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포스트-스탈린주의로서 주체사상
2-1. 스탈린적 편향의 요소들
스탈린은 레닌 사후에 좌우익 기회주의와의 사상투쟁 과정에서 당 내 분파형성권의 금지 및 일괴암주의를 주장한다. 철의 규율과 입장과 사상의 통일을 핵심으로 하는 전위당 노선에 따라 민주집중제가 특권화되고 대중(및 노조)은 전위당의 지도를 받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맑스-레닌주의의 핵심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공식화된 체계로 정립, 변증법적 유물론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을 보장해주는 자명한 세계관이 되고 사적 유물론이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와 공산주의의 필연적 도래를 지시하는 역사철학적 의미가 됨으로써 오히려 구체적인 계급투쟁에 대한 분석은 사상되고 만다.13)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목적론적 인식은 유토피아적 세계관과 연관되며 사회주의 혁명 이후의 대중-정치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봉쇄하고 말았다.
이러한 스탈린적 편향의 핵심 요소를 우리는 소위 `객관주의`적 편향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의 주요 형태는 자연과 진화(=진화로서의 자연)의 철학 혹은 `자연변증법` 즉 일반적 존재론의 구성(스탈린의 경우 이는 극단적인데, 그는 변증법의 원리를 정식화한 후, 그것을 유물론에 적용한다. 순서 자체의 전도)이다. 그리고 그 부차 형태는 지식이론 내지 `변증법적 논리학 또는 방법론`으로의 이행(이들은 변증법의 존재론화를 반대하고, `과학의 과학`으로서 유물변증법을 주장한다)이다.
이때 스탈린을 비판하던 세력은 기존의 `자연변증법`을 대체하는 `철학적 인간학`을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이 논쟁은 결국 `존재론`과 `인식론`을 절충하는 것으로 정리되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관`적인 측면이 추가·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략적으로 합의된다.
2-2. 포스트-스탈린주의의 등장
스탈린주의에 대한 이러한 불충분한 평가는 이후 각종 포스트-스탈린주의가 만개하는 기반을 이룬다. 이들의 경우 `세계관`의 문제에 논의를 집중하는 가운데, 이를 질곡하는 자연변증법을 비판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스탈린주의의 한계를 `주체의 능동성`을 사고하지 못하게 하는 과도한 유물론(자연변증법의 객관주의)에서 찾고, 이를 관념론적 전통과의 절충을 통해 교정해 내려 했다. 이때 특기할 만한 것은, 이들이 `이론적 인간주의`에 기반한 `철학적 인간학`의 도입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일찍이 맑스가 기각한 바 있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 -그런데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무엇을 `인간`으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추가적인 문제를 낳고, 이로부터 개인주의와 유기체주의로 나뉘게 된다- 을 명시적으로 재도입하면서, 그러한 규정에 기반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한편 이들은 `불철저한 유물론`의 핵심을 이루는 `변증법`, 즉 모순에 대한 사유는 이에 종속시키거나 거의 사고하지 않는다. 이러한 형태 하에서는 본질적으로 인류의 자기실현 즉 그 통일성의 실현(그 역사적 제 분할(계급 제 분할?)의 지양)인 동시에 그 자율성의 실현(인간(사회?)을 자연(그 자연적 실존 제 조건?)에 대립시키는 분할의 지양)이라는 이중적 과정으로서의 변증법이 이제 그 중심 테제가 된다. 이 경우 변증법은 목적론적 제 테마(소외, 부정, 지양, 총체화)의 집합일 뿐이다
2-3. 주체사상의 등장
주체사상이 포스트-스탈린주의로 분류할 수 있는 까닭을 살펴보자. 주체사상이 전면에 부상한 것은 1960년대로서, 중소분쟁 당시 등거리외교를 실시하며 수정주의와 교조주의 비판이라는 슬로건 하에 자주노선(`자력갱생`)의 제출했던 맥락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특히 군중노선의 측면이 강조되면서, `철학적 인간학`의 보완이 요구되었다. 예컨대 다음 구절을 보라.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이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역량으로 등장한 새 시대는 그들이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하며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의 역사적 위업을 승리적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을 요구하였습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하는 주체의 관점과 입장은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인식활동, 실천활동을 보장하는 확고한 담보로 됩니다.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은 식민지에서의 해방으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진입이라는 경로를 밟은 점에서 다른 제 3세계 나라들의 경험과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국토의 초토화를 겪으면서 부흥과 사회주의 건설을 함께 추진하였다는 점, 경제계획과 건설이 `주체사상`에 기초한 광범한 정치·사상운동과 결합되어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이 모두가 주변강국의 틈에서 나름의 `자주노선`을 관철하려 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는 점 등을 과정상의 커다란 특징으로 한다.
1960년대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입장의 대립과 분열이 드러났던 시기이며 따라서 북한 역시 그 속에서 나름대로 입장을 취해야만 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북한의 `자주노선`은 구체적으로 전개되어 갔는데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당내 권력 문제 등에 대한 대국(소련, 중국)의 간섭을 반대하면서 사회주의국들 사이의 자주성에 기초한 상호존중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경제적으로는 1964년 평양선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공업에 기초한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을 자국의 힘으로 추진해 나가는 자력갱생의 논리로 구체화되었다.
주체사상의 원리들 가운데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인간 즉 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해준다. 역사는 몇 단계에 걸쳐 인민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과 합쳐지는데, 그러한 투쟁의 현단계는 계급의식의 발전과 계급노선/대중노선의 결합 덕분에 명시적으로 이데올로기(사상)에 우위를 부여한다. 정치는 독립과 주권에 기초한다. 중공업의 우선적 역할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주체철학은 그것을 경공업의 역할 및 농업의 발전과 긴밀하게 결합시킨다. 별도로 자주국방에도 동일한 배려가 주어져야 한다. 이 때 주체사상은 도덕적, 정치적, 물질적 자극들을 균등하게 결합시킨다.14)
3. 주체사상에 대한 조사
주체사상은 스스로를 `노동계급의 새로운 세계관`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이 짧은 구절에 주체사상의 모든 `정당성`과 `불가능성`이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주로 세계관 범주의 함의를 중심으로 최초의 쟁점을 정식화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세계관이란 말은 과학과 정치, 보다 일반화하면 이론과 실천의 `가교`라는 뉘앙스를 띤다. 이는 철학의 전 역사와 그 외연을 같이 하는 발본적인 물음으로, 특히 이론주의와 행동주의에 대한 이중 전선으로 특징지어지는 맑스주의(그리고 또한 레닌주의)에게 사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관 범주는 이론과 실천의 (내재적 변증법이라기보다는) 외재적 변증법에 대한 사고에 그칠 뿐으로, 자신이 지양하고자 한 이론주의와 행동주의의 양편향으로부터 확정적으로 탈출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의식/토대-상부구조` 도식의 기계론적·환원론적 해석에 대한 불충분한 비판으로부터 출현하는 견해로, 이에 따르면 기존의 논의가 `존재` 혹은 `토대`에 대해서는 충분히 밝혔으나 `의식` 혹은 `상부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지 못하였으므로, 후자의 측면을 보완함으로써 기존의 기획이 갖는 `불충분성`을 보완하여 맑스주의를 전일적인 `체계`로 `완성`하는 것이 당면 과제가 된다. 이는 엥겔스로부터 시작하여 사르트르에 이르는 역사적 맑스주의가 끝끝내 벗어나지 못한 일종의 `이론적 무의식`으로, 우리는 이후 주체사상 역시 이러한 무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도식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사례임을 논증할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이론과 실천의 내재적 변증법`을 사고하는 데에 모든 문제의 열쇠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면 족할 것이다.
