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갤 원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77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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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 3줄요약:

1. 근대국가로서 체계가 미비하던 러시아에서 관료제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많은 지역당 지도부는 사실상 영주나 다름 없었음

2. 혁명 내전 5개년 계획을 돌리면서 사회 역량을 오버클럭하던 소련에서 이는 엄청난 낭비와 비효율로 이어졌고

3. 대숙청은 말 그대로 이를 퍼-지하면서 사회를 모스크바 중앙당의 위계제 아래에서 빠릿빠릿하게 재조직하다가 벌어진 일이다


뭐 여기에 당시 하급당원이나 대중의 참여, 문화혁명으로 등장한 신흥 화이트칼라 계층 등에 대한 이야기가 더 들어가지만 어쨌든 제일 많이 얘기되는 건 저런 거지

군부 대숙청은 여기에 4.를 붙이면 되는데 "군이라는 조직의 특성과 소련 역사에서 군의 위상 때문에 군부 안팎에서 정치적 갈등이 오지게 많았다"인 것이다.


따라서 군부 대숙청은

1. 영주 노릇 하고 말 안 들어 처먹는 ㅄ같은 부패 장교진과

2. 스탈린에게 불만을 품고 자꾸 모스크바에 개기는 인민의 적 반역자 쉽새끼들을 조지기


이 같은 투트랙으로 벌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머리 속에 넣고 내가 열심히 정리한 다음의 글을 읽도록 하자.


1. 소련 국가의 형성


소련은 전쟁과 함께 태어났다. 총력전 체제를 감당할 수 없어 하는 러시아 제국의 후진적 시스템은 전쟁 말기에 총체적으로 파탄이 났고 이미 국가는 기능부전 상태에 들어갔다. 무질서가 전 러시아를 휘감았고, 혁명은 그런 무질서의 어느 정도 높은 개연성을 가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나서도 당연하게도 혼란은 더욱 심해졌는데 애초에 지하정당이던 볼셰비키는 은행을 털고 파업을 종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지 거대한 관료기구를 통솔하는 데는 역량을 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이후 이어지는 적백내전에서 전쟁 승리를 위해 볼셰비키는 러시아 제국의 구 장교들을 기용한다. 이는 군부 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 일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유토피아주의와 정권을 살리고자 하는 현실론의 불가피한 타협이었다. "전문가들(spetsy)"이 부상해 관료 집단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된다. 한편으로 이후 탄생한 소련 정권은 러시아 제국의 미비한 관료제를 철저한 근대 국가의 치밀한 관료제로 재편하고자 하였고 이는 엄청난 신규 인력 수요를 발생시켰다. 그렇게 들어온 이들은 솔직히 말하자면 어중이 떠중이들로, 극단적 혼란기를 이용해서 한 자리 해먹겠다는 인간들이 다수였다.


형성 과정에서 이런 상이한 인적그룹을 안게 되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공산당은 구세대들을 점차 신세대로 교체하게 된다. 따라서 30년대쯤 가면 붉은 군대에서는 이런 신세대들이 거의 상위 직급에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이 혁명 세대들은 근대 국가의 관료제 안에 포섭되어 있었지만 사회적 구성은 전근대적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대체로, 붉은 군대의 상당수 병력은 트로츠키가 주도하는 무자비한 징집제와 처형으로 충당되기도 하였지만 많은 수는 현지의 자발적인 세력 형성으로도 충원되었다. 특히 인구는 많고 토지 불평등 정도는 극심했던 남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이런 경향이 강했고, 마을 별로 청년들이 토지개혁을 이뤄내기 위해서 자경단과 민병대를 조직하고 백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파르티잔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리적 특성과 당시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발전 수준 상, 광활한 남러시아-우크라이나의 초원지대에서는 전략 기병과 타찬카(기관총 포대를 단 마차)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백군의 가장 강력한 세력들이 남러시아에 결집해 있어 모스크바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이상, 붉은 군대의 주력은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고 혁명 이후 군부의 핵심 인사들도 여기서 부상한다.


