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고구려 사료의 부족으로 묘비 글씨 몇 줄 가지고 막 추리하는 글
아래는 어느 어느 역사 전공자의 고자 묘지명 탐구
후기 고구려 사료의 부족으로 묘비 글씨 몇 줄 가지고 막 추리하는 글
초 중 고등학생들 청년들한텐 막 관직 제도 외우게하고 법 제도 외우게하고
재미없고 시시한거만 외우게하고 그걸로 시험 치르게하고
대학 가게하고 공무원 되게하고
대학 강의에서도 그냥 좀 재밌지만 결국 시시한거나 가르치고
자기들끼리는 인터넷에서 쑥덕쑥덕,, 논문으로 쑥덕쑥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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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연개소문이 아닌 고구려 후기 정치사에 대한 전반적 오해
淸風溪추천 0조회 51408.10.07 17:15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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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2. 낙랑 왕씨의 예를 들었는데 평양성 시대 이후 왕씨가 두명이나 높은 지위를 가지고 등장합니다. 수도를 옮긴 이후 새로운 귀족층이 형성되었다는 것이지요. 400년 이상을 유지해온 전통귀족세력 사이에서 최고 관등의 지위를 갖는다는 것은 그동안 많은 권력다툼이 있었고 그 결과 평양에 기반을 둔 신흥귀족세력이 어느 정도 승리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죠.
--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신진정치세력의 성장에는 전성기 강력한 왕권의 지지가 뒷받침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400년 이상을 유지해온 전통귀족세력이라 하셨지만, 연개소문이 거론되는 시점을 감안할 때 이들 역시 200~300년의 역사를 보유한 세력이라는 사실도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점은 현재의 역사학계 내에서도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고구려는 부체제 당시부터 비교적 외부세력을 포용하는데 관대한 면모를 보여왔습니다. 이들의 포섭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엄밀히 따지지 않은채 새롭게 등장하는 세력을 '대립적' 성향의 존재로 비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편의상' 국내성과 평양성으로 비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평양에 기반을 둔 신흥정치세력'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성급한 견해임을 말씀드립니다. '이홍직' 선생님이나 '노태돈' 선생님께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서기에서 연개소문에 의해 제거된 인물로 서술된 '이리거세사'는 연개소문과 동성의 존재로 이해됩니다. 같은 혈연집단 내에서도 정치적 성향이 다른 원소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이 국내성을 기반으로 이탈하였음 역시 당시 고구려의 정치세력이 반드시 이분법적 대척점을 이룬 것은 아님을 반증할 수 있습니다. 일정한 이해관계의 공유가 있을 경우 정치적 성향은 언제든 변할 수 있지요. 정치에선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습니다.
3. 연개소문전에 나왔듯이 연씨 가문과 고식의 가문의 탄생 과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죠.
-- 연개소문의 족조전승에 대한 논고는 사실 커다란 논쟁 없이 수용되었음이 일정한 문제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고자 가문의 유구함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연개소문의 가문이 반드시 신흥세력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최근이라면 '전미희' 선생님이 지적하셨듯, 이미 왕을 시해한 경험까지 지닌 연개소문 가문에서 왕실과 관련된 족조전승을 강조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순리입니다. 나아가 당시의 묘지서술 방식이 윗대로 3대까지만 서술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는 사실을 재검토할 피룡가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 사회가 고구려 국조에 대한 '종교적 신성성'의 단계로까지 나아가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연개소문 가문의 족조전승이 '여러 사람을 미혹하였다'라는 현상이 나타났음에 주목하여 그만큼 오래된 전승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료가 부족한 한국고대사를 공부하는 재미겠지요.
4. 고구려 멸망시 남생이 기반을 잡은 곳은 국내성이며, 가장 먼저 이탈한 세력도 국내성이죠.
물론 평양성귀족/국내성귀족이라 한 것은 기존의 전통귀족 세력과 신흥귀족 세력을 편의상 표현한 것입니다. 다만 귀족간의 갈등이 있다면 그 큰 주류는 각 진영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국내성과 평양성에 기반을 둔 귀족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정도의 추론도 불가능하다고 단정짓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나라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교류가 있으면 닮아가는 구석이 있는데, 양식이 점점 비슷해져 간다고 이들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게 오히려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요.
--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정도의 추론조차 불가능하다고 본 것은 아닙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편의상' 구분이 가능함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시 고구려 정치사에서 양원왕 이후 점차 재확립되어 가는 왕권의 위상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라면 가장 먼저 국내성과 평양성을 구분하기 시작하신 '임기환' 선생님께서는 평양성의 배후세력으로 '한성'까지 포괄하고 있음도 되새겨볼 수 있을 겁니다.
수서 등에 보이는 고구려 지방도시의 위상에서 평양성 국내성 한성은 3대 도시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국내성이 가장 먼저 당에 투항하였지만 한성도 멸망을 얼마 앞두지 않고 무기력하게 투항하였지요. 하지만 한성은 성격상 신흥세력으로 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한성은 어떤 성격을 더 강하게 보유한 것이라 할까요? 아님 단순한 이해관계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그만큼 다양한 성향을 상정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금석문을 살펴보면 연태조와 고식은 동시대에 활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씨 집안은 점점 위축되는 반면, 고식의 집안은 이 시기에 번성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씨 집안은 등용된 이후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에 이르러서는 당연히 이어받아야 할 아버지의 벼슬을 사정사정해서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위축됩니다.
고씨의 경우 본래 대대로 권력자의 집안이었으나 평원왕, 영양왕을 거치면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3품 위두대형에 그칩니다. 물론 이것도 높은 귀족이나 본래 가문의 위상에 비하면 두어관등 이상 낮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영류왕 시기(고식이 활동했을 시기는 영류왕 시기와 맞물립니다.)에 다시 막리지로서 권력을 누림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주변의 정치적 상황을 덧붙여 이해할 수 있으나, 금석문만을 보더라도 같은 막리지라도 영류왕 시기 연씨의 위축과 고씨의 권력을 알 수 있습니다.
-- 연씨 집안의 위세가 강대졌기 때문에 귀족세력의 견제가 심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현재 학계의 정설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앞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고씨 가문의 위세가 연씨 가문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었다면, 그들은 연개소문의 정변 발발시 제거되었거나 동조세력으로 가담했음을 상정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확인되는 사료상(일본서기) 2대 피살자는 이리거세사와 왕이며, 이후 대신 자리에 오르는 것은 연개소문과 동성으로 표현된 '도수류금류'이고 막리지는 연개소문입니다. 고자의 묘지명 역시 중시조의 내용이 가장 강조되었고 이후 가문내 막리지 취임이 자세하게 언급되었지만 다음은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착오가 있으신듯 합니다만 서술내용에선 고자의 증조가 막리지 조부가 3품 위두대형 겸 책성도독 마지막으로 그 아버지가 장군직에 있으면서 당에 투항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일 '고자묘지명'이 아닌 다른 자료를 전거하셨다면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언급하신 자료를 재검토하시는 작업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서술내용 상으로는 분명히 하락의 징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도무지 무엇을 근거로 연씨 가문이 위축되었다고 보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학계의 정설과도 정면 배치되고 그렇다고 흥미롭게 풀어낼만한 새로운 자료가 제시된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혹여 다른 '근거'가 있으시다면 고견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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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cafe.daum.net/alhc/51q2/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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