한편 세계관이라는 말은 또한 중요한 뉘앙스를 띠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총체성`이다. 이는 이론과 실천의, 그러나 또한 그 이외의 심급들의 `통일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환원주의나 다원주의와는 엄격히 구별되는 인과율(그리고 또한 국가주의나 무정부주의와 구별되는 `혁명적 보편주의`)을 사고하고자 하는 맑스주의에게 또한 관건적인 문제이다. 이는 위의 문제와도 연관된 것으로, 어떤 이는 위에서 지적한 난점을 이 `총체성` 관념의 도입을 통해 우회하려고 할 것인데, 이에 따르면 세계관은 이론과 실천에 공히 적용되는 핵심을 추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제 요소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이론과 실천, 그리고 그 이외의 제 심급들(예컨대 `예술`)을 연결시킨다. 이는 얼핏 보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문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저 총체화의 기획에 좀더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자. 우리는 이 기획이 이론적으로는 `거꾸로 선` 로고스-중심주의(그리하여 `유물론적 관념론`이라는 역설)로, 실천적으로는 `요새화`(그리고 또한 `전체주의`와는 결코 혼동될 수 없지만 일종의 `국가주의`임을 부정할 수 없는 지배이데올로기로의 사회주의의 전화)를 넘어서지 못함을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포스트-스탈린주의의 비판이 불충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핵심은 고스란히 보존하였음을 폭로하는데, 우리는 이후 주체사상 역시 이러한 총체화의 기획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기획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사례임을 논증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대립물들의 통일성`(이것은 `변증법`의 정의이다)을 사고하는 것이 핵심임을 확인하는 데서 그칠 것이다.
3-1. 주체사상의 기본 논지
주체사상은 포스트-스탈린주의의 제 변종과 같이 스탈린주의의 문제를 `과도한 유물론`에서 찾는다.
… 주체철학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논증하려면 선행철학의 제한성을 똑똑히 알고 그와의 대비 속에서 주체철학을 고찰하여야 합니다. 주체철학은 모든 사물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한성과 대비할 때 그 우월성이 뚜렷이 밝혀질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인간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주체철학의 기본원리들을 해설하는 데서 사회적 운동의 고유한 합법칙성을 해명하는 데로 지향시키지 못하고 물질세계 발전의 일반적 합법칙성의 견지에서 해석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주체철학을 완전히 독창적인 철학으로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이론 발전의 견지에서 해석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주체철학의 독창성을 옳게 밝힐 수 없습니다 …- 김정일, [주체철학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이해를 가질 데 대하여]
주체사상은 스탈린주의의 이같은 `불충분성`을 관념론적 전통에 있는 `철학적 인간학`과의 접합을 통해 보충하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철학의 근본 문제`를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역할`로 재규정하며, 이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철학의 근본 방향`을 (관념론/유물론을 대체하는) 자주적 입장 대 숙명론적 입장으로 변경한다.
… 수령님께서 가르치신 바와 같이 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은 사람을 위주로 하여 철학의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를 밝혔습니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은 사람이 세계와 자기운명의 주인이라는 것이며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사람이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운명을 개척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는 세계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밝힌 사람 위주의 철학적 원리입니다 …
-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이때 사회적 존재인 사람은 그 본질로서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을 가지게 된다.
… 수령님께서는 사람은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밝히시었습니다.
사람도 물론 물질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며 물질세계발전의 특출한 산물입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벗어 나올 때 벌써 특출한 존재로 등장하였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다른 물질은 객관세계에 종속되고 순응함으로써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지만 사람은 세계를 인식하고 변혁하여 자기에게 복무하게 만듦으로써 생존하며 발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계의 주인으로서 특별한 지위와 역할을 차지하는 것은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수령님께서는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이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본질적 특성을 이룬다는 것을 밝히심으로써 사람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해명을 주시었습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람의 사회적 속성입니다. 세계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며 활동하는 것은 오직 사람 뿐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으로만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며 자기의 목적을 실현해 나갑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오직 사회적 존재인 사람에게만 고유한 것입니다.
-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한편 이로부터 1) 인민대중은 사회역사의 주체이다 2) 인류 역사는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3) 사회역사적 운동은 인민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다 4) 혁명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사상의식이다 라는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원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결론은 수령론으로 집약된다.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에게는 개인의 육체적 생명과 구별되는 사회정치적 생명이 있다는 것을 밝혀주셨습니다.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은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인 사회정치적 집단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개별적인 사람들은 오직 이러한 사회정치적 집단들의 한성원으로서만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닐 수 있습니다. 사회정치적 집단이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만큼 거기에는 사회적 집단의 생명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개별적 사람들의 생명의 중심이 뇌수인 것처럼 사회정치적 생명의 중심은 이 집단의 최고뇌수인 수령입니다. 수령을 사회정치적 집단의 최고뇌수라고 하는 것은 수령이 바로 이 생명체의 생명활동을 통일적으로 경험하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수령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종합, 분석하여 하나로 통일시키는 중심인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입니다. 당은 수령을 중심으로 조직사상적으로 공고하게 결집된 인민대중의 핵심부대로서 자주적인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추를 이루고 있습니다. 개별적인 사람은 당조직을 통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심인 수령과 조직사상적으로 결합되어 운명을 같이 할 때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니게 됩니다. 사람들은 당조직과 당이 영도하는 사회정치적 조직의 한 성원으로서 조직사상생활에 적극 참가함으로써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심인 수령과의 혈연적인 연결을 공고히 하고 자기의 사회정치적 생명을 빛내어 나갈 수 있습니다 …
- 김정일,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3-2-1. 주체사상 비판:
스탈린주의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우리는 위에서 주체사상의 기본 논지를 살펴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였을까? 이는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적 인간주의`의 근간이 되는 `세계관`이 되기에 불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원래 세계관의 기본사명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밝히는 데 있는 것만큼 유물론과 변증법이 세계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자면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는 것을 해명하는 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물질인 인간이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고 세계발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유물변증법의 일반적 원리만으로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과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를 제대로 밝힐 수 없습니다 …
- 김정일,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관`의 문제와 다시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특히 존재-의식 및 토대-상부구조에 대한 기계론적·환원론적 비판 뿐만 아니라, 존재 혹은 토대에 국한된 `불충분한` 논의를 의식 및 상부구조에 대한 논의로 보충하려는 시도 역시 이론과 실천의 내재적 변증법에 미달하는 외재적 변증법에 불과함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맑스주의 내에는 이를 사고할 수 있는 범주가 전혀 없는가?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물질화된 관념`으로서 `이데올로기`라는 (다소 도발적으로 들리는) 테제를 제출하고자 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관념에 대한 물질의 우위라는 유물론적 테제를 유지하면서도, 기존의 물질성 범주를 개조함으로써 관념과 물질의 내재적 변증법 - 따라서 이론과 실천의 내재적 변증법 - 을 사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획이 맑스주의 내에서 가능한가? 이는 우선 `물질성`이라는 범주에 대한 조사를 요청한다. 맑스는 이를 `사회적 관계`라는 개념을 매개로 사고한다. 그는 모든 인간주의적 관념론에 대항하여, 이 관계가 인간들 사이의 관계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아니고, 상호-주관적이거나 심리학적이거나 인류학적인 관계도 아니며, 이중적 관계, 즉 인간 집단들과 사물들(생산수단) 간의 관계와 그것에 관한 인간집단들 간의 관계라는 점을 보여 준다.