2. 몇 가지 문제


이런 배경 속에서 붉은 군대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게 된다. 하나는 이들이 시작부터 강력한 규율과 정치적 통제를 전제하고 모집된 병력이 아니라 상당히 자율적인 사회집단이었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조직 내의 이익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였고 이는 어느 정도 내전기를 통해 배태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둘은 이런 힘을 통제할만한 근대적 규율 체계가 당시 소련 공산당이나 국가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시는 조직적이고 합리적 시스템의 논리보다는 개인의 비공식적 관계에 의존하는 일이 많았고, 하부 집단에 대한 상부 집단의 일관된 통제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었다. 통제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적 카리스마 혹은 거래를 통해서 채워졌던 것이다.


내전기에 특히 파르티잔 계통의 부대에서 이런 문제가 극심했다. 요컨대 당이 약탈을 금지해도 그들은 약탈을 아랑곳하지 않고 했다. 너무 심한 경우 상급 당조직에서 정치위원이 파견되어 이를 분명히 경고하였고 심한 경우 처벌까지도 갔으나 몇몇 집단에서는 이에 대해 반란으로 대항하기도 하였다. 분명히 같은 공산주의를 추구한다는 슬로건을 걸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소비에트 정권이 추구했던 것은 허상 속에 있던 진정한 공산주의 같은 것보다는 근대 국가로의 전 사회적 전환이었다.


1920년대에 소련 국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에, 군부는 이후 자체적인 이익집단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내전 때 방대하게 팽창했던 군은 굉장히 많은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먹는 하마나 다름 없었다. 당은 군축안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으나, 군 조직은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당지도부의 골머리를 썩혔다. 또한, 이해관계와 인적네트워크로 엮인 당시의 감사체계는 소련 군 내부의 비리를 방지할만한 어떠한 노력도 기울일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적백내전 당시 어디서 활약했는가를 두고 내부의 파벌이 자리잡았고 이것이 분파주의적 갈등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스크바 정치국의 상황을 반영했다. 전쟁의 주 무대가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였던 만큼 파벌도 이 둘로 갈렸다. 우크라이나는 독일 및 폴란드와 접경한 곳이자 민족주의적 반군도 있던, 전략적으로 복잡하고 중요했던 곳이니 만큼 당시 군사인민위원회를 맡았던 트로츠키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한편 남러시아의 경우 볼가강의 수운 네트워크를 통해서 모스크바에 식량을 공급하는 중요한 위치였다. 이곳이 뚫린다면 또한 모스크바가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붉은 군대는 캅카스와 남러시아에 자리잡은 데니킨의 맹렬한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 볼가강 변의 차리친, 후에 스탈린그라드로 알려지게 되는 도시가 이곳에서 중심적인 지휘부가 되었고, 이곳에 부임한 정치위원은 스탈린이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트로츠키와 인맥을 형성한 그룹과 남러시아를 중심으로 스탈린과 인맥을 형성한 그룹이 병립해서 소련 군부 내에서 강력한 파벌로 발돋움 했다. 이는 20년대의 정치적 갈등과 맞물렸고, 트로츠키가 숙청당하자 30년대 내내 군부 내부를 통일된 조직으로 만드는 것을 방해했다. 이를테면 트로츠키의 후원을 받던 군 인사들은 통수권자로서 스탈린과 보로실로프를 극히 불신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후원을 받은 집단 또한 당중앙의 의도와 배치되는 행동을 이어갔는데 이는 그들이 중앙 정계와의 끈을 믿고 규율을 따르고 통제를 받아야 하는 그들의 위치를 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갈등은 1934년 나히모프 사건, 투하쳅스키를 주축으로 한 장군들이 보로실로프를 몰아내려고 하던 계획의 적발 등으로 이어졌고, 2차 5개년 계획이 진행되면서 점차 심화되던 소련의 당-국가 시스템의 진화와 필연적으로 얽힐 수밖에 없었다. 행정과 집행 권력을 중앙으로 일원화하고자 하는 스탈린의 의도는 당원에 대한 정기적인 관리와 주기적인 숙청(가벼운 처벌부터 출당과 때로는 투옥, 이어서 사형까지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징계)으로 구현되었다. 군부는 소련 정권의 특성과 파시즘의 발호로 가중되는 안보적 위협 때문에 필히 정리가 되었어야 했고, 스탈린은 이를 정리했다.


