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
제5장 좋아한다는 말
마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많은 것을 배워 나갔다.
스스로 혼자 식사를 구하고, 화장실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스로 다 먹지 못할 정도의 음식을 남겨서 처치 곤란해하는 일도 점점 없어졌다.
매우 좋아하는 햄버거에 둘러싸이면 행복해져서 많이 사 버리게 되지만, 조금씩이라도 참을 수 있게 되어갔다.
그리고 코헤이와 미즈카뿐만 아니라, 루미와 스이미, 다른 급우들과도 어느 정도 지장 없이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마유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미리 예상해 두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밤, 미즈카가 연락해 왔을 때, 코헤이는 자신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마유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마유를 원래 학교로 복학시키겠다고......!』
미즈카는 분명 동요하고 있었다. 코헤이는 그 충격에 이끌려가지 않도록, 가급적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나가모리, 일단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 봐."
아직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으로 미즈카가 말을 시작했다.
마유의 어머니는 딸이 다른 학교에 가짜 학생으로 들어가는 것을 크게 걱정했지만, 그것이 마유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한 듯하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더니, 자기 주변의 일들을 스스로 하려는 의욕을 집에서도 보여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계속 원래 가야 할 학교가 아닌 곳에 다니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이상 코헤이네 학교에 애착이 생겨 그대로 다른 곳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 전에 제대로 원래 학교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뭐, 맞는 말이긴 하네."
코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부터 안 오게 되는데?"
『23일까지래. 거의 이번 학기까지는 다니게 되는 걸까?』
"그렇군. 3학기부터 복학하는 건가."
코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는 시험이라 학교에 거의 있을 시간이 없겠네. 시험 끝나면 시이나와 어디 놀러나 갈까?"
『응, 그러자.』
미즈카에게 인사를 건넨 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오늘은 연주회 전에 마지막으로 맞춰보는 거라 꼭 동아리에 가야 해."
방과 후, 미즈카는 미안하다는 듯 사과했다.
마유가 복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코헤이는, 결국 마유를 집까지 배웅하는 김에 마유의 어머니를 만나 직젚 확인해보기로 했다.
설령 지금 미즈카가 없다고 해도 이 일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이나, 오늘은 너네 집에 갈 거니깐 같이 돌아가자."
"응!"
다른 사람과 어울리게 될 수 있다고는 해도, 마유는 여전히 코헤이를 가장 좋아하는 듯 하다.
상점가를 어슬렁거리며 마유의 집으로 가던 중.
"햄버거......"
갑자기 마유가 발을 멈췄다.
코헤이도 자주 들르곤 하는, 최근 늘어나기 시작한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가 있었다. 마유는 밖까지 퍼지는 햄버거 냄새에 이끌린 모양이었다.
"너, 점심도 햄버거였지?"
여전히 마유는 점심에 햄버거 외에 다른 걸 사 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두 개씩 사오는 점도 그녀의 성장을 보여준다.
"데리야키 버거."
마유는 데리야키 버거 포스터를 가리켰다.
확실히, 데리야키 버거는 학교에서 팔지 않는다.
"데리야키 버거가 제일 맛있어?"
"응, 먹고 싶어."
곧 마유가 학교에 오지 않게 될 테니 같이 먹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코헤이는 엄한 표정으로 훈계했다.
"지금 먹으면 저녁밥 못 먹을텐데. 엄마가 너 먹으라고 정성껏 만들어 주시지? 그걸 무시하고 먹고 싶다고 해서 먹는다면 짐승과 마찬가지라고."
"......데리야키 버거."
"시이나는 짐승이야? 인간이지?"
"알았어......안 먹을래."
"옳지."
코헤이는 마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
마유의 집에서 코헤이는 마주 서 있는 상태로 마유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시이나는......복학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아직이에요. 제가 마음을 정하자마자 나가모리 씨에게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그 이야기를 제가, 말해도 될까요?"
"......부탁합니다."
