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서구의 관점은 제 1기병사단이 유능했던 미하일 투하젭스키의 기갑군단과 종심전투를 시샘하여 망상증 스탈린을 부추겨서 싹 다 죽여버렸고, 이로 인해 독일군과 싸울 시기에 유능한 지휘관이 없었다고 말함.
그러나 최근 논문에 의하면 전혀 사실이 아님.
일단 첫째로 제 1기병사단도 평등하게 숙청의 대상이 됬다는 점에서 기존 통설은 완벽하게 박살이 남.
그럼 왜 스탈린이 숙청을 했는가?
정답은 이러한 종심전투 훈련이 존나게 비리와 부정이 판을 치고 있었고, 군부 지도자 역시 그랬다는게 문제임.
대표적인 예시를 보자.
이듬해인 1936년 말에 열린 국방회의에서 1935년과 1936년에 수행한 대규모 기동훈련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1930년대 적군의 주요 군사목표 중 하나는 새로운 군사기술과 장비 운용능력의 습득이었다. 가장 큰 문제 는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되었음에도, 지휘관들의 전투 숙련도와 장비 운용능력이 지극히 낮았다는 점이다. 기갑부대는 전반적으로 훈련이 부족했고, 그 결과 적의 기갑부대를 공격하는 대형은 “순식간에 뒤죽박죽 이 되어버리고는” 하였다. 특히 기갑 장비 운용 시 정찰이 제대로 이루 어지지 않았다. 1935년과 1936년의 대규모 기동훈련에서는 공히 정찰 활 동 자체가 아예 없었다. 당시 적군 전투훈련국( Upravleniia boev oi podgotovki RKKA: UBP RKKA) 수장으로서 기동훈련을 참관했던 알렉산 드르 세댜킨(Aleksandr Ignat’evich Sediakin, 1893-1938)에 따르면, 기동 훈련에서 전차부대들은 무턱대고 전진만 할 뿐이었다. “전차부대는 정찰 과 정보획득에서 어떤 ‘적극성’도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키예프 군 관구 소속 제15기계화사단과 제17기계화사단의 T-26 전차들은 계속해서 “빈 공간에(po pustomu mestu)”에나 포를 쏘아대기 일쑤였고, 벨라루스 군관구 소속 제5기계화사단과 제21기계화사단의 BT-7 전차들은 번번히 적의 매복에 걸려 피해를 입었다. “실제 전투였다면 전차부대들은 모두 [적에게] 완파되었을 것이다.”이외에도 훈련준비의 미비와 불충분한 보급 그리고 투입된 자원과 장비의 상당 부분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유용되 었음이 적발되었고, 훈련 자체에 대한 보고서가 조작되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기동훈련 이전에 예행연습을 거쳤다는 점이었다. 세댜킨은 “이 [키예프 군관구에서 수행한] 기동훈련이 오로지 예행연습을 거쳤기 때문에 엄청난 성공(kolossal’nyi uspekh)을 거둔 것처 럼 보였을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세댜킨은 1936년 우보레비치가 책임 을 맡고 있던 벨라루스 군관구의 기동훈련에 대해서도 동일한 평가를 내 렸다. 그는 기동훈련 기간중한 훈련심판관이 보고한 내용을언급하였 다. “내[훈련 심판관]가 기동훈련을 참관하고 있는 동안, 한 지휘관이 나에 게와서 몇몇 기계화 여단이특정지점으로향하고있다고전하면서, 그 부대를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부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파악 하지 못했지만, 그 지휘관은 계속 [상대 부대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 지휘관에게 어떻게 [적군인지를] 확신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부대를 공격하기로 미리 약속을 했습 니다’.”
르(Vasilii Konstantinovich Bliukher, 1890-1938)도 대규모 훈련이 있기 전 사전에 연습하는 ‘보여주기식 훈련행태’가 적군에 만연해 있는 문제라 고 지적하였다. 블류헤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기동훈련이 어떻게 진행될지 사전에 알려주고 각 부대가 해야 할 임 무를 미리 연습할 경우, 부대의 훈련 및 전투태세 수준을 확인하는 것 은 불가능하다. 부대들이 예상치 못한 환경에서 훈련을 진행해야 (진 정한 의미의) 기동훈련이 될 수 있다. 이들 기동훈련은 몇 달 전에 지 휘관들이 훈련 지역을 미리 조사한 후 기동훈련을 [미리 짜놓은 계획 에 맞추어] 진행하였다. 이것은 의도적인 사기 행각이고, 아무리 좋게 본다고 해도 기만이다.”
