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목표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여전히 최종목표 그대로 남아있다.
"노동자 계급은 (원문 생략) 인민의 결정을 통해서 도입할 어떤 형태의 이미 만들어진 고정된 형태의 아상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방과 자신들의 보다 높은 생활형태 -현재의 사회는 고유한 경제적 발전을 통해서 바로 그런 방향으로 불가피하게 흘러가고 있기도 하다.-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들 노동자 계급의 오랜 투쟁, 즉 인간은 물론 사회적 조건들도 완전히 바꾸는 그런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들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실현해야할 어떠한 이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이미 붕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품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야 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최종목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이 문장이었는데, 특히 이 문장의 모든 부분보다는 그것의 근본사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운동, 즉 일련의 과정 그 자체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그에 반해 미리 상세하게 정해진 최종목표라는 것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이미 명제의 형태로 된 최종 목표가, 만일 원칙으로 정형화시킨 노동운동의 일반적 목표를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선언하는 그런 해석을 수용하는 것이라면, 그런 명제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얘기한 바 있다. 그러나 운동의 원칙적인 방향과 성격을 결정하는 그런 일반적 목표 이상의 운동목표를 다루는 이론들은 필연적으로 언제나 공상론으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으며 언젠가는 사실상 운동의 이론적 실전적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되어버릴 것이다.
(중략)
투쟁을 위해 노력하는 계급에게 건전한 도덕은 필요로 하지만 나태한 퇴폐주의는 필요하지 않다. 이들이 머리속에 그려진 최종목표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전력을 다해 당면의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는 한 결국 부차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당면의 목표가 일정한 원칙에 의해서 달성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으며, 이 원칙이 전체 사회 생활과 경제의 보다 높은 수준을 반영하고 따라서 이들 목표에 문화의 발전에서 하나의 진보를, 즉 보다 높은 도덕과 권리의 개념을 표시해주는 사회적 견해가 관통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노동자는 어떤 이상도 실현할 수 없다."는 명제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이 명제가 만일 필자의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면 자기기만의 산물이라라고 본다.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
한줄 요약 : 목적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사회주의 혁명의 포기가 아니라 오늘날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에서의 운동을 한다는 것이 어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맑스주의가 미리 가지고 있는 특정한 이상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이념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그 해결책으로 삼는다는 소리인데 맑스주의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거부하면 당연히 궁극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가 될 수 밖에 없지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적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거부한 부분이 어딘지 그부분좀
맑스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이나 공산주의 건설은 자본주의 분석이 말하는 당면 목표라고 했지 '최종 목표'라고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 사회주의 혁명에 최종 목표라는 무고를 덮어씌우고 당면 목표라는 말로 개량적 목표를 포장하면 그게 맑스주의인가?
베른슈타인의 마르크스주의 분석 거부에 대해서는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이미 충분히 썼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베른슈타인은 로자의 주장에 대해서도 깠음. (레닌은 러시아 혁명 이후 깐거 서지사항만 알아서 모르겠다) 1. 로자는 신용이 공황에 반작용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공황을 정점으로 밀어넣는다고 주장했지만 마르크스는 신용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로자의 주장에는 어떠한 실증적인 증거도 없으며 오히려 자본론 3권에는 이자율의 하향으로 인한 기생소득의 수가 늘어난다고 언급하고 있다. 2. 로자는 공황의 상황이 아직 정점에 이르지 않았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마르크스가 자신의 저술을 할때 '공황은 이미 현재진행형'이라는걸 언급할 필요가 있다. 도데체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그 이론이 아직 제대로 검증될 때가 아니라면 도데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한단 말인가?
2-2 만약 그것이 가까운 장래에 확인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불가피성에 대한 증거는 허공에 맴도는 추상적 사유에 불과할 것이다. 3. 기업결합과 카르텔의 효용을 부정하는 것은 노동조합 무용론과 다를바가 없다. 과잉된 자본이 일시적으로 휴면상태에 들어가는 것과 직접적인 파괴 상태로 돌아가는건 다른 이유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세계시장)이 확장되어가는 시대에는 일반적 경제침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검은 월요일을 예측하지 못한건 실책 맞긴하다만)
1. 신용은 공황을 미루면서 신용이 청산될 때 공황을 심화시킨다. 금융부문의 성장과 산업공황에서 금융공황으로 이행일 뿐이다. 2. 공황은 마르크스의 시대에도, 룩셈부르크의 시대에도, 지금도 존재한다. 도대체 베른슈타인이 말한 오지 않았다는 공황의 정점은 뭘 말하는 것인가? 그 자체만으로 자본주의를 파괴시킬 거대한 공황인가? 그런 건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수도 없다. 모든 공황은 (새로운 공황의 준비를 위한) 회복 가능성을 내포한다.
3. 기업 결합, 카르텔, 세계시장 확장으로 경제가 안정을 찾을 수 있다? 현실에서 기업 결합과 카르텔은 근본적으로 초과이윤을 위한 적대적 활동이지 평화적 연합이 아니다. 제국주의가 안정적 경제성장을 불러올것이라는 주장은 말할 나위도 없고!
1. 애석하게도 신용은 생산과 교환 간의 확대속도의 차이를 주기적으로 조정함으로서 생산양식과 교환양식간의 '대립'을 지양한다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2. 그러게 말임. 공황에 정점같은게 어딨음? "단지 마르크스는 그것이 보다 첨예한 형태로 그리고 확대된 상태의 모순으로 반복되리라는 것을 예측했을 뿐이다." 3. 카르텔따위가 곧바로 경제발전을 의미하는 말이라거나 그것이 근대 경제생활의 모순을 제거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내가 주장하려고 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확신하는 바가 있다면 근대 산업국가들이 카르텔과 트러스트가 (로자의 주장대로) 보호관세에 지탱하고 발전한다면 그것은 결국 공황의 원인에 지나지 않는다. 카르텔의 작용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경험의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추측에 기댄다.
3-2 1894년 엥겔스는 공황이 과거의 형태대로 반복될 것이 틀림없다는 추상적인 결론에 경고를 보낸 바가 있다. 개별 산업의 역사는 이들 개별산업에서의 공황이 일반적인 산업의 공황과 결코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론 1권과 3권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