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식민 지배를 전복함으로써 미국이 조선을 해방시키고 계몽시켰다는 게 주류 견해이지만, 슬픈 전후의 현실은 미군정이 거대한 물리력으로 제국의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이른바 소련의 팽창주의와 중국혁명의 ‘도미노 효과’에 대항하는 요새를 창출한다는 냉전적 이해에 따라 행동한 미국은 결국 조선과 베트남을 각각 2개의 국가로 분할했다.


전쟁 발발 이후 김일성의 첫 라디오 연설은 한국과 미국이 포기한 지역에서 즉각 인민위원회를 재건할 것을 호소했다. 전국 곳곳에서 민중들은 바로 그렇게 했다.


만약 일본에서 출격한 미군의 대규모 공군력이 없었다면, 북조선의 단련된 투사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한 대중적 지지 속에 조선 전체를 장악했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내부적 차이를 조선인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다면, 아니면 흔히 가정하듯이 루즈벨트가 1년을 더 살아서 조선의 독립을 수용했다면, 한반도는 완전한 파괴를 면했을 것이고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도 오늘알 통일 한국은 번영하는 동북아시아의 핵심축이 됐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조선을 최혜국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대우했다면, 조선은 오늘날 일본만큼 번영했을 것이다. 확실히 1945년 당시 일본 외부의 동아시아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역이었던 북조선은 현재의 빈곤국 대열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다. 미국과의 지속적인 갈등에 발목을 잡힌 북조선은 반세기 이상 봉쇄와 국제기구들의 금융거래 금지, 지속적인 침투와 위장 공격, 러시아 등 주요 후원국의 몰락, 자연재해 중 내려진 잘못된 결정 등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물론 미국과 남한의 보수 논객들은 대부분 전쟁이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일어났다고 묘사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다음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한국인들이 그들 자신을 침략할 수 있는가?” 1950년 6월 25일을 전쟁 개시일로 받아들인다 해고? 그날 누가 누구를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아 있다. 이승만은 항상 한반도 전체의 통제를 약속했고 그 밑의 장군들은 계속해서 DMZ 너머로 중대한 습격을 명령했다. 북조선은 1949년 한 해에만 38도선에서 북측 병사 수백 명이 살해된 2,617건의 공격이 있었다고 집계했다. 더욱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쟁이 1950년 6월 25일 훨씬 이전에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전 5년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서 남한의 애국자 10만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한국의 민중봉기 P.198~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