애당초 스탈린이야 말로 이런 군부 기계화에 가장 큰 공신이었다. 군부가 원하는대로, 세계에서 가장 전차가 많은 나라로 만들어주고 전쟁이 코 앞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군부에 총체적인 역량을 기울렸다. 그러나 군부는 태만, 야합, 조작, 횡령, 비리로 대답했고, 스탈린 역시 규율로써 답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최근 논문에 의하면 전혀 사실이 아님.
일단 첫째로 제 1기병사단도 평등하게 숙청의 대상이 됬다는 점에서 기존 통설은 완벽하게 박살이 남.
그럼 왜 스탈린이 숙청을 했는가?
정답은 이러한 종심전투 훈련이 존나게 비리와 부정이 판을 치고 있었고, 군부 지도자 역시 그랬다는게 문제임.
대표적인 예시를 보자.
이듬해인 1936년 말에 열린 국방회의에서 1935년과 1936년에 수행한 대규모 기동훈련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1930년대 적군의 주요 군사목표 중 하나는 새로운 군사기술과 장비 운용능력의 습득이었다. 가장 큰 문제 는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되었음에도, 지휘관들의 전투 숙련도와 장비 운용능력이 지극히 낮았다는 점이다. 기갑부대는 전반적으로 훈련이 부족했고, 그 결과 적의 기갑부대를 공격하는 대형은 “순식간에 뒤죽박죽 이 되어버리고는” 하였다. 특히 기갑 장비 운용 시 정찰이 제대로 이루 어지지 않았다. 1935년과 1936년의 대규모 기동훈련에서는 공히 정찰 활 동 자체가 아예 없었다. 당시 적군 전투훈련국( Upravleniia boev oi podgotovki RKKA: UBP RKKA) 수장으로서 기동훈련을 참관했던 알렉산 드르 세댜킨(Aleksandr Ignat’evich Sediakin, 1893-1938)에 따르면, 기동 훈련에서 전차부대들은 무턱대고 전진만 할 뿐이었다. “전차부대는 정찰 과 정보획득에서 어떤 ‘적극성’도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키예프 군 관구 소속 제15기계화사단과 제17기계화사단의 T-26 전차들은 계속해서 “빈 공간에(po pustomu mestu)”에나 포를 쏘아대기 일쑤였고, 벨라루스 군관구 소속 제5기계화사단과 제21기계화사단의 BT-7 전차들은 번번히 적의 매복에 걸려 피해를 입었다. “실제 전투였다면 전차부대들은 모두 [적에게] 완파되었을 것이다.”이외에도 훈련준비의 미비와 불충분한 보급 그리고 투입된 자원과 장비의 상당 부분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유용되 었음이 적발되었고, 훈련 자체에 대한 보고서가 조작되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기동훈련 이전에 예행연습을 거쳤다는 점이었다. 세댜킨은 “이 [키예프 군관구에서 수행한] 기동훈련이 오로지 예행연습을 거쳤기 때문에 엄청난 성공(kolossal’nyi uspekh)을 거둔 것처 럼 보였을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세댜킨은 1936년 우보레비치가 책임 을 맡고 있던 벨라루스 군관구의 기동훈련에 대해서도 동일한 평가를 내 렸다. 그는 기동훈련 기간중한 훈련심판관이 보고한 내용을언급하였 다. “내[훈련 심판관]가 기동훈련을 참관하고 있는 동안, 한 지휘관이 나에 게와서 몇몇 기계화 여단이특정지점으로향하고있다고전하면서, 그 부대를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부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파악 하지 못했지만, 그 지휘관은 계속 [상대 부대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 지휘관에게 어떻게 [적군인지를] 확신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부대를 공격하기로 미리 약속을 했습 니다’.”
르(Vasilii Konstantinovich Bliukher, 1890-1938)도 대규모 훈련이 있기 전 사전에 연습하는 ‘보여주기식 훈련행태’가 적군에 만연해 있는 문제라 고 지적하였다. 블류헤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기동훈련이 어떻게 진행될지 사전에 알려주고 각 부대가 해야 할 임 무를 미리 연습할 경우, 부대의 훈련 및 전투태세 수준을 확인하는 것 은 불가능하다. 부대들이 예상치 못한 환경에서 훈련을 진행해야 (진 정한 의미의) 기동훈련이 될 수 있다. 이들 기동훈련은 몇 달 전에 지 휘관들이 훈련 지역을 미리 조사한 후 기동훈련을 [미리 짜놓은 계획 에 맞추어] 진행하였다. 이것은 의도적인 사기 행각이고, 아무리 좋게 본다고 해도 기만이다.”