요컨대 군부 대숙청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베버가 말하였듯 근대 국가는 "폭력의 독점체"다. 하지만 소련 군부는 내전이 만들어낸, 그리고 이후 러시아 사회의 파편화와 혼란으로 인해 정치권력의 단일한 도구로 기능하지 않았다. 군부는 각자의 출신과 직급 등으로 파벌화 되어 있었고, 이들은 자율적 주체로 자신들의 이익을 정치적인 수단과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종종 드러냈다. 이런 그들의 "노력"은 파벌 갈등, 독직, 비리, 횡령 등을 포함하곤 했다. 하지만 당-국가는 자신들의 손아귀에 폭력을 절대적으로 독점하도록 만들고자 했고, 이 충돌은 군부 대숙청으로 이어졌다.


3. 사례들


일반적으로 숙청 피해자들에 대한 오해는 아무 맥락 없이 "이 자는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면 약식재판과 처형으로 이어진다는 이미지다. 물론 앞서 언급했 듯 이는 진실을 담고 있으며, 특히 수십만의 무고한 소련 시민에 대한 "대규모 작전(Massovaya Operatsiya)" 약식재판과 처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부합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간부 당원 및 군부에 대한 숙청은 이런 단순한 이미지보다는 조금 복잡한 양태를 띤다.


실제는 이렇다. 관료국가를 지향했던 소련답게 숙청에는 흔히 숙청 명령서가 동반된다. 그리고 거기는 다종다양한 숙청 사유들이 동시에 기재 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것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이후 거기에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가 붙곤 한 것이다. 다음은 그 사유에 대한 몇 가지 사례들이다.


3.1. 우보레비치와 야키르


우보레비치와 야키르는 군부 내 스탈린의 핵심 측근들이다. 기존의 통설은 이들이 군부 내의 "기갑파"를 대표하며 보로실로프와 부죤니의 "기병파"와 갈등했기에 숙청당했다는 것이지만, 보로실로프는 오히려 기갑군을 적극 지지했던 것으로 밝혀져서 이 가설은 설득력이 없다. 스탈린은 오히려 이들을 신용하여 각각 벨라루스 군관구와 우크라이나 군관구의 군관구 장으로 파견한다.


이들은 지역 군관구에 들어가서 스탈린의 친분을 무기로 군관구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군관구 내부에서 본인들의 파벌을 만들었으며, 스탈린은 이들이 자신의 통제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의도적인 인사 정책을 실행한다. 이를테면 다른 군관구와의 인원을 주기적으로 교환하게끔 한 것이나, 야키르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 군관구를 키예프와 하리코프의 두 군관구로 분할한 것이 그렇다.


하지만 이 문제는 끝내 해결이 안 되었다. 우보레비치는 자신의 지역 영주 같은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부대 내의 장갑차를 사적 유용하여 자녀의 등교를 지원하도록 했고 부대의 유류 보급품을 횡령해서 외국에 밀매하기여 착복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군최고통수권자인 스탈린은 야키르와 우보레비치에게 모스크바 중앙군의 보직을 맡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야키르는 와병을 핑계로 오지 않는 등 인사변동에 저항했다. 우보레비치도 비슷하게 대응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이들에게 기회를 줬으나, 계속하여 보직변경에 응하지 않자 명령 거부를 근거로 숙청한다.


3.2. 우크라이나 분파(친 트로츠키)에 대한 숙청


적백내전 당시 트로츠키와 인적 신뢰를 쌓고 군부 내에서 활약한 인사들은 필연적으로 스탈린에 불신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이 갈등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뿌려졌다. 프리퍄트 늪지를 지나 측면이 과도하게 노출 되었을 때 붉은 군대는 폴란드군에게 각개격파 당하는데, 이 중 북부에 있던 우크라이나계와 남부에 있던 남러시아계는 책임을 서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이는 정치권의 갈등까지 반영하게 된다.