마유의 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코헤이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마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방의 문을 두드리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마유가 고개를 돌렸다. 코헤이와 미즈카가 사 주었던 정체불명의 인형에 휘감겨서 놀고 있었던 것 같다.
"호에?"
"시이나, 말해줄 게 있어. 진지하게 들어."
"응."
"지금까지 넌 정말 잘 해냈어. 대단하다고 생각해."
"응."
"이제 제대로 해 나갈 수 있게 되었구나?"
마유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코헤이를 바라보았다.
코헤이는 한 번 깊게 숨을 쉬었다.
"네가 가야 할 학교에서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거야. 난 널 믿어."
그때도 마유의 표정에는 아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럼에도 코헤이는 계속했다.
"넌 강해졌어. 정말 열심히 해왔지. 나도 나가모리도 제대로 보고 있었어. 시이나의 엄마도 제대로 보고 있었어. 그러니까, 새로운 학교에서도 제대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줄 거지?"
마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평소처럼 크게 울어대지 않고, 필사적으로 눈물을 억누르고 있었다.
"만약 힘든 순간이 온다면 나도 나가모리도 뭐든 들어줄게. 그러니깐, 힘내라. 게다가 네가 힘들어 하는 걸 보면 나가모리가 울 거라고. 넌 강하니깐 그 녀석을 울게 만들지 마, 알았지?"
"......응."
그것은 무방비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녀의 얼굴이 아니라, 열심히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는 소녀의 얼굴이었다.
"그래, 기특하네."
코헤이는 마유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어 주었다.
*
마유의 집을 떠난 후, 자신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코헤이는 미즈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니까 분명 동아리 활동을 마치고 돌아왔을 것이다.
신호음 두 번 만에 미즈카 본인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가모리인데요.』
"나야. 오늘, 이야기했어......시이나에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유는, 어땠어?』
"울었긴 해도, 열심히 해줄 것 같아. 제대로 배웅해주자."
『......응.』
"시이나가 열심히 노력할 생각인데 네가 울면 어쩌자는 거야. 덩달아 시이나까지 울 지도 모른다고. 제대로 웃으며 보내줘야지. 친구니까."
『맞아, 내가 울고 있으면 분명 마유가 걱정할 거야.』
미즈카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억지로 밝은 척 하고 있는 것이 빤히 들여다보였지만, 코헤이는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
다음 주,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물론 마유는 답안을 쓰는 척만 할 뿐이다. 코헤이도 이때만큼은 졸지 않고, 어떻게든 시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첫째 날 시험이 끝나고 마유에게 말을 걸었다.
"피곤했을텐데 어디 놀러라도 갈까? 나가모리랑 같이 햄버거나 먹을까?"
몹시 마음이 끌린 것 같았지만 마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옷, 만들러 가야 해."
아마 교복을 맞추러 가는 것이리라. 복학을 위한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냐, 어쩔 수 없지. 그럼 시간 날 때 말해."
"응!"
마유는 집에 돌아갔다.
오늘은 마유와 놀아줄 생각으로 시간을 비워두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맥이 빠져버렸다.
혼자 있는 코헤이에게 미즈카가 다가왔다.
"어라? 코헤이, 마유는 돌아간 거야?"
"어, 교복을 맞추러 가는 것 같아. 같이 놀아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그렇구나. 아쉬워라. 괜찮다면 나랑 놀자. 나 한가해."
지금은 한낮이라, 항상 줄이 생기는『파타포야』가 조금은 비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맛있는 크레페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식욕이 생겼다.
"나가모리, 파타포야에 가자. 저번에 가려다 못 갔잤아. 내가 쏠게."
스이카가 기뻐하며 웃었다. 그녀도 파타포야의 크레페를 아주 좋아한다.
햄버거만 계속 먹고 있는 마유에게도 언젠가 먹여 주자. 달콤한 걸 싫어하지 않는 이상 분명 마음에 들 것이다.
*
이 시간대엔 상점가도 꽤 한산했다.
이른 하교를 맞아 놀러 나온 학생들도 간혹 눈에 띄긴 했지만, 다른 학교들과 시험 기간이 딱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라서 거리가 한산한 건 여전했다.