이처럼 자연/인간의 이분법을 지양하면서, 맑스는 동시에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분열되어 왔던 두 가지 입장, 즉 유 또는 본질이 개체들의 존재에 선행한다는 입장(이는 유기체주의로 통한다)과 개체들이 일차적 현실이고 그것에 입각하여 보편들이 `추상된다`는 입장(이는 개인주의로 통한다)을 동시에 거부한다. 차라리 개인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것, 즉 `유`를 정의하는 것은 개인들이 상호설정하는 다수의 행위적 관계들(교통, 노동, 사랑, 재생산, 갈등 등이 문제이다)이라고 답해야 한다. 관계들은 매번 다양한 형태들로 유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의한다. 그러므로 관계들은 인간 일반(즉 다수의 인간들)에 적용되는 본질이라는 통념의 유일한 `유효한` 내용을 제공한다.
요컨대 맑스의 `물질성` 범주는 자연/인간, 집단/개인의 이분법을 지양한 복수의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산 및 교환관계들에 대한 자신의 분석으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모든 통념을 폐기해야 한다는 그런 결론을 도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적으로 `생산`을 의식이 그러한 본질의 발현 또는 현상에 불과한 인간의 사회적 본질로 만드는 식으로 경제적 힘의 결정적 역할에 대한 자신의 발견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맑스의 모순`은 이후 존재-의식 테제와 (주로 `노동의 인간학`이라는) 총체화의 기획과 접합되면서 우리가 익히 아는 모습으로 고정되어 왔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문제라면, 이는 결코 (포스트-스탈린주의가 말하는) `과도한 유물론`이랄지 `유물론에 대한 관념론의 보충`이 아닌, 보다 `철저한 유물론` 즉 노동으로 환원되지 않는 복수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사고를 통해서 물질성 범주를 일반화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른 사회적 관계이며, 따라서 또다른 물질성으로서 `이데올로기` - 이는 (학교나 가족, 교회 등과 같은) 물리적 장치 속에 물질화되어 있는 상징을 매개로 개인성이 집단화되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 에 대한 사고를 진척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3-2-2. 주체사상 비판: 변증법의 문제를 중심으로
그런데 이렇게 되면 존재와 의식의 외재적 변증법이나 기존의 `구조` 이론에 `상부구조` 이론을 추가하려는 시도, 그리고 물론 기존의 총체화의 기획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수의 사회적 관계들을 그냥 나열하는 다원주의적 사고 역시 대안이 될 수 없다. 핵심은 제 심급의 `상대적 자율성`을 사고하면서도 이들의 내재적 연관을 사고할 수 있는 역사적 복합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 즉 `대립물들의 통일성`으로서 `변증법`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과연 이러한 기획을 인식하고 있는가? 주체사상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는 느끼겠지만, 이들의 논의 속에서 변증법, 즉 `모순`에 관한 깊이있는 논의는 이상하리만치 부재하다. 이에 대해서 주체사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를 자기의 중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히 학술적 견지에서만 볼 문제가 아닙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다른 이론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도 혁명실천의 견지에서 역사적으로 고찰하여야 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 중요시된 것은 당시 자본주의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계급투쟁의 법칙을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중요한 역사적 과제로 나섰던 사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철학이 밝힌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가 오늘에 와서 사회주의사회 발전의 합법칙성을 해명하는 데서는 불합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철학이론을 전개하면서 이 원리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며 조국을 통일하는 것이 중요한 혁명과업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를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강조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으며 혁명과 건설에 어떤 작용을 미치겠는가 하는데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잘못 전개하면 사람들에게 현실에 맞지 않는 철학문제를 가지고 쓸데없는 말공부질을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며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혁명과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리공담을 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에게 맞지 않는 기성원리나 남의 이론을 본따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
- 김정일, [주체철학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이해를 가질 데 대하여]
마치 스탈린의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의 소멸`과 `전인민의 국가` 테제를 연상케 하는 위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 주체사상은 변증법의 문제를 대단히 실용주의적으로 사고한다. 이 때문에 변증법에 관한 주체사상의 논의는 거의 전무하며, 때문에 앞선 논의와 달리 여기에서는 비판할 대상조차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리의 진테제를 중심으로 약간의 언급을 덧붙이는 것으로 마치는 것으로 한다. 우리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핵심이 `구조의 물질성`과 `모순의 역사성`이라는 이중적 테제의 결합으로서 `모순의 효과에 의해 구조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전화의 필연성`이라고 생각한다. 맑스주의 철학자 발리바르는 ("구조인 것"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것으로, 즉 실천 일반에 내재적이지만 그러나 심지어 집단적인 의지[...]조차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모순들 자체의 복잡성, 그것들의 "불균등성" 혹은 알튀세르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것들의 과잉결정이"라고 말한다. 즉 모순이 구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은 모순들의 분절/절합의 복잡성 그 자체라는 것, 그리하여 모순들이 서로에게 반영되고 절합되는 양상, 즉 그것들의 배치의 고유성과 복잡성 그 자체가 구조적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구조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그 복잡성 자체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것으로서의 주체의 의지를 항상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왜 이것을 `모순적`(심지어 `적대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까닭은 그것이 그러한 대립의 조건들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따라서 오직 피지배자들이 예속관계 그 자체를 파괴하고 그럼으로써 그 관계가 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개인들로 스스로 전화함으로써만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인 화해불가능한 관계이며, 또한 그것이 개인들과 집단들의 `압축할 수 없는 최소`를 침해하는 `참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어서, 이러한 과정에 현실적인 제약이 있고 항상-이미 저항이 존재(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 것과는 별개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는 동시에 양방향으로 이행의 문제를 개방하게 만든다. 첫째,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을 그것들의 위기로부터 보존하는 것은 어떤 국가장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둘째, "그 자신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제어하여" 그것의 결말을 계획하는 것은 어떤 혁명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목적론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도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서도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이상의 논의(구조와 모순, 물질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사고하는)로부터 우리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의 이분법이 지양된 어떤 공간 위에서 역사와 정치를 재사고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역사에 대해서. 위의 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재생산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또한 단지 어떤 `최종적인` 단계나 `붕괴적인` 단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계기에 자본주의적 체계는 그 명백한 안정성 밑에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것이 그 자신을 `재생산`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형식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운동들의 가능성이 항상-이미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변화 자체가 일종의 `정상 상태`임을 뜻하는데, 이로부터 동일성과 변화의 이분법이 붕괴된다: 즉 어쨌든 변화가 좋은 것이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러한 변화가 기존의 물질성의 제약 속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고려할 때, `어떤 변화인가`, 혹은 오히려 어떠한 조건 속에서 `변화가 효과적이 되는가`라는 것을 구체적 정세 속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현실을 변혁하지 못할 것이다.
