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脫)육식을 시작하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먹어도 되는가?
Ⅱ.사실
우선, 글을 시작하기 전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포유동물(소, 돼지)의 고기와 그 부산물(유제품)을 먹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외에 닭을 비롯한 조류, 물고기, 굴, 꿀에는 도덕적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이를 멋진 용어로 “폴로베지테리안(pollo-vegetarian)”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라틴어와 영어를 섞어 만든 조어는 괴이하다고 느낀다.
어쨌든 나는 윤리적 의미의 포유류 우월주의자이다. 따라서 당연히 ‘비건 지향’이라거나 ‘단계적 채식주의’라고 규정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비건(완전한 채식)을 지향해야할 당위를 느끼지 못하고, 지금 나의 식이를 단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페스코(물고기)든 락토 오보(우유와 계란)든 어디까지 육식을 허용하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용어가 있으나, 이는 마치 채식주의에 단계가 있고 레벨 업을 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처럼 표현된다. 작은 실천부터 시작해서 정체성을 갖추어가는 방식은 긍정할 수 있지만,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필수적인 일을 당장 해나가는 것이 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0.고통이란 무엇인가
저번에 올린 글에서 나는 세상에 만연한 의미 없는 고통을 줄이는 일이 윤리적이라고 판단했다. 그 철학적인 난점들과 상관없이 기준을 고통으로 삼는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고통을 느낀다고 할 수 있느냐이다.
이 논제에 대해 찾아보면 정말 다양하고 상충되는 주장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장들이 근거를 갖고 있으며 따라 과학적이다. 이는 자명해 보이는 ‘고통’이라는 개념조차 철학에서 다양하게 분석하고, 과학에서는 다양하게 사실을 측정하기 때문이다.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흔히 참조하는 방식은 크게 3가지이다. 먼저, 동물의 행동이 고통을 느끼는 우리와 비슷하게 행동하는지 여부. 둘째로 진화론적인 유사성. 마지막으로 최근 발전한 신경과학적 증거들이다.
이 글에서 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식을 중심으로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고통을 느끼는지 검토하려고 한다. 지난 글과 달리 내가 이 주제에 대해 과문하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있다. 글에 첨부 된 그림은 영국 의학 윤리 회의에서 제시한 기준들이며, 이에 대한 결과들이다.
1.선 긋기
이러한 선 긋기 과정은 왜 필요할까? 자연은 연속적인데. 고통이 진화의 정확히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 필요가 있을까? 나는 행동에 나서기에 앞서 정확한 기준을 세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고통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두 주장이 있다. 하나는 비트켄슈타인의 것으로 고통은 완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사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고통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이 세상에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존재는 나뿐이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저 고통을 느끼는 척 연기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 방법이 없다.
다른 하나는 대승불교의 고통관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苦海)라고 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심지어 돌맹이조차 고통을 느끼며 해탈하기를 바라고 있을 수도 있다. 역시 우리는 따라서 그것을 알 방법이 없다.
고통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극단의 생각 사이, 어중간한 어딘가에 우리가 지침으로 삼을 만한 기준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했듯 과학적 증거를 통해 나름의 고통을 정의하고 그 선을 세워 윤리의 대상이 되는것들과 아닌 것들을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2.꿀은 먹어도 되는가?(곤충의 경우)
찾아본 바에 따르면 완전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꿀 역시 동물의 착취에 기반 한 결과로 본다. 이는 유제품 산업에 대한 비판과 맥락을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유와 꿀의 근본적인 차이는 꿀이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데 있다.
벌과 같은 곤충이 사실상 고통을 느낀다는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자. 먼저, 그들이 유해한 자극으로부터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기를 잡으려고 할 때에 그것을 열심히 도망치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유해한 것으로부터의 회피는 생명이 진화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서, 그것이 반드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약이다. 만약 이러한 회피 반응을 고통이라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벌써 고통에 반응하는 로봇을 만들 수 있다.
둘째로는, 그들이 스스로 내생적 마약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이는 내가 보기에 정황적 증거에 불과하다. 진화는 생물의 같은 기관 혹은 물질을 전혀 다른 목적에 사용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비록 내생 아편제가 그들에게서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3.물고기는 먹어도 되는가?(척추동물의 경우)
피터 싱어는 안 된다고 대답한다. 그가 보기에 물고기는 해를 당할 때, 나름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고 척추동물에 속하는 이들은 복잡한 신경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제인 구달이 격찬한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선언’에서도 윤리의 대상을 척추동물로 한정지은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피터 싱어는 동물해방 75년 초판에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굴 등의 연체동물을 먹어도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개정판에서 그는 딱히 자신에게 ‘귀찮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을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겁한 방법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과학계의 주류 의견은 고통을 느끼는 동물을 조류와 포유류 같은 고등 동물로 한정하고 있다. 이는 논란이 많은 주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명백하게 어류에는 통증을 감각하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경과학적인 관점에서도 어류의 신경망과 육지동물의 신경망은 큰 차이를 보인다.
