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脫)육식을 시작하면서.
탈(脫)육식을 시작한지 2달 쯤 되어가는 시점에 생각을 정리ㆍ정돈하기 위해 쓴다. 이러한 태도는 흔히 채식주의라고 표현되지만, 그 단어가 주는 의미와 내 삶이 멀기 때문에 지금은 육식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하려고 한다.
끄적이는 글이기 때문에 아이디어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출처하는지는 적지 않는다.
Ⅰ.당위
1.사로잡은 아이디어
생각컨데 육류를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사실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사람들 간의 차이보다 크다. 단적으로 한국에서 채식 식단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보통 그 이유를 미용 혹은 건강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는 설문조사를 읽은 적 있다. 하지만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 건 앞의 이유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같은 묶음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지금까지도 내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 어색하다. 한 평생 내가 채식을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어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먼 일이라고 생각해왔었다. 내가 식단에 제한을 두기 시작한 이유는 흔히 ‘윤리적 채식지향’이라고 부르는 아이디어 때문이다. 어느 날 친구와 식사를 하다가 동물의 고통에 대한 대화를 나눴고, 그 이후 생각이 계속 커져나가 행동으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예전에는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어떤 종류의 고기를 즐긴다기보다는 다양한 종류를 모두 섭렵하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윤리적 아이디어가 분명하고 스스로 반박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사태였다. 이미 내가 그런 판단을 해버렸기에 다른 길은 없었다.
2.불쌍함과 생명
윤리적 채식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윤리의 기준은 고통이다. 흔히 말해지는 ‘동물이 불쌍해서’ ‘다른 생명을 해치는 것이 옳지 않아서’라는 이유는 정당하지 않다.
우선, 동물에 대한 연민은 분명 중요한 것이지만 동물해방이 취향이 아닌 윤리나 정치적 기획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분명한 근거가 필요하다. 감정은 윤리를 행동에까지 이르게 하지만 명백하게 주관적인 산물이다. 우리는 가끔 로봇 청소기에까지 안쓰러운 감정을 느낀다. 이는 그만큼 감정이 속기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덕이 감정에서 근거한다는 것은 위태로워 보인다.
다음으로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이유는 사실 부정확하다. 무엇이 생명이고 혹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윤리를 실천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침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피터 싱어가 지적했던 것처럼 탄생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이라면 공장식 축산은 죽음보다 더 많은 탄생을 보장하기 때문에 옳은 것이 된다. 그렇기에 윤리적 채식주의자라면 가축의 죽음이 아닌 삶에 기준을 맞추어야 한다.
3.고통이라는 기준
윤리적 채식주의는 중학생 필수도서로까지 지정 된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에서 기본적인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피터 싱어의 이론이 근거한 공리주의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최근까지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름 얇게나마 철학사를 알고 있었기에 공리주의가 선을 정의함에 있어서 이익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맥락을 이해했고, 피터 싱어의 ‘쾌고감수성’을 윤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든 가치를 단일하고 계량화할 수 있는 기준으로 환원하는데 반대하며, 도덕적 딜레마를 만들어 이를 반박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즐긴다.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몇 명을 죽일지 결정해야 하는 기차 기관사 문제가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18세기에나 가능하지 지금도 기능하는지 의문이 든다. 현대의 공리주의자들은 그러한 방식처럼 공리주의를 외계인의 도덕으로 만들어버리는 시도들을 무용한 것이라고 본다. 현실에서는 희박한 극단적인 가정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공리주의의 기본 전제를 무너트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윤리적 계산에 한계를 만들어두는 방식이든, 다수의 공리를 설정하는 방식이든 비판을 회피하는 더욱 세련된 이론이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지하게 내가 고민했던 문제는 17세기부터 의무론자들이 결과론에 던졌던 질문인 ‘그런 정신 놀음이 우리 삶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였다. 최근 다른 흐름들이 있지만, 공리주의 바탕에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주체가 요구되는 것 같다. 이후 공리주의의 세례를 받은 경제학의 ‘합리적 주체’마냥 그것이 이론적인 모델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도, 우리가 삶에서 지침으로 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우리가 결국 알고 있는 것은 내면의 동기일 뿐이지 삼라만상의 결과가 아니다.(최근에 재밌게 본 시트콤 굿플레이스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만약 결과론이 옳다면 선한 행위인지 아닌지는 사실상 운에 맡겨진다) 공리주의가 선이 무엇인지를 동어반복적이나마 정의할 수 있더라도 그것은 이름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4.동물권?