정치에 대해서. 구조 속에 모순, 심지어 적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의 저항과 구조의 불안정성은 항상-이미 존재하며, 이행의 가능성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위에서 확인했듯 저항과 불안정성은 기존의 물질성의 제약 속에서 벌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일종의 `정상상태`라고 할 때, `자생성`에 대한 맹신이나 체제의 불안정성 내지 조건의 변화가 곧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안일한 발상은 역사적으로 그래왔듯 큰 대가를 치룰 수 밖에 없다. 이로부터 `의식성`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되게 된다. 그렇다면 의식적인 정치 활동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항상-이미 존재하는 대중의 집단적 저항과 그로 인해 강제되는 구조의 변화 지점에 개입하여 `변화 속의 변화`, 즉 대중들의 집단적 저항을 급진화하는 동시에 보편화하여 `봉기`로 상승시켜 냄으로써, 대중들이 기존의 집단 내외부를 넘나들면서 서로서로의 활동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증대할 수 있도록 하며(이 점에서 우리는 대중의 자생성을 무시하는 `진리의 정치`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이러한 대중들의 봉기적 역능을 구조 그 자체 내에 필연적인 경향으로 존재하지만 기존의 체제를 위협하기 때문에 그 긍정적인 측면이 억눌려 왔거나 (결국 같은 얘기지만) 기존의 물질적 제약에 의해 대중과 엇갈린 채로 혹은 오히려 대중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운동하던 이행의 물질적 가능성들 - 예컨대 소위 `생산의 사회화` - 과 해후하게 함으로써 해방의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전화할 수 있도록 제 요소를 (재)접합시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 한 번의 접합만으로는 순수하게 소멸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는 적대들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그것들과 지속적으로 투쟁함으로써 해방의 지속과 확장을 꾀해야 한다(이것이 소위 `PT 독재`의 본질이다).
4. 주체사상의 `불가능성`
위에서 살펴 본 두 가지 난점 - 이는 결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사고`로 집약된다 - 은 결국 한편으로 `민족주의화된 공산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수령론`에서 극단화되는 스탈린적 국가주의(그리하여 결국 대중노선의 질식)라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전자와 관련하여, 물론 우리는 지배자들의 민족주의와 피지배자들의 민족주의를 동일시하고 해방의 민족주의와 정복의 민족주의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치 국가 독재를 생산하는 것으로 전도된 사회주의 혁명들을 보아왔듯이, 지배의 민족주의로 변화된 해방의 민족주의를 우리는 무수히 보아 왔고, 그로 인해 반복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민족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끌린다. 민족주의 자체는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비가역적으로 출현한 (`인간-시민/평등-자유`를 핵심으로 하는) 혁명적 보편주의를 민족국가의 지평에 국한시킨 `총체적 이데올로기`로 규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주의와 혁명적 보편주의가 맺고 있는 양가적 관계를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본래의 기획을 유효하게 실현할 수 없었는 바, 민족주의는 자신의 필수적 보충물로서 `인종주의`, 즉 외국인 혐오증의 단순한 악화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 정반대로 `보충적 적`에 대한 증오와 차별, 내부적 배제와 내부적 국경을 출현시키는 증오와 차별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인종주의는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의 `미학화`와 `성별화`로 특징지어지며, 이의 가장 극단적 형태는 주지하다시피 독일의 나치즘이었다.
물론 이는 하나의 극단적인 형태이지만, 특정한 정세 속에서는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요컨대 이는 정세의 문제인데, 현하의 정세는 민족주의의 인종주의로의 전화라는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 이후 일반화된 자본의 초민족화와 노동의 불안정화(혹은 배제의 일반화)는, 계급투쟁을 조절할 수 있는 민족주의의 역량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이러한 상황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한 것은 `우리 국민 중에는 기생충이 있다`라고 외친 신보수주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를 향한 동시에 아래를 향한 `종족적` 차이에 대한 요구들이 격화되고 민족주의의 보충물로서 인종주의가 오히려 지배적 지위로 전위된다. 특수주의(`우리`를 순화해야 한다)와 향수어린 보편주의(미국에서는 `강한 아메리카`, 유럽에서는 `유럽적 문명`이라는 실낙원, 그리고 한국에서는 심지어 `고구려` 내지 `단군` 시대에 대한 향수)의 기묘한 결합이 출현하고, 더 이상 인민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약속이라기보다는 세계시장으로부터의 배제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대중동원이데올로기로 민족주의가 변질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민족주의를 매개하여서는 초민족적 연대를 할 수 없게 되는데, 이는 현재의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근본적으로 봉쇄한다. 이는 민족주의가 더 이상 `민족해방`을 위한 유효한 이데올로기조차 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바, 역설적으로 개별 국가에서의 민족주의(보다 정확히 말하면 인종주의)의 강화가 미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를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결과가 초래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스트-민족적 국제주의는, 민족주의 세력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종의 `몽상`이 아니라, 오히려 현 시기 제국주의와 맞서기 위해 관건적으로 요구되는 거대한 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한편 후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언급을 징후적으로 독해할 필요가 있다.
… 만일 사회적 집단의 통일을 보장한다고 하면서 사람의 자주성과 창발성을 억제한다면 집단 안에 참다운 통일이 보장될 수 없으며 반대로 사람들의 자주성과 창발성을 보장한다고 하면서 집단적 통일을 파괴한다면 개인의 생명의 모체인 사회적 집단의 생명이 약화되어 개인의 자주성과 창발성 자체가 보장될 수 없게 됩니다. 사회적 집단의 통일성은 자주성과 창발성을 높이 발양시키는 데 이바지하도록 이루어져야 하며 사람의 자주성과 창발성은 어디까지나 집단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테두리 안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등의 원리와 동지애의 원리를 통일적으로 구현함으로써 개인의 자주성과 창발성을 높이 발양시키는 문제와 집단의 통일을 강화하는 문제를 같이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사회적 집단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지휘가 필요하다는 것을 한두번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
- 김정일,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주체사상의 가장 큰 문제점이, 대중운동에 고유한 `혁명적 위험`을 무릅쓰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주체사상의 제 저작에서, 그리고 NL 진영의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확인되는 바, 그들은 대중의 자주성·창조성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끊임없이 의식성 하에 종속시키려 한다. 그런데 이때의 의식성 범주는 경제주의 비판의 맥락에서 제출된 레닌의 `의식성-자생성` 테제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칸트주의의 그것, 즉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출현한 대중의 봉기적 역능을 더 이상 부정하지는 못하되, 그것을 부르주아적인 방식으로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의식성` 범주의 뉘앙스를 더 강하게 가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중에 대한 그들의 `신심`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을 신뢰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사상 속에 모순에 대한 사고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구조를 이루는 제 요소의 전위·응축을, 따라서 지배의 변화를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주성과 창조성은 어떤 시기에도 의식성(이것이 당과 최종적으로는 수령으로 `총화`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의 규제 하에 놓여야 한다는 그들의 사고 체계 속에서는, 때때로 기존의 통일성을 위험스럽게 넘어서는 대중의 `혁명적 위험`은 곧 부르주아들의 음모이거나 일종의 `비이성`의 재발로서 신속하게 진압되어야 되는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물론 그 역으로 언제나 대중의 자주성·창조성을 받들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일면적 태도 역시 자생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군중노선`에 대한 반복되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결코 마오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 모순에 대한 사고 부재와 그로 인한 제 요소의 위치 고정은, `총체성`의 모델로부터 확정적으로 벗어날 수 없고, 이는 결국 대중의 자주성·창조성의 질식과 관료주의의 부활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1. 스탈린적 편향의 요소들
스탈린은 레닌 사후에 좌우익 기회주의와의 사상투쟁 과정에서 당 내 분파형성권의 금지 및 일괴암주의를 주장한다. 철의 규율과 입장과 사상의 통일을 핵심으로 하는 전위당 노선에 따라 민주집중제가 특권화되고 대중(및 노조)은 전위당의 지도를 받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맑스-레닌주의의 핵심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공식화된 체계로 정립, 변증법적 유물론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을 보장해주는 자명한 세계관이 되고 사적 유물론이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와 공산주의의 필연적 도래를 지시하는 역사철학적 의미가 됨으로써 오히려 구체적인 계급투쟁에 대한 분석은 사상되고 만다.13)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목적론적 인식은 유토피아적 세계관과 연관되며 사회주의 혁명 이후의 대중-정치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봉쇄하고 말았다.