하지만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스탈린이었고, 스탈린의 비호를 받아 자연스럽게 남러시아계 분파가 더 많은 정치적 권한을 획득하게 되고 군 조직 내부에서도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이는 1935년 보로실로프가 주축이 되어 붉은 군대에 계급을 수여할 때 가장 극심해졌다. 트로츠키와 친분이 많던 군인들은 적백내전에서 유사한 활약을 했어도 스탈린계 군인들에 비해서 낮은 계급을 받곤 했기 때문이다. 보로실로프는 이에 대해서 어떤 편향성이나 불공정함이 당연히 있을 것이고, 이는 최선을 다해서 교정하겠다고 해명했으나 군부 내의 특정 그룹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실제 소장 계급을 부여받은 이가 멋대로 별을 하나 더 붙여 중장 계급이라고 강변한 사례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은 어떻게 못해도 보로실로프만큼은 도저히 봐줄 수 없다는 분위기가 생겼고, 스탈린의 위임을 받은 국방장관을 끌어내리려는 음모가 꾸며지기도 했다.


이는 이전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중앙위원회 회기 당시 스탈린 파벌이 트로츠키를 격렬히 비판해 승기를 거머쥐었을 때에도 일화가 있었다. 당시 트로츠키 계파였던 붉은 군대 소속 중앙위원이던 슈미트가 군도를 빼들고 스탈린에게 겨눈 뒤 "너 계속 나대면 내가 죽여버릴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3.3. 남러시아 분파(친 스탈린)에 대한 숙청


우보레비치나 야키르가 숙청당했듯, 적백내전 때 스탈린과 함께 활약했던 군인들 또한 숙청의 대상에서 피해갈 순 없었다. 그들의 피해가 전반적으로 친 트로츠키 계보다는 적었다고는 해도 말이다.


예고로프의 사례는 가장 재밌는 사례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부상한 갈등은 군부 내의 균열을 드러내주었다. 스탈린과 친분이 있었고 같이 차리친에서 활약한 예고로프 원수는 당연히 보로실로프, 부죤니와도 친했다. 예고로프는 자신들의 실책을 계속 비판하는 투하쳅스키와 우크라이나계 파벌들을 적대시 했고, 1930년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투하쳅스키와 우크라이나계 파벌의 실책을 비난하는 굉장히 공식적인 문서가 될 수 있었다. 예고로프는 출간 전에 지지를 받기 위해 이 책을 같은 파벌에 있던 보로실로프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보로실로프는 "우리는 이미 붉은 군대의 중책을 맡고 있고, 다른 당사자들 또한 그렇다. 우리가 날카로운 역사가가 결코 될 수 없고 객관적인 시야로 저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라고 답했다.


기분이 상한 예고로프는 당연히 스탈린은 지지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책의 헌사를 스탈린에게 바친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고 잠시 묻혀 있던 갈등은 이 회고록 때문에 표면화되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즉시 예고로프를 처리하지 않았다. 그는 8년 동안 기다린 뒤, 1938년 숙청이 막바지에 이르자 예고로프를 공식적으로 비판했다. "불만이 있으면 중앙위원회에 나와서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제기해야하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멋대로 갈등을 조장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거는 있을 수 없다"라는 요지였다. 예고로프는 곧 투옥되고, 감옥에서 죽는다.


부죤니의 숙청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그는 최종적으로 숙청당하지 않았지만 급박한 숙청 위기에 몰려 스탈린과 개인적 통화를 통해 간신히 구사일생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그 역시 스탈린과 보로실로프와 친했으나, 붉은 기병대는 사실상 부죤니의 군대라 인식되었고 부죤니 또한 그 생각을 어느 정도 긍정한 것 같다. 그리고 부죤니는 기병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군기문란이 심했다. 이러한 것들은 숙청의 잠재적 사유로 꼽혔고, 숙청 직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3.4. 군기문란


이상의 군인들은 파벌문제도 그렇고 군기문란 문제도 매우 심각하였다. 우보레비치, 야키르, 투하쳅스키는 서부의 국경지대를 맡던 핵심 인물이다보니 많은 지원을 받았다. 특히 그들의 기갑군 구상은 정부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이에 외국 인사들까지 초청한 소련 내의 대규모 기동훈련을 열게 되고 이는 소련의 항공전력과 기갑전력을 과시해서 산업화의 성과를 홍보하고자 하는 국가적 행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훈련을 감독하던 군관들은 훈련이 보여주기 행사를 위해서 조작된 정황을 엄청나게 많이 포착한다. 이 또한 후에 숙청 사유로 등장했다.