파타포야 앞에는 몇 명의 여학생들이 줄을 서 있었지만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금세 맨 앞줄까지 갈 수 있었다.
"으음, 맛있어."
미즈카는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아주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한다.
물론 자신의 것도 최고로 맛있겠지만, 남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저것도 분명 기가 막히게 맛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게 된다.
"엇, 저 고양이 인형 되게 귀여운데~"
미즈카가 다른 곳을 보는 틈에 그녀의 크레이프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크림 속에 잘게 썬 과일이 어우러져 입 안에 기분 좋은 달콤함이 가득 퍼졌다.
"아앗, 내 크레이프 먹었지!?"
"더럽게시리 남이 먹던 걸 먹을 리 없잖아, 바보야."
"음......그런가."
미즈카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코헤이를 바라보았지만, 인형이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라 곧바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물론 코헤이가 그 틈을 놓칠 리 없다. 하지만, 한 입 크게 물어뜯는 순간, 종이까지 씹어버렸다.
코헤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미즈카가 코헤이의 얼굴과 베어 물린 종이 부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코헤이, 우물우물해 봐. 입안에 있는 게 코헤이의 크레이프라면 다 먹을 수 있겠지? 코헤이 거의 종이는 전혀 찢어져 있지 않은걸."
"읏."
자백하지 않는 한, 꼼짝없이 종이를 먹게 될 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코헤이는 미즈카가 말한 대로 입 안에 있는 것을 씹기 시작했다. 하지만, 종이를 삼켜버리려던 찰나, 그만 입에서 종이를 뱉어내고 말았다.
"아앗! 역시 코헤이가 먹었었어! 치사해. 나도 코헤이 거 먹을 거야!"
"내 크레이프!"
자신의 크레이프를 미즈카에게서 빼앗으려 했지만, 허무하게 먹히고 만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있었던 탓에 그러한 일에는 서로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자, 봐봐 코헤이.이 고양이 정말 귀엽지?"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상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
시험 기간이었지만 오랜만에 하교길에 미즈카와 놀 수 있었다.
시험 마지막 날, 미즈카가 마유와 만나서 뭔가를 사주겠다고 했다. 새 학교에서 쓸 수 있을 문구류를 보러 간다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문구 코너는 팬시 굿즈와 마찬가지로 발을 들이기 껄끄럽다.
코헤이는 혼자서 시험이 끝난 해방감을 즐기며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 찬 상점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 ● ●
새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바다가, 마치 하얀 대지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다.
하늘만 있는 세계.
『이 아래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래? 나는 넓은 들판에 많은 양들이 놀고 있다고 냉각하는데.』
『아무것도 없어.』
『그럼 대지를 만들자. 광대하고 새싹이 막 돋아난 대지를.』
『필요없어. 바다면 돼.』
행복하게 풀을 뜯는 양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푸른 하늘 아래 푸른 바다만 있는 세계. 그게 좋았다.
『양은 모두 바다에 빠지는 거야?』
『풍덩풍덩 바다에 빠져서, 거기서 둥둥 떠다니며 여생을 보내는 거지.』
『하지만, 그 양들은, 모두 너잖아.』
여기는 내 마음을 그대로 비추는 장소니까.
지금의 나는 무력한 채로 바다에 떠 있는 양.
『그래도, 꿈속에서는 모두가, 하늘을 나니깐 괜찮을지도.』
너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력한 양에게 어울리지 않는, 개방적인 광경이다.
『양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한 뒤에, 바다를 선택할 거야.』
『그것도 네 이야기야?』
내가 내 입장을 정하고 이 세상을 선택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그리고 너를 모욕하는 것이 된다.
너는, 눈치채고 있을까.
내가 이 세계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감추려는 듯 나는 입을 연다.
『하지만, 양들은 수영을 정말 잘해. 기분 좋게 물속을 헤엄치고 파도를 가르며 헤엄치는 거야.』
『그럼 괜찮겠네. 하늘을 날 수 없어도.』
하지만, 하늘과 바다만 있는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육지는 없다.
