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수구리의 우리 고대사 : 사마천 사기등 중국 고대문헌의 지리적인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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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로 발굴한 비류백제 역사(삼국지/후한서/진서의 부여)

--> 삼국지/후한서/진서의 부여 기록 비류백제 기록

 

1) "주서"와 "북사"에

     동명의 후손인 구태가 나라를 세웠는데 나라 이름이 백제(비류백제)

      --> 삼국지와 후한서의 부여

 

     ※주1) 후한 말(AD2세기 말)의 동명의 후손 (위)구태

              BC 1 세기 말(BC 18년) 비류백제를 건국한 비류의 후이다

 

      ※주2) 후한서,삼국지, 진서의

                 부여는 비류백제마한(한)은 온조백제

 

2) (북)위서에 부여(북부여) 출신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고 했고,

     삼국지/후한서에 고리국(색리국) 출신 동명왕이 부여(졸본부여)를 세웠다고 했으니

 

      동명은 (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왕(일본사서:속일본기/신찬성씨록의 도모都慕)로

      소서노(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의 조부

 

     ※주) 3연(전연, 후연, 북연)의 모용씨(慕容氏)는 도모 都慕(동명)의 모慕자를 사용하니

              졸본부여 건국자인 동명의 외 증손자인 온조계열로 보인다

              (후한시기 요동 공손도 정권은 비류계열로 보임)

 

3) 진서 동이열전 부여에

    그 나라(부여=비류백제)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일이 없다.

    그 왕(부여왕=비류백제 왕)의 인장에는 예왕지인(穢王之印)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부여=비류백제) 가운데에 옛 예성(穢城)이 있으니, 그것은 본래 예맥(穢貊)의 성이다고 했으니

 

     비류백제(부여) 위치는

     (1) 후한시기 낙랑군 남쪽 대방고지(미추홀)에 있다가

     (2) 낙랑군 동쪽으로 이동하여 낙랑군 동쪽의 예=예맥=동예 지역에 있었다

     

☞ "주서(周書) 백제(百濟) 전"
    백제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인 듯 하다
    위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인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로 경계지어져 있다.

☞ "북사(北史) 백제(百濟) 전"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에 옛 땅(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는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가 건너 왔다(濟, 건널 제)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불렀다.

 

   ※주) 동명(東明)
      (1)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이 아니라(삼국사기에 주몽을 동명성왕으로 기록),
      (2) 중국 고대사서인 논형論衡, 후한서, 삼국지에 기록된 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왕으로
           주몽의 아들 비류는 졸본부여왕의 외손으로 장자이기에
           비류의 후손인 위구태를 졸본부여 건국자인 동명의 후손으로 표현되어 있다
           (위서 고구려전에 고구려 건국자는 주몽으로 기록되어 있음)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
    [공손]도는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동맹을 맺으려고] 일족의 딸을 [부여 왕에게] 시집보내었다.

  

☞ "진서(晉書) 부여(夫餘) 전"

    그 나라(부여=비류백제)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일이 없다.

    그 왕(부여왕=비류백제 왕)의 인장에는 예왕지인(穢王之印)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부여=비류백제) 가운데에 옛 예성(穢城)이 있으니, 그것은 본래 예맥(穢貊)의 성이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졸본)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본)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과 소서노(부여왕 둘째 딸)의 아들 비류와 온조는  [북부여 출신] 유리가 태자가 되자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더불어 (졸본 부여) 남쪽으로 내려 가서

    백성들을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에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 하남(고대 황하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했다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가 없었기에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온조 백제(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주) 신집,유기,서기 등 고구려,백제 역사서가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았고,

             김부식 등 고려시대 학자들이 후한서,삼국지,진서의 부여가 비류백제임을 파악하지 못하여

             미추홀의 비류백제가 온조왕 시기에 멸망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한 것이다 

  

4) 삼국지.후한서,진선 동이열전에서 비류백제(부여)의 위치는

    (1) (연진)장성 북쪽의 사방 2천리 부여

        북부여--> 졸본부여--> 고구려로 바뀌었고

        요동 동쪽 천리에 있다는 고구려는 AD 247년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의 위치다

    (2) 위구태 부여(비류백제)의 위치

        낙랑군 동쪽의 예맥(濊貊=동예=예=창해군)의 영토에 있었다

 

5) 북주(北周, 557년 ~ 581년) 역사서인 주서(周書)에

     대방고지의 부여(비류백제) 위구태가 백제 시조로 기록된 이유는?

 
    무령왕(재위 501 ~ 523) 부터
    대방고지 부여(비류백제) 위구태와 의려왕(백제 고이왕) 후손으로
    일본열도를 다스리던 좌현왕이자 열도백제왕 사마(무령왕)가
  백제왕이 되었으니

    주서와 북사에 우태(=주몽) 아들 비류의 후손 부여 위구태를 백제 시조로 기록한 것이다

 

6) 의라가 부여(비류백제)를 재건한 후( 진서晉書 내용),

     AD 286년  이후에 부여(비류백제) 기록이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

  

    고이왕(의려왕)이 한반도 남부에서 사망하자
    왕통을 있기위해 의라가 한반도 남부로 건너가면서
    대륙에서 부여(비류백제) 백성 대부분이 의라를 따라서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후

    일본열도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이내용은
    일본서기 응신 14년(AD 283년) 이 해에 궁월군(弓月君, 의라)이 백제에서 와서
   “신은 저희 나라의 인부(人夫)120현(縣)을 이끌고 귀화하고자 하였다"는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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