몹시 당황했다.


역시 미즈카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코헤이의 생각과는 크게 달랐고, 여전히 루미와 미즈카의 득표수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미즈카 득표수가 더 앞서고 있기도 했다.


이대로라면 기세등등해진 스미이에게 점심을 사줘야 할 판이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절박한 기분이 된 코헤이는 고민 끝에 루미에게 선언했다.


"나나세, 협력하자."


"뭔 소리야?"


"스미이와 인기 투표 내기를 하고 있어. 그 녀석이 나가모리한테 걸어서 나는 자동적으로 너에게 걸게 되었지. 내 점심을 위해 꼭 네가 이겨줬으면 해."


"그거야, 노력은 하겠지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내용에, 루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코헤이는 팡 하고 루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너라면 할 수 있어. 물론 나도 투표 마감까지 온 힘을 다해 협력할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모리를 이겨줘."


"......알았어."


도움을 준다는 건 기쁘고 상황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는 있지만, 묘하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의 루미는 애매모호한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


승부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기말고사 전에 시험 범위 진도를 누구보다 빨리 끝마친  국어 교사가 만족스러운 듯 분필을 내려놓았다.


"지금부터 남은 시간을 이용해서 미니 테스트를 하겠다."


일단 시험 범위를 다 끝냈다는 생각에 안도하던 학생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바뀌었다. 하지만 국어 교사는 여유롭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잃지 않는다.


"이건 시험 범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한 것이고 성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단, 채점이 끝난 뒤에 상위권과 하위권의 명단을 발표하겠다. 대충 했다가는 큰 창피를 당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임하도록."


'여전히 능수능란 하시구만.'


코헤이는 싫증이 났지만, 일단 끝까지 풀어보기로 하였다.


'......응?'


루미의 등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루미는 이 미니 테스트로 승부를 걸 생각인 듯 하다. 선동을 잘하는 교사의 수작에 넘어가 혼자서 불타오르는 있는 모양이다. 확실히 여기서 형편업는 점수를 받으면 루미가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만들어 온『사랑스러운 소녀』이미지가 무너질 것이다.


소녀 만화 같은 이상적인 자신을 목표로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 루미로서는, 『얼굴은 귀여운데 머리는 나쁘네, 쟤』같은 말은 죽어도 듣고 싶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바로 여기가 승부처인 것이다.


그렇다면 코헤이도 도와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질 순 없어!"


"하지만 국어는 영 불리하단 말이야. 국어라면 나가모리가 상당히 잘해. 1등을 차지한 적도 있었을걸."


잠시 미즈카 쪽을 살펴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지만 결코 불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평소에 시험공부를 성실하게 하는 미즈카다. 자신 있는 국어 공부에 빈틈이 있을 리 없다.


"그 녀석을 이길려면 만점 말고는 방법이 없어. 자신 있어?"


"그렇게까지 있지는 않은데."


코헤이는 루미 외에는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공동 전선으로 가자."


"뭔 소리야."


"일단 내가 도와줄게. 스미이에게도 사정을 말하지 않고 돕게 만들 거고, 네 옆자리도 내가 살짝 들여다볼게. 이걸로 4대 1이다. 그 정도만 있으면 승률이 크게 올라가겠지."


"......알았어. 4명이서 한다는 거구나."


루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시험지가 뒤집힌 채로 배부된다. 모두에게 전달된 것을 확인한 교사가 시작하라고 선언했다.


재빨리 시험지를 넘긴다.


'이거 제법 어려운데.'


코헤이도 국어 성적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풀 수 없을 것 같은 문제가 몇 개 눈에 띈다. 이렇게 된 이상, 컨닝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다.


스미이의 국어 성적은 밑에서부터 세는 편이 더 빠르다. 하지만 스미이 또한 컨닝에 관해서는 반쯤 천재 같은 존재이며,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정답률을 유지하느냐에 따라 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루미 옆에 있는 여학생과는 좌석은 가깝지만 한 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반 여자애들은 대체로 성실한 편이라 공부도 어느 정도는 해왔을 것이다.