이러한 스탈린적 편향의 핵심 요소를 우리는 소위 `객관주의`적 편향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의 주요 형태는 자연과 진화(=진화로서의 자연)의 철학 혹은 `자연변증법` 즉 일반적 존재론의 구성(스탈린의 경우 이는 극단적인데, 그는 변증법의 원리를 정식화한 후, 그것을 유물론에 적용한다. 순서 자체의 전도)이다. 그리고 그 부차 형태는 지식이론 내지 `변증법적 논리학 또는 방법론`으로의 이행(이들은 변증법의 존재론화를 반대하고, `과학의 과학`으로서 유물변증법을 주장한다)이다.
이때 스탈린을 비판하던 세력은 기존의 `자연변증법`을 대체하는 `철학적 인간학`을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이 논쟁은 결국 `존재론`과 `인식론`을 절충하는 것으로 정리되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관`적인 측면이 추가·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략적으로 합의된다.
2-2. 포스트-스탈린주의의 등장
스탈린주의에 대한 이러한 불충분한 평가는 이후 각종 포스트-스탈린주의가 만개하는 기반을 이룬다. 이들의 경우 `세계관`의 문제에 논의를 집중하는 가운데, 이를 질곡하는 자연변증법을 비판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스탈린주의의 한계를 `주체의 능동성`을 사고하지 못하게 하는 과도한 유물론(자연변증법의 객관주의)에서 찾고, 이를 관념론적 전통과의 절충을 통해 교정해 내려 했다. 이때 특기할 만한 것은, 이들이 `이론적 인간주의`에 기반한 `철학적 인간학`의 도입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일찍이 맑스가 기각한 바 있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 -그런데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무엇을 `인간`으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추가적인 문제를 낳고, 이로부터 개인주의와 유기체주의로 나뉘게 된다- 을 명시적으로 재도입하면서, 그러한 규정에 기반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한편 이들은 `불철저한 유물론`의 핵심을 이루는 `변증법`, 즉 모순에 대한 사유는 이에 종속시키거나 거의 사고하지 않는다. 이러한 형태 하에서는 본질적으로 인류의 자기실현 즉 그 통일성의 실현(그 역사적 제 분할(계급 제 분할?)의 지양)인 동시에 그 자율성의 실현(인간(사회?)을 자연(그 자연적 실존 제 조건?)에 대립시키는 분할의 지양)이라는 이중적 과정으로서의 변증법이 이제 그 중심 테제가 된다. 이 경우 변증법은 목적론적 제 테마(소외, 부정, 지양, 총체화)의 집합일 뿐이다
2-3. 주체사상의 등장
주체사상이 포스트-스탈린주의로 분류할 수 있는 까닭을 살펴보자. 주체사상이 전면에 부상한 것은 1960년대로서, 중소분쟁 당시 등거리외교를 실시하며 수정주의와 교조주의 비판이라는 슬로건 하에 자주노선(`자력갱생`)의 제출했던 맥락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특히 군중노선의 측면이 강조되면서, `철학적 인간학`의 보완이 요구되었다. 예컨대 다음 구절을 보라.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이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역량으로 등장한 새 시대는 그들이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하며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의 역사적 위업을 승리적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을 요구하였습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하는 주체의 관점과 입장은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인식활동, 실천활동을 보장하는 확고한 담보로 됩니다.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은 식민지에서의 해방으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진입이라는 경로를 밟은 점에서 다른 제 3세계 나라들의 경험과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국토의 초토화를 겪으면서 부흥과 사회주의 건설을 함께 추진하였다는 점, 경제계획과 건설이 `주체사상`에 기초한 광범한 정치·사상운동과 결합되어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이 모두가 주변강국의 틈에서 나름의 `자주노선`을 관철하려 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는 점 등을 과정상의 커다란 특징으로 한다.
1960년대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입장의 대립과 분열이 드러났던 시기이며 따라서 북한 역시 그 속에서 나름대로 입장을 취해야만 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북한의 `자주노선`은 구체적으로 전개되어 갔는데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당내 권력 문제 등에 대한 대국(소련, 중국)의 간섭을 반대하면서 사회주의국들 사이의 자주성에 기초한 상호존중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경제적으로는 1964년 평양선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공업에 기초한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을 자국의 힘으로 추진해 나가는 자력갱생의 논리로 구체화되었다.
주체사상의 원리들 가운데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인간 즉 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해준다. 역사는 몇 단계에 걸쳐 인민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과 합쳐지는데, 그러한 투쟁의 현단계는 계급의식의 발전과 계급노선/대중노선의 결합 덕분에 명시적으로 이데올로기(사상)에 우위를 부여한다. 정치는 독립과 주권에 기초한다. 중공업의 우선적 역할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주체철학은 그것을 경공업의 역할 및 농업의 발전과 긴밀하게 결합시킨다. 별도로 자주국방에도 동일한 배려가 주어져야 한다. 이 때 주체사상은 도덕적, 정치적, 물질적 자극들을 균등하게 결합시킨다.14)
3. 주체사상에 대한 조사
주체사상은 스스로를 `노동계급의 새로운 세계관`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이 짧은 구절에 주체사상의 모든 `정당성`과 `불가능성`이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주로 세계관 범주의 함의를 중심으로 최초의 쟁점을 정식화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세계관이란 말은 과학과 정치, 보다 일반화하면 이론과 실천의 `가교`라는 뉘앙스를 띤다. 이는 철학의 전 역사와 그 외연을 같이 하는 발본적인 물음으로, 특히 이론주의와 행동주의에 대한 이중 전선으로 특징지어지는 맑스주의(그리고 또한 레닌주의)에게 사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관 범주는 이론과 실천의 (내재적 변증법이라기보다는) 외재적 변증법에 대한 사고에 그칠 뿐으로, 자신이 지양하고자 한 이론주의와 행동주의의 양편향으로부터 확정적으로 탈출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의식/토대-상부구조` 도식의 기계론적·환원론적 해석에 대한 불충분한 비판으로부터 출현하는 견해로, 이에 따르면 기존의 논의가 `존재` 혹은 `토대`에 대해서는 충분히 밝혔으나 `의식` 혹은 `상부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지 못하였으므로, 후자의 측면을 보완함으로써 기존의 기획이 갖는 `불충분성`을 보완하여 맑스주의를 전일적인 `체계`로 `완성`하는 것이 당면 과제가 된다. 이는 엥겔스로부터 시작하여 사르트르에 이르는 역사적 맑스주의가 끝끝내 벗어나지 못한 일종의 `이론적 무의식`으로, 우리는 이후 주체사상 역시 이러한 무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도식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사례임을 논증할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이론과 실천의 내재적 변증법`을 사고하는 데에 모든 문제의 열쇠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면 족할 것이다.
