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프 지에 기고된 글, 미카엘 하네케 작 피아니스트에 대한 비평문

이런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새삼 대한민국에 이런 지면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안도한다. 이 작고 겸손한 매체조차 많은 여자들이 진땀 흘리고 흥분하고 모욕당해가며 얻어낸 것이리라. 이렇게 촌스런 말로 서두를 시작하는 것은 자기 검열로 떨고 있는 소심한 나를 자위(自衛)하기 위함이다. 며칠 전 어느 대학에 강연을 갔다. 이야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태어난다면 두 가지 점에서 남자로 살고 싶다"고 했다. 하나는 (아무리 낮은 계급의 남자라도)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그 많은 자질구레한 진 빼는 노동으로부터 면제된다는 점, 그래서 그들은 '이성'적일 수 있고, 초월할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질문 시간에 어느 학생이 다시 물었으나 솔직하게 답하지 않았다.

쥬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이나 정신분석학이나 여성을 생물학적 사실로 전제했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본질주의"라는 다소 '과격한' 주장으로 보편주의자들을 불편하게 했지만 사실 그 말, 맞다. "가부장제가 여성을 동일성에 가둔다면, 우리는 다양성으로 맞서겠다". 이제까지 여성 공통성의 대표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던 모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여자들의 경험은 동일하지 않다. 남자 시스템이 그들의 필요와 원하는 기능에 따라 "여자는 모두 본질적으로 '창녀'(어머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같다"고 명명했을 뿐이다. 여자들은 같지 않다. 이러한 인식이 나의 숨통을 연다.

내가 취약해 보여서일까. 처음 만나는 여성들도 내게 비밀스런 이야기를 잘한다. 나는 쌔근 잠들어 있는 100일도 안 된 딸을 보고 묘한 (가학적)감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는데, 내게 상담을 청한 어떤 여성이 그런 나의 무의식에 일격을 가했다. "저는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면 목 졸라 죽이고 싶어요. 선생님은 안 그러세요? 그 애가 나를 밖으로 못 나가게 하고 내 미래를 빼앗아갔잖아요?" 상상력이 있어야 현실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여성의 이야기가 모성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모든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며 아이를 낳은 모든 여성이 헌신과 희생(이것은 책임과 다르다)을 당연하게 수용하지 않듯, 모든 여성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섹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젠더 극우주의자들이 우글거리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검열과, 그 검열을 남자들의 기대 이상으로 초과 달성하려는 검열이 과잉 내면화된 이 땅의 여자들은 남자가 원하는 범주에서 벗어나는 자기 경험은 말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여자에게 어떠한 추방과 사회적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나혜석처럼 살고 싶되, 나혜석처럼 죽고 싶은 여자는 없는 것이다. 전경린의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변영주의 <밀애>)은 어떤 여자에게는 경고였다.

내 생각에 한국 사회는 동성(애자) 사회(homo social)다. 우리 사회의 남자는 게이이고 여자는 '레즈비언'이다. 남자들은 터치를 가장한 패싸움을 즐겨 벌인다. 그렇게 격렬히 만지고(싸우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그들은 액션과 폭력과 터치의 구분이 없는 인류다. 남자는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아껴주고 키워주고 자리를 대물림한다. 여자를 가운데 둔 삼각 관계에서도 지지고 볶고 질투로 진을 빼는 대신 협상하거나 친구가 되거나, 여자를 제물 삼아 함께 성장한다(보 비더버그의 <아름다운 청춘>이나 알폰소 쿠아론의 <이투마마>를 보라). 남자에게 여자와의 사랑은 남성 연대만큼 중요하지 않다.

반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레즈비언'이 되는 방식은 남성의 타자, 대리인으로서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여성들은 몸만 '여자'지, 남자의 사고 방식을 머리에 이고 지고 그의 비위 맞추기를 일상 노동으로 삼으며 산다. 생각해 보라. 여자들이 '진짜' 이성애자라면, 남자의 벗은 몸을 보고 쾌락을 느껴야 하지 않나? 그러나 대부분의 이성애자 여자들에게 남자의 벗은 몸은 공포요, 폭력이다. 성기 노출이 성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은 여성이 그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불쾌해하는지 그들이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이성애자이면서도 남자의 벗은 몸이 아니라 (남성의 시선으로)여자의 벗은 몸을 보고 성욕을 느낀다. 우리는 남자의 안경을 너무 오래 쓴 탓에 아예 남자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사랑은 여자의 일이다. 사랑(관계)을 유지하기 위한 감정 노동, 육체 노동. 그 모든 비용은 여자의 몫이다. 여성이 그 일을 그만 두는 순간, 이기적인 여자라는 비난과 함께 대부분의 연애는 끝이 난다. 성별 사회에서 여자에게 사랑은 사회적 관계, 생존, 돈, 자아 실현, 성취 등 인생의 모든 것(everything)이기 쉽지만, 남자에게 사랑은 언제나 다시 올 버스, 여러 버스 중 한 대(a part)일 뿐이다. 남자가 사랑에 울고불고 할 때는 자기가 찬 것이 아니라 채였을 때, 즉 게임에 지고 거부당해 자존심이 다쳤을 때뿐이다. 닐 세다카의 You mean everything to me? 김소월의 진달래? 그들은 남자지만, 여성 화자로 말한다. 반면 여자 작가가 남성 화자로 말하는 작품은 별로 없다. 남자는 두 영역을 모두 오갈 수 있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