루미 본인의 성적은 그녀의 다소 어설픈 언동을 보면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는다. 이건 코헤이 자신이 분발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점심을 사게 되는 꼴이 된다. 그렇게 예상했다.


일단 확실히 정답이라고 생각되는 문제들만 골라, 한번에 루미에게 전달해 주기로 했다.


"나머진 지금 알아볼게."


루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공란으로 남아 있는 문제는 총 4문제.


우선 첫번째 문제. 코헤이는 교사에게 들키지 않도록 다른 사람의 답안을 엿보았다.


스미이의 답안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오답일 게 뻔한 내용들이 엉터리로 적혀 있었다. 이어 여학생의 답안지를 훔쳐보았다. 그곳엔 답들이 빈틈없이 적혀 있었다.


코헤이는 작은 목소리로 루미에게 전한다.


두 번째 문제와 세 번째 문제의 답을 차례차례 루미에게 순조롭게 전달한다.


하지만, 마지막 네 번째 문제에서 코헤이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역시 어려운 문제인지 스미이의 답안에도 여학생의 답안에도 답이 적혀 있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으음, 전혀 감이 안 오네. 이게 대체 뭔 문제냐.'


그러나 시간만은 무정하게 흘러간다.


"시간 종료! 옆자리와 용지를 교환해라."


아쉬워하며 답안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결국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옆자리의 스미이가 시험지를 낚아채 가더니 자기 것을 넘겨주었다.


코헤이 자신의 답안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정답률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풀지 못한 그 문제도 있어서 만점이라고는 도저히 말하기 어려웠다. 나머지는 루미 자신이 얼마나 정답을 맞추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답안이 회수되는 것을 교사가 모아 교단에서 성적 순으로 정렬하고 있는 듯 하다.


"한 문제는 시험 삼아 정말 재미있는 대학 입시 문제를 넣어봤는데 정답률은 거의 완전 제로다. 정답자가 한 사람밖에 없어."


'재미있다고 2학년 미니 테스트에 그딴 걸 넣지 말라고!'


코헤이의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만점자는 나가모리 미즈카 한 명뿐이다. 하지만 이 한 문제를 제외하고 모두 정답을 맞힌 사람이 3명. 이노우에, 시바타, 나나세. 이상 세 명이다. 하위권은......"


루미가 맥없이 축 늘어지는 모습이 뒤에 있던 코헤이의 눈에 빤히 보였다.


평소대로였다면 미즈카와 공동 1위 정도까지는 노려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운이 좋지 않았다. 루미는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다. 비록 1위는 아닐지언정 꽤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으니, 그렇게까지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


낮에 어느 정도 우려했던 대로, 루미는 미즈카에게 뒤처져 있었다.


"아직 반나절 정도 남았으니까 남은 득표수가 전부 나나세라면 역전도 가능해."


"그런 기적 같은 일을 요구하지 마. 뭐어, 노력은 해 보겠지만."


어느 쪽도 아닌 여학생에게 한 표라도 들어가도 끝장인 상황이니 확실히 갈 길은 험난했다.


"뭐, 나나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는 녀석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응, 그렇네."


루미는 평소보다 더 연약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무척 여자아이답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


방과 후, 달콤한 것이 먹고 싶어진 코헤이는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미즈카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코헤이는 단 것을 꽤 좋아한다. 상점가의 단것을 파는 가게라면 거의 다 꿰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맛있기로 소문난 크레페 가게, 『파타포야』의 크레페를 먹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 있었다.


단것은 가끔 이렇게 느닷없이 먹고 싶어지는 게 곤란한 점이다.


"나가모리, 오랜만에 파타포야에 안 갈래?"


"미안, 나......동아리가 있어서."


