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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서)
셋째는 학생들의 소요였다.
매점매석과 의회에서의 방해 외에도
우익 세력은 사회혼란을 유지할
좋은 구실을 찾아냈다.
정부가 교육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교육개혁 법안을 빌미로 야당은
우익 성향의 학생들을 대거 동원했다.
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서
정부를 성토했고 우익과 야당의 지원을
받으며 시위를 지속해갔다.
학생들의 데모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로
칠레 내부의 사회혼란이 더욱 가중되자
좌익 세력은 이런 문제의 본질이
종국에는 인민전선과 아옌데를 타도하려는
부르주아지 세력의 개입에 있다고 봤다.
노동자들의 회합 자리.
노동자들은 다양하게
자신들의 의견을 표명한다.
"더는 수세적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어제 보니 여러 그룹들이 갖가지 요구를 하던데 |
"화물차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다음 주에는 전국의 화물차량을 다 멈춘다고하는데 |
노동자들은 우익 세력의 준동에 맞서서
단호하게 행동할 것을 결정한다.
사람들은 서로의 차를 징발하고
모두 함께 차량을 타고서는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려고 한다.
1973년 4월 27일
노동총평의회(노총)은 노동자들을 규합해
아옌데 정부를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집회에 참석해서
정부를 지지하는 구호를 외쳤다.
"노동자에게 권력을!"
"민중에게 권력을!"
"단결, 인민전선, 승리 쟁취!"
"민중, 각성, 무기!"
그런데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시위대가 기독교민주당사를 지날 때
누군가가 총기를 난사한 것이었다.
이 일로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분명히 야당이 영향을 미친 일이었지만
야당은 어떠한 논평도 거부하며 침묵했고
법원에서도 확실히 늦장을 부려댔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사망자의 장례식에서
다시금 세를 과시하며 자신들의 힘을 보여줬다.
4월 30일. 이 날에
장례식에 참여하고자 모인 시민들의
숫자는 30만을 넘어섰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야당은
일단 소요를 멈추었다.
넷째는 고용주 단체의 공세였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한 정부였던
아옌데 정부에 대해 고용주를 비롯한
부르주아지들은 큰 불만을 느꼈고
'파업'이라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노동자들의 점유물이라고 생각했던
'파업'이 이제는 고용주들에 의하여
사회주의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조종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파업으로 인해 드는 비용은
전부 우익 세력과 기득권층
그리고 미국이 부담해줬다.
미국은 칠레를 향한 수출을 감소시켰고
기업주들은 운송을 파업으로 막았다.
운송기사들은 물론이고 버스기사들도
기업주들에 의해 파업에 동참하자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차량을 꺼내어
대중교통을 대신하여 시민들을 실어날랐고
어용 파업에 단호하게 저항했다.
시민들은 파업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용 파업의 의도를 알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단결과 투쟁의 필요성을 느꼈다.
차량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 생각엔 이젠 모두 항의시위를 해야 합니다. "수구파들이 계속 설치고 있어요. "저는 학생인데 저들이 온갖 수단으로 |
아옌데 대통령도 연설을 통해
지지자들에게 응답한다.
" 저를 믿는 국민들에게 대답합니다. "지금 생산 유통망을 더 잘 통제해야 합니다. |
다섯번째는 구리광산 파업이다.
칠레에 있어서 구리광산은
이 나라의 산업을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산업이었기에
이 파업의 여파는 엄청난 것이었다.
엘떼니엔떼 광산의 광부들이
경제적 이유를 근거로 파업에 들어갔다.
허나 이들은 당대 칠레의
일반 노동자들에 비하면
고임금을 받는 편이었다.
인민연합에서는 광부들에게
일터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나
파업 광부들은 야유를 부렸다.
그 와중에 전체 광부의 절반 이상은
파업에 동참하지 않았다.
잔업까지 해가면서
기본 생산량을 확보하려는
파업 미동참 광부들은
이 파업에 의문을 품었고
정부를 믿고 계속 일했다.
한 광산의 노동조합 지도자는
이렇게 노동자들에게 말한다.
"이걸 지적해야 겠습니다. 방송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뜻 깊은 일입니다. (중략) |
계속 조업 중인 노동자들도
마찬가지 의견이다.
앵커 : 엘떼니엔떼 노동자들이 분열된 것 같으세요? |
파업 광부들은 계속 일하려는
광부들을 위협까지 하면서 막았지만
그럼에도 광부들은 계속 일하려 나왔다.