물론 이에 한 어류 학자는 <물고기도 고통을 겪는가>라는 책에서 모르핀을 통한 고통 경감 활동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겪는다는 증거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생물학계 다수는 이를 의혹을 보내는데, 포유류에게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물질이 어류를 활성화 시켜주었다는 것이 어류도 같은 고통을 느낀다는 주장은 또 다른 ‘포유류 중심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은 이를 그저 스트레스 반응과 마비로만 해석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논쟁은 어류학계와 다른 생물학계 사이에 이루어졌다. 독특한 이익의 충돌이라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두족류나 갑각류 등 무척추 동물임에도 상당히 고등한 신경계를 지닌 생물들에 대해도 비슷한 논의가 있으나, 통각 기관이 없는 동물들에 대해 고통이 존재한다는 일련의 근거들은 결국 정황 증거에 불과할 것이다.
4.닭은 먹어도 되는가?(조류의 경우)
앞서 말했듯 과학계 다수의 입장은 조류와 포유류를 비롯한 ‘고등’ 동물들은 뇌신경계의 충분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특히 고통을 관장하는 뇌기관이라고 알려진 간뇌가 크게 동일하다. 이는 생물 진화의 역사에서 동일한 길을 밟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고통의 의미라는 문제에 돌아가서, 우리가 고통을 회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고통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가능한 그것을 피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이 가지고 오는 불쾌감’일 것이다. 고통에서 불쾌함을 구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최근의 일이다. 철학자 다니엘 대닛은 <왜 당신은 감각을 가진 컴퓨터를 만들지 못 하는가>라는 글에서 불쾌감이 없는 고통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철학적인 성과에 신경과학자들은 동의를 표현하는 편이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고통을 인지하는 메커니즘과 그로 인해서 불쾌감에 몸서리치는 메커니즘은 서로 다르며 분리될 수 있다. 동물실험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포유류 고유의 뇌인 신피질로 이어지는 두 가지 메커니즘을 분리할 수 있고 이러한 동물들은 ‘고통을 인지하기는 하지만 신경 쓰지는 않는’ 행동을 보였다.
따라서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모든 동물들과 달리 포유류만이 갖고 있는 6층짜리 신피질이 그저 자극과 그에 따른 끔찍한 고통을 가르는 기준선일 수 있다고 본다. 만약 그렇다면 신피질이 없는 다른 동물(예컨대 조류)는 비록 외부 세계의 고통을 지각할 수 있어도, 이에 대한 불쾌감은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무엇이 윤리적 기준이 되는 고통인지를 확정함에 있어서,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기준선이라고 본다.
(별개로 최근 신경과학의 연구에 따르면, 지금까지 새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던 신피질의 상동기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DVR이라고 불리는 이 기관은 6층짜리 포유류의 신피질과 다르게 하나로 뭉쳐있는 형태이다. 따라서 조류와 포유류는 뇌 진화에서 다른 길을 걸어왔던 것일 것이다. 이것이 고통에 대한 이상의 함의에 어떤 변화를 줄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5.다른 포유동물은 먹어도 되는가?(비지성체 포유동물)
내가 동의하지는 않는 부분이지만 언급을 해야 할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고통이라는 것이 단순한 불쾌감을 주는 것을 넘어서 그 주체의 지각(知覺) 혹은 의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과 마찬가지로 대뇌피질이 발달한 영장류 그리고 돌고래 등만이 이러한 범주에 들어 갈 수 있다. 그 외의 동물들이 느끼는 고통은 사실상 번개처럼 자연계에서 번쩍이는 자극이라는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건대 이러한 고통을 인식하는 ‘의식’이라는 주체가 과연 필요한지, 그리고 현실적인지 의문이 든다. 인간과 비인간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려는 시도는 사실상 이미 19세기에 실패가 예정되었다. 인간이 동물의 하나임이 당연해졌을 시절부터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 능력은 신화가 되었다고 보인다.
또한 앞서 말한 우리가 필요한 너무 낮지도 너무 높지도 않은 윤리의 기준선을 설정하려는 필요성에도 이는 모순에 빠진다. 우리가 존중하고 당연 그 윤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인간들도 가끔 충분한 수준의 의식을 가지지 못 하며, 그것이 장기간 지속되기도 한다. 따라서 다시 본래로 돌아가 고통만이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6.결론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포유류는 고통을 느끼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얻는다는 사실인 것 같다. 이에 대해서 반박하기는 어려워 보이기에, 나의 윤리 기준선을 포유류와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선에 놓기로 하였다.
사실 회색지대는 분명 존재한다. 우리가 당연히 포유류라고 확신하는 동물들 외에 진화사에서 어느 중간 쯤 되는 동물들이 그러하다. 예컨대 내가 읽은 책에서 오리너구리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근시일 내에 내가 오리너구리를 먹어야만 하는 상황이 올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고민은 먼 미래에 대신하기로 하였다.
지금까지가 내가 지금까지 스스로 배지테리언이라 표현하기 어려웠던 이유다. 닭과 계란을 먹는 채식주의자? 설명이 없이는 납득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내 나름의 결론이기에 받아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언어가 명확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 아니니까.
혹여 앞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거나, 내가 오해한 부분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내 생각을 무너트릴 주장을 만나기까지 잠정적으로나마 나는 채식주의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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