미즈카는 오케스트라부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덕분에 제법 실력이 좋다고 한다.


자신도 일단은 음악 관련 동아리인 경음악부에 들어가 있지만, 그 경음악의 실체가 재즈라는 사실을 알고 완전히 기가 죽어버려 의욕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로 코헤이는 줄곧 유령 부원으로 지내고 있다. 그래서 음악에 대해 떠들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지 않았다.


하지만 미즈카는 오케스트라부 고문인 음악 교사에게 음대 진학 권유를 받을 정도라고 하니 상당히 수준이 높을 것이다.


12월에 열리는 연주회를 앞두고 동아리 쪽도 굉장히 바쁜 것 같았다. 일단 미즈카에게 듣기는 했지만 귓등으로 흘려들었는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코헤이가 꼭 오늘 가고 싶다고 하면 무리해서라도 시간 내줄 수 있는데."


"아냐, 괜찮아. 연주회를 잊고 있던 나도 잘못했으니까. 그럼 먼저 갈게."


손을 흔들며 교실을 나선다.


여자애들 틈에 섞여서 남자 혼자 줄을 설 배짱은 없었다.


*


돌아가는 길에 중정(中庭)을 지나가던 중, 운동장 쪽에서 연습 중인 운동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귀가부 학생 대부분이 떠났기 때문에 중정에는 아무도 없다. 정문 쪽으로 가는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 연습 풍경이 아주 잠깐 시야에 들어왔다.


무언가에 몰두해서, 그것만으로 하루를 다 보내버리는 인종들.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다른 인종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코헤이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처럼 따분해하는 남학생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즐거웠고, 미즈카와 함께 여기저기 들러가며 하교하는 것도 좋아했다. 무언가에 뜨겁게 열중하는 일 없이, 미지근한 물에 몸을 담근 듯한 생활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계속 이대로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평온하고 따분한, 단지 그뿐인 나날들.


스스로 찾아 나서야만 하는 무언가를 쫓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즐거운 것을 소비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나 자신이 좋았다.


'위화감.'


그래서 무언가에 열중하는 인종을 보고 있으면, 온몸이 근질근질 거리고 불편한 기분이 느껴지곤 한다. 첼로에 몰두하고 있는 미즈카에게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


코헤이는 저물어 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주황색, 주홍색, 진홍색.


'하늘을 보고 있었어......전에도."


넋을 놓은 코헤이는 공허한 눈빛으로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신비로운 기분.


그것이 기분 좋은 느낌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


잠들기 전, 코헤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일은 꼭 미즈카를 놀라게 해보자.


지난번의 풀 누드 작전은 완전히 실패해 버렸으니, 이번에야말로 허를 찌르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해 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던 코헤이에게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침대 밑에 숨어서 자고 있으면 미즈카는 코헤이가 어디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갈아입을 옷은 있는데 정작 본인은 없는 상황이니 미즈카도 깜짝 놀랄 것이다.


코헤이는 기뻐하며 침대 아래 틈새에 몸을 미끄러뜨렸다.


*


"코헤이, 코헤에에에?"


아침, 예상대로 미즈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코헤이는 반쯤 잠에서 덜 깬 상태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즈카의 다급한 발소리가 바닥에 울려 퍼지며 전해져 온다. 코헤이를 찾아다니는 모양이다.


그것이 자장가처럼 느껴져서 코헤이는 졸기 시작했다.


"아앗, 아팟!"


왠지 모르게 등쪽이 심하게 아프다. 아무래도 몸이 질질 끌려가고 있는 듯 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환해졌다.


"대체 잠버릇이 어떻길래 침대 밑에 들어가는 거야!"


상체만 겨우 침대 옆으로 삐져나온 채로 코헤이는 누워 있었다. 어둡게 느껴졌던 건 얼굴 바로 앞에 침대 판자가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코헤이는 남은 하반신을 스스로 밖으로 끄집어냈다.