그저, 바다 위에 떠 있을 뿐이다.
● ● ●
시험이 끝나고 수업은 평소대로 진행되었다.
간만에 스미이가 메모를 건네왔다.
평소와 같은 생활 리듬이 되었기 때문에, 겨울 방학 전에 시간 때우기용으로 장난 하나를 떠올린 것이리라.
왠지 졸려서 잠 깰 겸 참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그렇게 생각한 코헤이는 메모를 받았다.
빅 찬스 도래!!
크리스마스 캠페인 실시 안내
추첨을 통해 단 1분에게만. 마음에 둔 그녀에게 고백할 권리를 증정.
코헤이는 한숨을 쉬었다.
'이거 또 악랄한 기획일세.'
물론 고백했다고 해서 성사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다 같이 몰려가 운 나쁘게 당첨된 녀석이 도망 못 가게 부추기면서, 멋지게 자폭하는 꼴을 구경하며 즐기는 장난일 뿐이다. 구경하는 입장에선 즐겁지만,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스미이가 몇 개 나와 있는 제비를 코헤이에게 건냈다. 이미 2,3개 밖에 남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 중 하나를 뽑았다.
귀를 기울이자, 교실 안에서 남학생들의 한숨이 들렸다.
즉, 거의 모든 남학생이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코헤이는 제비를 열었다.
그 순간, 코헤이는 굳어버렸다.
당첨,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적혀 있었다.
교실 안의 남학생들이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다.
이미 교체가 불가능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코헤이가 루미의 등을 살짝 찔렀다.
"야, 나나세. 좋은 걸 줄ㄱ......"
"오리하라, 먼저 할 게 있을 텐데."
무정하게도 스미이가 그를 불렀다.
"보여봐. 아직 당첨자가 안 나왔거든."
"봐. 아무것도 안 써져 있잖아."
당첨지를 뒤집어 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비쳐 보였다.
스미이가 씩 웃었다.
"축하한다. 반 남학생 모두가 널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고."
*
오늘은 오전 수업뿐이라 곧바로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나나세, 그럼......"
말을 끝마칠 틈도 없이, 코헤이는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런 일은 도지히 할 수 없다. 도망치는 게 이기는 거다.
하지만 코헤이의 계략은 이미 스미이에게 간파당한 상태. 달려가려는 코헤이의 팔을 콱 잡았다.
장난기 가득한 앳된 얼굴이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설마 도망가진 않겠지~? 모두가 이렇게까지 등을 떠밀어주고 있는데 말이야."
"알았으니깐 닥쳐봐. 집중 안 되잖아."
우선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상대를 골라야 한다.
가장 먼저 마유가 떠올랐지만, 멍하니 있다가 뜻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일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상대는 미즈카와 루미로 좁혀진다. 어느 쪽이든 농담으로 받아줄 것 같지만 누가 좋을까.
잠시 생각해보고 역시 미즈카에게 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어울려 온 미즈카라면 간단하게 코헤이의 행동을 받아넘겨 줄 것이다.
'음, 의외로 『내 여친이 되어다오오오오오!』하면서, 수염에게 고백하는 것도 방법일지 모르겠네.'
반응은 확실히 좋겠지만 뒷감당이 너무 무섭다.
역시 미즈카에게 가기로 결정한다.
"그럼 다녀온다."
"오, 끝까지 지켜봐 줄 테니깐 잘해봐."
코헤이는 마음속으로 스미이에게 저주의 말을 중얼거리고, 막 교실을 나가려던 미즈카를 불러 세웠다.
"왜?"
이런 식으로 사랑의 말을 전하기 위해 마주 보고 있으니, 그것이 농담이라 해도 긴장되는 법이다. 하지만 진심도 아닌데 긴장하는 것도 어리석다.
코헤이는 입을 열었다.
"나가모리!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나랑 사귀어 줘!"
'자, 나가모리. 얼른 농담으로 넘겨달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당연히 미즈카에게 전달될 리 없었다.