유럽 연합에서 선도적으로 시도하는 정책으로서, 동물들에게 일종의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적 시도가 있었다. 아직은 유인원들의 지성을 인정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실로 담대한 기획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이는 다문화주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새로운 운동 방식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의 정치적 유용성과는 별개로 엄밀한 의미에서 동물이 권리 주체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닭은 자신의 동족과의 서열을 정하기 위해서, 부리로 상대를 쪼는 행위를 하는데 그렇다면 닭에게 ‘부리로 쫄 권리’를 인정해야 할까? 그것은 닭이 태어나면서 닭으로서 얻게 된 천부적인 권리인가? 만약 그렇다면 닭의 존엄은 그러한 권리를 통해 어떻게 보호되는가? 또 닭과 공동체는 어떤 권리 의무로 묶여있는가? 내가 검토한 글들에서는 많은 이들이 동물권이 구호일 뿐 아직 내용을 가진 사실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동물을 배려하고, 세상에서 무의미한 고통을 줄여야 할 도덕적 의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대로 동물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법철학에서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다루어지더라도, 사실은 충분히 분리 가능한 개념들이기도 하다.
5.다시 돌아온 미덕
내가 관련된 주제를 찾아보면 흥미를 느낀 부분이 있는데, 최근 동물 윤리와 관련된 논의들에서 이를 가치와 연관 시키는 시도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리가 동물을 배려하고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인간과의 유사성이나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윤리와 가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무의미한 고통을 줄이려는 생각과 행동은 사실 인간 스스로 가치를 함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재미있는 이유는 과거 전통철학들, 다양한 종교나 사상에서 동물 보호를 주장하는 방식이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흔히 금욕주의나 음식에 대한 터부와 혼돈되기는 하지만 과거부터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윤리적 행위로 여겨졌고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동물윤리 연구자들을 현대 사회를 후기 데카르트주의 사회라고 이야기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분에서 미덕을 재발견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비록 고통을 기준으로 삼는 행위가 미덕이라면 왜 그것이 공리주의의 기준을 차용한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처음 말한 것처럼 기준은 우리의 감정이나 생명 따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건대 무의미한 고통을 제거하는 것은 넓게 합의될 수 있는 미덕이며 권장되어야 한다는 것 역시 분명해 보인다.
6.결국
사실 재미없는 긴 글에서 써낸 것은 나를 고민하게 했던 아이디어가 겪었던 과정이고, 결론조차 내리지 못 했다. 하지만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내가 느끼기에 충분하다고 여기기에 어쨌든 나는 배지테리언이다. 다른 배지테리언들이 들으면 화날만한 동물성 식품들을 잔뜩 섭취하기는 하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러한 나의 태도가 분명하고 지금도 실천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잠정적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 따로 다루지는 않겠지만 공리주의의 주요한 가정은 분명한 대안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다른 철학들이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지만 막다른 길이라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대안이 어느 정도부터 현실적이고 가능한지 그러니까 진짜 대안이라고 부를 수나 있는지이고, 이건 태도에 따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매번 고민해야 할 숙제일 거다.
(다음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먹을 것인가?’를 쓸 계획이다.)

비거니즘까지 다뤄줘서 고맙네. 갤 내에서 다루는 주제의 폭이 점점 넓어져서 기분이 좋다.
비거니즘 보고 동물을 인간보다 우선으로 놓느니 뭐니 하는 애들은, 그 가축 공장을 운영하느라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갈 자원이 1세계 시민들의 사치스러운 육류소비로 간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함.
정작 나는 비건이 아니라 :)
내가 궁금한게 고통을 이유로 채식을 이해하겠단 부분은 알겠는데 그럼 소위 워라벨을 갖춘 동물복지 제품은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배양육이 나오면 다시 육식으로 돌아올수 있다는거야?
난 중간 단계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기준이 고통이기 때문에 '동물 복지'가 위선적이거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충분히 달성하기 위해 노력할 가치지
배양육은 너무 sf영역이지만 됐으면 좋겠다..
오래 했네 신념이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