"아니, 깜짝 놀랄려나 싶어서 숨어 본 건데."


"아 놀랐다. 깜짝 놀래라. 이제 됐어? 정말이지,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구."


코헤이는 어쩔 수 없이 미즈카가 건네준 옷과 가방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대충 준비를 끝내고 등굣길을 달린다.


"있잖아, 정말 나를 놀래키려고 그런 일을 한 거야?"


"그럼 내가 뭐 때문에 그런 데서 자야 하는데."


미즈카는 크게 한숨을 쉬어 보인다.


"평소에도 충분히 놀라고 있으니까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돼. 몸은 아프지 않았어?"


"뭐, 어디서든 잘 수 있는 체질이니깐 말야."


"그런 바보 같은 일로 신경 써줄 거면, 좀 더 다른 일에 신경 써주면 좋을 텐데."


"뭐에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스펙타클을 공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놀래키는 거 그런 거 말고......매일 깨워주는 거에 대해서 평소의 고마움을 담는다든가, 그런 거 있잖아."


확실히 매일 깨워주는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그런 이벤트는 수지가 안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할 것을 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코헤이가 입을 열었다.


"그럼 평소의 고마움을 담아서 데이트라도 신청해 주지. 물론 전부 내가 쏠 거고 나가모리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데려다 줄게. 이걸로 어때?"


"에에엣!?"


확실히 예상 밖이었나 보다.


게다가 풀 누드 작전 때보다 몇 배는 더 당황해하고 있다.


미즈카는 허둥지둥 당황하며 항변한다.


"조, 좋지 않아, 그건. 멋쩍다고 해야할까...... 나 같은 애랑 데이트하다가 코헤이를 좋아하는 애가 오해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오해받든 말든 전혀 상관없는데."


이렇게나 미즈카가 당황해주고 있다. 다른 것 따윈 알 바 아니다. 애초에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인도 안된 것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생각보다 임팩트가 컸던 모양이다.


갑자기 미즈카의 다리가 멈춰버렸다.


미즈카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패닉 상태로 코헤이에게 대꾸한다.


"하지만, 나라구, 나! 알고 말하는 거야?"


"나가모리잖아. 수염이나 스미이로도 안 보인다고."


"그치만, 코헤이 바보. 나인데, 나인데, 나인데......!"


"좀 진정해. 심호흡 해봐."


코헤이가 말한대로 미즈카가 심호흡을 반복한다.


"자, 달릴 수 있겠어? 시간 없다며."


두 사람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나가모리는 항상 내가 걱정된다고 말하지만, 네 쪽이 훨씬 더 걱정스럽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리기만 하고 말야. 인기 투표만 봐도 꽤......"


"응?"


"아니, 아무것도 아냐. 하지만 역시 걱정된단 말이지."


"그렇지 않아. 나라면 괜찮다구. 나는 코헤이랑 달라서 혼자서도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


"섭섭한 말을 하는걸. 뭐, 데이트 건은 마음 내킬 때 언제든지 예약해 줘. 나가모리가 먹고 싶은 만큼 먹게 해줄 테니까."


"응, 고마워!"


이제 슬슬 전력질주를 하지 않으면 아슬아슬한 시간이 되었다.


"스피드 올리자, 나가모리."


코헤이는 미즈카가 뒤처지지 않도록 신경쓰며 속도를 높였다.


*


1교시 수업이 끝나갈 무렵 스미이가 한 장의 종이를 건네줬다.



인기 투표 결과 발표

1위 나가모리 미즈카



종이 구석에 『B정식 희망. 잘 먹겠습니다』라고 덧붙여 있었다.


코헤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나 열심히 하던 루미도 마음에 걸리고 스미이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것도 분했지만, 왠지 코헤이는 그 이상으로 개운치 않은 뭔가가 남아있었다.


진지하게 수업을 듣고 있는 미즈카의 모습을 힐끗 본다.