미즈카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입술을 열었다.
"응, 좋아......코헤이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괜찮아."
"......어?"
아마 그때 코헤이는 몹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즈카는 수줍은 듯 웃더니, 볼일이 있다며 서둘러 달려가 버렸다. 미즈카의 뺨이 발그스레 물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미즈카가 사라진 교실에서 남학생들에게 환호성을 들으며 둘러싸였을 때였다.
'무슨 생각이야, 나가모리 녀석.'
이럴 계획은 아니었다. 오버하면서 고백한 코헤이를 미즈카가 뻥 차 버리고, 그 후에 몰래 사실을 밝힌 뒤, 궁지에서 구해준 답례로 뭔가 한턱내는 걸로 끝낼 생각이었다.
코헤이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불러일으킨 결과를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
어제 일이 꽤 충격적이었던 탓일까. 다음 날 코헤이는 평소답지 않게 아침 일찍 스스로 잠에서 깨어났다.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마치고, 혼자서 집을 나선다.
"나가모리......"
현관 앞에 미즈카가 서 있었다.
마침 깨우러 온 참이었는지, 아니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밝게 웃는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면서도 어색해 보였다.
"안녕, 오늘은 유독 춥네."
"그렇네."
"봐, 이렇게 입김이 멀리까지 나가."
미즈카가 하아아아, 하고 숨을 내뱉자, 찬 공기에 입김이 하얗게 변한다.
"코헤이는 어디까지 나가? 자, 하아~해 봐."
별로 힘을 주지 않고 적당히 숨을 내뱉는다.
"그게 전력이야? 내가 더 멀리까지 나갔네."
이번엔 제대로 숨을 내뱉어 보인다. 멀리까지 퍼져가는 입김을 보며 미즈카가 웃었다.
"와아, 역시 멀리까지 닿는구나. 이번엔 나도 본실력을 내볼게, 봐봐."
그런 일을 하며 걷는 등굣길. 미즈카는 입김을 너무 많이 내뱉어서 머리가 아파진 모양이다.
코헤이는 낮은 목소리로 제지했다.
"나, 뭔가 바보 같네......"
미즈카의 미소에 망설임이 뒤섞여 있었다.
"어쩐지 평소랑은 느낌이 좀 다르네. 앞으로 올 겨울방학이랑 크리스마스도......분명 작년하고는 완전히 다를 것 같은걸."
"그야 1년이 지나면 이것저것 달라지겠지."
"그렇긴 한데......아마 올해는 특별하게 다를 거야."
미즈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우리, 이제 사귀는 사이니까. 그러니까 다를 거라고 생각해."
부끄러워서 볼을 붉히는 미즈카에게, 몹시 불편함을 느꼈다.
미즈카처럼 그 변화를 좋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이 변해버린 것이다.
"나, 딴 반에 볼일이 있어서 말야. 먼저 가."
코헤이는 미즈카의 목소리도 듣지 않은 채 달려갔다.
*
미즈카와 함께 있는 것이 묘하게 힘들다. 언제나 함께 있었는데.
학교에서도 왠지 모르게 미즈카를 피해 버리고 있다. 미즈카에게서 도망치려는 생각에 점심시간에는 마유를 꼬드겨 학생 식당에 가려고 했는데, 그걸 본 미즈카가 다가와 버리는 바람에 결국 마유를 떠맡기고 자신은 아무도 없는 먼지 쌓인 부실에서 빵을 씹고 있었다.
설마 미즈카도 몇 달 째 발길이 끊긴 부실에 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나 뭐하고 있는 거냐......'
그 고백은 단순히 벌칙 게임이었을 터였다.
결코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기에, 상대방으로 미즈카를 골랐던 것이니까. 그저 허물없는 소꿉친구일 뿐, 우리 사이엔 성적 매력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어릴 때처럼 장난이나 치던 사이가 지금까지 쭉 이어진 것뿐이었다.
그저 그것만을 바랐을 뿐이었는데.