한편 세계관이라는 말은 또한 중요한 뉘앙스를 띠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총체성`이다. 이는 이론과 실천의, 그러나 또한 그 이외의 심급들의 `통일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환원주의나 다원주의와는 엄격히 구별되는 인과율(그리고 또한 국가주의나 무정부주의와 구별되는 `혁명적 보편주의`)을 사고하고자 하는 맑스주의에게 또한 관건적인 문제이다. 이는 위의 문제와도 연관된 것으로, 어떤 이는 위에서 지적한 난점을 이 `총체성` 관념의 도입을 통해 우회하려고 할 것인데, 이에 따르면 세계관은 이론과 실천에 공히 적용되는 핵심을 추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제 요소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이론과 실천, 그리고 그 이외의 제 심급들(예컨대 `예술`)을 연결시킨다. 이는 얼핏 보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문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저 총체화의 기획에 좀더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자. 우리는 이 기획이 이론적으로는 `거꾸로 선` 로고스-중심주의(그리하여 `유물론적 관념론`이라는 역설)로, 실천적으로는 `요새화`(그리고 또한 `전체주의`와는 결코 혼동될 수 없지만 일종의 `국가주의`임을 부정할 수 없는 지배이데올로기로의 사회주의의 전화)를 넘어서지 못함을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포스트-스탈린주의의 비판이 불충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핵심은 고스란히 보존하였음을 폭로하는데, 우리는 이후 주체사상 역시 이러한 총체화의 기획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기획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사례임을 논증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대립물들의 통일성`(이것은 `변증법`의 정의이다)을 사고하는 것이 핵심임을 확인하는 데서 그칠 것이다.
3-1. 주체사상의 기본 논지
주체사상은 포스트-스탈린주의의 제 변종과 같이 스탈린주의의 문제를 `과도한 유물론`에서 찾는다.
… 주체철학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논증하려면 선행철학의 제한성을 똑똑히 알고 그와의 대비 속에서 주체철학을 고찰하여야 합니다. 주체철학은 모든 사물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한성과 대비할 때 그 우월성이 뚜렷이 밝혀질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인간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주체철학의 기본원리들을 해설하는 데서 사회적 운동의 고유한 합법칙성을 해명하는 데로 지향시키지 못하고 물질세계 발전의 일반적 합법칙성의 견지에서 해석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주체철학을 완전히 독창적인 철학으로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이론 발전의 견지에서 해석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주체철학의 독창성을 옳게 밝힐 수 없습니다 …- 김정일, [주체철학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이해를 가질 데 대하여]
주체사상은 스탈린주의의 이같은 `불충분성`을 관념론적 전통에 있는 `철학적 인간학`과의 접합을 통해 보충하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철학의 근본 문제`를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역할`로 재규정하며, 이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철학의 근본 방향`을 (관념론/유물론을 대체하는) 자주적 입장 대 숙명론적 입장으로 변경한다.
… 수령님께서 가르치신 바와 같이 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은 사람을 위주로 하여 철학의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를 밝혔습니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은 사람이 세계와 자기운명의 주인이라는 것이며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사람이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운명을 개척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는 세계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밝힌 사람 위주의 철학적 원리입니다 …
-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이때 사회적 존재인 사람은 그 본질로서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을 가지게 된다.
… 수령님께서는 사람은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밝히시었습니다.
사람도 물론 물질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며 물질세계발전의 특출한 산물입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벗어 나올 때 벌써 특출한 존재로 등장하였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다른 물질은 객관세계에 종속되고 순응함으로써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지만 사람은 세계를 인식하고 변혁하여 자기에게 복무하게 만듦으로써 생존하며 발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계의 주인으로서 특별한 지위와 역할을 차지하는 것은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수령님께서는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이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본질적 특성을 이룬다는 것을 밝히심으로써 사람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해명을 주시었습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람의 사회적 속성입니다. 세계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며 활동하는 것은 오직 사람 뿐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으로만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며 자기의 목적을 실현해 나갑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오직 사회적 존재인 사람에게만 고유한 것입니다.
-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한편 이로부터 1) 인민대중은 사회역사의 주체이다 2) 인류 역사는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3) 사회역사적 운동은 인민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다 4) 혁명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사상의식이다 라는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원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결론은 수령론으로 집약된다.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에게는 개인의 육체적 생명과 구별되는 사회정치적 생명이 있다는 것을 밝혀주셨습니다.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은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인 사회정치적 집단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개별적인 사람들은 오직 이러한 사회정치적 집단들의 한성원으로서만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닐 수 있습니다. 사회정치적 집단이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만큼 거기에는 사회적 집단의 생명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개별적 사람들의 생명의 중심이 뇌수인 것처럼 사회정치적 생명의 중심은 이 집단의 최고뇌수인 수령입니다. 수령을 사회정치적 집단의 최고뇌수라고 하는 것은 수령이 바로 이 생명체의 생명활동을 통일적으로 경험하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수령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종합, 분석하여 하나로 통일시키는 중심인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입니다. 당은 수령을 중심으로 조직사상적으로 공고하게 결집된 인민대중의 핵심부대로서 자주적인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추를 이루고 있습니다. 개별적인 사람은 당조직을 통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심인 수령과 조직사상적으로 결합되어 운명을 같이 할 때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니게 됩니다. 사람들은 당조직과 당이 영도하는 사회정치적 조직의 한 성원으로서 조직사상생활에 적극 참가함으로써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심인 수령과의 혈연적인 연결을 공고히 하고 자기의 사회정치적 생명을 빛내어 나갈 수 있습니다 …
- 김정일,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3-2-1. 주체사상 비판:
스탈린주의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우리는 위에서 주체사상의 기본 논지를 살펴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였을까? 이는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적 인간주의`의 근간이 되는 `세계관`이 되기에 불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원래 세계관의 기본사명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밝히는 데 있는 것만큼 유물론과 변증법이 세계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자면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는 것을 해명하는 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물질인 인간이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고 세계발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유물변증법의 일반적 원리만으로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과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를 제대로 밝힐 수 없습니다 …
- 김정일,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관`의 문제와 다시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특히 존재-의식 및 토대-상부구조에 대한 기계론적·환원론적 비판 뿐만 아니라, 존재 혹은 토대에 국한된 `불충분한` 논의를 의식 및 상부구조에 대한 논의로 보충하려는 시도 역시 이론과 실천의 내재적 변증법에 미달하는 외재적 변증법에 불과함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맑스주의 내에는 이를 사고할 수 있는 범주가 전혀 없는가?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물질화된 관념`으로서 `이데올로기`라는 (다소 도발적으로 들리는) 테제를 제출하고자 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관념에 대한 물질의 우위라는 유물론적 테제를 유지하면서도, 기존의 물질성 범주를 개조함으로써 관념과 물질의 내재적 변증법 - 따라서 이론과 실천의 내재적 변증법 - 을 사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획이 맑스주의 내에서 가능한가? 이는 우선 `물질성`이라는 범주에 대한 조사를 요청한다. 맑스는 이를 `사회적 관계`라는 개념을 매개로 사고한다. 그는 모든 인간주의적 관념론에 대항하여, 이 관계가 인간들 사이의 관계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아니고, 상호-주관적이거나 심리학적이거나 인류학적인 관계도 아니며, 이중적 관계, 즉 인간 집단들과 사물들(생산수단) 간의 관계와 그것에 관한 인간집단들 간의 관계라는 점을 보여 준다.