자신이 어느샌가 진행되고 있던 인기 투표의 1위가 되었으리라고는 아마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의외로 다른 남자들도 보고 있었구나......'


자신만이 미즈카의 좋은 점을 보고 있다고 믿어왔던 생각이 완전히 비웃음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관심있어하는 남자가 아예 없지는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오히려 엄청 많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그래, 스미이도 미즈카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코헤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바보냐, 난.'


미즈카는 단지 소꿉친구일 뿐이다. 서로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공기 같은 관계가 편안한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원하지 않을 터다.


종이 울렸다.


코헤이는 말 없이 앞자리의 루미에게 메모를 건네주었다.


*


수업이 끝나고, 왠지 모르게 부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왜 그러고 싶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뭔가 색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동아리 활동에 가는 미즈카를 보고 가끔은 가볼까 하는 변덕스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은 하는 것이 아니다.


코헤이가 경음악부의 문을 열었을 때, 예상된 결과였지만 고문 교사를 포함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뭐랄까......'


방 전체에 옅게 먼지가 쌓여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방에 사람이 들어온 것은 꽤 오랜만이라는 뜻일 것이다.


부실로 오는 길에 시끄러울 정도로 떠들썩하게 무대 장치를 만들고 흥겨워하는 연극부가 복도까지 침범해 있는 것을 일부러 피해 가면서 생긴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선명하게 남은 자신의 발자국을 묘하게 쓸쓸한 기분으로 바라보며, 코헤이는 부실을 나갔다.


*


그날 밤, 무언가 작은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는 듯한 위화감을 떨쳐내지 못한 채, 코헤이는 잠자리에 들었다.


마음만이 어딘가로 헤매어 나갈 것만 같은 기묘한 감촉.


코헤이의 눈꺼풀이 그대로 떨어졌다.


●  ●  ●


왠지 모르게, 밀려왔다 되돌아가는 파도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에는 빌딩이 늘어서 있고, 전조등을 켠 수많은 차들이 도로에 노란 선을 그려낸다.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저편에만 펼쳐져 있는 세계로,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저편에는 생활이 있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숨결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곳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찾아 헤매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이다.


드르륵,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그것은, 이쪽에서 난 소리였다.


몹시나도, 그리운 소리였을 텐데.


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모른 채,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본다.


『나는, 저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저곳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저 세계에서 온 거야. 저편의 일부분이었어.』


『대단하네. 하지만, 여행을 떠났었어......아주 먼 옛날에.』


『그랬었지. 그런 기분이 들어......하지만』


아주 먼 옛날이라고 말했지만, 그 뒤로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 아이가 중얼거렸다.


『맞아, 먼 옛날이지만, 방금 전이기도 해.』


『그것도, 알아.』


움직이는 것은 저편의 세계뿐이다.


이쪽 세계는 여전히 멈춰 있는 채다.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그 어린 소녀와 둘이서, 멈춰버린 세계에 머문 채 저편을 바라보고 있다.


이쪽에서 바라보고 있기에, 원래대로라면 움직이고 있어야 할 세계조차 제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노을은 언제까지고 붉은 그대로. 달리는 차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요컨대, 이런 것이다.


『세계는, 여기까지인가 보네.』


『질리면 다른 곳으로 떠나면 돼.』


이 소녀와 서로 기대며, 나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진 곳도 없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시간조차 흐르지 않으니, 천천히 있어도 되는 것이다.


●  ●  ●


"코헤이, 일어나!"


여는 때처럼 미즈카에게 깨워진다. 그 모습만 보면 도저히 인기 투표에서 훌륭하게 1위를 차지한 미소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생활감이 넘친다.


"......사실 내가 어제 교장을 때려서 무기 정학 처분을 받았거든. 언제 학교에 갈 수 있을지 전혀 모르니깐 이제 그냥 좀 내버려 둬......"