미즈카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미즈카의 살짝 붉어진 볼을 떠올린다.
『응, 좋아......코헤이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괜찮아.』
언제부터 미즈카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치 나만이 아이인 채로 있었다는 사실을 억지로 깨닫게 된 기분이라 왠지 짜증이 났다.
'이런 게 아냐......'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몹시 괴로운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코헤이는 교실로 향했다.
*
방과 후가 되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려 한 코헤이는 신발장에서 발을 멈췄다.
미즈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돌아가려고 싶었어."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 동아리 활동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분명 연주회는 지난 일요일에 끝났을 터니, 시간이 난다는 말은 사실이리라. 하지만 아무래도 속이 편해지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부가 아직도 연습하고 있다는 것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의 음색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다.
성실하게 동아리에 참여하던 미즈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쉰다는 것이 어딘가 불편했다.
그렇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함께 걸어가기 시작한다.
날씨가 매우 추워지고 있다.
미즈카가 가볍게 떨면서 하얀 숨을 내쉬었다.
"눈이 올 것 같네. 올해도 또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됐으면 좋겠다......."
"......그렇네."
코헤이는 미즈카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손에, 따뜻한 것이 닿는다.
차가워진 코헤이의 손을 미즈카의 따뜻한 손이 잡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미즈카가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감싸오는 따스함이 왠지 모르게 성가시게 느껴졌다.
"정말 춥구만."
코헤이는 미즈카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 그대로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미즈카가 몹시 무안한 듯 자신의 손을 거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소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조차도 짜증이 났다.
● ● ●
허무에서는, 행복이 태어나지 않는다.
오직 혼자 끝없는 바다에 던져진 채, 나는 울부짖을 기력조차 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잃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종언.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다시는 움직이는 일은 없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이토록이나 공허했던 것이다.
● ● ●
미즈카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코헤이는 너무 일찍 일어나 버렸다.
라디오 체조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에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이 시간이라면 미즈카도 아직 오지 않을 것이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을 걸어간다.
학교는 텅 비어있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몰래 들어갈 구멍은 얼마든지 있었다. 익숙한 경로로 숨어들어 교실로 향했다.
문 하단에 있는 통풍구를 멋대로 열고, 그곳을 통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교실 불을 켜고,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주번 학생이 와서 교실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이 교실에 차례차례 들어온다.
미즈카도 코헤이가 집에 없으니 슬슬 올 것이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아침 조회가 시작될 때까지 어디 숨어있자.
그렇게 생각했지만, 복도를 달려오던 미즈카에게 잡히고 말았다. 숨을 헐떡이고 있다. 아마도 급하게 달려온 것이겠지.
"왜 먼저 가버린 거야. 기다려 줬다면 좋았을 텐데."
미즈카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것마저 거슬렸다.
"......누가 깨우러 와달라고 부탁했어? 아침마다 깨우는 건 네가 멋대로 오는 거잖아."
"그야 부탁받은 적은 없지만, 코헤이가 그만큼 나를 걱정시킨다는 뜻이라구."
"멋대로 걱정하고 멋대로 챙겨주면서 은혜라도 베푸는 양 생색내지 말라고."
미즈카의 표정이 흔들린다. 몹시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코헤이는 사과할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미안해. 하지만 나, 생색내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그냥, 코헤이가 순수하게 걱정되서......"
"그게 성가신 거라고."
그때 마유가 복도를 달려와서 다가온다. 오늘은 마유가 마지막으로 등교하는 날이다.
"뮤우!"
기쁜 듯이 다가오는 마유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고, 코헤이는 미즈카 쪽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복도를 걸어갔다.
*
방과 후, 교문 앞에서 마유를 배웅해주기로 했다.
평소보다 긴장하고 있는 마유에게, 코헤이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정말 애썼어, 시이나. 다음에 만났을 때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들려달라고."
"응."
미즈카가 팔에 종이봉투를 안고 달려왔다.
"나가모리, 그건 뭐야?"
미즈카는 활짝 웃었다.
"이거, 마유에게 줄 선물. 데리야키 버거."