애당초 스탈린이야 말로 이런 군부 기계화에 가장 큰 공신이었다. 군부가 원하는대로, 세계에서 가장 전차가 많은 나라로 만들어주고 전쟁이 코 앞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군부에 총체적인 역량을 기울렸다. 그러나 군부는 태만, 야합, 조작, 횡령, 비리로 대답했고, 스탈린 역시 규율로써 답을 알려주었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32754
중국 꼴 나기전에 선 잘 그었네
그렇다면 글랜츠 슨상의 '30년대에 전쟁했으면 소련이 독일 이김'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겠네..
후속 연구니까? “만약이니까” 뭐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유능한 군사지도자”라는 신화는 없었다는 거겠지
뿐만 아니라 군수 물자를 서방에 몰래 팔아먹는 반역죄급 방산 비리에다가 블류헤르랑 예고로프 휘하 극동군들은 동맹국인 몽골인민공화국 국경지대에서 약탈까지 일삼았다던데... - dc App
한국에서도 군인이 저지랄하면 사형임 ㄹㅇ ㅋㅋ
....본문에서 붉은 군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세댜킨이랑 블류헤르가 둘다 처형당했는뎁쇼
블류헤르도 비리 저질러서 간 걸로 알고있음. 쉽게 말하자면 비리 인사들이 다른 비리 인사보고 저건 좀..... 이러는 거랑 비슷하겠지
세댜킨도 그랬던 것으로 기억나고.
숙청으로 싸울 유능한 지휘관이 없었다는 발언에대한 반박이 어디나오는거임? 유능한 지휘관이 많았다는 반박도 안보이고 숙청당하지 않았다는 반박도 없는데? 그리고 그런 발언이 나온 논문이 어디있음?
학계에서는 비리보다는 소련군의 급격한 교리변환으로 공격중심의 작계수정과 군 구조전환이 초반 연패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는걸로 아는데 유능한 지휘관 숙청이 이유가 아니라고 한논문은 못봤음
유능한 지휘관이 많았다에 대한 반박이라면, 저기서도 말하고 있는데, 너는 정찰도 안하고, 포도 이상한 곳에 쏘고 훈련도 개판에, 뇌물 받고, 군 장비를 자기 마음대로 쓰는 지휘관이 유능한 지휘관이라거 생각하냐?
연전 연패의 원인이, 소련의 급격한 교리변환과 군 구조전환이리는 것은 맞지만, 애당초 저 군부 세력이 도저히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무능했기에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다고 논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저기서 말하는 반박은, 군부 숙청이 존재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스탈린이 무슨 정치력 욕망에 의해서가 아닌, 군부의 무능으로 인해 숙청이 필수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글인데.
그리고 논문 위에 적어뒀는데 글 좀 읽자.....
애당초 독소전에는 거의 비리가 없을 수 밖에 없었겠지, 위 논문이 숙청을 시작한게 37년부터고 독소전은 40년에 터진일이니까. 만약 숙청 없이 전쟁했으면 비리로 망했다는 말임
그러니까 그 무능했다는 판단이 당시 소련의 교리개편과 연계된 이야기인데 그 시각이 반영된 보고겠지 애시당초 스탈린 숙청때 흔히 붙었던 죄목이 그 부패랑 태업임
그리고 그렇게 대책없는 혁신의 결과가 초반의 소련군 붕괴인데 숙청 없었으면 망했다는건 그냥 결과론이지
그리고 논문자체가 숙청이랑 초반 패전이 연관 없다는 논문이 아니니까 하는말임
초기 소련군은 계파, 파벌이 위주가 됐고, 이들의 비리는 단순한 죄목 이상으로 뿌리가 깊기 때문에 계파를 척결하거나 지휘계통을 확립하지 않고도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단지 “결과론”의 차원보다, 실질적으로 군 내부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였음.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것이 군에 대한 숙군으로 나타난 것.
그러니까 계파 숙청이랑 지휘권 확립을 위해서 군부에 대규모 숙청이랑 교리변화를 했겠지 그걸 그냥 부패장교 잘라낸걸로 퉁치면 안되는거고
뭔 부패랑 태업이 그냥 붙은 것인지 아나. 너 말이 맞다면 같이 숙청당한 블류헤르의 언급은 전혀 말이되지 않음. 정치적으로 스탈린의 적이 왜 스탈린의 숙청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것임? 또한 애당초 이 숙청은 스탈린의 군사기반을 한 숙청이었음. 위에서 말한 제 기병1군은 스탈린의 군사 파벌이었기 때문에 전통 시각에서 제 1 기병과
유능한 기갑을 대립시킨 거였은데, 위 논문에서도 나왔듯, 제 1기병사단에서도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기 때문에 논리가 파탄난다는 것임.