훈련 안 하고 훈련시간으로 등록한 조작은 매우 흔했다. 횡령도 다반사여서 로코솝스키는 자바이칼스크 군관구에서 건축자재를 횡령하여 걸리기도 했다. 블류헤르 원수는 몽골에 파견 되었을 때 그의 병사들을 거의 관리하지 않았다. 몽골의 불교 사찰에서 금박을 긁어내서 털어가는 일이라든가, 라마승을 강간하고 부대 옆에 주도적으로 집창촌을 만든 일들이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4. 결론


이런 것들은 군부 대숙청이 단순히 스탈린의 폭정에 저항한 유능한 장교진에 대한 탐욕스러운 권력욕으로 이루어졌다는 통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군부 대숙청은 스탈린의 권력을 늘려주었고, 군을 경직화시켰다. 그리고 이는 히틀러가 초기에 소련을 침공했을 때 재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베버가 말했듯이 근대 국가가 폭력의 독점체고,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가 말했듯 근대 국가는 전쟁을 통해서 생존하기 위해 진화된 것이라면, 군부 대숙청 없이 소련은 생존할 수 있었을까?


스탈린의 전략적 오판과 전술적 실책들, 무능하고 타격받은 장교진들은 분명 재앙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동시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절망적 상황에서 62군의 추이코프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볼가강변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천왕성 작전의 미끼로 던져지는 것 또한 상상하기 힘들다고 보는 게 공정할 것이다. 키예프 방어전에서 스탈린이 위치를 고수하라는 어리석은 명령들로 쓸데없는 손실이 발생했다고 우리는 쉽게 욕할 수 있지만 부 명령 없이 퇴각하는 일이 대규모 발생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실제로 겨울전쟁 당시에 한 장군은 참모본부를 이탈하여 며칠 동안 행방불명 된 일이 있었는데, 후에 NKVD가 그를 발견 하였을 때 그는 다차(별장)에서 여자들 5명과 보드카 병을 낀 만취상태였다. 대숙청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대조국전쟁 당시 이런 일들은 훨씬 많았을 것이며, 코네프와 주코프의 갈등은 훨씬 더 큰 스케일로 벌어졌을 것임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군부 대숙청이 없었다면 모스크바의 겨울폭풍과 레닌그라드의 항전, 스탈린그라드의 혈투는 다 소설 속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 전역에는 나치의 하켄크로이츠가 휘날렸을 것이다. 베르너 폰 브라운의 로켓은 암스트롱 대신 영광스러운 아리아인을 달에 실어나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군부 대숙청 또한 어느 정도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스탈린이 이룩한 많은 업적이 그랬듯 이것 역시 스탈린이 죽자 관리 될 수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을 통해서, 그리고 이어지는 냉전을 거치면서 군부는 다시 엄청난 이익집단으로 부상하고 새로운 파벌들이 만들어진다. 이는 소련에서 둔중하고 어마무지한 자원과 인력을 잡아먹는 군산복합체를 탄생시켰다. 이 군산복합체는 당과 군을 횡단하는 거대 이익집단이 되어 소련의 경제개혁과 체제개혁을 가로막았으며, 1970년대 정보기술혁명을 놓치게 되어 서방 국가들에 끝내 뒤쳐지게 되는 궁극적 원인이 된다. 소련 말기가 되자 누구도 거대한 국방예산이 어디로 들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전반적 그림조차 그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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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갤에서 쓴 것이므로 어느정도 감안해서 읽을 것

- 판단은 각자의 몫이나 군부대숙청을 비롯한 대숙청 전반에 스탈린이 의심병 많은 사이코패스, 권력 페티쉬즘 환자라 그런건 아니라고 생각. 대숙청 없었으면 관료체계 미비 + 구심점 없는 무정부 상태로 이권다툼하다 자멸했을게 뻔함 

- 대숙청의 배경이 되는 정황들은 검정색 볼드체로, 여파에 대해선 붉은색으로 표시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