이처럼 자연/인간의 이분법을 지양하면서, 맑스는 동시에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분열되어 왔던 두 가지 입장, 즉 유 또는 본질이 개체들의 존재에 선행한다는 입장(이는 유기체주의로 통한다)과 개체들이 일차적 현실이고 그것에 입각하여 보편들이 `추상된다`는 입장(이는 개인주의로 통한다)을 동시에 거부한다. 차라리 개인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것, 즉 `유`를 정의하는 것은 개인들이 상호설정하는 다수의 행위적 관계들(교통, 노동, 사랑, 재생산, 갈등 등이 문제이다)이라고 답해야 한다. 관계들은 매번 다양한 형태들로 유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의한다. 그러므로 관계들은 인간 일반(즉 다수의 인간들)에 적용되는 본질이라는 통념의 유일한 `유효한` 내용을 제공한다.
요컨대 맑스의 `물질성` 범주는 자연/인간, 집단/개인의 이분법을 지양한 복수의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산 및 교환관계들에 대한 자신의 분석으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모든 통념을 폐기해야 한다는 그런 결론을 도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적으로 `생산`을 의식이 그러한 본질의 발현 또는 현상에 불과한 인간의 사회적 본질로 만드는 식으로 경제적 힘의 결정적 역할에 대한 자신의 발견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맑스의 모순`은 이후 존재-의식 테제와 (주로 `노동의 인간학`이라는) 총체화의 기획과 접합되면서 우리가 익히 아는 모습으로 고정되어 왔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문제라면, 이는 결코 (포스트-스탈린주의가 말하는) `과도한 유물론`이랄지 `유물론에 대한 관념론의 보충`이 아닌, 보다 `철저한 유물론` 즉 노동으로 환원되지 않는 복수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사고를 통해서 물질성 범주를 일반화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른 사회적 관계이며, 따라서 또다른 물질성으로서 `이데올로기` - 이는 (학교나 가족, 교회 등과 같은) 물리적 장치 속에 물질화되어 있는 상징을 매개로 개인성이 집단화되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 에 대한 사고를 진척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3-2-2. 주체사상 비판: 변증법의 문제를 중심으로
그런데 이렇게 되면 존재와 의식의 외재적 변증법이나 기존의 `구조` 이론에 `상부구조` 이론을 추가하려는 시도, 그리고 물론 기존의 총체화의 기획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수의 사회적 관계들을 그냥 나열하는 다원주의적 사고 역시 대안이 될 수 없다. 핵심은 제 심급의 `상대적 자율성`을 사고하면서도 이들의 내재적 연관을 사고할 수 있는 역사적 복합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 즉 `대립물들의 통일성`으로서 `변증법`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과연 이러한 기획을 인식하고 있는가? 주체사상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는 느끼겠지만, 이들의 논의 속에서 변증법, 즉 `모순`에 관한 깊이있는 논의는 이상하리만치 부재하다. 이에 대해서 주체사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를 자기의 중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히 학술적 견지에서만 볼 문제가 아닙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다른 이론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도 혁명실천의 견지에서 역사적으로 고찰하여야 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 중요시된 것은 당시 자본주의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계급투쟁의 법칙을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중요한 역사적 과제로 나섰던 사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철학이 밝힌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가 오늘에 와서 사회주의사회 발전의 합법칙성을 해명하는 데서는 불합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철학이론을 전개하면서 이 원리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며 조국을 통일하는 것이 중요한 혁명과업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를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강조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으며 혁명과 건설에 어떤 작용을 미치겠는가 하는데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잘못 전개하면 사람들에게 현실에 맞지 않는 철학문제를 가지고 쓸데없는 말공부질을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며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혁명과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리공담을 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에게 맞지 않는 기성원리나 남의 이론을 본따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
- 김정일, [주체철학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이해를 가질 데 대하여]
마치 스탈린의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의 소멸`과 `전인민의 국가` 테제를 연상케 하는 위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 주체사상은 변증법의 문제를 대단히 실용주의적으로 사고한다. 이 때문에 변증법에 관한 주체사상의 논의는 거의 전무하며, 때문에 앞선 논의와 달리 여기에서는 비판할 대상조차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리의 진테제를 중심으로 약간의 언급을 덧붙이는 것으로 마치는 것으로 한다. 우리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핵심이 `구조의 물질성`과 `모순의 역사성`이라는 이중적 테제의 결합으로서 `모순의 효과에 의해 구조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전화의 필연성`이라고 생각한다. 맑스주의 철학자 발리바르는 ("구조인 것"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것으로, 즉 실천 일반에 내재적이지만 그러나 심지어 집단적인 의지[...]조차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모순들 자체의 복잡성, 그것들의 "불균등성" 혹은 알튀세르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것들의 과잉결정이"라고 말한다. 즉 모순이 구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은 모순들의 분절/절합의 복잡성 그 자체라는 것, 그리하여 모순들이 서로에게 반영되고 절합되는 양상, 즉 그것들의 배치의 고유성과 복잡성 그 자체가 구조적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구조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그 복잡성 자체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것으로서의 주체의 의지를 항상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왜 이것을 `모순적`(심지어 `적대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까닭은 그것이 그러한 대립의 조건들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따라서 오직 피지배자들이 예속관계 그 자체를 파괴하고 그럼으로써 그 관계가 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개인들로 스스로 전화함으로써만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인 화해불가능한 관계이며, 또한 그것이 개인들과 집단들의 `압축할 수 없는 최소`를 침해하는 `참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어서, 이러한 과정에 현실적인 제약이 있고 항상-이미 저항이 존재(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 것과는 별개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는 동시에 양방향으로 이행의 문제를 개방하게 만든다. 첫째,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을 그것들의 위기로부터 보존하는 것은 어떤 국가장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둘째, "그 자신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제어하여" 그것의 결말을 계획하는 것은 어떤 혁명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목적론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도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서도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이상의 논의(구조와 모순, 물질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사고하는)로부터 우리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의 이분법이 지양된 어떤 공간 위에서 역사와 정치를 재사고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역사에 대해서. 위의 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재생산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또한 단지 어떤 `최종적인` 단계나 `붕괴적인` 단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계기에 자본주의적 체계는 그 명백한 안정성 밑에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것이 그 자신을 `재생산`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형식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운동들의 가능성이 항상-이미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변화 자체가 일종의 `정상 상태`임을 뜻하는데, 이로부터 동일성과 변화의 이분법이 붕괴된다: 즉 어쨌든 변화가 좋은 것이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러한 변화가 기존의 물질성의 제약 속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고려할 때, `어떤 변화인가`, 혹은 오히려 어떠한 조건 속에서 `변화가 효과적이 되는가`라는 것을 구체적 정세 속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현실을 변혁하지 못할 것이다.