"와아!"
마유는 기뻐하며 봉투를 열었다. 봉투 속 햄버거 하나를 꺼내서 '먹어도 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미즈카를 바라보았다.
"응, 먹어도 돼."
마유는 그 자리에서 햄버거를 한 입 물었다.
"아아아앗!"
멀리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똑같이 종이봉투를 안고 있는 루미였다.
"뭐야 이게. 이래선 나만 바보 같잖아."
그녀 또한 마유를 위해 데리야키 버거를 사고 온 모양이다.
"이건 필요 없을 거니깐 내가 가져갈게."
"뮤우!"
이미 햄버거 하나를 먹어버린 마유는 어느새 루미 곁으로 가서 그녀의 트윈 테일을 꽉 잡아당겼다. 루미가 괴성을 지르며 요란을 떨었지만, 추운 길거리에서 그런 광경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컷 머리를 잡아당기며 놀다 질리자 마유는 루미의 종이봉투를 낚아채갔다.
역시 산더미 같은 햄버거에 둘러싸이는 게 그렇게 좋은가 보다.
봉투 크기로 보아, 전부 대략 15개 정도는 될 것이다.
어떻게 다 먹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건 코헤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눈물이 맺히는 걸 참고 필사적으로 웃는 얼굴을 만드는 미즈카도, 부끄러운 건지 평소보다 더 퉁명스러운 루미도, 열심히 힘내고 있는 마유를 좋아한다.
마유의 얼굴은 평소보다 약간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뮤우웃!"
온 몸의 힘을 다해, 마유가 왼손을 흔든다.
세 사람은 그에 답하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
루미가 먼저 떠나버리면서, 코헤이와 미즈카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두 사람만 남게 되면, 그 순간 바로 어색해진다.
"저기......코헤이, 우리 어디 들렀다 갈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오늘 아침 일이라던가, 마유에 관한 이야기라던가......"
코헤이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일부러 숨기지 않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어디 가고 싶으면 혼자 가. 난 돌아갈 거니깐.."
"코헤이랑 이야기하고 싶은 거란 말이야!"
미즈카의 비통한 외침을 무시한 채, 코헤이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미즈카가 따라올 것 같자,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코헤이의 이름을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미즈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종업식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식이 끝나자, 수염이 프린트 같은 것을 배포하고는 대충 이야기를 마쳤다.
학생들은 겨울 방학과 크리스마스 파티 계획을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모습을 코헤이는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코헤이, 같이 돌아가지 않을래?"
수염이 나가자마자 미즈카가 코헤이의 책상 앞까지 달려왔다.
"아니면 따로 볼일이 있어?"
"아니, 없는데."
"그럼, 괜찮지?"
코헤이는 미즈카와 함께 교실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 미즈카가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말이야, 크리스마스 이브네......"
"그렇네."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답하자, 미즈카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코헤이의 안에서 무언가 어두운 감정이 서서히 솟아올랐다. 그 감정이 고조됨과 동시에, 코헤이는 미즈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뭐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갈까?"
"응!"
마치 꽃이 핀 듯한 사랑스러운 미소가 미즈카의 얼굴에 떠올랐다.
저녁 5시에 역 앞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코헤이는 미즈카와 헤어졌다.
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간만에 지저분한 방을 청소했다. 빨랫감을 모으고, 잡지를 묶고, 쓰레기를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중노동이었다. 청소를 마치고 나서 느긋하게 침대에 누워 재미없는 TV를 보다가 꾸벅꾸벅 잠에 들었다.
도중에 전화벨이 여러 번 울렸다.
무시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사람들뿐이다. 나는 그런 행복한 사람이 아니기에 이런 날에 누군가 나를 찾을 리 없다.
머릿속에서, 울면서 전화하고 있을 사람의 실루엣을 강제로 지워버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백 받아주는 미즈카
햄버거 먹는 마유
해당 장면은 원래 햄버거집에서 나온 거
본격적으로 나가모리 루트로 돌입
우우우 코헤이 쓰레기...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