님 말처럼 우크라이나 관구는 계파 변화가 없지는 않음.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크라이나 관구의 계파가 일단 정당한 통치자인 스탈린의 말을 대놓고 씹기 시작했다는 것임. 이건 애당초 군에서 항명인데 이게 유능하다고 봄?
그리고 너가 그런 논문들이나 책을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는 이런 군사 부문의 수정주의 사조들이 1990년 이후에나 등장 할 수 있어서였고, 본격적인 책들은 00년대 후반에나 출판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번역된 것은 10년대 중후반에나 가능했음
교리 변화가 대책없이 일어났다는 주장도 문제적인 게, “대책없이”라는 말이 합의하는 바는 사후적 판단에 가깝지 당대 역사적 상황과는 거리가 멂. 이 경우, 프랑스 전역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전방 뿐만 아니라 후방에 종심방어전략을 입안해서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 목표 달성을 저지시키는 데에 성공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이뤄지지 않음.
소련이 전방에 모든 전력을 집결시키지 않은 것은 전선이 공략되면 모든 저항 역량이 일소된다는 판단이 컸고, 1차 세계대전 당시 삼소노프의 패전이 전체 전선에 끼친 영향도 고려했기 때문. 주코프가 회고록에서 밝히듯 모든 군 부대를 국경에 집결시켰다면 전군의 섬멸을 면치 못했을 것.
실제로 소련은 기갑부대는 정비를 이유로 후방으로 빼놨기 때문에 초기 저항할 수 있는 동원력을 만들어주기도 했죠.
사실 대숙청 스탈린음모설은 나도 개구라라 생각하고, 대숙청을 할 수밖에 없었겠다는데도 100% 동의하긴 하는데 사형제반대론자의 입장에선 굳이 처형까지 갔어야 했나 싶은 생각은 들긴 해요. 근데 동시대 다른 나라들에서도 사형은 보편적인 형벌제도였으니 소련에게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댈 필욘 없고, 시대적 한계였다고는 생각함
대체로 숙청은 4가지를 종합해서 하는 말이었으므로 사형만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동지. 면직,강등,감옥,사형이었고 사형까지 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고 합니다
하긴 다 사람 살자고 하는 혁명인데 혁명가들 입장에서도 사형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기야 하죠. 다음에 들어설 노동자 정부에선 사형제는 폐지되길 바랄 뿐입니다
'~1938'
아치 게티가 집계한 통계를 볼 때도 전체 군 지도자 중 직위해제된 인원이 최대가 7.7%(37), 3.7%(38)에 해당됐죠. 단, 게티의 통계는 직위해제된 군 인원 중심으로 집계했기 때문에 세부적인 차원에서 보면 “사형”은 집계된 수치보다 적은 수치를 차지하죠. 1937-38년조차도 면직, 강등, 감옥이 대다수를 차지했기에 사형의 비중이 큰 것은 아닙니다. 직위 해제된 군 지도자라도 할지라도, 보직에 복귀한 경우는 1937년에도 상당수였고, 38년 초순을 기점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 dc App
형벌권을 최대한 절제해서 행사한게 통계로도 보이는군요
근데 하필 보이는 블류헤르랑 세다킨은 -1938이네
블류헤르도 극동 일대에서 군기문란의 문제가 현저했고, 타국에서 집창촌을 굴려도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에 의해 적용된 것. 그리고 소련 군 지휘부 내부 파벌들의 이권 다툼이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1938년까지 범위가 확장된 것 역시 그 일환으로 볼 수 있고 블류헤르, 그리고 세다킨도 예외가 되지 않은 것.
1. 소련군의 쓸만한 장교단의 숙청은 적백내전 직후부터 시작됨. 2. 수정주의 역사관은 전간기 적군 장교단의 숙청, 징집, 교육의 전반적 이해가 먼저 되야함. 기본 이해부터가 안되있는 상황에서 이야기하는건 별 소용 없음. 3. 소련군 군기문란 책임을 장성들한테 뒤집어 씌우는 것 부터가 전간기 소련군에 대한 이해부족을 보여주는 거임. 일단 영어 알면 로저 리즈 책부터 읽고 그 다음 러시아어 공부해서 전간기 소련군 상태 공부해야 대숙청 원인이 군기문란이라는게 개소리라는걸 이해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