정치에 대해서. 구조 속에 모순, 심지어 적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의 저항과 구조의 불안정성은 항상-이미 존재하며, 이행의 가능성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위에서 확인했듯 저항과 불안정성은 기존의 물질성의 제약 속에서 벌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일종의 `정상상태`라고 할 때, `자생성`에 대한 맹신이나 체제의 불안정성 내지 조건의 변화가 곧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안일한 발상은 역사적으로 그래왔듯 큰 대가를 치룰 수 밖에 없다. 이로부터 `의식성`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되게 된다. 그렇다면 의식적인 정치 활동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항상-이미 존재하는 대중의 집단적 저항과 그로 인해 강제되는 구조의 변화 지점에 개입하여 `변화 속의 변화`, 즉 대중들의 집단적 저항을 급진화하는 동시에 보편화하여 `봉기`로 상승시켜 냄으로써, 대중들이 기존의 집단 내외부를 넘나들면서 서로서로의 활동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증대할 수 있도록 하며(이 점에서 우리는 대중의 자생성을 무시하는 `진리의 정치`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이러한 대중들의 봉기적 역능을 구조 그 자체 내에 필연적인 경향으로 존재하지만 기존의 체제를 위협하기 때문에 그 긍정적인 측면이 억눌려 왔거나 (결국 같은 얘기지만) 기존의 물질적 제약에 의해 대중과 엇갈린 채로 혹은 오히려 대중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운동하던 이행의 물질적 가능성들 - 예컨대 소위 `생산의 사회화` - 과 해후하게 함으로써 해방의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전화할 수 있도록 제 요소를 (재)접합시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 한 번의 접합만으로는 순수하게 소멸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는 적대들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그것들과 지속적으로 투쟁함으로써 해방의 지속과 확장을 꾀해야 한다(이것이 소위 `PT 독재`의 본질이다).
4. 주체사상의 `불가능성`
위에서 살펴 본 두 가지 난점 - 이는 결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사고`로 집약된다 - 은 결국 한편으로 `민족주의화된 공산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수령론`에서 극단화되는 스탈린적 국가주의(그리하여 결국 대중노선의 질식)라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전자와 관련하여, 물론 우리는 지배자들의 민족주의와 피지배자들의 민족주의를 동일시하고 해방의 민족주의와 정복의 민족주의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치 국가 독재를 생산하는 것으로 전도된 사회주의 혁명들을 보아왔듯이, 지배의 민족주의로 변화된 해방의 민족주의를 우리는 무수히 보아 왔고, 그로 인해 반복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민족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끌린다. 민족주의 자체는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비가역적으로 출현한 (`인간-시민/평등-자유`를 핵심으로 하는) 혁명적 보편주의를 민족국가의 지평에 국한시킨 `총체적 이데올로기`로 규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주의와 혁명적 보편주의가 맺고 있는 양가적 관계를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본래의 기획을 유효하게 실현할 수 없었는 바, 민족주의는 자신의 필수적 보충물로서 `인종주의`, 즉 외국인 혐오증의 단순한 악화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 정반대로 `보충적 적`에 대한 증오와 차별, 내부적 배제와 내부적 국경을 출현시키는 증오와 차별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인종주의는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의 `미학화`와 `성별화`로 특징지어지며, 이의 가장 극단적 형태는 주지하다시피 독일의 나치즘이었다.
물론 이는 하나의 극단적인 형태이지만, 특정한 정세 속에서는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요컨대 이는 정세의 문제인데, 현하의 정세는 민족주의의 인종주의로의 전화라는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 이후 일반화된 자본의 초민족화와 노동의 불안정화(혹은 배제의 일반화)는, 계급투쟁을 조절할 수 있는 민족주의의 역량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이러한 상황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한 것은 `우리 국민 중에는 기생충이 있다`라고 외친 신보수주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를 향한 동시에 아래를 향한 `종족적` 차이에 대한 요구들이 격화되고 민족주의의 보충물로서 인종주의가 오히려 지배적 지위로 전위된다. 특수주의(`우리`를 순화해야 한다)와 향수어린 보편주의(미국에서는 `강한 아메리카`, 유럽에서는 `유럽적 문명`이라는 실낙원, 그리고 한국에서는 심지어 `고구려` 내지 `단군` 시대에 대한 향수)의 기묘한 결합이 출현하고, 더 이상 인민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약속이라기보다는 세계시장으로부터의 배제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대중동원이데올로기로 민족주의가 변질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민족주의를 매개하여서는 초민족적 연대를 할 수 없게 되는데, 이는 현재의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근본적으로 봉쇄한다. 이는 민족주의가 더 이상 `민족해방`을 위한 유효한 이데올로기조차 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바, 역설적으로 개별 국가에서의 민족주의(보다 정확히 말하면 인종주의)의 강화가 미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를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결과가 초래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스트-민족적 국제주의는, 민족주의 세력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종의 `몽상`이 아니라, 오히려 현 시기 제국주의와 맞서기 위해 관건적으로 요구되는 거대한 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한편 후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언급을 징후적으로 독해할 필요가 있다.
… 만일 사회적 집단의 통일을 보장한다고 하면서 사람의 자주성과 창발성을 억제한다면 집단 안에 참다운 통일이 보장될 수 없으며 반대로 사람들의 자주성과 창발성을 보장한다고 하면서 집단적 통일을 파괴한다면 개인의 생명의 모체인 사회적 집단의 생명이 약화되어 개인의 자주성과 창발성 자체가 보장될 수 없게 됩니다. 사회적 집단의 통일성은 자주성과 창발성을 높이 발양시키는 데 이바지하도록 이루어져야 하며 사람의 자주성과 창발성은 어디까지나 집단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테두리 안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등의 원리와 동지애의 원리를 통일적으로 구현함으로써 개인의 자주성과 창발성을 높이 발양시키는 문제와 집단의 통일을 강화하는 문제를 같이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사회적 집단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지휘가 필요하다는 것을 한두번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
- 김정일,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주체사상의 가장 큰 문제점이, 대중운동에 고유한 `혁명적 위험`을 무릅쓰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주체사상의 제 저작에서, 그리고 NL 진영의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확인되는 바, 그들은 대중의 자주성·창조성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끊임없이 의식성 하에 종속시키려 한다. 그런데 이때의 의식성 범주는 경제주의 비판의 맥락에서 제출된 레닌의 `의식성-자생성` 테제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칸트주의의 그것, 즉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출현한 대중의 봉기적 역능을 더 이상 부정하지는 못하되, 그것을 부르주아적인 방식으로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의식성` 범주의 뉘앙스를 더 강하게 가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중에 대한 그들의 `신심`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을 신뢰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사상 속에 모순에 대한 사고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구조를 이루는 제 요소의 전위·응축을, 따라서 지배의 변화를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주성과 창조성은 어떤 시기에도 의식성(이것이 당과 최종적으로는 수령으로 `총화`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의 규제 하에 놓여야 한다는 그들의 사고 체계 속에서는, 때때로 기존의 통일성을 위험스럽게 넘어서는 대중의 `혁명적 위험`은 곧 부르주아들의 음모이거나 일종의 `비이성`의 재발로서 신속하게 진압되어야 되는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물론 그 역으로 언제나 대중의 자주성·창조성을 받들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일면적 태도 역시 자생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군중노선`에 대한 반복되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결코 마오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 모순에 대한 사고 부재와 그로 인한 제 요소의 위치 고정은, `총체성`의 모델로부터 확정적으로 벗어날 수 없고, 이는 결국 대중의 자주성·창조성의 질식과 관료주의의 부활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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