이는 어용 파업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지였고
아옌데 정부를 믿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인터뷰를 하나 더 보자.
노동자6 : 위협을 받았어요. 길을 가로막고 동료 노동자들이 좀 더 각성해야 합니다. |
시간이 흐를수록 파업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노동 의지는 강력했다.
5월 7일 기준으로 직장에 출근하러 나온
광부들의 비율은 61%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파업 광부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옌데 대통령은 구리파업에 대해
노동에 복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부르주아지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구리파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커지고 있어서였다.
"저는 오랜 벗이며 동지로써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는 구리산업에 의지해 |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건 파업 측이었다.
다른 광산들이 엘떼니엔떼 광산과의
파업 동참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야당 세력이 앞장서서 파업 세력을
돕고자 돈과 생필품을 지원해 줬다.
부유층들에게는 이 파업을 지원하는 게
마치 의무사항인 양 되었으며
가톨릭 대학에서는 부유층 자제들이
'노학연대' 운운하면서 파업을 지지했다.
그렇지만 정작 엘떼니엔떼에서는
75%의 광부들과 10%의 사무직들이
이미 광산에 복귀해 있었다.
이들의 파업과 파업 지지는 그저
정치쟁점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마음에 급해진 파업 세력은
광산에서의 투쟁에서 멈추지 않고
수도 산티아고에서 과격 시위에 나섰다.
이에 노동자들은 시위대에 맞서서
그날 대통령궁 앞에 집결했다.
노동자 시위대는 저녁까지
해산하지 않고 집회를 계속했다.
참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 온 건 계급의식 때문이에요.
"파시즘에 맞서고 민중의 정부를 지지합니다.
|
"칠레인으로서 아옌데 정부를 지켜야지요.
|
노동자들의 압박 덕분에
엘떼니엔떼에서는 93%의
광부들이 파업에 복귀했으며
그저 소수의 파업 세력만이
기독교민주당 당사를 떠돌았다.
6월 21일에는 노동자들이 주도하여
반파시즘 시위가 열렸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모인 이날
칠레 노동계급의 첫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군중 앞에서 연설을 했다.
"저는 지금 우리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
이 연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광산 파업은 종료되었다.
76일 간의 엘떼니엔떼 파업은
별 소득도 얻지 못한 채
그저 엄청난 경제적 손실만 안겼다.
파업도 아옌데를 흔들지 못하자
정적들이 선택할 것은 그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쿠데타였다.
6월 29일 군인들이 나타났다.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은
대통령궁을 공격했다.
야당은 입을 다물었다.
야만적인 군인들은 촬영하던
카메라맨에까지 사격을 가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레오나르도 헨릭센이
이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죽음은 몇 개월 후에 있을
피노체트의 우익 쿠데타를
고발해주는 예고편이나 다름 없었다.
[칠레전투 1부 끝]
[뱀발]
1. 노동자 시위대가 기독교민주당 당사 앞을 지날 때 발생한 테러로 인하여 숨진 사람은
호세 리깔도 아우마다(José Ricardo Ahumada)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건설 노동자였는데 아옌데 정부를 지지하는 노동자 집회에 참석 중
기독교민주당 당사 근처에서 의문의 총격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1973년 4월 30일에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30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으며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도 참석하였다.
<작중에 나오는 아우마다의 초상화>
2. 작중에 나오는 우익/야당 세력의 반동 행위와 부르주아지들의 반항은 분명히
미국하고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다들 아다시피 미국은 남미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정권이나 좌익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왔다.
물론 대놓고 하지는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독재정권들을 후원해주는 식이었다.
이미 미국은 아옌데 당선 전부터 칠레에 대한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옌데 당선 전에는 아옌데를 당선시키지 않기 위해 애썼으며
당선 이후에는 경제적, 사회적인 압박을 가해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공작했다.
차후에 공개된 미국의 기밀문서들에서는 1970년부터 이미 공작이 시작됐으며
리처드 닉슨 대통령,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 등 굵직한 인물들이
칠레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했던 여러 발언이나 정책들이
참으로 적나라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또한 CIA의 경우에는 미국 정부의 지시로
아옌데 대통령을 암살하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칠레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고
그리하여 1973년 총선에서 미국과 우익 세력은
인민연합이 패배할 것을 내심 기대했었지만
알다시피 결과는 인민연합의 승리였다.
아니 오히려 인민연합은 예전보다 더 성장했다.
결국 이렇게 되자, 미국 또한
군부와의 접촉을 늘렸고 끝내는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원 혹은 묵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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