이런 세상을 상상해 본다. ......남자에게도 사랑이 관계, 생존, 돈, 자아 실현, 인생의 목표여야 한다. 남자들도 친밀감에 목숨을 걸고 관계 유지를 위해 생의 모든 자기 가능성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출세를 위해 헌신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성폭행 당한 후 그녀가 결혼을 거부하자 자살한다.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가 되어 남자도 여자를 기다리다 지쳐 썩어 문드러져 돌이 된다... 사랑과 친밀감, 섹슈얼리티의 정치경제학에 혁명이 오기 전까지는 그 어떤 남자들의 혁명도 부분적이거나 자기 만족일 뿐이며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여성이 자기 몸을 소유하는 것은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인류의 가장 거대한 타자성(他者性)이 일소되는 것이다.

이자벨 위페르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사랑은 여자의 일이되, 사랑의 주체는 남자'라는 이 체제의 법칙을 거부한 여자가 그녀 가슴의 내파(內波)를 견디지 못하고 자폭한 이야기다. 어떤 여자들에게 이 영화는 당황스럽고, 어떤 여자들에게는 혼란스럽다. 어떤 여자들에게는 극심한 통증이다. 언제나 상처는, 해석은, 이야기는 자신의 풍경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한참 추울 때 혼자 이 영화를 보고 온 후 나는 이틀을 몸져누웠다. 내게 기운을... 기운이 너무 없었다. 이런 나의 '감수성'에 감탄하거나 조소하던 친구들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팠다고 고백한다. 이 영화가 당황, 혼란스러운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사랑하는 젊은 남
자로부터 피학증(매저키즘)을 원하는 위페르의 욕망은 페미니스트의 '정치적 올바름'에 딴지를 건다. 두 번째 이유는 스크린에 (일부)여성의 자기 체험이 '고스란히'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는 여성의 경험에 대한 기존의 재현과는 거리가 멀다. 이 영화는 우리의 어떤 것을 벗지 않으면 맞지 않는 옷이다.

남자 사회에서 여성의 섹슈얼러티는 자유주의면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면 페미니즘, 피해의식이면 피해의식이 뒤엉킨, 대단히 복잡하며 중층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이 여성 주체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성은 그 어느 것도 선택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세 가지 매저키즘을 '동시성의 비동시성' 혹은 '비동시적인 것을 동시적'으로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남성이 여성에 대한 폭력 책임을 피해 여성에게 전가하기 위해 주장하는 '여자는 강간을 즐긴다'는 프로이드식 매저키즘이다. 남자들의 이 같은 투사 때문에 여성 폭력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매저키즘이라는 말만 나와도 질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성들은 매저키즘을 원해도 '원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사실 SM(사도 매져키즘)은 대단히 준비된, 기획된, 동의된 '지적'인 섹스다. 남자의 권력과 폭력, 여성의 피학성을 정당화시키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두 번째는 성이 학습되는 문화의 일부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 섹슈얼리티가 성폭력/성매매와 성관계를 구별하지 못하듯이 즉 남성의 쾌락이 가학적인 것으로 사회화되었듯이,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피학적으로 학습되는 것 또한 어떤 면에서는 '당연'하다. 많은 여성들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파트너에겐 '아프게 해 줘, 좀 더 세게 해줘, 나를 니 마음대로 해봐'라고 주문한다. 물론 이런 말을 성폭력범에게 하는 여성은 없다. 여성이 남성을 '성폭행' 하는 경우는 (남자의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벗겨달라"고 강요(애원)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여성의 욕망과 쾌락, 자율적 선택으로서의 매저키즘이다. <피아니스트>는 이 경우다. 이것이 나쁜가? 남자들이 이것을 이용한다고 해서 욕망 할 권리도 없는 것인가? 여성 자신이 선택한 욕망으로서의 매저키즘을 허위의식으로 간주하는 페미니스트 정치학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허위의식이다. 위페르가 "자신감을 잃는 것보다 버림받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지독히 외로운 여자였기 때문에 비정상이 되었다는 식의 영화 읽기는 여성의 주체성과 삶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은 '아름답고 착한 섹스'만 (원)해야 하나? 영화에서 위페르는 두 개의 각본을 동시에 위반한다. 남자가 만든 성 각본과 그것에 저항하는 세력이 만든 피억업자에 대한 '각본'이 그것이다.

