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우리의 관점에서의 그릇된 견해〉에 관해 평가할 때, 말그대로 그것은 그릇된 견해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그 어디에도 쓸모없으며, 그것의 근원에 대해 고찰할 필요도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견해는 어떠한 방향에서든 직접적으로 다루어질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릇된 견해가 발생하는 원인을 살펴보기 시작하면, 세계에서 그릇된 견해가 등장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객관과의 일치에 이르는 한 필연적 도정임을 알게 됩니다. 즉 (그릇된) 견해는 기존에 옳다고 간주된 내용의 구체성을 풍부화하는 계기로 작용하는데, 실은 이것은 옳다고 간주된 내용의 (우리가 인식하지 못 한) 모순 속에서 발생하는 틈인 것이며, 바로 두 내용 간의 대립이 인식이 발전해 나가는, 필연적인 자기 규정적 원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그릇된 견해”라고 썼지만, 실상을 보면 모든 것은 그릇된 견해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릇된 견해”의 대립항은 그릇된 견해에 대한 그릇된 견해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것―“그릇된 견해”―을 배제하고자 하는 우리의 관점 역시 명백히 한계지어진 규정된 주관적 총체성이자 특정한 사유 현존 규정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한낱 사념적인 추정에 따라서 참과 거짓의 대립을 고정시켜 버릴수록 여기서는 오직 현존하는 철학체계에 동의를 표시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 모순을 지적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데 그침으로써 그와 같은 학설을 설명하는 데서도 단지 어느 한편에만 치우친 입장을 내세우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적 체계의 상이성도 진리의 점진적 발전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지 않고 이들 서로간 차이가 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학설의 모순점을 지적하려고 할 것이다. [...] 여기서 이들 양측이 지니는 형식들은 서로가 구별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들은 서로가 용납될 수 없는 입장에서 상호 배척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들 서로의 형식은 그 자체의 유동적 성질에 의하여 상호간에 유기적 통일을 이루는 저마다의 계기를 뜻함으로써 결코 이들은 서로가 상치될 수 없는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어느 것도 없어서는 안 될 필연적 계기를 이루는 것이다." (II, 4-5; 60-61.)


우리가 우리의 입장과 다른 견해에 지녀야 할 태도는 그 “다른 견해”의 발생적 계기를 파악하여 이것을 우리의 사상이 더 많은 개체적 존재 양식을 포섭해 나가면서 총체성에 대한 인식을 확대할 수 있게 하는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과정 자체는 서로 외면적인 관계 하에서 상호 배척하는 관계를 자체 내에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더욱 중요한 것은, 본래 이 “다른 견해”가 우리 견해의 내적 한계성을 그 계기로 지니고 있는 생생한 발현 양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견해“란 진정 우리의 견해가 우리의 견해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자기 대립항인 것입니다.


이같은 관계 속에서 발전해 가는 양식을 헤겔은 “전체로서의 생명(das Lebens des Ganzen)(II, 5; 61.)이라고 합니다.


헤겔의 이러한 주장을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을 수용하라는 견해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헤겔은 옳고 그름이 상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와 객체의 일치로 나아감이 바로 위와 같은 모순 운동을 통해서, 즉 한계지어진 사유 규정 총체가 자기부정을 통해서 이루어짐이 필연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유의 현존 규정이 지닌 한계의 양면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유의 현존 규정 총체는 다른 총체에 의해 외타적으로 부정되고 그 결과 몰락하는 것으로 현상하지만 동시에 이 과정은 그 스스로―발전의 첫 번째 계기로서 부정당하는 사유의 현존 규정―가 존재하기 위해서 자기부정의 실제적 작용력을 자신에게 가하는 것으로도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양면성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일단 기존 규정은 몰락해 버리지만, 이내 그것을 지양한 규정의 총체가 등장하면서, 몰락해 버린 규정은 발전의 필연적 계기였음이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양면성입니다.


그리하여 헤겔은 다음과 같은 현상을 문제적으로 바라봅니다:


"목적이나 결과에 대해서, 혹은 서로의 체계가 지니는 차이나 제각기 다른 판단을 놓고 경합을 벌인다는 것은 아마도 얼핏 보기보다 수월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대처방식이란 언제나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는 오히려 문제의 정곡을 벗어나서 이를 뛰어넘으려 하는 까닭에 결국 그러한 지식이란 문제 자체 속에 침잠하여 그 속에 몰두하는 대신에 언제나 그와는 다른 어떤 것을 손에 넣으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식은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거기에 몰두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결과를 빚고 만다." (II, 5; 62.)


누군가는 어떠한 사유 체계에 관해, 이 체계에 도전해 오는 다른 사유 체계가 지적하는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리려고 하지만, 그것은 총체에 접근한 인식 상에서는 부질없는 것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공격의 대상이 되는 사유 체계를 고수하는 자들에 의해서는) 공격의 대상이 되는 사유 체계가 지적의 내용을 무산시킬 모종의 ‘내용’을 갖고 있다고 간주되기 쉽지만, 실은 여기서 말하는 사유 체계 또는 그 한계란 지적의 내용이 나올 수밖에 없게 하였던 모든 계기에 관한 고려의 부족까지 포괄합니다. 바로 이러한 부족함을 메꾸는 일련의 과정으로서 자기부정이 개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를 합한 것, 즉 이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일”(II, 6; 62.)로 됩니다. 물론 이는 서로에 대한 내밀한 고려 속에서 행해지는 상호 투쟁의 형태로 전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