오래된 싸구려 드라마 같은 연기를 과장된 액션으로 보여주었다.


"교장 선생님이라면 어제 복도에서 만났는걸. 평소랑 똑같으셨어. 금방 들통날 거짓말 같은 거 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


"으으음. 교장 녀석, 이런 곳에서 내 발목을 잡다니…...얕볼 수 없겠군."


툴툴 거리며 코헤이는 일어났다.


미즈카에게 옷과 가방을 건네받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아무래도 미즈카는 준비하는 사이에 이불을 널 생각인 듯 하다. 가끔 이렇게 미즈카가 이불을 널어 주지 않으면 분명 코헤이의 이불은 곰팡이의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코헤이가 준비를 마친 시점에, 가벼운 소리를 내며 미즈카가 내려온다.


"오늘 코헤이는 빠르네. 오늘은 여유롭게 학교에 갈 수 있겠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평소라면 아직 한창 꾸물대고 있을 시간이었다.


평소와 달리, 두 사람은 느긋하게 걸으며 학교로 향했다.


평소라면 들을 여유조차 없었을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나 아침의 다소 옅은 햇살에도 마음을 기울일 수 있었다. 어제 비가 내렸던 탓에, 나뭇잎도 선명한 녹색이었다.

"있지, 가끔은 뒷산으로도 가볼까? 천천히 산책하면서 가면 분명 예쁠 거야."


"......그럴까."


뒷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학교까지 가는 최단 거리다.


하지만 중간에 급경사 언덕이 있어서 『심장 파괴의 언덕』이라 불리고 있었고, 웬만큼 절박한 상황이 아니면 이 길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달려서 등교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여유롭게 걸어갈 수만 있다면 거리도 길지 않고, 고지 중간에 전망이 좋은 공원 같은 것도 있고, 학교 부지와 인접한 숲 사이에 있는 정말 기분 좋은 산책 코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엔 직진하는 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항상 이렇게 등교할 수 있으면 좋겠네. 최근 동아리 때문에 바빠서 코헤이와 말도 별로 못 했잖아."


"그렇네. 이런 것도 좋지."


"그치? 코헤이도 이렇게 여유롭게 등교하는 걸 좋아하잖아. 단지 아침잠이 좀 많아서 그렇지."


미즈카가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있잖아, 내일부터 이렇게 일찍 나와서 같이 가지 않을래?"


코헤이는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해 코헤이의 아침잠은 정말 심하다. 어릴 적엔 가끔 이모인 유키코가 깨워 주곤 했지만, 전혀 일어나지 않는 코헤이에게 질린 나머지 대개는 침대에서 그대로 밀어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일찍 나가는 것을 습관 들일 자신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 성격상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하겠지만......그래도 괜찮다면."


"응, 그거만으로도 기뻐, 코헤이."


미즈카가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정말로 인기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것도 납득이 간다. 꽃이 활짝 피는 순간을 보는 기분이다.


공원에 들어서니 역시 추웠다.


"너, 안 추워?"


"괜찮아. 코헤이, 내가 춥다고 했으면 겉옷 벗어 줬을 거야?"


"내가 추위를 못 느낀다면 말이지. 추우면 그냥 나랑 한 배를 탔다고 생각해 둬."


"고마워."


오늘의 미즈카는 정말이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늘 그렇듯, 어찌 보면 누나처럼 구는 때보다 훨씬 더 귀엽게 느껴진다.


확실히 이런 아침도 꽤 괜찮다.


코헤이와 미즈카는 숲을 지나 학교 뒤편으로 나온 뒤, 펜스를 타넘었다


*


"아, 맞다. 나가모리, 시간 나면 파타포야에 가자."


"응!"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평소엔 뛰어 들어가던 신발장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등교하는 학생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한가로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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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투표는...나가모리의 승리야
부제는 소녀의 미션이지만 정작 나나세가 져버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