일탈 욕망은 젊은/부잣집/도련님이나 가능하다. 그것은 성 해방이요, 인간의 성장과 창조를 촉진한다. 남자가 자기 세계를 넓히기 위한 액션 어드벤쳐다. 그러나 힘없는 자의 욕망은 역겹거나 최소한 심한 불편함을 준다(노인의 성과 사랑의 '욕망', <죽어도 좋아>에 대한 우리사회의 폭력을 보라). 위페르처럼 아버지 없이 어머니를 먹여 살려야 하고 사랑하는 젊은 남자로부터 "그런 몸으로 나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해?"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늙고' 외로운 여자는 욕망도 선택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부르조아가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것은 히피요 문화적 전위지만, 가난한 자가 그렇게 한다면 그건 단지 초라함일 뿐이다. 장선우의 벗기기나 촌스런 나쁜 영화는 키치일 수 있지만, 시장에서 장사하는 뚱뚱한 중년 아주머니의 몸빼 바지는 진짜 촌스럽다. 그것은 노동과 남루함의 상징일 뿐, 키치가 될 수 없다.

남자의 새디즘과 매져키즘은 쾌락이요 전복의 정치지만, 여자의 그것은 변태다. 여성이 매져키즘의 대상이 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여성 스스로 욕망으로서 매져키즘을 선택하는 주체가 될 때는 처벌받는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매져키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매져키즘을(조차) 선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난 영화를 두 번 봤다. 내내 울었고 그래서 많은 장면을 놓쳤지만 남자 주인공이 위페르에게 "당신은 미쳤어",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무시하면 어떡해?", "사랑은 서로 하는 거야, 같이 즐기는 거야", "내 손이 더러워질까 봐 못 때린다", "다시는 남자를 모욕하지마"...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웃음과 비웃음을 모두 참기 힘들었다. 그에게 묻고 싶다. 그럼, '같이 즐기는' 그 각본은 누가 짜는데? 네가 한 강간이 같이 즐기는 거야? 남자, 너의 손은 폭력에 일상적으로 더러워져 있잖아? 만일 그녀가 미쳤다면 그것은 그녀가 단지 중년 여자이기 때문이고, 네가 미치지 않은 것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단지 젊은 남자이기 때문이야. 만일 그녀가 변태라면, 넌 (성폭행)범죄자야. 그녀의 '변태성'은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아 하지만 넌 그녀를 대상으로, 물건으로 만들었잖아? 그리고, 미치고 안 미치고는 누가 결정하는데?

영화의 마지막 성폭력 장면은 그의 아니 남자 일반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의 종착이 결국은 삽입(강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남성 주체는 삽입 섹스를 함으로서 존재한다"는 안드레아 드워킨의 통찰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남자의 상상력은 젠더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저토록 초라할 수가! 그가 말하는 '서로 즐기는' 섹스는 남자의 자존심과 사고의 범주가 조금도 다치지 않는, 그래서 여자에게는 불편하고 모욕적이며 불평등한 체제의 지속을 말한다. 남자는 그 어떤 혁명가도, 로맨티스트도 진정 체제 밖을 살 수 없다. 그런 상상력이 없다. 이것이 그의 불행이고 잘못이다.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여자에게 폭력은 환타지지만 남자에겐 실제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젠더 시스템은 남성에게 폭력이 환타지에 머물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한다. 그녀는 게임의 법칙을 몰랐다. 게다가 그녀는 그의 친절과 친밀감이 주는 '좋음'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피억압자(특히 여성일 때)의 사회 심리적 특징 중 하나는 불안한 미래의 행복보다는 현재의 확실한 불행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다. '행복'도 아무나 즐기는 것이 아니다. (취약한)여성들은 관계가 주는 긴장, 관계를 통제(해야)하는 자기 권력을 견디지 못한다. 그의 속으로 들어가거나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어, 자아 경계의 충돌과 협상이 주는 긴장이 해소되길 바란다. 여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기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자아를 없애려면? ... 사랑하는 사람의 폭력의 대상이 되어 '그대 가슴에 물들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위페르가 원한 사랑이었지만 그녀의 젠더는 이러한 사랑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남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미션 임파서블인가? 이건 내가 강연에서 답하지 못한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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